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 - 제7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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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말수가 적은 아이였기 때문에 자세히 대답하지 못하고 벙긋 웃기만 했다. 영주를 업고 있으면 그 아이가 꼼지락거리는 작은 파문이 내 등의 울퉁불퉁한 갈비뼈와 척추에 그대로 전해져왔다. 동생이라는 존재는 꼬물거리기만 해도 신기하고 흐뭇했다. 영주는 내 등에 업혀서, 잠이 오면 조그맣게 낑낑 소리를 내며 하품을 하다가,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다가, 내 어깨에 쿵쿵 소리가 나도록 얼굴을 처박다가 마침내 노곤히 늘어져 잠이 들었다. 그런 느낌들을 설명하기엔 내 말주변이 한참 모자랐다.
- p. 22

비껴 들어오는 오후 햇빛에 선생님의 볼에 있는 솜털이 뽀얗게 비쳐 보였다. 우유와 방금 내린 눈송이, 푸르스름한 오이의 속살에 꿀을 더하면 선생님의 피부 빛깔이었다. 반투명한 피부 밑을 흐르는 푸른 혈관은 얕은 바닷속의 싱싱한 해초 같았다. 박 선생님의 손은 손가락 뿌리와 끝의 두께가 거의 비슷하게 가늘어서 우하한 느낌을 주었고 작은 보석인지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박혀 있는 예쁜 반지를 끼고 있었다. 선생님이 목덜미에 두른 하늘하늘한 스카프와 책상 옆에 맵시 있게 놓은 바바리 코트와 작은 리본이 몇 개 달려 있는 머리띠를 쳐다보면서 나는 선생님이 말을 걸어줄 때까지 기다렸다.

- p. 94

  나는 방바닥에 누워 계산을 수정했다. 엄마는 내가 박 선생님과 결혼하려면 내가 태어나서 오늘날까지 살아온 날들보다 더 많은 날들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맙소사, 오늘은 정말 거지 같은 날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거지 같은 날은 없었던 것 같았다. 차라리 아버지에게 두들겨맞거나 할머니에게 욕을 먹는 날이 훨씬 견딜만 했다. 오늘만 거지 같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계속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거지 같은 날들이 계속되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 사람들은 이런 걸 가지고 '절망' 이라고 부르는 게 아닐까.
- p. 176

삼촌이 내가 걸터앉아 있는 돌담 밑에 털썩 주저앉았다. 돌담에 등을 기대고 두 어깨를 휘휘 돌리며 근육을 풀고 있는 삼촌은 나무 등걸에 등을 비비는 멧돼지같이 우악스러워 보이지만, 내 표정에 깃든 고민의 흔적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걸 보니 이슬이 내려앉아야 눈에 보이는 투명한 비단실을 잣는 거미처럼 섬세한 면도 있는 모양이었다.
- p .196

  "아빠가 집에 없으면 좋겠어. 우리끼리도 재미있게 살 수 있잖아."
  저런 영주야, 그런 생각까지. 아버지는 너를 제일 좋아하시는데. 아마 아버지가 진심으로 잘 보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너 하나뿐일 텐데. 나는 아버지의 필요성을 곰곰 생각했다.
  "아버지가 없으면 안 돼. 아버지는 돈을 벌어오시잖아."
- p. 261

  영주는 우리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애정 표현이 자유롭던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아이가 벌리는 팔과 그 아이가 내미는 입술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 아이를 통하지 않고는 웃지도, 이야기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게 길들여져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마치 신호등이 고장난 네 갈래 길에 각각 서 있는 당황한 사람들처럼, 서로 말을 걸거나 상대방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로 바라만 보게 되었다. 우리의 소통이 엉키지 않도록 요술 같은 방법으로 누군가는 기다리게 하고, 누군가는 직진하게 하고, 누군가는 좌회전하도록 지도하던 우리의 푸른 신호등은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우리는 신호등 없이는 교차로를 지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 p. 273~274

