[eBook]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문학동네 시인선 197
문보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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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0 문보영.

문보영의 시집 ‘책기둥’을 5년 전에 샀다고 한다. 벌써 5년이 지나다니 놀랍다. 너무 어려워서 앞에서 보다 다시 맨뒤로 가서 거꾸로 읽다 말아서 도넛처럼 중간이 뻥 뚫린 채 미처 완독 안 되고 책꽂이에 꽂혀 있다. 그 사실을 3년 전 읽은 문보영 산문집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독후감에서 찾았다. 문보영 검색하면 시집 독후감은 안 나오고 산문집 독후감은 나오니 시집은 다 읽지 않은 게 확실하다. 거기에도 모래랑 책이랑 앙투안이랑 지말이 나왔던 것 같다. 산문집에 나온 것일지도.

이전 시집도 안 봐 놓고 시인의 새 시집을 빌렸다. 도서관의 장점은 안 사 볼 것 같은 책을 읽게 한다. 재촉해서 빨리 읽게 한다. 뭔가 멘탈이 제법 깨지는 날들인데 그건 내가 자처한 걸까 과거의 내가 자처한 걸까 그냥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던 걸까 이 시점에 너의 멘탈은 깨진다, 그렇게 정해진 걸까 일어날 일이 일어난 걸까 이 물음의 대답은 다 아니오 일까 알 수가 없다.

이럴 때 어려운 시집을 읽는 건 제법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시집을 오래 안 봤네, 하고 굳이 시집을 봤는데 오, 좋다 아니다 하고 할 말이 없어, 뭔말인지 잘 모르겠거든, 이러고 읽었다. 읽다가 지수로그 함수도 쪼끔 풀고, 기하 강의도 쪼오끔 듣고, 그러다가 하루가 갔다. 날이 추워졌다.

제법 실험적이라 할 시를 쓰는 몸과 마음은 어떨까 궁금하다. 평론은 써줄 사람이 없어서 자기가 썼을까, 자기가 쓰고 싶어서 역자 후기로 썼을까, 장점은 나는 왠만해서는 평론은 읽지 않고 독서를 끝내는데 이 시집의 후기는 역자 후기라는 이름으로 문보영이 올리비아 페레이라의 시를 옮긴 문보영의 글을 다시 옮긴 사람이 적었다라고 장난을 쳐놔서 일단 내가 읽게 만들었다.

내가 가는 서점은 모래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주로 온라인 서점이니까 어디선가 1과 0과 버그와 디버그의 비가 내리겠지. 가장 최근에 간 오프라인 서점은 서울대입구 중고알라딘인데 거기에서 전쟁같은 맛을 팔아버리고 체르니30번을 사서 피아노 연습을 하는 엄마에게 줬다. 큰어린이가 내가 30년 전에 치던 체르니30번책을 치는데 둘이 그걸 주거니받거니 하면서 돌려 쓰는게 불편해 보여서 (체르니100번은 그렇게 돌려 쓰면서 둘다 책을 마쳤다) 3600원이면 될 걸 그것도 예치금이랑 적립금에서 까는 것, 나는 3600원짜리 효도를 하고 3600항하사의 불효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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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는 대화 도중 상대방이 눈을 깜빡일 때면 0.4초 간격으로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다고 느꼈다. 또는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다고. 그렇다면 인간은 하루에 1만 5000번 변신하는 셈이다. 이는 내가 절대로 나 자신에게 적응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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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눈을 너무 오래 감고 있는 나이든 사람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적응하고 있다.”
라고.
(‘적응을 이해하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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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악어가 진정 소망을 뜻할지라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소망에게 잡아먹히거나 물어뜯길 거라고, 아빠는 소리쳤다.
(‘소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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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이 나를 내버려둬. 상처받을 정도로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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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애인은 걷는 걸 고통스러워했고 걸음걸이가 조금 달라졌는데 그건 그가 물고기인데 사람인 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너무 오래 참았던 것이다.
(‘사람을 버리러 가는 수영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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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뚜안 너네 갑자기 좀 늙어 보인다.
지말 책 때문에 그래.
스트라인스 모래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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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알갱이가 빛을 업고 있다
작은 사람을 업은 더 작은 사람이라네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중. 책 때문에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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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나는 닭 다리를 잡아당겨보았다 그것은 끈적한 콧물에 감싸인 채 쑥 빠져나왔다 이토록 쉬울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참지 않았을 것이다 내 안의 어둠이 물살처럼 빠져나간다
(‘새로운 호흡법’ 중. 닭다리처럼 쉽게 빠진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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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득 현실이 너무 무서워 극장으로 내려가 공포영화를 시청했다. 진짜 공포에서 가짜 공포로 도망가기. 가짜 공포에서 진짜 공포로 도망가기. 탈출하기 위해 극장으로 내려가면 극장은 삶과 똑같은 공포영화를 상영하고 있다.
(‘옆구리 극장’ 중. 공포영화 이제 안 본다. 삶에서 몇 바퀴만 돌면 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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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무 많은 시간과 마음을 요괴에게 쏟고 있어
—그러라고 요괴가 있는 거니까
—너는 온종일 요괴의 털을 빗겨주지 그런데 빗을 때마다 털이 자라 곤란하잖아 너는 곤란해하느라 인생을 다 쓰고 있어
—그러라고 요괴가 있는 거니까
(‘친구의 탄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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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인간: 식물을 키운다는 건 안 죽이는 연습을 하는 거야.
지말: 아……
모래인간: 그리고 동시에 안 죽는 연습이기도 하지.
(‘풍족한 삶‘ 중. 나는 연습이 부족하다 못해 소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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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 있는 집은 내부도 기울었을 것 같지만 평평하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이 가짜라는 증거다.
(‘초행길’ 중. 바닥이 기운 집에 사는 사람은 매트릭스 깨어났냐. 다들 방바닥에 연필 굴려보셈. 멈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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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그러진다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해온 상태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랑한 물체가 모종의 힘에 의해 변형되는 것을 보며 찌그러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눌렸다고 말하죠. 눌린 사물은 시간이 흐르면 원상 복구됩니다. 그러나 찌그러진 사물은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돌아가기가 곤란해졌음을 나타내며, 찌그러진 사물은 귀가하지 않는 영혼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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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혼이 기체라면 이렇게 자주 찌그러질 리 없습니다. 기체는 압축되거나 팽창할 뿐입니다. 따라서 영혼은 고체라는 결론이 도출되지요.
(‘설치 예술가 올리비아 페레이라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기분이 좋지 않다”‘중. 어휴시벌 제목부터 개빡세네. 영혼은 가출, 영혼은 고체라는 신박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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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gene 2023-09-21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랜만에 읽는 김광규 시인의 시집 그만 읽을까 생각 중입니다.시인이 넘나 생각이 많으신 것 같아요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9-21 17:57   좋아요 1 | URL
문득 일상어 쓸때도 시인들은 신경을 많이 쓸까 어쩔까 궁금했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