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전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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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해 세계 각국마다 치명적인 경제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유류값이 폭등하더니, 지금은 비닐봉지 대란으로 시끌벅적하네요. 경제가 계속 타격을 입다 보면 일상이 무너지는 것도 금방이겠다 싶습니다. 저도 마침 종량제 봉투가 떨어져서 집 앞 슈퍼에 갔는데, 1인당 2장씩만 구매가 가능하다네요. 그마저도 언제 품절될지 모른다 하고요. 이제껏 비상시에 전기나 수도가 끊기는 상상해 봤지, 고작 봉투 따위가 없다 해서 이리도 당황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얼마나 더 많은 공급이 끊어지고 우리 삶이 불편해질까요.


중동 쪽 전쟁이 제3차 대전으로 넘어가냐 마느냐 하는 판국이다 보니, 아무래도 전쟁문학을 좀 읽어줘야겠다 싶어서 고른 게 <휴전>입니다. 우루과이 문학도 처음이지만 이거 전쟁문학이 아니더라고요? 본 제목은 불신자인 주인공과 신의 ‘협정‘을 의미합니다. 주 내용은 아내와 사별 후 세 자녀를 홀로 키운 중년 사내의 공허한 나날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왜 이런 낙엽지는 쓸쓸한 서사가 좋은 걸까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긴 했나 봅니다. 이런 유의 작품들은 미망인보다는 홀아비의 얘기가 몰입감이나 전달력 면에서 훨씬 뛰어나요. 제가 남성인 이유도 있겠지만, 유대관계에 서툰 남정네들은 한번 무너지면 여성들만큼 일상으로의 회복이 어렵단 말입니다. 게다가 여성호르몬의 증가로 자꾸 감상적이게 되거든요. 하지만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체면치레 때문에 억지로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거지를 짜내야만 해요. 이게 참 남성들을 미치게 만드는 겁니다. 그 같은 고뇌와 애수가 여성의 서사보다는 좀 더 호소력을 가지는 게 아닐까 싶고요.


주인공은 저랑 성향이 꽤 비슷합니다. 사람 구실은 하되 성공, 출세, 야망심 따위에는 흥미가 없죠. 달과 6펜스의 사이를 오갔던 한 저자의 약력만 봐도 알만한데요. 가만 보면 사업가 기질이 없는 사람들만 문학을 쓰는 것도 같습니다. 그도 그럴게, 문학은 사람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찐 문학들은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한가득 담아냅니다. 그게 정상인데도 어떤 독자들은 그런 인물과 저자를 욕하고 비난하기 바쁘더라고요. 그건 문학을 대하는 자세도 아닐뿐더러 본인의 수준 낮음을 드러내는 꼴이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어른이란, 타인의 가치관에 찬성할 순 없지만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말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하여 눈에 거슬리는 모든 상황과 감정들을 개인의 편협한 사고와 잣대로 찍어 누를 필요는 없겠죠. 그토록 진보를 외치는 한국에서 유독 문학에만 보수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하는 현상이 안타깝습니다.


얘기가 좀 샜네요. 곧 오십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다 자란 세 남매와 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은퇴를 준비 중인 부장님이고요. 무엇보다 일찍 사별한 아내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번에 입사한 여직원 중 한 명을 좋아하게 됐지 뭡니까. 딸뻘인 애한테 이 무슨 추태냐며 눈살 찌푸릴 독자들의 모습이 눈에 훤한데, 앞서 얘기했듯이 내 기준이 꼭 정답은 아니며, 그런 잣대로는 판에 박힌 작품밖에 나올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합시다요. 아무튼 주제 파악 못하고 추파를 날려대는 늙다리들과 달리 주인공은 사랑 앞에서 본인의 처지를 고려해가며 그녀에게 접근하였고, 다행히 그녀도 그의 진심을 알고 받아주게 됩니다. 어찌나 기뻤던지, 평생 놓지 못했던 아내를 이제서야 보내줄 수 있게 되었죠. 어떠신가요? 어쩜 자식들도 있는데 딴 여자를,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여자랑 놀아나는 주인공이 역겹게 느껴지시나요? 이런 건 한국인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니까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가야죠. 누가 보더라도 그는 애도할 만큼 했습니다. 자식들 또한 이 낯 뜨겁고 민망스런 관계를 이해하고 또 응원해 줬습니다. 심지어 아빠의 행복을 바라기까지 해주었고요. 그는 아버지로서, 보호자로써 잘해내지는 못했다지만 끝까지 가정을 책임지며 헌신한 남자였고, 그 노고를 자식들도 알아주었기에 아빠의 연애를 밀어줄 수 있었겠죠. 개인적으로 너무 감동받았습니다. 보통 스캔들이 터지면 어떻게 되는지 다들 아시잖아요? 당사자만큼이나 가족들도 당혹스러울 테고요. 그렇다면 홀로된 사람들은 재시작도 못해보고 경마장에서 꼴찌 한 기수처럼 창피와 수모 가운데 살아가야 할까요? 혹 그래야 한다면 너무 가혹합니다. 하여 사회적 시선과 체면 때문에 움츠러든 아빠를 일으켜주는 자식들이 참 대견해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아빠 속을 썩이고는 있는데, 그럼에도 자식복이 전혀 없는 가정은 아니라서 다행이었지 싶어요.


