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작 네이션 - 우울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 보고서
엘리자베스 워첼 지음, 김유미 옮김 / 민음인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20200329 엘리자베스 워첼.

The Verve-The Drugs Don‘t Work
https://youtu.be/ToQ0n3itoII

스물 한 살 때 전공 수업 참고문헌 목록에 엘리자베스 워첼의 ‘비치-음탕한 계집’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수가 간단하게 책 소개를 했는데 무척 끌렸다. 겉표지에 발가벗은 저자가 가운데 손가락을 펼치고 속표지는 형광핑크색으로 장식된 그 두꺼운 책을 서점에서 뽑아들었을 때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지름신은 내 등을 자꾸 떠밀었지만 마침 과외알바가 다 짤려서 개털이었다. 결국 밥 몇 끼 굶지, 하고 책을 사서 부지런히 읽고 기말 페이퍼로 그 책 리뷰를 써냈다. 싸이월드를 뒤지니 2004년에 쓴 그 글이 남아있어 읽어보았다. 스물 한 살의 나야 어쩜 이런 걸 다 썼니.

올초 갑자기 생각나서 알라딘 서점에 저자 이름을 쳐봤다. ’프로작 네이션’이라는 책이 이후에 번역되어 나온 걸 알았다. 비치보다 훨씬 전에 쓴, 저자가 겪은 우울증을 다룬 자서전이라고 했다. 당장 사놓고 몇 달 후에 펼쳤다.

서문을 읽다가 이제 50대쯤 되었을 저자가 잘 살고 있나 궁금했다. 구글창에 검색하니 읭. 이 책을 살 무렵이 사망 날짜로 찍혀 있었다. 무심결에 이름 뒤에 자살.을 추가로 붙여 검색했다. 구글은 아니야, 사망원인: 유방암 이라고 알려주었다. 약간 부끄러웠다. 뭘 얼마나 안다고 자살했을 거라고 넘겨짚었을까. 한편으로는 자살하지 않고 사는 날까지 살았구나, 하고 안도했다. 누군가 해냈다면 나도 못할 건 뭐야 싶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똑같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다른 이유에서 불행하다는 톨스토이의 말은 자주 인용된다. 내 생각에는 그의 말은 전적으로 틀렸다. 그는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것 같다. 행복은 무한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행복한 사람들과 행복한 가족은 수많은 방법으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그러나 불행한 가족이 자신들의 슬픔과 극단적인 감정에 빠져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지 못하는 동안, 행복한 가족은 행복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거나 또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행복할 때는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많지만, 슬플 때에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절망으로 마비된 채 가만히 앉아서 불행을 끌어안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불행한 가족은 모두가 똑같다...비정상적인 가정은 술을 마시는 엄마든, 아이들을 때리는 아버지든, 서로 죽일 듯이 미워하는 부모든, 어떤 문제라도 그 골격이 동일하다. 병리적인 현상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어린 시절에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했다든지, 또 다른 점에서 방치되었다든지 하는 것들로 항상 동일하다. 불행한 사람이 털어놓는 자신의 불행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모든 사람의 불행한 이야기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된다.’ (342-343쪽)

단정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지만 어려서부터 어떤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너네 아버지도 술을 많이 마시는구나. 어쩌면 엄마를 때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거울 앞에서 볼 수 있던 그늘을 얼굴에 덮고 있는 약간 움츠려든 아이들에게 다가가 그런 생각을 직접 건넬 수는 없었다. 나도 그래. 우리집도 그래. 우리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인데다가 정신병자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면 나와 그 아이들의 마음이 좀 나아졌을까. 피씨통신동호회에서 만난 아이들과 전날 아버지가 술을 먹고 무슨 만행을 벌였는지(칼을 들고 죽겠다, 죽이겠다 난동을 피웠다, 마당에 드러누워 잠들었다, 가스 호스를 끊으려했다 등) 경쟁하듯 말하곤 했다. 서로를 위로하는 방식이었지만 그 뒤에 나오는 결론은 언제나 우리는 루저야, 하는 패배감과 무력감이었다.

그래서 다정한 아버지와 함께한 여가 시간을 말하는 아이들이 부러웠고, 화목한 가정의 일상을 자연스레 드러내는 걸 보면 거부감마저 들었다. 그런 게 가능해? 가족이란 게 그런 거야? 거짓말 아니야?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워첼은 부모의 불화와 별거, 이혼을 겪으며 자랐다.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지만 엘리의 마음은 어린 나이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다. 스스로 우울증에 빠져 있다는 걸 일찍 인지한 듯하지만, 자신의 우울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관심을 끌기 위해 너무 오랜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학교 탈의실에 숨어서 다리를 면도칼로 긋는 자해를 하고, 엄마가 일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맡겨진 유대인 여름캠프에서 약물 과다 복용을 하고 며칠 누워있기만 한다. 하버드에 입학한 뒤에도 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방황한다. 끝없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버려질 거라는 걱정이 앞서서 연인에게 집착하거나 나쁜 남자와 쉽게 가까워지는 바람에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다. 코카인, 엑스타시, 술, 일, 많은 것들에 지나치게 빠져든다. 어려운 일에 처하면 금세 울어버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엉망으로 대하고 과도한 계획을 세웠다가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다. 그런 상태가 악화되다가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원격학습을 한답시고 휴학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 영국으로 떠났다가 황폐해진 정신으로 미국에 돌아온다. 영국에 갔을 때가 제일 바닥일까 싶었는데, 정신과 의사와 상담 직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게 정점이었다. 다행히도 죽지 않았고 그 무렵 개발된 프로작 복용이 효과가 있었다. 자살 시도 이후 살고 싶다는 의지를 회복한 덕에 엘리는 살아남았고, 계속 프로작을 복용했고, 이 책을 썼다. (그리고 비치도 쓰고, 올해 초까지 살아있었다.)

