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 - 상처 입은 뇌가 세상을 보는 법
엘리에저 J. 스턴버그 지음, 조성숙 옮김 / 다산사이언스(다산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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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0 엘리에저 스턴버그.
이 책의 영어 제목은 NeuroLogic이다. 제목이 ‘신경논리(학)’하고 붙어 있었으면 내가 이 책을 봤겠어. 알라딘 전자도서관에서 제목만 보고 2월부터 줄을 섰는데 여태 기회가 안 왔다. 그러다가 자치구 전자도서관에 신간으로 입고가 딱 되서 예약해서 금세 받았다. 그런데 이번 주중에는 너무 바빴다. 책 볼 틈도 없었다. 반납일이 다 되어서 토요일 자정 가까이까지 부지런히 읽었다. 
영어 원제랑 동떨어지는 낚시성 제목들도 많은데, ‘뇌가 지어낸 모든 세계’는 책의 내용을 제법 적절하게 담으면서 나를 꼬실 정도로 잘 지은 한국어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어렵기도 하지만 무척 흥미로운 주제와 사례를 담고 있어서 여유를 가지고 볼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나중에 다시 사서 보고 싶다.

우리가 인식하고 감각하는 세상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뇌의 가공을 거친 결과라는 것은 올리버 색스의 ‘환각’, 최낙언의 ‘감각 환각 착각’에서 알게 되었다. 이미 올리버 색스의 책들에서 만난 병례들이 자주 등장해 반가웠다. 

책의 앞쪽에 뇌지도 그림이 제시된 게 좋았다. 원작 부록에 있던 그림이라고 하는데 전문가가 아닌 독자를 위한 세심한 배려로 느껴졌다. 물론 늘 찾아보는 건 아니지만, 수시로 나오는 이마엽, 이마앞엽겉질 정도는 어디에 있나 시각적으로 보는 게 도움이 되었다. 

챕터별로 질문을 던지며 뇌 일부 기능이 손상되거나 정상 작동하지 않는 독특한 사례를 제시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뒷받침할 만한 연구 결과를 정리한다. 저자가 의사로서 진찰한 사례와 환자와 나눈 대화는 더욱 생생하게 읽혔다.

 
1장 | 시각장애인은 꿈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지각, 꿈, 외부세계의 창조
꿈을 예언, 예지 같은 신비로운 능력으로 보던 시대도 있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꿈은 그 꿈을 꾸는 사람의 경험과 생각이 섞여 만들어진 산출물인 걸 알게 되었다.(이 책에서도 한 번 더 설명해준다.)
혀 차는 소리를 내서 주변에 일으키는 반향으로 공간을 인식하는 시각장애인의 이야기가 신기했다. 저자가 박쥐의 반향정위와 비교하기도 했다. 다양한 감각은 서로 교차하고 영향을 주는 지점이 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들이 이러한 교차점과 다른 감각을 동원해 시각의 부재를 보완하는 동안 (예를 들면 츳츳 소리를 내고 들을 때) 시각정보를 처리할 때 활성화되는 뇌 부분이 작동한다고 한다. 
꿈에 관해서는, 일곱 살 이후 후천적으로 시각을 잃은 사람은 이전 시각 기억으로 정상 시력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는 꿈을 꿀 수 있지만 진짜 시각 이미지를 경험해 본 적 없는 선천적인 시각 장애인의 꿈은 다소 다르다는 게 (뭔가 보는 듯 하더라도 반향정위를 인식하는 것과 유사할 것이라는 게)저자의 주장이다. 

2장 | 좀비도 차를 몰고 출퇴근할 수 있는가?
습관, 자기통제, 자동행동
의식적으로 집중하지 않고 운전하면서 다른 일까지 하는 사례를 들고 있는데, 나는 면허가 없으므로 비슷한 자동행동으로 설거지를 생각했다.
식사 후 조금 있다가 설거지통을 보면 말끔하게 비어있다. 신난다-누가 설거지를 했어! 응 그게 나야… 나는 내가 설거지한 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 무아의 상태로 뭘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딴 생각을 하거나 명상하듯 알파파를 뿜어대며 거품 묻은 수세미로 그릇을 문지르고 흐르는 물에 헹궈서 정리대에 차곡차곡 쌓는다. 
저자는 이런 행동이 습관 체계가 형성되고 무의식을 통해 일이 처리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무의식적 행동을 하는 동안 의식을 집중하는 다른 행동과 멀티태스킹도 가능하다고 한다. 
케네스 파크스가 몽유병으로 의심되는 상태에서 장인 장모를 살해한 사건은 정말 끔찍했다. 가끔 두려워하는 일들이 있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도 모르고 나쁜 일을 벌이는 상상을 했다. 졸피뎀계 수면제를 먹고 저녁 내 있었던 일을 다 잊어버린 경험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이 자유의지에 기반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 사람들이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범죄자를 엄청 미워하지만, 의지 밖 의식 밖 행동의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와 범죄자 마인드…)

