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 스스로 ‘정상, 평균, 보통’이라 여기는 대한민국 부모에게 던지는 불편한 메시지
오찬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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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2 오찬호
책이 나왔을 때 부터 궁금했고 읽고 싶었다. 그치만 회자되거나 인기를 끌지는 못할 것이란 슬픈 예감이 들었다. 저자의 특성상 결혼과 육아의 시기를 거치는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은, 애써 부정할 만한 것들을 건드릴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웃어야 돼 울어야 돼)

눈뜨고코베인 노래 중 “우리집은 화목한데”삼촌만 티비 앞에 없다는, “아빠가 벽장”안에 있을리가 없다는, 아버지 “납골묘”아래에 내가 먼저 누워 있을 거라는 노래들이 있다. 화목한 가정의 허구와 화목함을 가장하는 폭력을 일찍 꿰뚫은 그 노래들을 나는 좋아했고 지금도 즐겨듣는다. 그 덕에 내 아이들도 어쩌다보니 같이 듣는다. 이 책은 그 화목함을 연기하기 위해 서로의 지옥을 만든 부부 부모자녀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나름 주체적인 삶을 살겠다고 기를 쓰며 살아왔고 남편이 ‘상식과 관습의 파괴자, 철저한 반골’이라 칭할 만큼 남의 눈 신경 안 쓰고 내 고집대로 많은 선택을 했다.(고 쓰고 그 고집에 남편과 엄마를 질질 끌고 온 독재자가 나다…)
여덟 살, 칠개월 두 아이 낳고 키우며 육아박람회는 근처도 안 가봤고 산후조리는 집에서 했고 육아템이라 불리는 것들은 가성비 최저가 따지며 최소한으로 구입하거나 얻어 쓰거나 만들어 썼다.
아이가 생겨 갑작스레 차린 살림이라 서로의 조건을 따져 볼 겨를은 없었다. (칠 년 사귄 연인이니 뭐 서로 알 것 모를 것 없었지만)
부모 도움을 받긴 커녕 혼인 후에도 양쪽 엄마 생활비를 감당하는 동시에 전세 보증금 대출을 갚아야 했으니.
대학원생인 남편 뒷바라지하려니 (그렇다고 나 혼자 번것도 아니고 남편도 알바로 이골이 났다) 경력 단절? 그런 것 고려할 새도 없이 육아 휴직은 커녕 산휴 90일 후 바로 일을 나가야 했다. (1년 간 유축기와 보냉팩 든 커다란 가방을 든 채 만원 지하철에 우겨지며 19개월 완전 모유 수유한 건 이건 돈으로도 못 하는 몸으로 떼우는 모정을 발휘했다해야 하나.)
여덟 살 큰 아이는 유아 때는 책과 스티커북 잔뜩 사서 던져준 것, 초등학교 입학 후엔 방과후교실에서 하고 싶다는 컴퓨터 로봇 생명과학 수강한 것 외의 사교육 경험은 없다. 학교 다녀오면 저 혼자서 이삼십 분 정도 월요일엔 영어, 화요일엔 국어, 수요일엔 수학 문제집을 풀고 이후엔 세 시간 정도 맘대로 유튜브 시청이나 게임을 하도록 약속한 정도.

책에 나오는 과열된, 그래서 이상한 결혼과 육아와는 거리가 멀다고 안도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1.나는 운이 좋았음을 인정해야 하고 그래서 책에 나온대로의 비혼 또는 과열 육아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냉소해서는 안 된다.
불우하고 궁핍한 집안 출신이지만 둘은 운 좋게도 대한민국 입시에 적합한 지능을 갖추고 운좋게도 좋은 대학에 가서 운좋게도 만났다.
운좋게도 양쪽 부모가 자식들에게 큰 간섭 없이(사실 해준게 없어 간섭 못 한다도 컸겠지만 이러나 저러나 간섭하는 집들도 있으니)혼인을 허락하고 다 알아서 하게 냅두었다.
궁핍하게 시작한 신혼이지만 첫애가 태어난 후 운좋게도 일이 잘 풀려 남편이 박사학위를 얻고 운좋게도 회사원이 되었다.
운좋게도 첫애가 네살까지 외할머니가 봐주실 수 있었고 운 좋게도 다섯살 때 대학원 연구생인 부모 아래 대학 내 어린이집에 입소해 다른 사교육 없이도 양질의 특별활동을 하며 교수 교직원 학생 자녀라는 동질성 아래 별 무리 없이 취학 전 보육을 해결했다.

