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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841년 독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영국이 자신들은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금을 통해서 경제적인 패권을 장악해 놓고서 정작
다른 나라들에게는 자유 무역을 권장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그는 영국이 세계 최고의 경제적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고 비난하며 "정상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 올 수 없도록 자신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은
아주 흔히 쓰이는 영리한 방책"이라고 꼬집었다.
오늘날 부자 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가난한 나라의 시장을 장악하고, 가난한 나라에서 경쟁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을 설교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가 했던 대로 하지 말고, 우리가 말하는 대로 하라.'며 '나쁜 사마리아인'처럼 곤경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더 걱정스러운 것은, 요즘에는 아예 자신들이 권장하는 정책이 개발도상국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역사는 완전히 다시 쓰여졌다. 때문에 부유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을 권장하는 것이 역사적 위선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 p. 34~35
나쁜 사마리아인인 부자 나라들은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 무역을 권장하면서, 자신들이 모두 완전한 자유 무역은 아니더라도 그에 가까운
무역을 하고 있다는 걸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여섯 살 먹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보고, 성공한 어른들은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으며, 또한
자립을 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라는 논리를 들이대면서 여섯 살 먹은 그 아이를 일터로 보내라고 충고하는 것과 같다. 성공한 어른들은 성공을 했기
때문에 자립을 한 것이지, 자립을 했기 때문에 성공을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실제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경제적, 정서적으로 든든한 지원을 받아온 사람들이다. 2장에서 논의한 바처럼 부자 나라들은 자국의 생산자들이 준비를
갖추었을 때에만, 그것도 대개는 점진적으로 무역을 자유화했다. 요컨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무역 자유화는 경제 발전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결과이다.
- p. 119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시장과 민주주의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충돌한다.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고, 시장은
'1달러 1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 전자는 개개인이 가진 돈에 관계 없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동일한 비중을 둔다. 후자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 큰 비중을 둔다. 따라서 민주적인 결정은 대개 시장의 논리를 뒤엎는다. 실제로 19세기 자유주의자들은 대부분 민주주의에
반대했는데, 그것은 민주주의는 자유 시장과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들은 민주주의는 가난한 다수가 부유한 소수를 착위하게 될
(누진소득세, 사유재산의 국유화 같은) 정책들을 도입할 수 있게 하고, 그에 따라 부를 창출할 동기를 무너뜨린다고 주장했다.
- p. 265~266
문화에 근거해 경제 발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바로 이런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를 통해 확인된 바에 근거한 사후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초기 시절 경제 발전에 성공한 국가들의 대부분이 신교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신교가 특히 경제 발전에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천주교 문화권인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남부 독일이 급속히 발전하자 신교뿐 아니라
기독교 전체가 '신통한'문화로 취급되었다. 일본이 부자 나라가 되기 전에는 동아시아가 유교 때문에 발전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일본이
번영을 이룩한 뒤에는 중국과 한국의 유교가 개인의 계발을 중시하는 데 반해, 일본의 유교는 협동을 강조하기 때문에 급속한 경제 발전이 가능했다는
주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다 홍콩, 싱카포르, 대만, 한국이 경제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자 유교에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은 잊혀졌다.
유교야말로 근면과 검약, 교육과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경제 발전에 가장 적합한 문화가 되었다. 요즘에는 회교권인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불교권인 태국, 그리고 힌두교권인 인도가 경제적으로 좋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든 문화들이 경제 발전에 얼마나
적합한지 (그리고 이론가들이 어떻게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과시하는 새로운 이론의 출현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 p. 296~297
장하준, <나쁜 사마리아인들>
선진국은 어떻게 선진국이 된 걸까? 우리나라 급속도 성장의 원인은 무엇일까? 자유 무역 · 자유 시장 · 신자유주의가 나쁘다면 왜
나쁘다는 것일까? 저자는 우리가 한 번쯤 궁금해할 만한 의문들의 답을 제시하고 사람들이 잘못 알거나 착각하고 있는 사실들의 '진실'을
밝힌다.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오늘날 선진국은 다른 국가보다 자유 무역· 자유 시장 경제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부자 나라가 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도상국들에게 자국과 반대의 길을 가기를 강요하면서 오히려 똑같은 방법을 다시 쓰지 못하도록 '사다리
걷어차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각 장마다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역사 / 자유 무역 / 외국인 투자 / 민영화와 공기업 / 지적소유권 제도 / IMF와 통화정책 /
정치와 경제발전 / 경제발전과 문화] 에 대한 분석 자료와 적절한 비유를 뒷받침하여 논리적 '까발리기'를 이어나간다. 어렵지 않았다. 일독으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수준이다. 여섯 살 먹은 아이를 일터로 내몬다는 것, 고개가 끄덕여진다.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p. 296~297)에서는 평소에 나도 의문이었던 점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부자가 되기 적합한
문화가 있을까? 그건 인종에 따른 차별 만큼이나 어리석은 얘기다.
전반적으로 글은 차분하며 논리적이고 유기적으로 매끄러웠다. 여러 사람의 조언과 도움이 필수적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읽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