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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감
하니프 쿠레이시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슬픈 밤이다. 나는 집을 떠나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내일 아침, 육 년을 함께 산 그녀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면, 아이들에게 공을 쥐여 주고 공원에 데려다 놓은 후, 나는 여행 가방에 간단히 짐을 싸서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기를 바라며 집을 살짝 빠져나와, 지하철을 타고 빅터네 집으로 갈 작정이다. 얼마나 오래가 될지는 모르지만, 빅터가 친절히 허락한 부엌 옆 작은 방에서 나는 잠을 청하게 되리라.
- p . 7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건 내키지 않는 친밀함의 표시다.
- p. 8
타인의 몸에 손을 얹거나 입술을 얹는다는 것. 그 자체로 얼마나 깊은 개입인지! 누군가를 선택하는 건 인생을 통째로 열어 보는 행위다.
- p. 26
텔레비전 역시 내 유년기 동안은 새로움의 표상이었다. 아버지의 분부대로 까치발을 하고 창가 높이의 안테나를 쥐고 있으면 방 안에 펼쳐지던 그 모든 명멸하는 세계들. 두세 달마다 어김없이 새롭고 빛나는 무언가가 도착했다. 자동차, 냉장고, 세탁기, 전화기까지. 그리고 매번 우리는 그 새로운 것들에 놀라워했다. 적어도 보름 동안은 쓰다듬고 뜯어보았다.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면서, 누구들보다는 앞서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걸로 충분한 거라 우리는 생각했다.
- p. 28~29
자신의 정신을 묵히고, 견딜 수 없는 생각들이 내면에서 폭풍 치다 저절로 숙질 때까지 기다리며, 참을성 있게 폭풍의 파편들을 곱씹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 것이야말로 부러운 정신 상태.
- p. 59
모든 이들이 그런 사랑을 바라는 건 당연하다. 마치 예전에는 그런 사랑을 알았지만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삶을 이어 갈 지고의 가치로 사랑을 찾아 헤매도록 강요받기라도 한 듯 말이다. 사랑 없이는 삶도 속살의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불운한 일이지만, 사랑만큼 매혹적인 건 없다.
사랑이 그늘진 노동이란 걸 나는 안다.
-p. 110
햇살만큼 끔찍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게 달리 또 있을까? 그녀는 침대 끝에 앉아 옷을 입고 있다. 아이들은 침대 위에서 뛰어 대고 있다. 작은아이는 손가락으로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한다. 큰아이는 다른 쪽 귀로 흘러나오는지 궁금해서 내 귀에 사과 주스를 붓는다. 녀석에게는 과학자가 될 소질이 보인다.
- p. 174
하니프 쿠레이시, <친밀감>
겉표지가 시선을 끌어당긴다. 온통 노란색의 배경에 한 남자가 손을 모으고 서 있다. 주름 잡힌 셔츠 위로 니트를 입은 수척한 느낌의 남자. 그는 깎지 않은 수염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로 어느 한 곳를 응시한다. 고독을 뒤집어 쓴 얼굴이지만 공허한 표정은 오히려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다고 대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오른편에는 소설의 제목인 <친밀감>이란 글자가 군더더기 없이 세로로 쓰여있다.
모름지기 소설의 표지란 이 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부분이자 그 자체로도 완벽한 작품.
서점에서 얼쩡거리다가 겉표지에 혹해서 집었는데, '슬픈 밤이다.' 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정신 못 차리고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정작 책을 다 읽고 덮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40대 남자가 아내와 아이들을 둔 채 집을 떠나려 한다. 권태에서 벗어나거나 또는 새로운 사랑을 찾을 목적으로. 담담하면서도 냉소적인 그의 독백으로 이어지는 하룻밤 동안의 이야기다. 영국에서 작가의 실제 이야기라는 논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럴 법 하다. 글은 솔직하고 담담한 어조를 이어나가는데 매우 구체적이다. 내용 자체는 파격인데 글을 참 잘 썼다. 이런 소설이 논란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생각들, 문장들이 결국은 독자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 문장들이 아른거린다. 단문으로 이뤄진 독백체의 글이고 외국 소설임에도 문장에 놀란다. 눈으로 글자를 따라가면서도 감탄할 수밖에 없다. 허, 뭐지 이 사람, 하고. 다시 곱씹고 다시 읽어보게 되고. 절제된 문장의 매력이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나아가고, 머물기를 반복하는 글의 호흡에 읽는 사람마저 곰곰 생각에 빠지게 한다.
애정, 사랑, 또는 친밀감이란 삶에서 얼마만큼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일까, 그속에 순수히 들어앉은 삶의 모습은 그것의 가치만큼 매혹적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