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한 개비의 시간 - 제3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문진영 지음 / 창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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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학기 때와 마찬가지로 학교 공부는 여전히 내게 아무런 흥미도, 재미도, 의미도 없었다. 수업시간이면 멍하니 낙서를 하거나, 아니면 아예 땡땡이를 치고 캠퍼스를 빠져나와 이어폰을 꽂은 채 정신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그러면서 내가 얻은 결론은 간단했다. 그것은 '나는 내가 어디로 가길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혹은 내가 정말 어딘가로 가길 원하는지조차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캠퍼스를 분주히 걷고 있는 이들은 모두가 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질문조차 가져본 적이 없는 것처럼 깨끗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동기들이나 선후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뿐더러, 그들은 그들의 궤도로 바쁘게 달리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속에 끼어들기가 두려웠다.

 

-

 

  하지만 한 인간에 대한 마음이 한 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는 데에 나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면, 그 자격은 함께한 기억의 부피보다 시간에 비례하는 게 왠지 더 공평하다고 그때의 나는 여겼다. 나는 겨우 스무살이었던 것이다.

  스무살의 내겐 논리도 없고, 상식도 없었다. 어제 내가 믿고 싶었던 것들이 오늘의 내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스물한살의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지난 일년간 배운 것이라곤 시간은 일정한 속도로 흐르지 않으며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도 않는다는 사실, 그 정도였다.

 

-

 

  옥탑 아래의 사람들은 모두 분주했다. 그들은 지금 이 시각에도 쉼없이 무엇인가가 되어가고 있었고, 아니면 이미 그 무엇이었다. 혹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그 믿음을 존경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또한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애초에 나는 그것을 꿈꾸어서는 안되었다. 나는 그저 점점 더 내가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나는 더이상 나의 성장에 저항할 힘이 없다. 나는 자라는 데 지쳤다.

 

문진영, <담배 한 개비의 시간>

 

 

  쉬운 글 또는 쉬운 소설을 쓰는 게 늘 어렵다. 덜어내고 간단하게 다듬는 과정이 그리 즐겁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작 부분만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햇볕에 잘 말린 이불을 쓰다듬고 싶은 것처럼 자꾸 글을 돌아보게 된다. 쉬운 글의 매력이겠지. 심심할 정도로 간단한 이야기지만 그 안에 실린 공감의 문장들이란. 아, 난 언제쯤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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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개들의 왕 - 제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12
마윤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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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할머니는 무슨 죄를 지었어?"

  "할머니?"

  "아들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한 할머니가 왜 버림을 받아야 하고, 왜 저렇게 참혹한 일을 당해야 하는 거지? 대답해 봐! 이 멍청한 자식아!"

  동치의 멱살을 잡고 있던 홍두의 손이 스르르 풀어졌다. 홍두가 자신의 뭉개진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이건 나쁜 짓이야……."

  "왜 우리한테만 그런 벌을 주는 거야!"

  동치는 아무리 두들겨 맞아도,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녀석이었다. 그런 동치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예배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우린 아직 죄를 짓지도, 지을 시간도 없었단 말이야."

 

마윤제, <검은개들의 왕>

 

  검은개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누런 이빨을 박아넣을 듯한 광기 어린 눈빛. 보름달 훤한 밤에 갈가리 찢겨지는 일만이 남은 날의 운명인 듯한 예감. 더욱 불안한 것은 이 괴물이 튀어나온 갈대밭을 건너다보며 과연 '이 녀석이 전부일까?' 하고 드는 생각. 이런 공포를 마주하는 법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함께 굳어있는 녀석들을 보며 깨닫는다. '꿈틀'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이런 상황에 처한 게 우리 탓일까마는 이건 처음이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거라는 것은 안다. 뛰어야 한다. 이 공포를 깨부숴야 한다. 같이 뛸 녀석들이 있다. 어쨌거나 왕은 황무지에도, 저수지 농장에도, 역 광장에도, 식육점에도 있었다. 다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그때는 우리가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대박이다. 이상한 힘을 가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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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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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게 몸이 있단 사실을 깨닫는 데 생애 대부분을 보냈다. 혓바늘이 돋은 순간만큼 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때도 없는 것처럼, 각 기관들을 아주 세부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 …… 나는 건강에 무지한 건강, 청춘에 무지한 청춘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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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그땐 그냥 짐작이었지. 나이란 건 말이다, 진짜 한번 제대로 먹어봐야 느껴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거 같아. 내 나이쯤 살다보면…… 음, 세월이 내 몸에서 기름기 쪽 빼가고 겨우 한줌, 진짜 요만큼, 깨달음이라는 걸 주는데 말이다, 그게 또 대단한 게 아니에요. 가만 봄 내가 이미 한번 들어봤거나 익히 알던 말들이고,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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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지 누군가 자신에게 진심을 털어놓는단 사실만으로 자신이 귀한 사람처럼 느껴지던 때였다. 비밀과 거짓말, 유혹과 딴청, 진담 혹은 우스갯소리가 얼마간 이어지던 시기. 작게 웃고, 공감하고, 귀 기울이던 나날. 하지만 연인들이 차려놓은 대화의 식탁에 꼭 밀담만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거기에는 오히려 둘만의 밀어를 보호하기 위한, 무수한 딴 얘기와 시치미가 필요했다. 시시껄렁한 얘기도 좋고, 범박한 소재라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그 말들을 통해 두 사람이 뭔가 축조해나가고 있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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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천진한 표정으로 내숭을 떨며 아버지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세상에! 저 동공 좀 봐……'
  도발을 모르는 도발. 혹은 도발을 약간 아는 도발. 활짝 열린 어머니의 동공 속엔 분명 그런 것이 있었다.……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조로증을 앓는 열일곱 소년과 그 나이 즈음에 그 소년을 가졌던 부모의 이야기이다.
 
  내겐 열일곱 소년의 사건들보단 중간중간 나오는 부모의 오래전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오랜 앨범 속 사진처럼 알고 있던 것들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듯한 느낌이. 여태 무지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늙어버린 우리 부모님에게도 똑같은 같은 청춘이 있었다는 것을. 

  소설 속 문장은 해풍에 오래 말린 생선처럼 간결했다. 글을 쉽고 재치있게 잘 쓴다. 남자 주인공에 김애란이 더러 묻어나오는 점을 제외하면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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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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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익숙한 주제의 철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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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 출간 50주년 기념판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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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두 사람이 친숙해질수록 친밀감과 기적적인 면은 점점 줄어들어서, 마침내 적대감, 실망감, 상호간의 권태가 생기며 최초의 흥분의 잔재마저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들은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한다. 사실상 그들은 강렬한 열중, 곧 서로 '미쳐 버리는' 것을 사랑의 열도의 증거로 생각하지만, 이것은 기껏해야 그들이 서로 만나기 전에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입증할 뿐이다.

  이러한 태도 ─ 사랑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는 태도 ─ 는 반대의 경우에 대한 압도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일반적 관념으로서 지속되고 있다. 사랑처럼 엄청난 희망과 기대 속에서 시작되었다가 반드시 실패로 끝나고 마는 활동이나 사업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만일 이것이 다른 활동의 경우라면 사람들은 열심히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려고 하고 개선의 방법을 찾아내려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이 활동을 포기할 것이다. 사랑의 경우, 포기는 불가능하므로,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적절한 방법은 오지 하나뿐인 것 같다. 곧 실패의 원인을 가려내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이 아저씨 친절하다. 다시 읽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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