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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양장, 어나더커버 특별판)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9월
평점 :
품절
-20190916 테드 창
내가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다. 그래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는 있다.
월초에 모 작가의 SF소설집을 읽고 많이 깠어. 전작 다 읽었던 작가를 급기야 손절 선언했어. 너무 가혹한 평가가 아니었을까? 내게 장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건 아닐까? 마침 이 책을 봤어. 절반만 맞아. SF에 대해 잘 몰랐고 읽은 게 없던 것도 맞아. 이 책은 그 매력을 알려줬어. 탄탄한 구성과 기발한 상상력과 사고의 깊이와 좋은 문장이 더해진 과학소설은 정말 흥미진진해. 어딘가 어설픈 데가 있다면 저 중에 뭐 하나 빠진 거지. 취미로 쓴 작품을 봤다면야 노력이 가상하고 더 나아지길 빌어줄 거야. 그런데 돈 내고 기대감 가지고 현역 작가의 글을 시간 쏟아 봤는데 불만이다? 리콜도 안 되니까 그냥 빠이빠이 더 나아질 때까지 별거. (라고 지 돈 안 들이고 전자책 대여한 거지에 뻔뻔이가 지껄입니다.)
공상과학소설이라지만, 과학을 잘 모르는 나도 어떤 과학 소재를 활용한 건지 대략 파악하면서 읽을 수 있었어. 프리즘의 원리 같은 건 에라 나도 모르겠다 어버버 했지만 그래도 평행우주와 다양한 분기의 평행자아와 이곳의 내가 대면하는 상상을 이해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는 거지. 좋았어. 단순히 신기한 상상을 재미있게 잘 그린데서 더 나아가니까 이건 뭔가 아름답기까지 했어. 거기에다 우리의 자유의지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 긍정 같은 게 엿보여서, 마냥 디스토피아만 그리는 나 같은 인간조차 약간은 감화될 정도였다니까.
작가노트는 정말 핵심만 넣은 친절한 주석 같았어. 데헷 내가 허투루 읽지는 않았네? 하고 뿌듯하게 만들면서도 핵심을 짚어줬어. 게다가 어쩌다 이런 걸 썼는지도 비교적 명확히 밝혀주고 연결고리가 되는 작품도 언급해줘서 흥미로웠어.
필립K딕의 전기 개미, 로저 펜로즈의 황제의 새로운 마음이 궁금해. 월터 옹의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같은 건 궁금하긴 하지만 제목만 딱 봐도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라 도전할 마음은 접어두게 되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무슬림 문화권을 배경으로 이거 아라비안 나이트식 민담이네? 그런데 타임머신이라니. 시간의 문 같은 게 나와. 과거로 갔다 미래로 갔다. 많은 걸 바꿀 수 없지만 더 나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동이란 게 흥미로웠어. 약간 교훈적인 느낌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숨
인류라는 말은 한 번도 안 나오지만 화자는 읽는 사이 나도 모르게 우리와 동일시 할 만큼 인류와 닮은 수준의 지적 존재야. 공기의 흐름으로 기억과 사고를 유지하는 그들 세계는 그들의 숨이 만드는 압력의 평탄화로 인해 언젠가는 멸망할 거야. 그들 자체나 세계가 직면한 문제가 우리와 유사해. 근사하고도 슬픈 우화야. 사라지지만 존재했던 것에 대해 기뻐하는 존재. 나도 그런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각인 같은 흔적을 남겨야 할까.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해야 할 일
자유의지가 환상일 수 있다는 가능성. 그럼에도 결정론에 절망하지 않는 것을 권고. 그런 경고를 남길 수 밖에 없는 자신. 순환적이다.
누르기도 전에 누를 것을 알고 불이켜지는 장난감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무동무언증 상태에 빠진다는 상상력이 재미있고 섬뜩했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
인공지능에 대한 또 하나의 이야기인데 그 동안 본 것과 사뭇 달랐다. 긴 데도 재미있었다. 인간이 형성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고 예측이 어렵듯 인공 존재 또한 그럴 것이라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 아이를 키우는 것이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과 묘하게 겹치면서도 다른 이슈들이 등장했다. 여기서도 자유의지의 문제가 등장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고군분투. 그 대상이 인공 존재일라도. 내 육체의 유전자를 지니지 않았더라도. 플랫폼의 쇠퇴로 인한 단절은 우리도 많이 겪었지. 공들여 키운 인공지능 디지언트까지는 아니라도 서비스 종료된 게임 속 캐릭터, 프리챌에 꾸민 아바타, 싸이월드의 미니미와 미니룸...다들 잘 있니?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기분인 걸.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
교육학 배운 사람이면 수차례 봤을 것이다. 새끼 원숭이가 어미 대신 주어진 헝겊 인형과 젖주는 기계 인형 중 어디에 애착을 가졌는지. 이 이야기도 그런가 했는데 결론이 조금 달랐다. 인간을 새끼오리 마냥 초기의 각인에 따라 달라요 하는게. 납득은 안 되었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구술 문화의 아프리카 어느 부족에서 글을 깨친 청년 지징기의 이야기와, 기억 기록 장치 리멤을 통해 자신이 딸 니콜을 부당하게 대하고도 기억을 왜곡한 채 살아온 것을 깨달은 화자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꾸려진다. 마무리는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관통하는 생각은 마음에 새기고 싶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옳았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경험과 기억의 블랙박스 같은 리멤에 대한 이야기는 전에 (장작가 책임가?) 분명 읽었는데 그새 어디에서 봤는지 까먹었다. 제대로 기록을 못한 증거. 독서에도 리멤이 필요한가. 망각은 축복이 맞고 나는 기억력이 쓸데없이 좋아 불행하다고 여겨왔는게 다 뻥이다. 요즘엔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어.
-거대한 침묵
절멸 직전 앵무새가 우리에게 건네는 작별 인사. 김애란의 침묵의 미래와 되게 비슷한 느낌이었다. 존재의 사멸과 동시에 세상에서 사라지는 언어들. 다만 현실의 박물관은 그런 자취조차 담지 못하지. 사라지는 건 그냥 사라진다.
-옴팔로스
의도를 가진 인격신의 창조가 세상의 근원으로 공인된 세상. 과학은 그런 믿음을 뒷받침하는 철저한 신하. 그 믿음이 흔들리는 우주 관찰. 그런 상상 하에 세계를 인식하는 것도 그럭저럭 흥미로웠다.
기도문 형식은 처음엔 풍자하고 비꼬는 건가 웃자고 하는 건가 했는데 세계관을 못 박고 시작하니 의외로 진지했다. 중간에 자유의지나 선택을 언급하는 부분은 갑자기 기도문에서 벗어나 독백? 방백? 하듯 서술하는데 의도적인 변형 같지만 그 효과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고치다 말거나 번역하다 실수한 듯 어색한 느낌 외에 극적인 효과는 없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프리즘을 이용해 평행우주 속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다면. 가 보지 않은 길. 나의 수많은 다른 가능성. 그걸로 돈을 벌려는 사람. 그걸로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만족하거나 반대로 불행해지는 사람. 어느 정도는 결정론적.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우리의 통제하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누구도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모두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책 한 권으로 SF빠돌이가 될 수는 없겠지만 사고가 확장되는 경험은 즐거웠다. 앞으로도 이런 장르를 골라 읽겠다고 단언은 못하지만 이런 걸 쓸 자신도 없지만 테드 창 작품은 기회가 되면 기꺼이 읽을 듯하다. 잘 썼고 재미있고 유익한 것도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