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여우와 나 - 한없이 다정한 야생에 관하여
캐서린 레이븐 지음, 노승영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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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7 캐서린 레이븐.

책을 읽다 말고 계란후라이를 부쳐서 나시고랭 소스랑 소시지랑 볶은밥 위에 얹어 어린이들 밥을 먹였다. 산 속 오두막에 사는 저자는 계란 흰자만 먹고 노른자를 까치 먹으라고 바깥에 버린다. 아니 까치도 계란 노른자를 얻어 먹는데 내 새끼들은 어미가 책 본다고 굶기고 있네…하고 번뜩 정신이 들었다. ㅋㅋㅋㅋ
아니 그런데 아깝게 흰자만 먹네…하면서 머랭 쿠키를 만들기로 했다. 진짜 계란은 아니고 유통기한이 벌써 일 년 넘게 지난 프리믹스로 하는 거지만 더 미룰 수도 미룰 이유도 없었다. 나는 이제 시간을 아끼지 않아! 머랭 쿠키를 만들 땐 만화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에 나온 해머의 주제가 ‘뭔가의 번데기‘를 흥얼거린다. 첫 머리 가사가 이렇다. “머랭이란 뭘까, 머랭이란 뭐지- 그건 뭔가의 번데기가 아닐까?!” 아니야 임마… 생각난 김에 머랭 쿠키랑 누에번데기를 같이 먹는다. 어린이들은 질색을 하다가 번데기 두 마리 먹을 수 있으면 오늘 피아노 연습 안 해도 돼, 했더니 큰어린이는 번데기 두 마리와 영혼을 맞바꾸고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처음 창밖의 황조롱이를 봤을 땐 놀랬다. 비둘기랑 다르게 얘는 올라서기도 힘든 보일러 연통이나 조그만 부엌 창턱, 화장실 창턱 같은 데 걸터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아파트 출몰이 흔한 놈인 모양이었다. 가끔 거주자 관리가 소홀한 테라스에다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는 놈들도 있는지 어떤 커뮤니티에 자기 집에 새끼 황조롱이가 자라고 있는 사진을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 그 게시물 아래 댓글로 ‘세상에 이런 일이’ 영상을 링크해 두었다. https://youtu.be/3fXxbBJk45E
길이 들어 사람 머리통 위에서 놀고 잘 따르던 참새를, 황조롱이가 눈앞에서 낼름 채 가 냠냠 먹어버린 충격적인 상황이었다. 새랑 놀던 사람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인상 깊었다. 살아있는 무엇이든 정이 붙으면 그런 거겠지…

그러니까 귀여운 야생 여우에게 애착을 느끼는 것도 그렇게 부끄러울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책 속 여우 친구인 저자는 한동안 여우에게 친밀감 느끼는 걸 남들에게 감추고 연구하는 척 한다. 생물학자는 동식물을 의인화하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지, 뭐 그런 분위기가 있나 보다.
사슴 뛰어다니고 독수리 날고 철새 텃새 바글거리는 산골짜기에 땅 사서 파랑지붕 오두막 짓고, 강의 하는 때 제외하면 그곳에 은둔하는 저자는 집 주변에 초지를 꾸미려고 계획을 세운다. 밭쥐가 꽃씨를 굴 앞에 모으는 습성을 보았으니, 밭쥐 살기 좋게 잡초떼기 조성해 놓고 얘들이 꽃씨 모은 거 쓱싹해다 심으면 되겠지? 예상과 달리 밭쥐는 저자가 원한 리아트리스 씨앗이 아닌 다른 걸 잔뜩 모아 놓고 무성하게 번식한다. 그 밭쥐들을 여우가 열심히 잡아 먹는다. 여우는 저자를 무서워하거나 꺼리지 않고 꾸준히 방문해서 둘은 친구처럼 잘 지낸다. 여우 친구가 여우에게 ‘어린왕자’를 읽어주고 같이 거닐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이 책 읽다 말고 ‘에린왕자’를 보았다. ㅋㅋㅋ 함께 자주 언급된 ‘모비딕’이랑 ‘프랑켄슈타인’도 보고 싶어졌다.

