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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할 땐 뇌 과학 - 최신 뇌과학과 신경생물학은 우울증을 어떻게 해결하는가
앨릭스 코브 지음, 정지인 옮김 / 심심 / 2018년 3월
평점 :
-20200204 앨릭스 코브
내가 어릴 때 아빠가 우울증과 조현병 때문에 자살시도를 한 적이 있다. 엄마 역시 아빠의 질병과 폭력 때문에 우울과 무기력에 쩔어 내게 무표정하게 대했고 만성 두통으로 자주 누워있었다. 지금은 잘 웃고 잘 떠들고 운동과 글쓰기 열심히 하며 즐거이 사신다. (때론 신속한 이혼이 가장 좋은 우울증 치료제 입니다…)
유전과 환경. 스물 일곱 살의 나는 수면장애와 자살충동에 시달렸다. 다행히도 병원에 가야겠다는 결심을 비교적 빨리 했다. 나중에 정신보건 관련 연수에서 발병과 치료 시작 시점 간격이 짧을 수록 예후가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게 병인지도 모르고 가족들까지 잔뜩 시달리고 굿을 하고 기도원에 가고 엉뚱한 짓을 하다 치료 시점을 놓치는 안타까운 경우도 많다.
정신과의원에 갔더니 항우울제와 항불안제, 수면제를 처방해줘서 6개월을 먹었다. 상담치료는 비용이 매우 비싸서 대부분 정신과의원이 짧은 진료 후 투약 위주로 치료를 진행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내가 간 곳이 소아정신과라 그랬는지 좋은 분이라 그랬는지 의사 선생님이 비교적 오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런저런 조언도 해 주었다. 운동과 독서를 권하면서 오소희 여행책과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어보라고 했다. 읽긴 했지만 재미는 없었다.
한참 뒤에 우연히 그 의사 선생님 sns를 보게 되었다. 사진과 짧은 글들이 그분 또한 심한 어둠에 빠져있는 걸 알려주었다. 의사도 사람이고 아플 수 있구나 새삼 느꼈다.
이후로도 산후우울증과 여러 심리 문제가 종종 닥쳤고, 수면장애는 거의 평생을 따라다니고 있다. 그래도 최근의 마음 상태는 아주 좋은 편이다. 그러니 이 책도 읽을 수 있었다. 지금은 좋은 시기이지만 혹시 모를 나중을 위해 읽어두면 좋을 것 같았다. 자신의 상태에 관해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이해하는 일만으로도 때로는 많은 도움이 된다. 예전 같으면 운동해라(이 책에 제일 많이 나오는 말), 미소지어라, 감사해라, 다른 사람과 같이 있어라 같은 조언들이 다 부질없다고 여겼을 것 같다. 이번에는 읽으면서 빤한 소리지만 맞는 소리라고 끄덕거렸다. 내가 무난한 날들을 보내고 나아진 이유가 나도 모르는 사이 책에 나온 행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책에서는 우울증과 관련된 뇌의 부위의 구체적 이름과 기능, 우울증이 발생했을 때 해당 부분의 변화, 호르몬의 변화 등을 알려준다. 뇌의 부위 이름이 워낙 생소하고 어려워서 외워지지 않고 금세 까먹지만, 그래도 증상이 나타나는 이유가 내 머릿속에 무슨 일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만 알아도 위로가 되었다.
거기에 더해 생활 속에서 스스로 시도할 수 있는 행동의 변화가 뇌의 부위에 어떤 자극과 변화를 주는지, 어떤 메커니즘으로 우울증에서 벗어날 힘을 주는지 과학을 바탕으로 설명해준다. 단순히 운동해라, 웃어라, 잘자라, 미소지어라, 하는 말은 한 귀로 새어나가지만 그렇게 하면 이러이러한 일이 네 뇌에서 일어난다- 하는 과학자의 말은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우울로 빠져들게 하는 나쁜 습관들과 그 연속 반응을 하강곡선, 하나라도 나아질 계기를 만들어 일어나는 변화를 상승곡선으로 표현한 것이 제법 잘 와닿았다.
다만 주변에 우울을 앓는 이들이 있을 때, 아픈 사람에게 이 책을 읽고 스스로 노력하면 쉽게 병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권하는 착각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해칠 수준의 우울에 빠진 사람, 자살충동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투약, 입원 등 의료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당장 사람이 죽을 상황인데 약 먹는 일을 꺼릴 이유가 없다. 약은 상태 호전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너무 심한 우울과 무기력에 빠진 사람은 책을 읽을 기력조차 없다. 과학적 설득조차 통할 수 없고 행동변화를 시도하기도 어렵다. 본인이 강한 치료 의지가 있거나 투약으로 어느 정도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상태로 호전 중인 사람에게는 이 책의 지침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정신 건강과 뇌과학에 대한 책과 글에 관심이 많고 열심히 찾아본다.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잘 발견하고 내 일인양 걱정하곤 한다. 병원에 가고 약을 먹어보라는 권유도 쉽게 한다. 모두가 그렇게 해서 낫는 건 아니지만 일부에게는 확실히 효과가 있는 방법이라 그렇다.
다시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주변 사람들 모두 마냥 행복했으면 좋겠다. 계속 들여다보고 나빠지지 않게 보살피는 수 밖에는 없다. 올해는 많이 걸을 생각이다. 읽기와 쓰기도 마음에 많은 도움이 되니 계속 할 생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