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가능하다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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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1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미국을 가 본 적 없고 미국에 대해 1도 모르는 내가 일리노이를 들으면 먼저 떠오르는 건 영화 기생충 기우 기정 남매가 독도는 우리 땅 멜로디에 맞춰 ‘제시카 외동딸 일리노이 시카고 과선배는 김진모 그는 니 사촌’ 하고 부르는 장면이다.
Anything is possible 오랜만에 직역한 제목을 보며 정말 그럴까? 하고 반문부터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마치...일리노이 앰개시 판 전원일기 같은 느낌이었다. 연작소설이라 하기엔 조금 느슨한 연결점이긴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 입에 오르내리거나 회상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또다른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되어 다시 등장한다. 그렇게 이어지고 이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연결망을 지켜보는 건 흥미로웠고, 종이 한 장 펴고 인물 관계도 같은 걸 그려 보고 싶은 마음을 자꾸만 불러일으켰다. (참고 안 하기로 했다.) 마을에서 안 좋은 취급을 받던 바턴씨 일가와 작가가 된 루시 바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마침내 바턴네 세 아이가 모인 소설을 읽었을 때는 정말 슬펐다. 자랐지만, 살아남았지만 그들의 아픔은 너무 커 보였다.
선택할 수 없는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이들이 하필이면 가난한 데다 병들고 엉망진창으로 아이를 키우는 사람일지라도, 역시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저 남일 뿐이지만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고 안타깝게 여기고 작은 따뜻함이나마 나누어주는 이웃이 있다면 아이들은 그 부모보다는 조금이나마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을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쓰레기 취급하고, 호의를 배반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인간은 한없이 못 되고 답 없는 존재 같지만, 아닌 사람들이 있는 덕에 세상은 지탱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마냥 남을 위해 살 자신도 없지만 가끔은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아주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소설 자체는 어려운 말은 하나도 없는데도 상황 파악이 쉽게 되지 않고 술술 읽히지도 않았다. 무얼 말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는 장면과 이야기가 더 많았다. 온기를 주는 부분이 가끔 있어서 그나마 참고 읽을 수 있었다.

-계시
토미의 헛간에 불이 났고, 토미는 그 날의 일을 오히려 하느님의 계시로 여기며 이후로도 나쁘지 않게 삶을 꾸려왔다. 혼자 지내는 바턴씨네 아들 피트에게 들렀다가 그의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어린 루시와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 같은 피트에게 내민 토미의 손길은 다정해 보였다.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지는 일. 어려운 일을 누군가는 애써 해내고자 한다. 옆 사람 몸냄새를 참아가며,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을 견뎌가며 그렇게 한다. 뒤에 나올 소설에서 피트가 토미와 함께 무료급식 일을 돕는 이야기를 보며 그의 손길이 지속되고 있다는 걸 확인하니 좋았다.
-풍차
나이슬리 걸즈로 불리우며 마을의 손가락질을 받던 패티와 린다 자매. 패티는 자라서 마음을 다친 남편 세바스찬을 만났고, 다시 잃었다. 우울증약을 먹고 살이 쪘다. 학교에서 진로상담교사로 일한다. 루시 바턴의 조카이자 비키의 딸인 라일라에게 험한 말을 듣고 잠시 상처 받지만, 오히려 그 아이의 더 큰 상처를 깨닫고 아이의 잠재력을 일깨워주며 대학에 보내주겠다고 한다. 라일라의 눈물. 자기에게 누군가 잘 해주면 견딜 수 없다는 아이. 패티는 마음에 두고 있는 찰리의 곁에 다가 앉는다. 그가 하는 말을 들어준다. 사랑스러운 패티, 조금 더 사랑 받아도 될 것 같은데 설정이 아직까지는 가혹하다. (나중에 뒤의 소설에서 그녀의 사랑이 다시 시작되는 듯한 소문을 듣긴 하지만…)
-금 간
린다는 부잣집 남자와 결혼했지만, 행복하지 않다. 유명 사진 작가 캐런의 호감을 사기 위해 캐런의 지인 이본이 행사 기간 동안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하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뒤에 나온 민박집을 운영하는 도티와 많이 대조적이다. 린다의 남편 제이는 돈만 많은 대책 없는 미친놈이고 린다와의 사이도 소원하지만 린다는 그걸 직시하지 않으려고만 하는 것 같다. 부자들은 가난한 예술가의 예술을 수집하면서도 무시하고, 예술가들은 부자들의 소비에 의존하면서도 그들을 경멸한다. 유리로 된 투명한 집, 문 없이 개방된 공간, 그러나 그집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못하고 벽에 걸린 금간 접시처럼 갈라진 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엄지 치기 이론
베트남 참전 경험이 얼마나 찰리라는 남자의 마음을 부숴놓았는지 잘 와 닿지가 않았다. 사랑에 빠졌던 창녀 트레이시에게 만달러를 뜯기고 상처 받고, 도티의 민박에 머물며 고통과 결핍에 대해 생각한다. 남의 고통에 대한 소설을 가지고 이러면 안 되지만 그래도...읽기 힘들고 재미가 없었다. 남자 화자가 나오는 부분이 특히 그런지, 마지막 소설도 약간 비슷한 기분이었다.