진과 토닉으로 이름 붙인 두 그루 노간주나무에 새떼가 날아드는 걸 기분 좋게 감상하고(파랑새 앉은 나무가지를 프로판가스불로 비유하는 거 보면 표현력 천재), 성가시게 구는 이웃 까치 테니스공(배불뚝이)과 찢긴 꼬리 부부랑 안 친하면서도 노른자 자주 챙겨주고 까치가 죽었을 땐 많이 슬퍼하고, 예전 레인저 시절 살리지 못한 부상당한 아기 사슴을 떠올리며 두고두고 슬퍼하고, 여우가 사라지거나 죽을까 봐 내내 걱정하는 모습을 보면 여우 친구가 얼마나 자연 속에 사는 걸 행복해하고 동식물을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꺼리고 조용한 곳이 좋은 나이지만 여우 친구 만큼 고립무원 대자연 속에 혼자 살 자신은 하나도 없다. 같이 사는 사람이 없으니 야생 동물이랑도 친구가 되는 걸까? 아니면 야생 동물이랑 친구가 될 수 있으니 굳이 곁에 사람이 없어도 되는 걸까? 나는 반려 동물 문화를 별로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길들인다는 것은 너무도 인간중심적이고 동물의 생사와 복지가 온통 키우는 인간에 달려 있다는 점 때문에 그게 싫어서 동물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인적 드문 산 속에서는 그런 반려 내지 가축이 아닌, 야생 상태의 동물과 사람이 친해지는 관계도 있긴 있구나, 삶의 방식도 생명들이 이어지는 형태도 참 다양하고 내 생각은 좁구나, 했다.

박사 학위를 했다는 것 말고는 여우 친구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의도한 것인지 여우 관점에서 쓴 글에서는 여우 친구를 소녀-라고 칭해서 저자가 교란시킴 ㅋㅋㅋ) 비타민 씨 발견자 센트죄르지가 죽었을 때 학부생이었다고 해서 아…1985년에 대학생이셨으면 저 애기때 어른이었네요 ㅋㅋㅋ갑자기 머릿속 주인공이 젊은이에서 할머니로 바뀜 ㅋㅋㅋㅋ다 읽고 앞표지 다시 보니까 박사님 연세가 우리 엄마랑 같았다. 여우와 보낸 시절은 조금 더 과거일수도 있긴 하지만, 역시 까치 같이 꿋꿋한 삶의 방식이나 글솜씨나 다 연륜으로 갈고 닦은 결과였어…

사람보다 대형 야생동물들이 현관 앞을 더 자주 지나가는 거주 장소를 책으로 읽으며 어림짐작이나 해보지 제대로 된 상상을 할 수 없었다. 내 세상은 좁다. 책으로나 바깥과 이어진다. 다는 아니어도 낯설고 상상조차 못할 식물들은 사진을 찾아 봤다. 사진에 의존하지 않고는 그 나무들을, 새들을, 산비탈을, 강의 흐름을 떠올릴 수 없는 삶이란. 콘크리트 벽 안에 오래오래 갇힌 나란 생명체란. 이것도 삶이지만 무얼 말하고 무얼 쓸 수 있을지.

+밑줄 긋기
-평소에는 구불구불한 강의 만곡부 개수를 헤아려 위치를 가늠하고, 구름의 변화를 살펴 시간을 가늠하고, 검독수리를 찾는 것으로 운을 가늠했지만(일곱 마리가 최고 기록이었는데 네 마리면 일기장에 적어둘 만했다),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암컷이 수컷보다 오래 사는 건 포유류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포유류는 새끼를 기르는 책임을 맡은 쪽이 오래 산다.

-이슈메일은 바깥공기와 육체노동의 필요성을 느끼자 교사라는 버젓한 직업을 그만두고 고래잡이 선원이 된다. 고래를 죽인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직업이다. 작살잡이를 위해 고래를 찾는 임무를 이슈메일은 “등한시”한다. 돛대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고래를 지켜보는 게 아니라 명상하고 삶에 필요한 철학들을 궁리한다. 망보는 동안 한 번도 “고래다!” 하고 외치지 않는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돛대 꼭대기에 서야 했다면 눈을 감고 미러 선글라스를 쓰고 “고래를 구해주세요” 티셔츠를 입었을 것이다. 당신처럼. 또는 당신이 아는 누군가처럼. 아니면 당신이 알았던 누군가처럼.
그것도 아니면 예전의 당신이었던 사람처럼.