직장, 가정, 연애, 우정 등 크고 작은 일들이 있지만, 전부 낫배드한 결과로 흘러갑니다. 주인공이 욕심 없고 소박해서 그런지 작은 행복에도 크게 기뻐하거든요? 같은 남자로서 응원은 하지만 이렇게까지 행복하길 바라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의 유일한 걱정은, 자신이 늙어 죽으면 그녀가 과부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또 배려해서, 재혼은 하지 말고 딱 연애까지만 하자는 게 그가 욕심부릴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젊은 남직원과 수다 떠는 장면을 보고 눈이 확 뒤집혔지 뭡니까. 안되겠다 싶어 청혼을 계획하는 그에게 분노한 신께서 한 말씀하십니다. 선넘네?


그녀는 주인공과 달리 신실한 믿음의 신자였습니다. 반면 그는 아내를 잃고 신 자체를 불신한 지가 오래됐죠. 그럼에도 말년에 이만한 행복을 갖게 해줬으니, 조금은 신에 대한 원망이 사그라들었을지도요.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는 문화권일수록, 자신이 죽도록 고통받고 죗값을 치렀으니 이만하면 평안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일들에도 감사와 찬송이 절로 나는 걸 테고요. 이런 신앙인의 특징은 믿음의 척도를 따지지 않는 듯합니다. 어쨌거나 그는 끝까지 불신자였지만 그녀라는 축복으로 슬픔과 공허가 중단된 것을 일종의 ‘휴전 선언‘이라고 보았습니다. ‘유예기간‘을 마쳤으므로 이제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행복하겠다던 마음이 문제였을까요. 신은 그녀를 데려가버렸습니다. 역시 예쁜 꽃일수록 꺾는 맛이 있는가 봅니다.


그보다 읽는 내내, 일반 독자들이 이 얘기를 얼마나 불쾌해하고 추잡해할지 신경 쓰이더군요. 소설이니까 봐주는 거지 현실에서 저러면 극혐이라고 하는 분들의 말은 솔직히 들어줄 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결점과 결핍에 역정 내게 되어있어요. 이런 불순한 소재나 설정에 욱하는 걸 본다면, 그에게도 억눌린 욕망이 깔려있나 보다 하시면 됩니다. 소설이라서 이해해 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문학을 전혀 읽을 줄 모른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인간은 가증스러운 것들로 꽉 찬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아름다움을 보려고 할 뿐이죠. 그렇게 욕망을 제어할 줄 아는 인간이 돼가는 것이지, 욕망 자체가 소멸되는 건 아닌데 마치 자신들은 완전무결한 위인처럼 평가하려는 게 참 거시기합니다. 유독 한국은 이상적인 형태가 아니면 물고 뜯고 흠집 내려는 경향이 강합디다. 이거는 문화인이나 지식인들이라도 예외가 잘 없더군요. 여하튼 읽으실 거면 편견이나 색안경은 넣어두시고 보시길 바라바라바라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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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 날의 요리사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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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독서광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서를 꽤 좋아합니다. 근데 사실은 독서보다도 글쓰기를 더 좋아해요. 종종 하는 말이지만 전 쓰기 위해서 읽는 것이지, 독서 자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완독 권수에 집착하지 않아요. 오히려 쉬지 않고 집어삼키기 바쁜 책벌레들을 썩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읽었다 한들 남는 게 뭐 얼마나 될까요? 전 그게 바보상자 소리 듣는 TV 시청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읽어야 할 책은 많고 독서할 짬은 한정돼있죠. 세월이 갈수록 꺾이는 우리의 체력과 집중력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러하고요. 아무튼 내 아까운 시간들을 써가면서 읽었는데 얼마 못 가 내용을 잊어버린다면 허무하지 않나요? 저는 좀 그렇거든요. 그게 아쉬워서 기록에 진심을 다하고 또 주기적으로 저의 지난 글들을 읽어줍니다. 그럼에도 기억이 흐릿한 작품이 있고, 반대로 절대 못 잊을 인상적인 작품도 있고 그래요. 그 이유가 ‘당시의 나‘와 합이 맞느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믿었는데요, 지금은 언제 읽어도 푹 빠져들만한 서사의 힘에 있구나 싶어요.


