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잡설 - 박상륭 꼼꼼히 읽기
채기병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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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2 채기병.

누가 씹어 떠먹여주는 걸 크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너무 어려운 고전들은 궁금은 한데, 내가 직접 원전 읽을 깜냥은 안 되니까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에서 이진경 선생님 도움으로 자본론 조금, 고병권 선생님 도움으로 니체도 조금, 맛만 보고 죄다 까먹었다. 대학원 생활 최고 위기(?)였던 정치철학 수업에서는, 그래도 리처드 로티를 좀 이해해보고 싶어서 이유선 선생님의 해설서들도 조금 보았다. 이렇게 고집탱이다보니 거저 떠먹여준다는 일타 인터넷 강사들의 훌륭한 수업도 잘 못 따라가고…아직도 배움에 서툰데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나보고 누구를 가르치라 그러니까 나는 힘들어요 힘들어…

그래도 칠조어론 1권은 한자어와 칠조의 설법이 많이 힘들었는지 ㅋㅋㅋㅋ 우연히 채기병 선생님이 쓰신 ‘소통의 잡설’을 알게 되고 냉큼 모셨다.

이 책의 가장 먼저 느낀 좋은 점은, 종이질이 좋다. ㅋㅋㅋㅋㅋㅋ아니 진짜로…종이가 뭔가 평량 묵직하면서 매끈매끈해가지고 고급스럽다. 박상륭 전집 종이가 잠자리 날개 같은 것에 비하면 뭔가 전도된 느낌이기도 하지만…거 성경책에 말씀 담긴 거 보면 거기는 잠자리 날개 넘어서 모기날개장 같으니까… 좋은 종이는 그냥 기분 좋은 거지 종이질 때문에 말씀에 지장은 없는 것으로???
좋은 종이 아깝지 않게, 부제로 붙은 ‘박상륭 꼼꼼히 읽기’에 어울리는 책이었다. 먼저 읽었다고 으스대지 않으시고, 차분하게 독서하고 공부하면서 박상륭의 우주론(세계관, 유니버스?), 대표 상징, 문체 이렇게 세 주제를 이백페이지 남짓 과하지 않게 묶으셨다. 사실 박상륭 선생님이 한자 그대로 낸 거 말고는 쓰실 때 그렇게 불친절하지 않으시다. 본인이 만든 말은 괄호나 -라는 즉슨, 하고서 부연해주실 때 많고, 얘도라 나 개그친 건데 못 웃을까 봐, 하고 셀프 주석 느낌으로 개그 설명도 잘 해주시고 그렇다. 그렇대도 이렇게 체계적으로 (조금의 반복은 있지만) 책 한 권에 박상륭 유니버스 관통하는 공통의 부분들 엮어주시니, 뭔가 거친 산길에 먼저 밟고간 인적마냥, 낙엽도 슥슥 치워지고 솔잎도 눌려서 덜 미끄러운 기분이라 감사히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직 읽는 중인 ’칠조어론‘ 스포일러를 많이 당해서 잠시 뭐얏! (스포 싫어하는 편)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예를 들면 가장 마지막 글을 그대로 옮겨오기도 하고, 장로의 손녀가 구조라는, 어맛 그랬구만… 뭐 그런 것들… 그러니 스포 싫어하는 사람은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원전을 다 읽고 와서 다시 꼼꼼히 읽기 책을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만… 그래도 궁금증 해결에 도움(?)이 된 스포일러도 조금 있는데, 이전에 칠조어론2 읽고 독후감 쓰면서 칠조랑 장로손녀랑 육조 영실에서 왜 비역으로 맺어짐??? 왜 멀쩡한 데 놔두고??? 하고 궁금했던 장면을 처용가의 역신-처용처-처용 이런 비유와 연결지어 친절하게 설명한 점이었다. 아니 그런 깊은 뜻이… (이것도 뭐 칠조어론 4권의 스포이기는 하지만 ㅋㅋㅋ)