-미시시피 메리
패티의 직장 동료인 앤젤리나는 패티와 비슷한 상처를 공유한다.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집을 떠난 일이다. 60이 넘어 얻은 새 사랑을 찾아 이탈리아로 떠난 엄마 메리는 이제 80대이다. 앤젤리나는 떠난 엄마에 대해서만 골몰해 있다가 남편이 그 사실을 지적하며 떠나버린다. 그런 엄마를 찾아간 앤젤리나가 메리와 보낸 날을 그렸다. 나이를 먹어도, 죽을 때까지도 사랑은 멈추지 않을 수 있겠지. 그래도 남겨진 사람들은 그걸 인정하기 힘든 일 같다.
-동생
바턴씨네가 살던 집에 홀로 남아 살고 있는 피트는 작가로 성공한 동생 루시가 자신을 보러 돌아온다는 말에 청소도 하고 이발도 한다. 또다른 여동생 비키도 오지만 루시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는 생각에 루시에게 모질게 대한다. 그들이 어린 날 입은 상처를 파헤치는 시간, 루시의 공황장애, 루시를 챙기는 언니 오빠, 그래도 남아 있는 형제애 같은 게 안타까운 소설이었다. 그 모진 부모들이 죽었어도 주위 사람들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지금 잘 살고 있어도 상처에서 벗어나는 일은 평생을 가도 힘든 일인지 모른다.
-도티의 민박집
루시가 사인회에서 만난 사촌 에이블과 그 동생 도티. 도티는 멀지 않은 곳에서 숙박업을 한다. 스몰씨와 그 부인 셸리가 손님으로 머물렀고, 셸리는 도티에게 자신이 상처 받는 경험을 말한다. 스몰씨의 친구 데이비드의 부인이었던 배우 애니가 자신이 신경써서 꾸민 자신의 집에 대해 모욕했다(는 소리를 데이비드로부터 전해 듣)고 창피했던 일이다. 도티가 그 이야기를 듣고 반응한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스몰씨 부부는 자기들 방에서 도티를 모욕하는 험담을 했고 도티는 상처 받았다. 그래서 그들이 먹을 잼에 침을 뱉고 스몰씨에게는 대놓고 항의하는 말을 건넸다. 나름 작은 사이다 같은 장면이지만 그걸로 되었을까 싶었다. 도티는 조용한 위로를 건네고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인 찰리를 잊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도티가 기억하는 찰리와의 시간은 한결 따뜻했다. 앞의 소설에서 찰리가 그걸 제대로 알아챘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마 몰랐을 것 같다. 자기만의 슬픔에 너무 깊이 빠진 사람이라.
-눈의 빛에 눈멀다
바로 앞 소설 속 배우 애니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엄함, 아버지의 치매 발병 후 뒤늦게 알게 된 비밀, 그런데도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는 듯한 애니의 마음. 눈 쌓인 숲을 함께 바라보던 기억.
-선물
도티의 오빠 에이블이 크리스마스 날 극장에서 겪는 이야기이다. 사실 깊이 공감이 가지도 이해가 가지도 않았다. 배우 링크와의 갑작스러운 조우로 에이블은 심장마비까지 겪는데, 그와중에도 링크와 마음이 통하고 좋은 시간을 보냈고 친구가 되었다고 여긴다.

+밑줄긋기
‘그리고 자책한다는 것, 음, 자책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 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
-토미가 피트에게 건넨 위로.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주된, 그리고 가장 큰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시비만은 예외여서 그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었고, 그녀 또한 그에게 엄청난 관심을 쏟았다. 그것이 사람들을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피부였다—자신의 인생을 공유하는 또다른 누군가의 사랑이.
-그런 사랑을, 피부를 잃은 패티의 마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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