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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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3 장강명.

2년 만에 다시 읽은 책이다.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전에 어여 읽어야지, 하고 읽는 마음이 전에도 몇 번 있었다. 당신이 읽은 책을 내가 읽고, 내가 읽은 책을 당신이 읽으면, 우리는 조금 더 서로를 잘 알게 되지 않을까요. 순진한 생각인 걸 이제는 알지만 그래도, 좋잖아요.

이 장편소설은 장강명이 쓴 소설 중에 제일 예쁘게 쓰여진 작품이다. 나 이런 것도 쓸 줄 알거든, 하고 작정하고 쓴 느낌이다. 이 소설로 장강명은 문학동네작가상을 탔다.
남자아이, 여자아이, 아주머니가 나오는데, 셋 다 나인 것만 같아서 슬펐다. 남자아이는 아주머니 아들인 영훈이를 죽이고 교도소와 정신병원을 거쳐 사회로 나온다. 그리고 여자아이를 만나 얼마간 사랑한다. 여자아이는 불행한 가족관계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아주머니는 집요하게 남자아이를 쫓아다니며 훼방을 놓는다. 남자아이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다음에 어떤 장면이 올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덤덤하게 많은 것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인다.
한강 주변 현수동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장강명 소설에서 반복되어 나온다. 남자아이는 현수동이야기 라는 지역 탐방 책을 쓰면서 그 지역에 켜켜이 쌓인 과거를 본다. 우주알이 몸 안으로 들어온 덕에 뒤틀린 시공간을 그믐달을 타고 넘나들 수 있다. 순서를 알 수 없게 뒤죽박죽 되어버린 소설, 영화 인터스텔라 속 뒤틀린 시공간, 수많은 가능성과 엇갈림을 헤치고 여자아이를 만나러 온 남자아이, 일부러 틈을 만들어 덜 고통스러운 끝을 찾아가는 남자아이. 과거에 매몰되어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아주머니. 흠 지금 내 모습은 아주머니랑 제일 비슷하다. 불쌍한데 추해. 이제 안 그럴게.

+밑줄 긋기
-운동장이 쓸쓸했다. 두 아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운동장은 그 학교에서 가장 표정이 풍부하고 가장 인간적인 존재였다. 살아 있는 학생들보다 더. 학생들은 학교에 있을 때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개미나 벌을 더 닮았다. 교사들은 지친 로봇 같았다. 운동장은 재래시장의 늙은 상인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대낮을 견디다 하교시간 즈음해서 제 혈색을 되찾았다. 운동장의 성별은 아마 남성인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친 남자아이들이 축구를 할 때 즐거워했으니까. 운동장은 신화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해 질 무렵부터 슬슬 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해 밤이 되면 귀기를 몸에 둘렀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다시 사소하고 조잡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생각해봐. 그 아버지와 딸은 서로 못 본 채로 수십 년을 떨어져 살았어. 그러다가 마지막에 만나는 건 겨우 십 분 정도야. 그 십분으로 인생이 해피엔딩이 되고 안 되고가 결정되는 거야?
그런가?
저 딸이 만약에 아버지가 오기 한 시간쯤 전에 죽었다면 말이야, 그러면 저 아버지와 딸은 엄청나게 불행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산 셈이 되는 건가? 운이 좋아서 딸이 죽기 전에 딱 십 분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 그 수십 년의 인생에 갑자기 의미가 생기는 거고?
어...꼭 그런 건 아니더라도 되게 안타깝잖아. 누구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만나지도 못하면.
우주 알이 몸에 들어오면 이런 점이 참 안 좋아. 왜냐하면 어떤 만남이 어떻게 끝이 날지 뻔히 보이거든. 그런데 어떤 관계의 의미가 그 끝에 달려 있는 거라면, 안 좋게 끝날 관계는 아예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 끝에 이르기까지 아무리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안 좋게 끝나? 여자가 물었다.
너는 어떤 게 좋아? A, 약간 짧지만 완벽하게 기승전결이 되고 아련한 마음으로 헤어지는 인연. B, A하고똑같은 기간을 보낸 다음에 조금 더 시간이 추가되는데 끝날 때 굉장히 안 좋게 끝나는 관계.
시간이 얼마나 추가되는데?
글쎄. 하루 정도라면?
그러면 A지.하루 차이가 뭐 중요한가. 다 끝나더라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게 중요하지. 그런데.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도 한참 후에야 여자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어찌나 힘을 주고 있었던지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여자아이는 잘못 열면 안에 있는 남자아이가 다치기라도 할 것처럼 조심조심 캐비닛 문을 열었다. 남자아이는 빛에 놀란 듯 눈을 깜빡거렸다. 다른 세상에라도 다녀온 듯한 표정이었다.
여자아이가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와, 진짜 나…
그때 남자아이가 캐비닛 안에서 여자아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여자아이의 몸이 앞으로 기울며 캐비닛 안에서 두 아이의 입술이 맞닿았다.
베이비로션 냄새. 겨드랑이 냄새. 비냄새. 젖은 나무와 이끼 냄새. 다크초콜릿 냄새. 강아지 발바닥 냄새. 그 밖의 온갖 강렬하고 유혹적인 냄새들.

-너를 만나기로 결심했을 때, 그래서 너의 회사로 원고를 보냈을 때, 나는 우리의 결말도 미리 봤어. 결말이 오늘 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까지의 시간을 더 알차게 보내려 노력했어. 사실 그 마지막 장면이 나한테 좀 안 좋긴 해. 하지만 시공간연속체 속에서 평가하자면, 너와 함께 있었던 시공간은 전체적으로 다 좋고, 극히 일부가 그렇지 못할 뿐이야.
나한테 남은 문제는 이거였어. 네가 이 마지막 때문에 우리 관계를 온통 불행했던 것으로, 비극적인 것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보통의 시간 순서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서사와 결말을 중시하잖아. 어린 시절 행복하고 노년에 불행한 것보다 그 반대를 선호하고, 수십 년을 기다린 아버지와 딸이 마지막에 잠시라도 꼭 만나야 하고...그런데 우리는 노선 B를걷기로 했지. 너는 미래를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이기심 떄문에. 그래도 나는 십 분 먼저 너와 헤어지려 해. 십 분이면 최악은 피할 수 있을 거야.
미안해. 남자가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그러고 나서 남자는 화면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여자에게 하는 말이 너무 짧아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더 보탤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 사실 남자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시공간연속체 속에서 그 모든 일을 몇 번이고 다시 겪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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