끝없이 자신을 극한 상황까지 몰아가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좀 어떻게 해달라고 울부짖고, 그러면서도 스스로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엘리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아주 똑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십 대 이십 대를 겪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우울증에 빠진 부모의 불화, 이혼, 사랑의 결핍과 갈망, 자살 충동, 항우울제 복용(프로작은 아니고 나중에 개발되어 효과가 더 좋다던 렉사프로), 자기 혐오, 자기 파괴적 행위들.

힘든 시기에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지나치게 동일시하고 더 우울에 빠졌을 것 같다. 차라리 조금은 나아진 지금 읽는 편이 다행인 것 같다.

이유를 모른 채 잠들지 못하고 울기만 하던 밤들, 고층 창 밖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과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싸우며 울던 날들(앞으로도 3층 이상은 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잠든 아기와 빨랫줄에 널린 천기저귀를 번갈아 바라보며 두 사람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던 끔찍한 밤들. 이십대 후반에 6개월 간 복용했던 항우울제는 모든 불면과 우울을 걷어가지는 못했지만 자살충동을 억제하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 이후로 다시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은 없지만 우울과 불면과 자살충동은 잊을 만하면 몰려왔다 겨우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아직도 가끔 환한 낮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때, 한밤 중에 잠에서 깨어 어둠 속에 눈을 뜨고 있을 때 불쑥 드는 마음이 있다. 내가 너무 미워서 없애버리고 싶어. 그 때 내 곁에 누운 어리고 나이든 사람들의 잠에 빠진 숨소리가 들린다. 당신, 우리에게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조금 더 곁에 있어줘요, 하는 것 같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늘었다. 최소 여섯 개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살아야지.

언젠가 내가 말했다.
내 삶은 열정도 재미도 없어졌어. 그냥 평범해.
곁의 사람이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도 행복해지기로 했잖아.
그 말은 내내 잊히지 않는 위로로 남았다. 무언가 되고 싶지 않은 삶, 위대한 뭔가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삶, 그냥 평범하고 조용한 나날. 행복이 뭔지 조금은 알게 되었고 그런 마음을 유지하고 싶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워첼처럼 스스로가 아닌 다른 이유로 죽는다면 완전히 망한 삶은 아닐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생각했고, 세상에 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으며, 내 존재를 조금이라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고통뿐이라고 생각했다. 삶에 대해 극도의 민감성을 갖는 것이,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무감각한 보통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드는 것보다 훨씬 순수하고 정직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내가 깨닫지 못한 것은, 모든 것을 지나치게 강력하게 느끼면 결국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모든 일들을 같은 데시벨로 인식하면, 포마이카 개수대 위를 기어가는 바퀴벌레의 죽음이 아빠의 죽음만큼 비극적인 일로 느껴진다. 사실은 밖에 있는 사람들 즉, 감정적인 에너지를 선택적으로 소모하는 사람들이, 감정상의 미묘한 차이를 끊임없이 단조로운 절망으로 대체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직하다…나는 엉뚱한 순간에 나의 개인적인 얘기를 마치 남의 일처럼 늘어놓는 괴팍하고, 수다스럽고, 에너지가 넘치는 나의 성향을 내 친구들이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우울증에서 회복되어 가는 동안, 친구들은 내가 사려 깊지 못하고 도가 지나친 말을 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행동을 나의 어쩔 수 없는 약점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나의 그런 점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었다…우울증은 오랜 시간동안 나의 잘못된 부분들을 설명할 수 있는 편리하고도 정직한 도구였고, 그러한 약점은 나의 좋은 면들을 두드러지게 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화학적인 치료를 받음으로써 그 모든 도구는 사라질 것이다.’ (439-441쪽)

책의 말미에 덧붙은 프로작 처방의 증가에 대한 견해와 커트코베인의 죽음(이 책이 마무리되던 1994년 봄에 그는 권총으로 자살했다)에 관한 소고는 논점이 흐릿하고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프로작이 쉽게 선택된다고 해서 다른 중증 우울증 환자의 고통까지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정도로 읽혔다. 일부는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약은 우울과 불안이 제거된 잔잔한 마음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하는 수단으로 쓰일 때는 도움이 된다. 다만 약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함께 하는 사람들, 관심, 사랑, 스스로의 가치를 발견하고 더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스스로를 구할 수 있다. 바깥의 사람도, 화학물질도 약간 도울 뿐 나를 완벽한 행복으로 데려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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