더 이상 긴 말이 필요 없는 요나스 요나손의 작품도 그러합니다. 그의 소설은 읽었다 하면 금방 재미에 빠져들거든요. 게다가 그 내용이 쉽게 지워지지도 않아요. <지구 끝날의 요리사>는 현재 기준으로 저자의 최신작인데요, 초기작들에 비하면 다소 순한 맛이 되었지만 특유의 병맛감성은 여전합니다. 라이트 팬으로써 아쉬운 점은, 저자가 제법 작품성을 갖추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원래 이분은 ˝개연성 따위, 개나 줘버려!˝, ˝웃기면 장땡이야!˝가 모토였는데, 전작인 <달콤한 복수 주식회사>부터 그 초심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들어요. 가수 싸이가 살이 빠져서 연예인 병 걸렸다던 소문이 한때 돌았었는데, 그거랑 흡사하달까요.


주인공 요한은 말 그대로 ‘천치‘입니다. 아버지를 따라 외교관이 되려는 형은, 부동산을 처분하고 홀로 남겨진 동생에게 캠핑카를 선물한 뒤 떠납니다. 자유를 만끽하던 그는 자살을 시도 중인 한 여성과 합세하게 됩니다. 천체 물리학자인 그녀는 64단계의 방정식을 풀어내, 조만간 종말이 닥쳐올 것을 알게 됐다죠.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고, 먼저 가려던 차에 웬 바보한테 방해를 받아버렸고요. 그래 뭐, 세상이 망하기 전에 밥 한 끼 먹자는 요한의 제안을 접수한 예언가의 마음은 잠시 흔들립니다. 이 구제불능 천치씨에게는 웬만한 마스터 셰프 뺨치는 요리 실력이 있었거든요. 요한의 수준급 요리와 바보균 앞에 무색해진 그녀는 최후의 날을 직관해 보기로 합니다.


본투비 극소심 좌였던 예언가는 어차피 얼마 못 살 거, 과거의 후회들을 청산하자는 생각에 요한과 동행합니다. 어찌어찌해서 제 목적을 이루고 이제 요한의 숙제도 해결해 주려는데, 알고 보니 이 친구는 평생 형에게 착취당했다는 사실을 몰랐답니다. 아무튼 진실을 마주한 요한 일행은 복수를 위해 형이 근무하는 스웨덴 대사관을 찾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은퇴한 갑부 할머니 하나가 추가되는데, 시간상 소개는 생략하고요. 마침내 형을 만나 입을 떼려던 순간, 형의 상사분께서 저녁 만찬 행사에 초대했지 뭡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한폭탄 동생 때문에 죽을 맛인 형을 골려주기로 한 주인공은, 행사장에서 각국의 외교관 및 대사관들과 허물없는 대화를 나눕니다. 심지어 오바마와 반기문도 요한의 요리 철학과 쿨한 태도에 완전히 매료돼버려요. 그걸 멀리서 지켜만 보는 형은 아주 가시방석이고요. 뭐 이런 운발뿐인 전개가 다 있냐고 할 텐데, 요나손의 스타일이 이런 걸 어떡합니까. 그냥 뇌 빼놓고 즐기세요.


서브 스토리로, 아프리카 섬나라 중 하나인 콘도르스의 대통령이 등장합니다. 러시아 출생인 그는 마피아에게 금전 사기를 친 뒤 해외로 도주하여 운 좋게 대통령까지 올라갔죠. 허나 정치인이 아니다 보니 국가운영도 엉망이고, 아프리카 연합과 국제기구 쪽에서도 ‘빌런‘소리나 듣고 있다죠. 오바마에게 이 얘길 들은 요한은, 빌런의 코를 눌러버리겠다는 일념으로 섬나라에 가기로 합니다. 어째 사태가 점점 커지지만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뭐 어떠랴 하고 예언가와 할머니도 따라갑니다. 말년에 도파민 폭발하신 할머니가 모든 비용을 다 대줘서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게 말하자면 이스터에그랄까요. 어찌 보면 메인 사건이랄 게 없는 작품인데, 워낙 전개가 시원시원해서 지루할 틈이 느껴지지 않아 좋았습니다.


