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휴전 ㅣ 창비세계문학 40
마리오 베네데티 지음, 김현균 옮김 / 창비 / 2015년 1월
평점 :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인해 세계 각국마다 치명적인 경제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유류값이 폭등하더니, 지금은 비닐봉지 대란으로 시끌벅적하네요. 경제가 계속 타격을 입다 보면 일상이 무너지는 것도 금방이겠다 싶습니다. 저도 마침 종량제 봉투가 떨어져서 집 앞 슈퍼에 갔는데, 1인당 2장씩만 구매가 가능하다네요. 그마저도 언제 품절될지 모른다 하고요. 이제껏 비상시에 전기나 수도가 끊기는 상상해 봤지, 고작 봉투 따위가 없다 해서 이리도 당황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럼 앞으로는 얼마나 더 많은 공급이 끊어지고 우리 삶이 불편해질까요.
중동 쪽 전쟁이 제3차 대전으로 넘어가냐 마느냐 하는 판국이다 보니, 아무래도 전쟁문학을 좀 읽어줘야겠다 싶어서 고른 게 <휴전>입니다. 우루과이 문학도 처음이지만 이거 전쟁문학이 아니더라고요? 본 제목은 불신자인 주인공과 신의 ‘협정‘을 의미합니다. 주 내용은 아내와 사별 후 세 자녀를 홀로 키운 중년 사내의 공허한 나날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왜 이런 낙엽지는 쓸쓸한 서사가 좋은 걸까요? 아무래도 나이가 들긴 했나 봅니다. 이런 유의 작품들은 미망인보다는 홀아비의 얘기가 몰입감이나 전달력 면에서 훨씬 뛰어나요. 제가 남성인 이유도 있겠지만, 유대관계에 서툰 남정네들은 한번 무너지면 여성들만큼 일상으로의 회복이 어렵단 말입니다. 게다가 여성호르몬의 증가로 자꾸 감상적이게 되거든요. 하지만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체면치레 때문에 억지로 이성적인 판단과 행동거지를 짜내야만 해요. 이게 참 남성들을 미치게 만드는 겁니다. 그 같은 고뇌와 애수가 여성의 서사보다는 좀 더 호소력을 가지는 게 아닐까 싶고요.
주인공은 저랑 성향이 꽤 비슷합니다. 사람 구실은 하되 성공, 출세, 야망심 따위에는 흥미가 없죠. 달과 6펜스의 사이를 오갔던 한 저자의 약력만 봐도 알만한데요. 가만 보면 사업가 기질이 없는 사람들만 문학을 쓰는 것도 같습니다. 그도 그럴게, 문학은 사람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어야 하니까요. 그래서 찐 문학들은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한가득 담아냅니다. 그게 정상인데도 어떤 독자들은 그런 인물과 저자를 욕하고 비난하기 바쁘더라고요. 그건 문학을 대하는 자세도 아닐뿐더러 본인의 수준 낮음을 드러내는 꼴이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어른이란, 타인의 가치관에 찬성할 순 없지만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말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하여 눈에 거슬리는 모든 상황과 감정들을 개인의 편협한 사고와 잣대로 찍어 누를 필요는 없겠죠. 그토록 진보를 외치는 한국에서 유독 문학에만 보수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하는 현상이 안타깝습니다.
