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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개정판
심윤경 지음 / 문이당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하지만 경쾌하고 은근한 노랫자락에 얹어서 똑같이 쿨하다고 착각해 버리기에는 너무나 쿨하지 못한 우리네 인생. 아무래도 사는 건 구차하고
남루하다. 인연은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이어졌고, 생의 흔적은 먹고 내버린 파리 껍질처럼 여기저기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 속에서 나는 한 마리
호랑거미처럼 발 디딜 자리를 찾는다. 그런데 이건 뭐야. 내가 살아가는 이 덥고 끈적끈적한 세상을 한없이 쿨하게 냉소하는 너희는 누구야. 나는
일본인이 썼는지 한국인이 썼는지 분간되지 않는 몇몇 쿨한 소설들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일말의 모욕감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뜨겁게. 여한 없이 뜨겁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세상 뜨겁게.
- 작가의 말
할아버지라는 인물은 원래 그러했다. 당신의 인생은 확실히 셀 수 없이 많은 구성 요소로 이루어졌고 그중에는 불균형하거나 치명적인 부분도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는 그 많은 요소들을 모두 제압하여 하나로 뭉뚱그리는, 범속한 사람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강력한 압착의
능력이 있었다. 도무지 이음매라고는 없이 치밀하게 하나가 되어 있어서, 어느 쪽으로 바라보아도 내가 끼어들 틈새라고는 애초에 찾을 길이
없었다.
- p. 15
소진이 다시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봐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에 합격하면서 우리의 사랑은 끝났다. 그녀가 나와 사랑을 하면서 수능 준비를
했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하긴, 무단히 그녀의 방을 드나들면서 책꽂이 한번 훑어보지 않았으니 할 말은 없었다. 나는 수업 시간 이후 그녀의
생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소진은 여전히 사랑한다고 했고 함께 서울로 떠나자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단 며칠도 고민하지 않고
입대를 택했고, 그녀가 떠나기 전에 먼저 학교를 떠났다.
- p. 52
생모와 헤어진 후 흘러간 20여 년의 세월이 갑자기 내 목을 졸랐다. 나는 끝없이 허물어지는 개미귀신의 구덩이에 빠진 여섯 다리
곤충이었다. 서안 조씨 가문 양정공파 17대 종손 조상룡이란 이름과 종손에게 부과되는 많은 임무와 결코 가져서는 안 될 소망들이 깔깔한
모래알처럼 나의 숨구멍 속으로 쏟아져 들었다. 나는 생시에나 몽매간에나 하염없이 몸부림쳤다.
- p. 113
내 인생이 그동안 나를 우습게 보고 그토록 어지러이 휘둘러 댄 것은 순전히 나의 물리적인 무게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인생이 왜 이렇게 한 조각도 내 뜻대로는 되어 가지 않는지, 나는 단지 그것이 분하고 억울해서 계속 울었다.
- p. 167~168
「니 각시는 이삔하고 고와야제…… 내매이로 널찐 메주띠이 같은 기…… 몬생기기만 했나 어데…… 다리빙시에다 부엌디기에다…… 얼라도 못
놓을 기라 아이가…… 내는 암 때도 시집 못 갈 몸이이까네 맹 니가 맘대로 해도 괘핞다.」
「삼복에 얼어 디질 소리 언가이 주낀다. 고마 치아라.」
- p. 171
심윤경, <달의 제단>
종가와 종손의 삶이라니. 생각해본 적
없는, 어쩌면 조금은 동떨어진 소재가
아닌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그저
여유있는 궁금증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단숨에 읽었다. 어느 단단한 고치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읽고 난 후 맑은 하늘이 어딘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 서서히 가라앉더니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룡의 이야기가 나를 똑같이 끌어내리고 있었다. 소름돋을 만큼 정확한 문장이나
묘사가 아니라도 분위기에 맞는 자연스러운 문장과 개성적인 인물, 그들의 어투만으로 이야기는 온전히 완성된다. 드라마란 이런 것이구나! 통속적인 남녀 관계라고 한들
그게 관계의 본질인 것을. 매끄러운 호흡과 적당한 깊이를
넘나들며 근원적인 갈등이 힘 있게
서사를 이끈다.
'언찰'이라는 소설적 장치는 주 서사에 양감을 만듦과 동시에 스토리를 이끄는
역할까지 했다. 소설 소재에 맞게 고풍스런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뒤로 가면 그 자체만으로 옛글이 가진 고유의 매력을 느끼게끔 했다.
처음 심윤경 작가에 대해서는 우연히 라디오에서 소설
<사랑이
채우다>를 낭독하는
것을 듣고 관심을 가졌다. 이 작가 글은 꼭
읽어봐야겠구나, 하고 기억해둘 만큼 그녀가 쓴
문장들은 충격이었다. 단순히
'잘 쓴다'를 넘어서는 금세 훅하고 끌어당기는 무언가가 있었다. 우선 초기작품부터
읽어보잔 생각으로 접근했는데 이번엔 문장보다
장편소설로서 많은 걸 느꼈다.
잘 쓴 소설에서 무언갈 배운다는
것이 오히려 좀 어렵다. 매끈하게 쌓아올린 탑을 보면서
'정말 잘 쌓았네' 감탄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지만
그걸 찬찬히 바라보면서 어디서 시작했을까, 어떻게 한
거지, 혼자 질문하다 보면 그만
진이 빠질 때가 있다. 바로 재능에 대한 감탄이 일
때다. 소설을 이렇게도
쓰는구나, 하고. 이번이 그렇다. 이걸 쓰기까지
작가가 쌓아올렸을 내공에, 이 소설 밑에 자리하고
있을 고증과 노력에 한 번 더 배워간다.
※
유일한 단점은 책 표지. 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