한참을 적었는데 아직 분량의 절반도 못 왔네요. 최대한 중략해야겠습니다. 어찌어찌해서 빌런을 만난 요한 일행은 그 나라의 장관들이 됩니다. 이 무슨 개떡같은 전개냐 싶으시면 직접 읽어보길 바라겠고, 일단 대통령이 요한의 친부였습니다. 네네, K-드라마에서 숱하게 써먹은 출생의 비밀이란 거죠. 아 참, 예언가가 말했던 종말의 날은 뻔하게도 멀쩡히 지나가버려요. 이어서 빌런과 아들은 UN의 반부패 운동 본부를 자기네 땅에 세우겠다는 허황된 국제선언을 하여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돈, 인재, 기술, 그 무엇도 없는 후진국에서 뭘 어떡해야 할까요? 이때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등장합니다. 예언가가 다시 내놓은 종말의 날을 SNS에 발표하고, 여기에 전 세계인이 베팅하게 만듭니다. 이들의 계획은 이런저런 이유로 섬 출입을 일시적으로 차단한 후, 모아들인 자금으로 국제기구 건물을 후딱 짓는 겁니다. 하지만 헬리콥터를 타고 정찰 나온 요한의 형에게 들켜버리죠. 여기에 프랑스 인터폴과 러시아 마피아의 추적까지 겹친다는, 수습불가한 초대형 사이즈의 이야기입니다.


좀 더 재밌고 디테일한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한도 끝도 없겠네요. 뭐 어차피 가벼운 타임킬링용 소설이니까요. 이 작품의 주제는 명확합니다. 어떤 심각한 일이라도 한숨 돌리고 보자는 거예요. 모든 선택지에는 후회와 미련, 근심과 걱정이 달라붙기 때문에 결국 거기서 거기란 얘깁니다.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최선이었다지만 현재의 모습은 어떤가요? 아무런 불만 없고 불안하지 않은 삶을 살고 계신가요? 예, 그런 겁니다. 낙관주의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점점 더 나빠져가는 세상살이와 사회적 분위기에 너무 휩쓸리지 마시길 바라요. 그럼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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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
마야 안젤루 지음, 김욱동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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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떤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들을 곧잘 들여다보곤 합니다. 이런 경우에 흔히 본질을 꿰뚫는다고도 하는데요. 똑같은 사물이나 현상을 앞에 두고서 왜 누구는 이면을 바라보고 누구는 액면가 그대로만 보는 걸까요. 한창 떠들썩했던 mbti가 대변한 바로는, 나무를 보는 S와 숲을 보는 N의 차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인즉슨 현실적일수록 관찰력이나 상상력이 떨어진다는 말일까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능력이란 정녕 타고나는 것일까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미국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말합니다. 사회적 합리화(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부정되고 화합을 이룬 사회생활 내의 갈등들을 벗어버리려면 ‘자각‘이 필요하다고요(존재의 기술中). 즉 의식을 갖게 하는 자각이 해방의 효과를 불러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자각이 있느냐에 따라 본인의 시야도 달라진다는 얘깁니다. 자각은 타고나기도 하겠지만 훈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길러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영역에 도달하면 그동안 보고도 놓친 게 얼마나 많았으며, 세상 돌아가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를 깨달을 테죠.


미국 흑인문학의 대표작이자 시조새 격이라는 작품을 만났습니다. 마야 안젤루, 처음 들어본 작가인데 명성이 대단하시더라고요. 이 책도 그렇게 권위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저 여타 흑인 소설들과 다르게 막 어둡거나 읽기 힘들지가 않아서 좋았거든요. 미국 교과서에도 꼭 실린다는 이 작품은 저자의 자전소설입니다. 그런데 마치 남 얘기하듯 제3자의 입장에서 설명하니까 본인 얘기라고는 생각을 못 했어요. 전 개인적으로 흑인문학을 잘 읽지 못합니다. 그들의 아픔과는 별개로, 거기서 거기인 서사가 많고 너무 다크해서 읽기가 힘들거든요. 같은 이유로 전쟁소설, 반전소설도 그렇고요. 아무튼 그럼에도 <새장에 갇힌 새…>는 가뿐하게 읽혀서 흡족했답니다.