심윤경, <나의 아름다운 정원>


  이미 느꼈던 확신의 재확인이다. 심윤경 작가는 소설을 쓰는 데에 천부적이다. 아니 글을 이렇게 중독성 있게 쓰나. 지루한 초반을 지나가야 하거나 일정 부분을 넘어야 읽기에 속도가 붙는 여타의 소설과 다르게 초반부터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여기까지만 읽고 다음에 읽어야지' 하는 독자의 편의 따위 안중에 없다는 듯이. 아니, 아예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소설을 쓰기로 작정하고 쓰는 것 같다. 문장은 매우 유려하지만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인물들은 때론 독하고 극단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독자가 거기에 수긍하지 못할 만큼 어설프지도 않다. 물 흐르듯 흐르는 이야기 속에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지만 그걸 통해 비춰 보일 수 있는 것들에도 작가는 소홀하지 않다. '따라와, 그럼 알게 될 거야' 그녀는 수십 번 다녔던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처럼 독자를 이끌고 다닌다. 괜히 딴청 피우거나 옆길로 새지도 않는다. 자기가 앞장서는 길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작가의 자신감이자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인왕산 아래 동네에서 자란 초등학교 3학년인 한동구의 가족을 배경으로 이뤄진다. 그 시기는 정말 한국사에서 다사다난했던 때가 아닐 수 없을 것 같다. 유신독재 체제가 박정희의 사망으로 막을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의 탱크와 장갑차가 광화문 앞에 들어선다. 계엄령이 전국을 뒤덮고 80년 봄,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은 당시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조차 못했다. 세월이 지난 지금 역사를 뒤돌아볼 수 있는 처지인 우리는 '아, 이게 그 사건이구나' 하고 알지만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다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동구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와 더불어 줄거리의 핵심이 되는 동구네 가족의 모습이 열 살짜리 아이의 눈으로 생생하게 그려진다.

  김애란의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었을 때는 아름이라는 아이의 모습과 말이 너무 현실적이지 않아서 거부감을 느꼈다. 재밌게 읽었다는 사람도 많고 곧 영화로도 나오겠지만, 아름이라는 아이의 말이 작가의 입을 대신하는 듯하다는 느낌, 또는 아름이는 수많은 김애란의 소설 속 아이의 종합본이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들었을 때 도저히 몰입할 수가 없었다. 반면 이 소설의 한동구라는 소년은 너무 흥미롭고 정말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몰입됐다. 그건 그만큼 작가가 거리조절을 잘했다는 것. 소년뿐만 아니라 이 작가가 형상화한 모든 인물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할머니, 엄마, 아빠, 동생 영주, 담임 여선생님까지 내가 원래 알고 있던 사람들인 듯도 하고 몰랐으나 이제는 알게 된 사람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작가가 부리는 언어는 어떤 마력이 담긴 물레에서 뽑아내는 실처럼 묘한 힘을 담고 있다. 그 실로 만든 올가미는 섬세하고 은근하게 파고들면서 가장 강하게 옭아매야 할 때를 놓치지 않고 허투 없이 잡아챈다. 그렇게 해서 드러내는 풍경이란 실상 우리가 말하는 일상의 생활과 다르지 않은데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은 구체성과 팽팽한 인물의 갈등이 전혀 평범하지 않은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 한 마디로 범주화해버리는 건 이야기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다. 이처럼 작가가 촘촘하게 엮은 삶의 그물을 스쳐지나지 않고 읽을 수 있어 감사하다. 조만간 다른 작품도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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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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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세요, 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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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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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전파상을 하고 있었다. 전파상이라고 해봐야 온갖 부품과 전선들이 창자처럼 엉켜 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전파상 앞에는 성치 않은 가전제품들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조서 작성을 기다리는 파출소 안 취객들처럼 모두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구부정히 앉아, 잘 닦지 않은 안경알 너머로 기기들을 살폈다. 아버지의 눈빛은 뭔가 한가지 일을 오랫동안 해온 사람의 얼굴답게 건성인듯 세심했다. 나는 아버지가 내 충치를 보자 했을 때 그와 비슷한 시선을 느낀 적이 있다. 아버지는 평생 못쓰게 된 물건들을 고치느라 시력과 항문 그리고 허리가 망가지셨다. 아버지가 고치는 물건도, 그것의 고장도 보잘것없는 것이었기에 아버지는 우리가 큰사람이 되길 바랐다. 우리가 비디오 헤드에 걸린 불법 테이프 때문에 끙끙대고, 그걸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 가게에 갖고 가지 못해, 옆동네까지 이고 갔던 애들이란 걸 다 알고 계셨으면서도 말이다. 