-철새를 죽이는 것은 범죄이지만 수렵조를 죽이는 것은 스포츠다. 이 터무니없는 사고방식은 ‘외국에서 태어났거나 조상이 외국에서 태어난 생물은 우리의 생태계에 해롭고 서식지를 교란한다’라는 논리로 모욕적 처우를 합리화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나를 선택하지 않은 것에 의해 휘둘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나는 아빠의 말 한마디를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내게 말을 한 것 자체가 인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자식을 갖고 싶지 않았다. 네가 자식을 가질지 알고 싶지 않다. 네가 어떻게 되든 내 알 바 아니다.” 그는 조금 있다 이렇게 덧붙였다. “좋은 소식은, 네가 인생에서 뭐라도 이루게 된다면 적어도 내게 감사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내가 열두 살 때였다. 나에 대한 그의 태도를 한눈에 보여주는 이 말들은 나의 감정 상태와 나의 모든 관계와 그 뒤로 내가 한 모든 일을 짓눌렀다.

-회색 플란넬 같은 사슴 귀 두 개가 불쑥 나타나더니 부엌 창문을 문질러 얼룩지게 했다. 귀에 붙어 있는 것은 비교적 작은 수사슴으로, 호색적인 시선만 빼면 여느 사슴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사는 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언제나 나는 머릿속에는 그려지지만 손에는 닿지 않는 것을 향해 나아갔으며, 목표에 도달하면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손에 닿는 것은 너무 가깝게 느껴졌고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 것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어느 황무지의 아고산대 능선에 홀로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일주일 내내 우리는 바위를 아메리카들소로, 아메리카들소를 바위로 착각했다. 나는 외로운 바위들이 관심을 끌려고 아메리카들소인 척한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바위를 그만 뚫어져라 쳐다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메리카들소가 바위인 척하는 것은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어서라고도 말했다. 이렇게 말한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치 상처 입은 마멋에게서 핏방울이 배어나오듯 산길에서 짙은 분홍색 구름의 물결이 쏟아져나오는 광경을 바라보며 잠들었다.

-그의 선원용 재킷은 단추가 달아난 자리가 벌어져 있었다. 그가 내 야구 모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나는 명예롭고 존경할 만한 수고는 죄다 딱 질색이야.” 『모비딕』에 나오는 문구였다. 책에서 이슈메일에게는 교사라는 진짜 직업이 있다. 그는 그만둔다. 자신의 사명을 추구한다. 피쿼드호에 승선하여 고래와 사귄다.

-표지에 접은 자국이 깊이 파인 경량 페이퍼백이 내 허벅지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고 있었다. 퀴퀴한 책 냄새를 들이마시며, 삐죽빼죽한 책장 가장자리를 바루려고 가장 참혹한 흉터를 엄지손가락으로 눌렀다. 문장에는 수십 가지 필기구로 강조 표시가 되어 있었고 여백은 메모로 빼곡했다. 15년 전 구입한 헌책이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모서리가 곰비임비 접힌 소설책과 나는 둘 중 하나가 풍화할 때까지 함께할 것 같다.

-새끼들이 소란을 피우는 와중에 북슬북슬한 주황색 짐승 하나가 바위 위에서 춤추고 있었다. 그 순간보다 더한 행복을 다시는 경험하지 못해도 나는 여한이 없다. 우리 여우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 여우는 무시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토끼를 낚아채 가운데를 꽉 물어 주둥이 양쪽으로 축 늘어지게 했다. 토끼는 내가 그날 아침 돌돌 말아 짠 치약 튜브를 닮았다.

-나는 눈을 어지럽히거나 내가 왔다 갔다는 흔적을 바보같이 큼지막하게 남기고 싶지 않다. 나의 깊은 스키 자국은 얼어붙어 들쥐에게는 또 다른 산이 되고 어민족제비에게는 올라야 할 능선이 되고 달리는 사슴에게는 발목을 접질릴 도랑이 된다. 나는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굳이 남기는 자국은 우리 자신의 성격을 나타낸다.

-아내가 안에서 소나무 가지를 꺾어 진흙 화덕에 던져넣다가 갑자기 가지 하나를 화덕에서 끄집어낸다. 나뭇가지의 잿빛 껍질 조각 사이로 사람 눈알만 한 연분홍색 구슬 두 개가 볼록하다. 말랑말랑한 고체 분홍콩점균은 태워버리기엔 너무 아름답다. 그녀는 수영 말리는 바구니를 얹어둔 너럭바위에 예쁜 가지를 올려놓는다.