세 살 밖에 안된 마거리트 존슨은 연년생인 오빠와 함께 할머니 집으로 보내집니다. 이 흑인 남매는 꼬꼬마 시절부터 부모의 이혼 및 타지 생활과 궁핍 등등 감당키 어려운 아픔들을 겪어야 했죠. 허나 1920년대 흑인들의 삶이란 대개 그런 것이므로, 주인공들은 원망 않고 현실에 적응해갑니다. 마거리트는 동포들이 백인들에게 쩔쩔매는 광경을 볼 때마다 불공평한 세상에 의문이 듭니다. 백인이나 흑인이나 같은 종교를 갖고 같은 신을 믿는데 어째서 자신들은 이 같은 차별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더욱 놀라운 것은 절대적인 할머니를 비롯하여 그 누구도 이런 형평성에 불만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눈치 빠른 소녀는 이 암묵적인 규율을 따랐지만, 입을 다무는 만큼 눈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너무 이른 나이에 자각하는 법을 터득해 버린 거죠.


시야가 넓다는 건 그만큼 인풋이 많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게 꼭 좋은 것만도 아니에요. 머리에 잔뜩 쑤셔 넣는다 해서 아웃풋도 좋았다면 너도나도 서울대 갔겠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면,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꿰뚫고 벌거벗길 줄 알아도 나 자신이 시스템을 바꿀 순 없다는 겁니다. 마거리트의 중학 졸업식날, 웬 백인이 와서 같지도 않은 칭찬과 비전을 연설하는 데 얼마나 아니꼽던지요. 그가 얘기하는 훌륭한 사람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이름 날린 백인들이었습니다. 그것은 농부, 세탁부, 잡역부, 하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흑인들의 처지와 팔자를 더욱 상기시켜줄 뿐이었죠. 소녀는 흑인으로 태어나 내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몸서리를 칩니다(238p). 기쁜 날에 받은 충격도 그렇지만 더한 충격은 그 백인이 깽판 치고 갔다는 걸 주변 아무도 느끼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번에도 주인공 혼자만이 뭔가를 보고 말았죠. 더불어 자신들의 무력함까지도요.


남매는 따로 지내는 친부모와 재회합니다. 두 분 다 자기 삶에 만끽하면서 인종과 계급에 불만 없이 살아가는 중이었죠. 엄격한 할머니 밑에서 자라난 주인공들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신선한 생활 방식에 물들어갑니다. 물 만난 물고기가 된 오빠와 달리 보수적인 마거리트는 망설일 때가 많았습니다. 근데 꼭 이런 친구들이 늦바람 나서 정신을 못 차린단 말이죠. 뒤늦게 고삐가 풀린 사람들은 뭐가 빨간 불이고 파란 불인지 구분하지를 못해요. 결국 주인공도 폭력, 가출, 난폭운전 등 다양한 급발진을 보여줍니다. 미지의 세계, 즉 제3의 세계와 가까이하다 보면 당연히 현실감각은 떨어져요. 어려서부터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던 마거리트는 제 나이에 맞게 노는 법을 배우지 못했죠. 보통 생각이 없는 애들의 무모한 행동들은 하나의 경험이 됩니다. 반면에 주인공처럼 생각 많은 애들이 저지른 일들은 대개 후회로 남곤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딘가 평범치 않다는 걸 느꼈기 때문인데요,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서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게 문제입죠. 그것도 의식이 잔뜩 들어간 상태로요. 이게 참 인생을 앞서간 친구들이 늘상 겪게 되는 문제예요. 서른 살 넘어 처음 연애하는 성인이 뚝딱거리지 않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요.