이런 운 좋음이 모두에게 통용되지 않는다. 나와 남편은 나름 고생했고 다행히 결과가 좋아 형편이 나아지는 중이지만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너희도 우리처럼 고생하고 노력하라고 강요할수는 없다.

2. 아이의 독립을 바라고 사교육의 수혜를 받지 않아 아직까지 아이에게 자기가 (예체능 등에서)필요를 호소하기 전까지는 사교육을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유주의나 방임주의 양육자는 아닌, 아이에게조차 권위주의 독재자로 군림하는 나를 반성해야 한다. 아이에게 뭐든 스스로하길 말하면서도 그 스스로가 “엄마가 원하는 시간에” 밥 먹고 옷 갈아입고 이 닦고 하는 것이라면...휴대전화 사용이나 텔레비전 시청 제한에 아이가 납득할 설득이 안 되면서 그저 안 된다고만 한다면…
게다가 무례를 넘어선 무시와 폭력에 노출된 내 어린시절의 양육방식이 자각과 인내를 뚫고 아이에게 퍼부어진다면…(그렇다. 아이를 때리고 아이에게 욕하고 소리지른 적이 있다. 이것은 가정폭력이고 아동학대이며 아이에게 사과를 해도 지워질 수 없는 죄악이다. 알면서도 반복된다.)
또는 성평등 관점을 키운답시고 “민주사회에 왕은 없다. 왕의 딸일 뿐인 공주는 아무것도 아니다.” “남녀의 색은 따로 없다. 모두 다 필요한 색이다.” 등의 말이 아이에게는 단순하게 이해되어 “난 공주가 싫어. 공룡이나 드래곤이 좋아.” “난 분홍색이 정말 싫어.” 하며 엉뚱한 혐오감을 조장하거나 이상한 우월감으로 번지는 역효과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일상적으로 던졌을 차별과 비하와 거리두기의 발화가 직접적인 가르침보다 더 강렬했을지 모른다.
육아는 아이를 잘 기르는 것보다 나를 제대로 된 사람 만드는게 우선일 것이다.

3. 나는 원체 은둔형에 내성적이기도 하지만 경쟁에 휘말리거나 남들 시선에서 자유롭기 위해 고립과 차단을 택한 것 같다. 학부모 단체 카톡에 안 들어가려고 카톡 아이디를 만들지 않고 육아 모임이나 커뮤니티 어디에서도 활동하지 않고(물론 불특정 다수가 가입한 카페나 블로그 눈팅은 한 적이 있다) 아이 키우는 지인들과 교류하지 않았다.(첫애는 이르고 둘째는 늦어서 또래 아이들이 없던 것도 크지만…)
그러다보니 구조적 모순이나 차별, 혐오, 문제들을 인식하면서도 해결을 위해 적극 행동한 적이 없다. 그저 방구석 방관자이고 애써 무관심하려 애쓰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선을 긋고.
이런 내가 아이들이 바른 사회성과 인성을 가지고 크길 바란다면 욕심일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지도 못하면서 잘 살길 바라는 마음은 결국 체제에 순응하며 과열된 경쟁에서 내몰고 부모와 자녀 서로 불행해지는 책 속에 묘사된 도가니로 수렴하는게 아닐지.
아님 엄마아빠도 알아서 살아왔으니 너도 알아서 해라 하는게 자율성의 존중이 아닌 유기가 되지는 않을지.

어렵고 고민이 많이 되는 부분이다. 내 아이들이 자유롭고 주체적이면서 행복하길 바라는데 거기다 사회의 문제를 깨닫고 남들과 다같이 잘 사는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길 또 바라는 건 욕심일지. 내가 못 하고 있는 걸 떠미는건 아닐지.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는 나는 불행한데 그 불행함을 보라고 너무 일찍 강요하고 있는 건 또 아닌지. 너무 일찍은 또 없는건지.
일단은 때리고 소리지르고 강요하는 작은 부분 같지만 절대 작지 않은 절대적인 부분부터 잘해나가야 겠다. 그러려면 내 스스로가 행복해지고 좋은 사람이 되는게 우선일 것이다.

나와 주변을 돌아보고 바른 삶에 대해 고민하게 해주는 독서였다. 늘 변화와 실천은 더디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싶다. 어디가서 좋은 소리 못 들으면서도 열심히 이런 책들 쓰고 강연하고 있는 저자한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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