-한편 유리에서는, ‘육조-장로의 손녀-칠조’의 관계가 ‘이양일음’의 구조를 이루게 되는데, 칠조는 육조의 영실에서 육조가 비역을 통해 자신의 배 속에 넣어준 ‘불의 씨앗(팔조)’을 다시 비역을 통해 장로의 손녀에게 전수한다. ‘불의 씨앗’의 이전은 조의 전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손녀는 이렇게 해서 팔조를 임신하게 된다. 저 손녀는 육조의 영실에서 오래전에 죽은 낭군(육조)과 육교를 하고 있는데(“저런 육교는 그래서, 무교화한다”), 살아 있는 ‘객귀’인 칠조가 여기에 개입하는 형국이어서, ‘처용가’의 역현상(객귀[살이 있는 칠조]+각시[손녀]+처용[죽은 육조])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저 손녀가 ‘좀비’ 역을 담당하게 되는데, 손녀의 중요성은 저 좀비가 팔조의 탄생을 위한 ‘살아 있는 제단’이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유리에서 저 ‘좀비’는 ’해골‘과 상사를 이룬다.(152-153)

워, 그리고 아직 해설서 보기 전에 박상륭 작품 특징-인물의 이름 없음- 내 나름대로 정리한 거 있는데 이 책에도 비슷하게 적혀 있어서 뿌듯했다. 선생님덜, 저 잘 따라 읽고 있지라우? 하고 ㅋㅋㅋ

-박상륭 작품의 작중 인물들은 어떤 특정한 이름을 갖지 않는다. 대체로 작중 인물의 호칭은 그 인물의 신분상의 특성을 나타내는 보통명사로 대치된다. 예를 들면, 작품 ‘죽음의 한 연구’에서 작중 인물들은 ‘육조’, ‘칠조’, ‘장로’, ‘손녀딸’, ‘존자 스님’, ‘십장’, ‘수도부’ 등으로 호칭되고 있다. 이러한 호칭 방법은 호칭의 상징성을 강화하여 작중인물을 어떤 특정 인물로 개별화하기보다는 한 범주의 인물로 보편화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작가는 또한 각 인물들의 외모나 성격 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지 않아 각 인물들은 다분히 추상성을 띠게 되는데, 이러한 사실도 같은 의도로 보인다. 그래서 작가는 작중 인물들의 어투(사투리)를 차별화함으로써 인물들을 구별하는 방법을 사용합습지…ㅋㅋㅋ(170-171, 맨 마지막은 제가 촛불승 흉내 한 번 내 봄…죄송…)

이 책 덕분에 ‘박상륭 어휘사전’이라는 책의 존재도 알게 되어 찾아 보았다. 세상에…한 권 당 900페이지 넘는 게 상하권으로 둘다 갖추면 십만원이 꼴딱 넘어버리고… 알라딘에서 새 책 값과 중고책 값(별로 차이 안 남) 뒤져보는 나새끼를 정신차려, 뭐 국문과 논문 쓸 거도 아니고, 정신적 싸대기를 두 대 치고 도서관 검색을 해보니, 오, 서울도서관에도 없는 ‘박상륭 어휘사전’이 관악도서관에는 있다. 상권만이래도. 대출 불가래도. 우리 동네는 이런 고급책도 있다요 으쓱. 그런데 도서대출증 만들고 전자책만 겁나 빌리고 정작 관악도서관에서는 한 번도 대출 안 해본 유사 관악구민아… 나중에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서가가서 대출 불가 사전님을 한 번 알현하고 오고 싶었다. 근데 또 채기병 선생님은 친절하게 수록 어휘 몇 개를 두 쪽 정도에 옮겨 주셨다. 아이참 난 친절한 선생님들을 정말 존경합니다…

채기병 선생님 블로그 찾아 보니
https:// m.blog.naver.com/chaekbsj
이 책 쓰시면서 발췌해 둔 박상륭 선생님 작품들을 또 공유까지 해 주셨다. 한자 병용 같은 거 직접 쓸라면 거 진짜 짜증날텐데…후학 연구자들을 위한 밑거름까지…눙물… 존경… 일단 이 책 자체에도 작품 발췌가 많이 실려 있어서 막 밑줄 긋고 플래그 안 하고도 발췌록 삼아 가끔 봐도 좋지 싶었다. 원래는 프랑스 문학 전공하시고 말라르메로 논문 쓰신 선생님이라 와, 나 말라르메 시집 한 권 봤어요 ㅋㅋㅋ 그런데 프랑스 시 어려워요…ㅋㅋㅋ 여러모로 독서 선지자인 분들의 가르침을… 난 해설서 안 봐 하고 깝치던 새끼가 저도 모르게 많이 도움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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