마거리트 존슨은 저자의 본명이라고 하네요. 이 작품으로 저자 안젤루의 세상을 발견하는 시야에 대해서 한 수 배웠습니다. 앞서 얘기한, 자각이 해방의 효과가 있다는 말은 반드시 체험을 전제로 합니다. 내가 가진 언어가 내 세계의 한계다 라는 말이 있듯이, 결과가 좋았든 나빴든 체험한 만큼만 해방이 되는 거겠죠. 사실 이런 자전소설에서는 이렇다 할 주제나 교훈을 갖기가 어려운데요. 저는 인종, 여성, 계급에 억눌린 환경에서도 마냥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저자의 ‘자각‘에 주목하며 읽었습니다. 듣자 하니 몇 권의 자서전이 있다던데 국내에는 아쉽게도 이 책 하나뿐이더라고요. 아무튼 인간은 볼 줄 아는 데에 그칠 게 아니라 그것에 뛰어들 줄 아는, 그리고 상처받을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안젤루는 ‘나이 먹는 것‘과 ‘성장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시야가 좁은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저절로 알게 되는 날이 옵니다만, 우리네 인생은 그렇게 저절로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거든요. 그러니 뭐든 자꾸자꾸 부딪히고 깨져봅시다들. 화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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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클래식 라이브러리 1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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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사강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언제라도 독자를 청춘기로 데려간다는 말에 백번 동의합니다. 특히나 저같이 낭만에 취약한 사람에게는 더 그렇고요. 스스로를 형식에 가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니 에르노‘와 비슷하다고도 하겠으나 그보단 좀 더 라이트하면서 러블리한 사강이 제 취향입니다. 게다가 사강이란 사람은 제가 정말 좋아했던,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사람과도 많이 닮아있어서 볼 때마다 기분이 참 묘합니다. 어쩌면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여자들은 다 비슷하구나 싶고요.


낭랑 18세의 사강이 썼다던 <슬픔이여 안녕>의 파급력은 어마 무시했답니다. 읽는 내내 그 정도인가 했는데, 한국의 고등학생이 이만한 수준의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던데요. 한창 감수성 풍부한 여학생의 글이라는 인상을 팍팍 받았지만, 평론가 및 문학 연구자들은 이 짧은 작품에서 발견한 갖가지 분석들을 내놓았습니다. 알면 알수록 놀라워요. 순진한 동네 꽃집 아가씨와 같은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인간을 해부하는 외과의사였다고나 할까요? 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데 그것이 계산된 행동이 아니어서 더 매력적으로 와닿았습니다.


주인공 세실과 그의 아버지는 바닷가 근처의 한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냅니다. 태생이 자유로운 영혼인 부녀는 하고 싶은 대로,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기죠. 부친은 한참 어린 동거녀와, 세실은 어느 법대생과 연애사업을 키워갑니다. 적당히 무심하고 취향을 존중하는 부녀의 성향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었죠. 이들의 평화를 깨뜨리는 중년의 여성이 별장을 찾아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옛 친구이자, 한동안 세실을 맡아주었던 사교계의 스승인 ‘안‘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확 뒤집혀요. 부친의 환심을 사던 그녀는 결국 동거녀를 몰아내고 부친과 재혼하기로 합니다. 부녀의 좋은 시절도 다 지나갔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사랑에 푹 빠진 부친과, 사교계를 선망하는 세실은 오히려 긍정적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꿈꾸는 법이니까요.


부친과 달리 사사건건 간섭하는 안에게 세실은 불만을 갖기 시작합니다. 세실은 자신이 길들여질 수 없는 야생마라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달았죠. 하지만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인 데다 그녀 자신도 안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거든요. 불편하지만 미워할 수만도 없는 두 마음이 생겨나면서 세실의 자아도 확장합니다. 다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반항심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죠. 영리한 세실은 안이 아니라 부친을 공략합니다. 세실은 동거녀와 법대생을 설득하여, 두 남녀가 부친 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도록 계획합니다. 욕망에 솔직한 부친이라면 그 광경을 보면서 충분히 흔들릴 테니까요. 세실이 이렇게까지 한 것은 안을 몰아내기 위함도 있지만, 안이 세실과 법대생의 연애를 비난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계획을 실행하는 동안에도 세실은 사랑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죠.


안은 그녀에게 말합니다. 네가 안다고 자부하는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고요.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달려들었던, 그저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랐던 미흡한 연애를 사랑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그 나이대에 겪는 사랑이나 연애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세실이 하고 있는 사랑이 어른들 눈에는 풋내기 연애에 불과할지 몰라도요. 한때 대한민국의 연애 시장을 주름 잡았던 ‘나쁜 남자‘에 열광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던가요. 뭘 모르면 그럴 수도 있다, 즐거웠으면 그걸로 됐다 치고 넘기는 거죠, 뭐.


