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문장강화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 창비 / 2005년 3월
평점 :
권태(일부)
이상
길 복판에서 6, 7인의 아이들이 놀고 있다. 적발동부(赤髮銅膚)에 반라군(半裸群)이다. 그들의
혼탁한 안색, 흘린 콧물, 두른 베 두렁이, 벗은 웃통만을 가지고는 그들의 성별조차 거의 분간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아가 아니면 남아요 남아가 아니면 여아인, 결국에는 귀여운 5, 6세 내지 7,
8세의 '아이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아이들이 여기 길 한복판을 선택하여 유희하고 있다.
돌멩이를 주워온다. 여기는 사금파리도 벽돌조각도 없다. 이 빠진 그릇을 여기 사람들은 내버리지
않는다.
그러고는 풀을 뜯어온다. 풀─이처럼 평범한 것이 또 있을까. 그들에게 있어서는 초록빛의 물건이란
어떤 것이고 간에 다시없이 심심한 것이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곡식을 뜯는 것도 금제(禁制)니까 풀밖에 없다.
돌멩이로 풀을 짓찧는다. 푸르스레한 물이 돌에 염색된다. 그러면 그 돌과 그 풀은 팽개치고 또 다른
풀과 다른 돌멩이를 가져다가 똑같은 짓을 반복한다. 한 십 분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이렇게 놀아본다.
십 분 만이면 권태가 온다. 풀도 싱겁고 돌도 싱겁다. 그러면 그 외에 무엇이 있나?
없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선다. 질서도 없고 충동의 재료도 없다. 다만 그저 앉았기 싫으니까 이번에는
일어서 보았을 뿐이다.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하늘을 향하여 쳐든다. 그리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본다. 그러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들 겅충겅충 뛴다. 그러면서 그 비명을 겸한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그만 눈물이 났다. 여북하면 저렇게 놀까. 이들은 놀 줄조차 모른다.
어버이들은 너무 가난해서 이들 귀여운 애기들에게 장난감을 사다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뻗치고 그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뛰는 그들의 유희가 내 눈엔 암만해도
유희같이 생각되지 않는다. 하늘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 산은 벌판은 왜 저렇게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푸르냐는, 조물주에게
대한 저주의 비명이 아니고 무엇이랴.
아이들은 짖을 줄조차 모르는 개들과 놀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이 찾느라고 눈이 벌건 닭들과 놀
수도 없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너무나 바쁘다. 언니 오빠조차 바쁘다. 역시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노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놀아야 하나. 그들에게는 장난감 하나가 없는 그들에게는 영영 엄두가 나서지를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듯 불행하다.
그 짓도 5분이다. 그 이상 더 길게 이 짓을 하자면 그들은 피로할 것이다. 순진한 그들이 무슨
까닭에 피로해야 되나? 그들은 우선 싱거워서 그 짓을 그만둔다.
그들은 도로 나란히 앉는다. 앉아서 소리가 없다. 무엇을 하나. 무슨 종류의 유희인지 유희는 유희인
모양인데─이 권태의 왜소인간들은 또 무슨 기상천외의 유희를 발명했다.
5분 후에 그들은 비키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선다. 제각각 대변을 한 무더기씩 누어놓았다. 아 이것도
역시 그들의 유희였다. 속수무책의 그들의 최후의 창작유희였다. 그러나 그중 한 아이가 영 일어나지를 않는다. 그는 대변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는 이번 유희의 못난 낙오자에 틀림없다. 분명히 다른 아이들 눈에 조소의 빛이 보인다. 아 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
-
'퇴고의 실제' 부분
(1) 용어를 보자
(2) 모순인 곳과 오해될 데가 없나 보자
(3) 인상이 선명한가, 어지럽게 하는 데가 없나 보자
(4) 될 수 있는 대로 줄이자
(5) 처음의 것이 있나? 없나?
여러 번 고쳤다. 글은 물론 나아졌다. 그러나 글만 자꾸 고쳐나가다가는 글보다 귀한 것을 잃어버리는 수가 있다. '처음의 것'이란
처음의 글이 아니다. '처음의 생각'과 '처음의 신선함'을 가리킴이다. 글 만드는 데만 끌려나오다가 '처음의 생각'과 '처음의 싱싱함'을
이지러뜨렸다면 그것은 도리어 실패다. 초등학생들의 글이 문법적으로는 서툴러도 차라리 솔직한 힘을 갖는 것은, 오직 '처음의 생각'대로,
'신선함' 그대로 써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백번이라도 고치되 끝까지 구기지 말고 지녀나가야 할 것은 이 '처음의 생각'과 '처음의
신선함'이다.
이 '처음의 것'들을 이지러뜨릴 염려가 없게 하기 위해서는
① 그 글을 처음 썼을 때의 생각과 기분을 자기 자신에게 선명히 기억시킬 것.
② 중얼거리며 고치지 말 것. 자기도 모르게 자꾸 소리를 내며 읽어보기가 쉬운데, 그렇게 하다가는 뜻에는 날카롭지 못하고 음조에만
끌리어 개념적인 수사에 빠지기 쉽다.
③ 앉은자리에서 자꾸 고치지 말 것. 글도 실처럼 급할수록 엉킨다. 피곤해지는 머리로는 '신선함'을 살려나가지 못한다. 여러 날만에,
남의 글처럼 낯설어진 때에 고치는 것이 이상적이다.
(6) 이 표현에 만족할 수 있나? 없나?
-
자연스러운 문체를 볼 때는 누구나 놀라고 마음이 끌린다. 왜 그러냐하면 그들은 일개의 작가를 보려
기대했다가 하나의 인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작가냐? 인간이냐? 인간이 먼저요 높은 것도 인간이다. 비록 작가일지라도, 작가로서의 문장보다 인간으로서의 문장을 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진실한 문장은 없을 것이다.
이태준, <문장강화(文章講話)>
글쓰기 교본의 고전이다. 이 글이 세상으로 나온 지 반백 년도 넘었지만 간결한 설명과 문장쓰기를 위한 실질적 조언은 큰 도움이 된다.
책에 실린 예문은 오랜 글들이었기에 중간중간 구미가 당기는 글을 발견할 때마다 작자가 '이상'이었던 점이 흥미로웠다.
이 책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 퇴고를 강의하는 부분은 필독할 내용이다. 어쩌면 그리도 잘 아는지. 내가 여태껏 수십 번 자빠졌던 함정과
나도 모르게 저지른 실수들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준다. 엉크러져 있던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 들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