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대한 개츠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평점 :
지금보다 어리고 쉽게 상처받던 시절 아버지는 나에게 충고를 한마디 해 주셨는데, 나는 아직도 그 충고를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다.
"누구든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나 이 점을 명심하여라."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놓여 있지는 않다는 것을 말이다."
- p. 15 (처음)
나는 밖으로 나가 부드러운 황혼에 휩싸인 동쪽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고 싶었지만, 나가려고 할 때마다 귀에 거슬리는 자극적인 이야기가
밧줄처럼 내 발목을 잡아당겨 의자에 앉아 버리곤 했다. 그런데도 도시의 하늘 위로 줄지어 있는 노란 창문들은 조금씩 어둠이 깔리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보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비밀을 속삭여 주고 있음에 틀림없었으리라. 나 또한 위쪽을 올려다보며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만화경(萬華鏡)처럼 변화무쌍한 삶에 매혹당하기도 하고 혐오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나는 집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집 밖에도 있는
기분이었다.
- p. 60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폭풍우가 거칠게 몰아치고 있었다. 밤에 잠을 잘 때면 너무나 기괴하고 환상적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시계가 세면대 위에서 째깍거리고 촉촉한 달빛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옷을 적시는 동안,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우주가 그의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피어났다. 매일 밤 그는 졸음이 몰려와 생생한 장면을 막각의 포옹으로 감쌀 때까지 새로운 환상을 계속 늘려
나갔다. 얼마 동안 이런 환상은 그의 상상력에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현실이 꿈처럼 비현실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충분한 암시요, 이 세상의
주춧돌이 요정의 날개 위에도 안전하게 세워질 수 있다는 약속이었던 것이다.
- p. 144
"나 같으면 그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을 겁니다. 과거는 반복할 수 없지 않습니까." 내가 불쑥 말했다.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요? 아뇨, 반복할 수 있고말고요!"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그는 마치 과거가 바로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자기 집 앞 그늘진 구석에 숨어 있기라도 하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난 모든 것을 옛날과 똑같이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그녀도 알게 될 겁니다." 그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p. 159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뉴욕 외곽의 웨스트에그로 이사오면서 삶을 새롭게 꾸려나가려 하는 닉은 그곳에서 개츠비라는 사람을 만난다. 매일 밤
호화파티를 벌이는 이웃 저택의 개츠비에 대해서는 온갖 루머가 무성하지만 굉장한 부자라는 것은 분명하다. 곧 그와 친구가 된 닉의 시선으로 주변
인물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관찰자 시점을 택한 것이 딱이다. 주인공은 닉이지만 그는 개츠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톰과 데이지 그리고 잠깐 연애를
하기도 하는 조던 베이커가 대표하는 상류층의 모습과 당시의 미국 사회를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 방법이 아니었다면 개츠비를 이만큼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위대한'이라는 수식어가 개츠비에게 맞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작가가 바라보는 개츠비는 무엇인지. 다른
작중인물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물질만능주의에 젖은 사람은 아닌지. 무언가에 홀려 공허하고 허황된 세계를 꿈꾸는 인물은 아닌지.
다른 사람들이 화려한 불빛에 달려드는 부나비같은 삶을 산다면 개츠비는 어슴프레한 초록빛을 손에 쥐려 하는
사람이었다. 밝게 빛나는 밤하늘이 어떤 비밀을 품고 있기라도 한다는 듯이 손을 뻗어 꿈을 꾸는 이상주의자였다. 두 발을 딛고 선 현실의 소란함과
질펀함마저 고귀한 목적으로 귀결시킬 줄 아는 인물이었다. 흥청망청 벌이는 매일 밤의 파티마저도 자신의 사랑을 위한 것이었으니. 특별한 낭만을
가진 사람임에 틀림없다. 작가는 그런 개츠비를 알맹이 없이 빈껍데기 삶을 사는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보인다.
작가는 인물 간의 갈등으로만 진행될 것 같던 흐름을 한 사건을 통해 개츠비의 파국이라는 형태로 이야기를
틀어놓는다. 자동차 사고는 미묘한 관계 · 불륜과 애정 · 이상과 현실의 대립 따위가 '뻥'하고 터지는 순간이다. 모든 것은 우연의
일치처럼 그러나 운명대로 흘러간다. 그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이야기를 구성한 점도 인상적이다.
개츠비라는 인물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을 이루고 또다시 멀리 반짝이는 사랑을 꿈꾸는 모습이.
'위대한' 이라는 표현은 고작 결과론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쓰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결말도 절망적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열망하는 것은 언젠가 손에 쥘 수 있다. 그것이 불완전하거나 미완성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