안의 보수적인 연애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세실의 태도에서, 사강이 추구하던 개방적인 사랑의 공식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녀의 관념은 애인의 홀어머니를 대하는 태도에서 크게 드러나요. 법대생의 모친은 홀로되고부터 쭉 어머니의 역할만을 수행했으며, 그런 자신의 삶에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하지만 세실은 그런 애인의 모친이 결코 위대해 보이지 않았어요. 누군가를 사랑할 특권을 스스로 박탈시키고 자식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건, 세실이 보기에는 그리 자랑할 만한 게 못되었거든요. 그녀에게는 고결한 성녀로 살기보다도 실컷 사랑을 하는 음녀가 더 나아 보였을 겁니다. 차라리 사랑은 이제 필요 없다고 하면, 애인의 모친이나 안처럼 전통, 교양, 품위, 헌신에 힘쓰며 살아가도 되죠. 허나 사랑을 바라면서 체통을 지키는 어른들의 세계관에 세실은 납득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장에 갇힌 것과 다름없는 성녀의 삶을 비난했던 거겠죠. 작품 통틀어서 세실이 성낸 유일한 장면인 만큼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 18세의 여고생한테서 이만한 통찰력이 나올 수 있다니요.


앞서 말했듯, 자유분방한 연애를 추구하는 세실도 속으론 품격 있는 어른들의 세계를 동경했어요. 그래서 아빠의 재혼으로 이제 자신도 지성인의 균형 잡힌 삶을 갖게 되리라 기대했고요. 작중에서 균형이란 표현이 나온 것은, 질서와 혼돈 사이에 서겠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저쪽 세계로 아예 넘어가겠다는 말이 아니라요. 하지만 안의 간섭과 통제는, 세실이 동경했던 세계가 질서 아닌 혼돈이었음을 알게 해줬죠. 아무튼 세실의 계획이 성공하고 안은 후다닥 퇴장합니다. 안 자신도 동거녀를 밀쳐내고 평화를 깨부순 장본인이면서, 자신도 그렇게 되자 펑펑 우는 게 어이없긴 합디다. 남을 울렸으면 자기도 피눈물 흘릴 각오가 돼있어야죠. 아무튼 이 작품은 주인공의 로맨스나 복수혈전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 안에게 상처를 입힐 때마다 괜히 찜찜하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세실을 지배하거든요. 이 과정에서 자아가 분리되고,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따져보게 됩니다. 역시 성장에는 실수와 상처, 좌절만 한 게 없다는 얘기겠죠.


저는 이 작품이 저자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후속작들이 얼마나 대단하든 간에 <슬픔이여 안녕>을 넘어서진 못하리라고 감히 단언합니다. 데뷔한 이후로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스타 작가에게도 이처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는 게 신선한 충격이에요. 그녀의 소녀 감성이 어찌나 별처럼 반짝거리던지, 이 작품만 두고 보면은 저는 사강을 한 여자로서 사랑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세상에, 봄이 되니까 낯간지러운 글도 잘만 써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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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 - 사막의 망자들,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5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누가 그러더라고요. 오마카세가 더 맛있지만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쪽은 정크푸드 같은 것들이라죠. 그 말에 적잖이 공감하는 바입니다. 독서도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계문학이 아무리 우수하다 한들 현대문학의 도파민은 못 이긴다고요. 특히나 스릴러 같은 장르소설은 더더욱이요. 저는 어디까지나 재미로 독서하기 때문에 장르, 형식, 시대, 사상을 불문하고 재미있었다면 그만입니다. 그게 종합예술이라는 뮤지컬 공연보다도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 코미디 무대를 훨씬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근래에 묵직한 작품을 연달아 읽었더니 피로해져서 오랜만에 코넬리 옹의 작품 하나 읽었습니다. 초기 작품인 <시인>에서 활약한 매커보이 기자를 일회용으로 써먹지 않고 시리즈로 만들었더군요. 솔직히 <시인>에서는 주인공의 매력이 그다지 돋보이지 않았었는데, 이번 편에서는 제법 정감이 가는 캐릭터로 나와주었습니다. 보니까 13년 만에 나온 후속작인데, 그만큼 여러 피드백을 반영하여 캐릭터에 힘 좀 썼구나 싶었네요. 다만 텀이 너무 길다 보니 이전 내용들이 가물가물해서 그냥 스탠드얼론처럼 읽었습니다. 물론 전개나 흐름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고요. 이런 게 코넬리 옹의 가장 큰 강점이 아닐까 합니다. 사랑받는 작가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네요.