-우리에 갇힌 흰매는 자유롭게 살아가는 매만큼 귀한 존재일테지만, 하는 행동이 다르다. 우리에 갇힌 동물은 야생동물과 달리 인간 중심 세상에서 이익을 얻으며 우리에 의해 고분고분해진다.
나는 깨달았다.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무언가가 어떤 존재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는가, 어떻게 살고 무엇을 하는가였다.
며칠 뒤 이 깨달음을 여우에게 들려주었다.
“내가 이제 어른이 돼서 뭐가 될 건지 아니? 동사가 될 거야.”
동사라고?
“그래, 동사와 부사. 형용사도 괜찮아.”
그동안 나는 스스로를 명사로 정의하려 했다. 동사를 써야 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직업과 동일시되는 직함으로 나를 나타냈다. 직함을 나타내는 명사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어쩌면 고의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젠 누군가 내게 그는 가수다가 아니라 그는 노래한다라고 말했으면 좋겠다.

-내가 써야 하는 말은 입니다가 아니라 합니다였다. 그래서 몇 가지 동사를 고르기 시작했다. 쓰다, 가르치다, 사람과 야생동물의 관계를 탐구하다. 땅을 돌보다.
모든 근심이 단지 잘못된 문법적 선택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삶에서 발견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여우가 말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여기저기서 풀이 소용돌이칠 때마다 여우의 머리가 솟아올랐다. 달빛이, 또는 넓은 띠를 이룬 채 반짝이는 강의 물빛이 여우들의 작고 뾰족한 주둥이를 역광으로 비췄다. 하나, 둘, 셋, 넷…… 셀 수 없을 만큼 그들은 빨리 나타났다 사라져……, 그래…… 머리다……. 아니…… 너무 빨리 없어졌네. 머리 하나가 소용돌이에서 튀어나와 왼쪽, 오른쪽, 다시 왼쪽으로 기울더니 지난해의 여러해살이풀 줄기 아래로 잠수했다. 소용돌이를 예측하여 여우의 머리가 솟아오르는 순간을 포착하려 했지만 번번이 놓쳤고 그들이 너무 빨라서 어지러웠다. 밤은 점점 초현실적으로 변해갔다.

-“이 숲이 절정 단계에 거의 도달했을 때 (극적 교란인) 산불이 덮쳤어요. 숲은 로지폴소나무와 함께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했죠. 산사태, 홍수, 벌목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시계가 원점으로 돌아가요. 제가 보기에 이 숲은 다시 한번 절정 단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절정 단계의 숲은 자신의 물리적 환경과 완벽에 가깝게 소통한다. 이렇게 소통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변동이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절정 단계는 편안하며 가장 안정적인 단계다. 그 무엇의 전주곡도 아닌, 모든 것의 정점.

-숲과 마찬가지로 내 삶도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하여 절정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나는 여우와의 관계가 내 삶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내 삶의 목적임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목적이 직업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척 우습긴 하지만, 오만 가지 걱정을 하고 깊이 생각한 뒤에 내가 정작 방향을 바꾼 것은 달빛 속의 새끼 여우들이라는 물리적 사건과 그에 따른 감정 때문이었다. 이성과 합리성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가 나를 신뢰했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이성을 제쳐놓은 탓에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깜박했다. 여우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 관계를 무엇으로 대체하게 될까? 여우와의 관계는 나의 첫 진짜 관계이자 마지막 관계가 되는 것일까?

-우리의 본능은 무엇이 자연적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며, 우리 사회는 무엇이 정상적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어느 쪽에 귀를 기울일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테니스공은 땅바닥을 쏘다니며 얼어 죽은 식물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잎이 달린 뾰족한 갯능쟁이 잔가지들을 집었다. 돌풍이 그녀의 부리에서 잔가지를 낚아채 데굴데굴 굴리면, 까치는 검은 눈을 부릅뜨고는 바람 채찍에 깃털을 두드려맞으면서도 단단한 진흙을 움켜쥐고 꿋꿋이 서서 또 다른 잔가지가 떨어져 날아오길 기다렸다.



+밭쥐 노역으로 모으려다 실패한 리아트리스

+분홍콩점균(나뭇가지 위 연분홍 구슬들)
사진 출처:https://m.cafe.daum.net/forestguide/174G/2878

+요제프 볼프, 1856, 솔개를 공격하는 흰 매들
출처:https://www.jhnewsandguide.com/scene/gyrfalcons-striking-a-kite-1856/image_9ea80cce-8151-56b4-9b2a-f50672c83a1f.html

+왠지 위에 분홍콩점균 생각나는 오늘의 머랭 쿠키(분홍 새똥 아님) 굽기 전, 구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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