- 스카이콩콩 p. 63~64 

  아버지는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깨진 화면은 고칠 수도 없다."
  나는 '내 맘은요! 내 가슴은요, 아버지!'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전기밥통을 고친 후 고쳐주마'라고 답하리란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훌쩍이고 있는 내 얼굴을 흘깃, 한번 쳐다보더니, 점퍼를 집고 어디론가 후닥닥 사라지셨다. 형은 아버지가 나간 뒤에도 안방에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 스카이콩콩 p. 70


  세상엔 이유를 알고 나면 너무 시시해져버려 오히려 영원히 알지 않는 편이 나은 경우도 있는 듯했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들은 이유가 있다. 그리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것들은 반드시 할말이 있는 것이다.
- 사랑의 인사 p. 144~145


  아버지가 용기내어 말한다.
  "괜찮다면 제가 어떻게 좀 해볼까요."
  "어떻게요?"
  아버지가 그녀 앞에 무릎꿇는다. 그러고는 한손으로 그녀의 팔을 가만히 들어올린다. 사람들은 기대와 의혹에 싸인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버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손에 쥐고 있던 감자를 그녀의 팔에 비비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표정이 난감하다. 감자 부스러기들이 지우개 가루처럼 파슬파슬 떨어져나온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정성스럽게 여자의 팔을 마싸지한다. 잠시 후 여자가 어머, 하고 외친다. 두드러기가 가라앉은 것이다.
  "어머."
  아버지가 말했다.
  "그게 네 엄마가 내게 건넨 첫마디였지."
  자신감을 얻은 아버지는 다소 과감하게, 마싸지의 범위를 넓혀간다. 그러나 손끝은 여전히 바들거린다. 아버지의 손이 지나는 곳마다 여자의 가려움과 붓기는 사라진다. 여자는 계속 감탄하며 외쳐댄다. 어머, 어머.

  "졸리니?"
  "아니에요. 아버지, 계속하세요."
  "첫날밤에도 네 엄마는."
  아버지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어머, 어머, 하고 미친 듯이 외쳤지."
  나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물었다.
  "뭐라고요?"
  아버지가 면도칼을 바닥에 떨어뜨리며 말했다.
  "아니다."
-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p. 174~175


  나는 문학이 나의 신앙이 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소설을 쓰는 데 배움이나 경험이 반드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 안의 어떤 정직. 그런 것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은 제가 당신에게 매우 딱딱한 얼굴로 보내는 첫 미소입니다.
- 작가의 말 p. 267~268


김애란, <달려라, 아비>


  '달려라 아비'는 소설적인 사건을 어떻게 이야기 속에 엮어내는지 능청스러움이라고 할까, 소설적 상상력일까? 그런 부분이 참 좋았다. '노크하지 않는 집'은 다 읽고 필사까지 해봤다. 소설 한 편을 짜기 위해 이야기를 구성하고 배치하는 방식을 배우는 점에서 많은 도움이 됐다. 그나저나 80년생 작가인데 2002년에 작품을 발표, 스물 넷에 이런 소설로 등단하다니. 소설 쓰기에 천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게 어린 나이에 재능이 찾아오기도 하는구나.

  그녀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본다. 소설 속에서 느껴진다. 아름답지 않은 세상이건만 아름답게 바라보는 방식을 보여준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정직, 솔직함이 분명 그녀의 글 속에 꼭꼭 담겨있다. 어렵지 않은 글, 쥐어짜내지 않은 이야기인듯 해서 더욱 좋았다. 그 이야기들이 무심한 듯 섬세한 목소리에 담겨 귓가에 울린다. 

  작가는 이 한 번의 미소를 위해 얼마나 오랜 날을 찌푸리고 있었을까. 하지만 또 그렇기에 많은 독자가 맨 끝장을 덮는 순간 그녀의 첫인사에 답하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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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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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삶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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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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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사람을 만나거든 잘 살펴봐. 그가 헤어질 때 정말 좋게 헤어질 사람인지를 말이야. 헤어짐을 예의 바르고 아쉽게 만들고 영원히 좋은 사람으로 기억나며 그 사람을 알았던 것이 내 인생에 분명 하나의 행운이었다고 생각될 그런 사람. 설사 둘이 어찌어찌한 일에 연루되어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든, 서로에게 권태로워져 이별을 하든, 마음이 바뀌어서 이별을 하든, 그럴 때 정말 잘 헤어져 줄 사람인지 말이야.