LA 신문사 ‘타임스‘의 베테랑인 주인공은 감원 대상에 포함되어 해고되기까지 2주 남았습니다. 나가기 전에 특종기사를 써서 신문사에 빅 엿을 먹이자는 복수심에 사로잡히죠. 그가 계획한 특종이란,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간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겁니다. 그런 보도가 나가고 나면 이제 신문사는 온갖 연락을 받으며 곤욕을 치러야 할 테죠. 저는 이렇게 사회와 정의를 위해 일하는 직업군들이 삐딱선을 타는 이야기를 참 좋아라 합니다. 아무튼. 갱단 소속의 흑인 소년이 방치돼있던 차를 몰았는데, 알고 보니 트렁크에 여성 시신이 있더랍니다. 경찰 측은 소년을 용의자로 간주했고, 압박 심문 끝에 소년이 저지른 범죄처럼 된 거였죠. 진실을 조사하던 매커보이는 매우 유사한 사건을 찾아내, 어쩌면 연쇄살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슬슬 판이 커지려는 게 보이죠?


주인공의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해리 보슈‘같은 공권력이나 액션이 없어 밋밋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작가는 사건 외에 다른 요소들을 집어넣습니다. 앞으로 매커보이를 대체할 후임 여기자가 들어오는데요, 깍듯한 선배 대우를 하면서도 교묘히 선을 넘곤 합니다. 더불어서 이제껏 함께 했던 타 직원들과의 믿음도 식어버리고요. 게다가 특종을 다룰수록 신문사 측에서는 퇴사 일을 조금씩 더 연장시키는 모습들도 나옵니다. ‘야비한 직장‘의 특징과 패턴을 골고루 볼 수 있다는 게 이번 편의 핵심이에요. 이로써 작가 또한 기자 생활하며 얼마나 수모와 치욕을 겪었을지도 상상이 갑니다.


유사 사건의 발생지역인 라스베이거스로 달려간 메커보이는 사건 담당 변호사를 비롯하여 이곳저곳을 방문하다가 알 수 없는 봉변을 당합니다. 신용카드가 정지되고, 통신이 차단되고, 이메일 등의 온라인 접속이 전부 막혀버려요. 누군가가 그를 본격적으로 방해하기 시작했고, 다급해진 주인공은 최후의 보루를 꺼냅니다. 옛 연인이었던 FBI 요원 레이철에게 연락하여 도움을 받게 되죠. 레이철은 해리 보슈와도 얼레리꼴레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서는 매커보이와 더 깊은 관계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사건 수사보다도 견우와 직녀의 애정선을 구경하는 맛이 더 좋았어요. 스릴러소설에서 연애 씬을 더 좋아하다니, 저도 나이가 들긴 했나 봅니다.


한편 매커보이의 마지막 기사를 공동작업하던 후임은 덫에 걸립니다. 트렁크 살인사건을 조사하다가 어느 사이트에 접속한 뒤로 종적을 감춰버려요. 주인공들은 해당 사이트의 출처를 따라 모 데이터 보안센터를 방문합니다. 아 참고로, 범인은 이 센터의 서버 관리자입니다. 시작부터 범인의 시점이 번갈아 나오므로 이건 스포가 아니에요. 범인을 지독하게도 감춰놨었던 <시인의 계곡>에 비하면 차라리 이런 구도가 더 낫다고 봅니다. 아무튼 허탕치고 LA로 귀가한 두 사람은, 주인공의 집에서 후임 기자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경고였고, 이로써 사건의 주인공이 돼버린 매커보이는 특종을 동료 직원에게 건네주어야 했습니다. 매번 느끼지만 코넬리 옹은 캐릭터 굴리기에 가히 천부적입니다.


글이 길어져 슬슬 마무리하겠습니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데이터를 지켜내는 ‘허수아비‘의 단서를 따라 주인공들은 범인과의 사투 끝에 간신히 승리합니다. 그 장면은 직접 읽어보시고, 전도유망한 능력자들이 어쩌다 빌런의 길로 들어서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영화나 만화에서도 꼭 미친 과학자들이 악당으로 나오곤 했었죠. 단순히 불우한 시절을 지나와서 그렇다기엔 증오나 집념의 정도가 너무 괴랄합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기술을 인정받지 못해, 다른 방면으로 재능을 펼치며 욕구를 충족한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지금 보니 능력 자체가 목표인 것과, 능력을 ‘수단‘으로 쓴다는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요리를 예로 들어볼까요. 대개 남자들은 요리 자체를 잘 하는 게 목표인 반면, 여자들은 가족과 이웃을 먹이는 데에 목표를 둔다죠. 애초에 출발선부터가 다릅니다. 그 때문에 실력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뭐가 옳고 그른지는 따져봐야 한다는 거죠. 그렇다고 무조건 선이 옳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법이 없으면 죄도 죄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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