3장 | 상상만으로도 운동 실력이 좋아질 수 있는가?
운동 통제, 학습, 심상 시뮬레이션의 힘
거울뉴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 운동도 안 하다보니 내가 아무리 심상 훈련을 해 봤자 근육이 저절로 생기는 일은 없겠지만 ㅋㅋ그래도 이미지트레이닝이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는 놀라웠다. 
유령통증이라고 들었던, 절단 환자의 부재한 신체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가려움의 이야기가 여기에서도 나왔다. 부재한 신체 대신 거울로 반대편 몸을 비추고 허공에 다리가 있는 양 긁어서 증상을 완화시키는 방법도 신기했다. 우리 뇌의 상상력과 모방, 공감능력은 때때로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4장 |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기억할 수 있을까?
기억, 감정, 자기중심적인 뇌
남들이 보기에는 거짓말이지만 본인은 거짓말인지도 모르고 하는 말짓기증이 인상 깊었다. 완결성 있는 이야기를 요구하는 우리의 뇌는 무엇이든 가져다 붙여서라도 부재와 의문을 해소하려고 한다.
수많은 이야기들도 그런 경향이 만들어낸 결과물 같다. 영화 라쇼몽도 생각났다. 모든 해석은 결국 자기중심성을 벗어날 수 없고 나 또한 나에게 유리한 진실만 말하고 적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과 기록의 취약성. 진실이라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그런데도 그거 붙들고  뭔가를 알아내겠다고 기를 쓰는 사람의 마음이란. 
그나마도 기억을 뒷받침할 글도 사진도 사람도 물건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면, 그래서 모든 게 쉽게 잊혀진다면, 일어났던 일조차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5장 | 왜 사람들은 외계인 납치설을 믿는가?
초자연적 경험담과 기이한 믿음이 생겨나는 이유
수면마비, 뇌 혈류의 일시적 차단으로 보는 환각 등을 사람들이 스스로 납득할 만한, 문화권에서 공유되는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등장했다. 외계인 납치설은 미국인들의 공유 장르라는 사실도...알게 되었다. 
같은 수업 듣는 분이 쓴 소설 중에 과거 학대 경험으로 인해 해리성 장애-기억을 잃고 야간에 시력이 저하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한 화자는 천사를 만나서 시각에 문제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초자연 현상 동호회에서 실마리를 찾으려고 시도한다. 이 책을 보고 그런 상상력을 발휘하신 걸까, 아니라면 이 책을 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6장 | 조현병 환자에게 환청이 들리는 이유는?
언어, 환각, 자아/비자아의 구분
조현병에 대한 이 챕터는 특히나 관심있게 읽었다. 아빠가 25년 전에 조현병 발작을 해서 망상적 사고를 보이다 입원하는 모습을 지켜본 경험이 있었고, 그 이야기를 지난 주 과제로 써 냈다. 다 쓴 후에 이 책을 읽긴 했지만, 조현병 환자가 듣는 환청, 자기 의지가 아닌데 남에 의해 생각이 심어졌다고 생각하는 등의 증상의 이유를 짚어낸 부분이 뭔가 크게 도움이 됐다. 혼잣말을 타인의 목소리로 지각하는 일, 자기가 한 생각조차 자기 생각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게 되면서 환청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전기물고기가 자기가 곧 전기신호를 내보낼 것이다-하고 의식한 뒤 전기신호를 방출하는 식으로 다른 동물의 신호와 자기가 내보낸 신호를 구분하는 수반 방출계라는 기능에 연결지어 설명한다. 
내가 나라는 감각, 나와 남을 구분하는 감각, 나의 말 나의 생각과 남의 말 남의 생각을 구분하는 일조차 당연한 게 아니고 그게 뒤틀리고 어그러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 섬뜩했다. 

7장 | 최면 살인은 가능한가?
주의집중, 영향, 잠재의식 메시지의 힘
저자는 직접 영향을 주려고 시도하는 최면의 힘은 강하다고 보지만, 서브리미널이니 하면서 몰래 심어놓는 메시지의 영향은 크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광고가 구매를 촉진하는 부분은 잠재의식을 건드리는 것보다 대놓고 최면 걸듯 세뇌하는 쪽이 더 강력할 수도 있다는...정말 그런지는 모르겠다. 파이트클럽에서 영화 필름 사이마다 타일러 더든이 포르노 장면 끼워넣던 생각이 난다. ㅋㅋㅋ 은근하게 던지던 말들이 나에게 어떤 감정과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기분 나쁘지 않게) 투덜거리던 날들도. 
정신적 손상 없이 정상 사고가 가능한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살인을 유도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는 게 저자의 주장. 최면이 가능한 것은 맞지만, 살인 급의 강력하고 파괴적인 명령을 받으면 최면을 통해 강력한 집중력을 가졌던 사람조차 의식적으로 되돌아보고 억제하게 될 것이라고. 
그러니까 최면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의 자기 암시가 작동한 결과일 수 있다. 레드썬.

8장 | 다중인격은 똑같은 안경을 공유하지 못한다?
인격, 트라우마, 자기방어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는 여러 자아를 가지고 심지어 그 자아들의 시력조차 다른 사람의 사례가 등장한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던 학대의 경험. 되게 슬픈 이야기였다.
다중인격에 관한 건 주로 영화에서 독특한 인물과 그로 인한 사건을 다룰 때 등장한다. 뇌와 인식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자아란 무엇일까,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자아는 뇌의 어느 부분에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닿아 있었다. (저자 말대로라면 어느 부분이 아니라 뇌 도처에 있고 뇌가 작용하고 기능하는 동안 만들어지고 변하는 게 자아이고 정체성인 듯…)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이 우리의 생존에 더 유리했기 때문에 무의식은 그 정체성을 위협하고 구멍이 나는 부분을 메우려고 나름의 방식을 만들어 왔고, 그런 기능들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사고와 인식부터, 일상이 깨어지고 망가져서 원래 하던대로 사고와 인식을 하기 어려울 때 그 틈을 메꾸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이 흥미로웠다. 와 다 흥미롭대. 그런데 진짜 읽고 있으면 다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연구결과가 가지는 설명력,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과정조차 대단해 보였다. 

뇌에 대해 알아가는 건 나라는 개체, 인간이라는 종, 사회라는 그물, 거기에서 생겨나는 이야기에 대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래서 앞으로도 열심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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