- p. 13


  비록 부질없고 싸구려 연대감이지만 고독을 그것과 바꾸고 싶을 때도 있고, 형편없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도 좋으니 겉치레라도 그들과 함께 고독을 나누고 싶을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시간들이 고독이 자라나는 때일지도 모릅니다. 고독이 자라나는 것은 소년이 성장하듯 고통스러우며, 봄이 시작되듯이 슬프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이것 하나뿐입니다. 고독, 크고도 내적인 고독뿐입니다.
- p. 21~22


  미국에서 대통령은 4년간 집권하고 언론은 영원히 통치한다.
  민주주의(democracy)란 단지 인민을 위하여, 인민에 의해서, 인민을 커다란 몽둥이로 두드리는 것을 뜻할 뿐인 것이다.
  사랑이란 언제나 자신을 기만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타인을 기만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로맨스라는 것이다.
  연애 감정이란 서로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다.
  올바른 결혼의 기초는 상호의 오해에 있다.
  유행이란 하나의 추악함의 형태이며, 대단히 사람을 피곤하게 하므로 석 달에 한 번은 바꿀 필요가 있다.
  의무란 사람들이 타인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인생은 모두 다음 두 가지로 성립된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다. 할 수 있지만 하고 싶지 않다.
  인생이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진지한 표정으로 거론할 수 있는 그런 하찮은 것이 아니다.
- p. 75~76


  오늘 아침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 모욕에 오늘 하루를 내줄 것인가, 생명이 약동하는 이 오월의 아름다움에 네 마음을 내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너 자신이지. 그것은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너의 선택이라는 거야.
- p. 110


  참 이상하지 위녕, 이상하게 똑같은 일 년인데 어떤 특별한 날이 있다. 일 년에 하루뿐인 어떤 날. 엄마는 며칠 전 그날을 느꼈단다. 너는 어땠니? 으음, 말하자면 여름이 가을에게 한 갈피 자리를 내주는 날, 무성하게 피었던 벚꽃들이 바람도 없는데 일제히 떨어져 내리는 그날, 어렵게라도 나무에 붙어 있던 마른 이파리들이 갑자기 일제히 손을 놓고 거리를 뒤덮는 날 그리고 엄마가 이야기하는 며칠 전 같은 날. 말하자면 습하고 무더웠던 공기 속으로 마르고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스며드는 날. 그날은 실은 일 년에 단 하루뿐이라는 걸 너는 아니? 엄마는 며칠 전 어느 깊은 밤, 길거리에 서서 이 바람을 느꼈다. 마침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울고 있더구나.
- p. 172~173


  위녕, 언젠가 어두운 모퉁이를 돌며, 앞날이 캄캄하다고 느낄 때, 세상의 모든 문들이 네 앞에서만 셔터를 내리고 있다고 느껴질 때, 모두 지정된 좌석표를 들고 있는데 너 혼자 임시 대기자 줄에 서 있다고 느껴질 때, 언뜻 네가 보았던 모든 희망과 믿음이 실은 환영이 아니었나 의심될 때, 너의 어린 시절의 운동회 날을 생각해. 그때 목이 터져라 너를 부르고 있었던 엄마의 목소리를. 네 귀에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엄마가 아니라면, 신 혹은 우주 혹은 절대자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겠지.
- p. 255

공지영,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책은 공지영이 딸에게 보내는 편지글의 형식으로 그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삶의 메시지들을 담았다. 딸의 엄마로서 잔소리나 충고를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동시에 '책' 이야기를 한다. 편지마다 소개되는 책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아마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얀 이야기-얀과 카와카마스'는 꼭 읽어보고 싶다.) 

  살아낸다는 것, 인생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는 일을 반복하면서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답은 아직도 '모르겠다'는 것뿐. 그럼에도 힘이 되어주는, 아니 힘내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앞에 펼쳐진 오르막은 걸어볼 만한 평지로 느껴진다. 막연한 미지는 아닌 것이다. 아직 지나가지 않은 수많은 순간들. 아직 해 볼 만한 것들로 세상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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