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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랑을 위한 되풀이 ㅣ 창비시선 437
황인찬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20200602 황인찬.
올초에 시 읽는 법이라는 책을 읽고 매달 한 권의 시집을 읽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웠지.
원대한 것은 그리고 목표는 늘 그러듯 실패로 향한다.
중간에 예쁜 시집 선물 받고도 아껴 읽는다고 너무 아껴서 아직 다 못 읽었다. 그건 이 다음에 다 읽을 시집!
그래서 이 시집은 올해 처음 그리고 아마 인생 처음 내 돈 주고 사서 다 읽은 시집일 것 같다.
시를 잘 모르지만 잘 읽히고 좋았다.
사실 전자책을 샀다. 그리고 사기 전에 유튜브로 시인이 낭독하는 사랑을 위한 되풀이를 들었다. 목소리가 무척 좋았다.
수다떨듯 말과 글의 군더더기와 쓰레기를 자꾸만 만드는 나는 한참 생각하고 누르고 자르고 줄여 담은 말이 글이 그저 신기하다.
밑줄긋기
“이런 삶은 나도 처음이야”
그렇게 말하니 새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고
(사랑과 자비 중)
파도에는 끝이 있고, 해변의 모래에는 끝이 있고, 바다의 절벽에도, 바다 절벽 위의 소나무에도, 파도가 깎아놓은 몽돌에도 끝이 있는데
아직 우리는 끝을 보지 못했구나
그런 생각들 속에서
끝이 있는데도 끝이 나지 않는 날들 속에서
사랑을 하면서
계속 사랑을 하면서
우리는 어디를 둘러봐도 육지가 보이는 섬의 해변에 앉아 있었다
돌아가는 배 위에서는 멀미를 하는 너의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계속되는 것이구나
생각을 했고
(소무의도 무의바다누리길 중)
우연히 얻은 것을 우연히 얻었다는 이유로 부끄럽게 여기는 삶에 대해 생각해보았다면
그 생각을 여기 적지 않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느끼는 참을 수 없는 기쁨과 배를 앓는 듯한 불안을 그리는 순간이 없으면 좋겠다
영원히 계속되는 미래가 오지 않는다면 좋겠다
아침도 오지 않는다면 더 좋겠다
(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중)
공원에 떨어져 있던 사랑의 시체를
나뭇가지로 밀었는데 너무 가벼웠다
어쩌자고 사랑은 여기서 죽나
땅에 묻을 수는 없다 개나 고양이가 파헤쳐버릴 테니까
그냥 날아가면 좋을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날 꿈에는
내가 두고 온 죽은 사랑이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죽은 사랑은
집 앞을 서성이다 떠나갔다
사랑해, 그런 말을 들으면 책임을 내게 미루는 것 같고
사랑하라, 그런 말은 그저 무책임한데
이런 시에선 시체가
간데온데없이 사라져야 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날 공원에 다시 가보면
사랑의 시체가 두 눈을 뜨고 움직이고 있다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다들 미안하다고 하더라” 전문)
“우리 이야기 좀 하자”
맞은편에서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어떨까 목소리가 들려오면 이야기라는 것이 시작되겠지
어떤 목소리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아름답고, 어떤 현실은 이야기와 무관하게 참혹하고, 그런데도 이야기를 하자는 사람이 있구나
이야기라는 것은 또 대체 무엇일까
(부서져버린 중)
(시인의 말 중에서)
이 시집은 1959년 11월 30일에 발간된 전봉건의 첫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에서 제목을 빌렸다. 꼬박 60년의 시차를 두고 있는 셈이지만, 특별히 의식하고 정한 것은 아니다. 전봉건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인인데 어째서 그를 사랑하느냐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이유 같은 것은 언제나 나중에 붙는 것이다.
사랑 같은 것은 그냥 아무에게나 줘버리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