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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했다가 죽이겠다고 했다가 - 양을 치며 배운 인간, 동물, 자연에 관한 경이로운 이야기
악셀 린덴 지음, 김정아 옮김 / 심플라이프 / 2019년 2월
평점 :
-20190710 악셀 린덴
포도 농사 짓는 농부의 블로그를 가끔 구경한다. 예전에 디시에 만화를 그려 올리던 분인데 이제는 포도를 기른다. 물을 대고 밭을 정비하고 흰가루병 곰팡이병에 근심하고 열린 포도알을 세고 수확철이면 포도 판매 공지를 올린다.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뭔가를 제공하고 벌어 먹는 입장에서 보면 먹을 수 있는 걸 키워 파는 사람은 훨씬 정직해 보인다.
제목에 끌려 읽었는데 책 자체는 그리 열탕 냉탕하지 않다. 한국어판 판매 촉진은 제목이 다 했네. 밋밋해도 원제인 양 일기?나 영어제목 양 세기가 더 어울릴 법하다. 잔잔하고 심심해 보여도 정말 양 키우는 이야기 밖에 없다. 뭐 밖에 없다 하면 없어보이는데 양 키우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이 있었다. 인간과 양의 삶이 얽히니 생각보다 복잡하다. 책을 읽다 나도 모르게 발굽 깎는 영상을 찾아봤다.
https://youtu.be/OAmF7ndQpZ8
양은 너무 온순하게 주인에게 발을 맡겼다. 주인은 능숙하게 니퍼와 칼로 썩은 발톱을 도려내고 약을 발라 주었다. 석석 잘라내는데 속이 시원하네. 제 썩은 새끼발톱도 어떻게 좀..(안 될까요?)
나의 평범한 삶은 순식간에 체제 공범자, 부당 수혜자 명찰이 붙었다. 뼈를 때려서 반박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산사람이 될 수도 없고 땅덩이 좁은 한국에서 농축산업 종사자가 되는 건 도시인 못지 않게 오염 덩이를 만들고 지속 불가능한 생산(에다 지속 불가능한 경제적 삶)을 유지해야 하니 대안이 못 된다. 내가 한다고 하는 일은 생수병 쓰레기 너무 많이 나온다고 몇 년 째 물 사먹던 걸 그만 두고 유리병 두 개에 수돗물 끓인 걸 식혀 담아 먹는 정도이다. (그나마도 같이 사는 사람은 탄산수만 먹어서 전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페트병 나온다…)
테레자도 생각났다. 웨이트리스로 일하다 토마시를 만나 가게 된 도시에서 프라하의 봄을 알리는 사진 작가로, 다시 바의 종업원으로 일하던 그녀의 마지막 직업은 양치기였다. 그녀와 함께 카레닌도 목양견이라는 최초 최후의 직업을 가졌다. 양들을 풀어놓고 책을 읽으며 유유자적 해 보였다. 현실의 양치기는 도망치는 양을 붙잡아 울타리 안으로 안아 넣고, 고장난 울타리를 끊임 없이 고치고, 풀과 건초와 사료와 물의 양을 재고, 양을 세고, 양을 잡고, 양을 교미시키고, 다치고 아픈 양을 보살피거나 죽이고 눈코뜰새 없이 바빠 보인다. 물론 하루에 다하는 게 아니라 좀 낫지만. 먹고 사는 일은 안 그런게 없는 것 같다.
신념을 굳건히 지키는 삶은 어렵다.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가 발디딘 삶에 할 수 있는 한 충실하고 할 수 있다면 덜 나쁜 방향으로 조금씩 고쳐나가는 정도가 할 수 있는 일 같다.
남의 일기 보는 건 재미있다. 내 일기도 시간이 오래 지나고 읽으면 남의 일기 읽는 것 같다. 주로 힘들 때 일기를 많이 쓴다. 지나고 읽으면 힘든 얘기 밖에 없다. 요즘에는 일기를 거의 쓰지 않는다. 나름 잘 살고 있나보다. 별일 없이 살고 있는 일기도 가끔 남겨야 겠다. 별일 없이 양치는 일기도 읽어보니 별 볼일 없지 않고 작은 재미가 있는 걸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