얘기가 좀 샜네요. 곧 오십을 바라보는 주인공은 다 자란 세 남매와 살고 있습니다. 조만간 은퇴를 준비 중인 부장님이고요. 무엇보다 일찍 사별한 아내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번에 입사한 여직원 중 한 명을 좋아하게 됐지 뭡니까. 딸뻘인 애한테 이 무슨 추태냐며 눈살 찌푸릴 독자들의 모습이 눈에 훤한데, 앞서 얘기했듯이 내 기준이 꼭 정답은 아니며, 그런 잣대로는 판에 박힌 작품밖에 나올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합시다요. 아무튼 주제 파악 못하고 추파를 날려대는 늙다리들과 달리 주인공은 사랑 앞에서 본인의 처지를 고려해가며 그녀에게 접근하였고, 다행히 그녀도 그의 진심을 알고 받아주게 됩니다. 어찌나 기뻤던지, 평생 놓지 못했던 아내를 이제서야 보내줄 수 있게 되었죠. 어떠신가요? 어쩜 자식들도 있는데 딴 여자를,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여자랑 놀아나는 주인공이 역겹게 느껴지시나요? 이런 건 한국인의 정서와 맞지 않는 것도 사실이니까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가야죠. 누가 보더라도 그는 애도할 만큼 했습니다. 자식들 또한 이 낯 뜨겁고 민망스런 관계를 이해하고 또 응원해 줬습니다. 심지어 아빠의 행복을 바라기까지 해주었고요. 그는 아버지로서, 보호자로써 잘해내지는 못했다지만 끝까지 가정을 책임지며 헌신한 남자였고, 그 노고를 자식들도 알아주었기에 아빠의 연애를 밀어줄 수 있었겠죠. 개인적으로 너무 감동받았습니다. 보통 스캔들이 터지면 어떻게 되는지 다들 아시잖아요? 당사자만큼이나 가족들도 당혹스러울 테고요. 그렇다면 홀로된 사람들은 재시작도 못해보고 경마장에서 꼴찌 한 기수처럼 창피와 수모 가운데 살아가야 할까요? 혹 그래야 한다면 너무 가혹합니다. 하여 사회적 시선과 체면 때문에 움츠러든 아빠를 일으켜주는 자식들이 참 대견해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아빠 속을 썩이고는 있는데, 그럼에도 자식복이 전혀 없는 가정은 아니라서 다행이었지 싶어요.
직장, 가정, 연애, 우정 등 크고 작은 일들이 있지만, 전부 낫배드한 결과로 흘러갑니다. 주인공이 욕심 없고 소박해서 그런지 작은 행복에도 크게 기뻐하거든요? 같은 남자로서 응원은 하지만 이렇게까지 행복하길 바라진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그의 유일한 걱정은, 자신이 늙어 죽으면 그녀가 과부로 살아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여러 가지를 고려하고 또 배려해서, 재혼은 하지 말고 딱 연애까지만 하자는 게 그가 욕심부릴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젊은 남직원과 수다 떠는 장면을 보고 눈이 확 뒤집혔지 뭡니까. 안되겠다 싶어 청혼을 계획하는 그에게 분노한 신께서 한 말씀하십니다. 선넘네?
그녀는 주인공과 달리 신실한 믿음의 신자였습니다. 반면 그는 아내를 잃고 신 자체를 불신한 지가 오래됐죠. 그럼에도 말년에 이만한 행복을 갖게 해줬으니, 조금은 신에 대한 원망이 사그라들었을지도요. 종교의 영향을 크게 받는 문화권일수록, 자신이 죽도록 고통받고 죗값을 치렀으니 이만하면 평안할 자격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일들에도 감사와 찬송이 절로 나는 걸 테고요. 이런 신앙인의 특징은 믿음의 척도를 따지지 않는 듯합니다. 어쨌거나 그는 끝까지 불신자였지만 그녀라는 축복으로 슬픔과 공허가 중단된 것을 일종의 ‘휴전 선언‘이라고 보았습니다. ‘유예기간‘을 마쳤으므로 이제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행복하겠다던 마음이 문제였을까요. 신은 그녀를 데려가버렸습니다. 역시 예쁜 꽃일수록 꺾는 맛이 있는가 봅니다.
그보다 읽는 내내, 일반 독자들이 이 얘기를 얼마나 불쾌해하고 추잡해할지 신경 쓰이더군요. 소설이니까 봐주는 거지 현실에서 저러면 극혐이라고 하는 분들의 말은 솔직히 들어줄 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결점과 결핍에 역정 내게 되어있어요. 이런 불순한 소재나 설정에 욱하는 걸 본다면, 그에게도 억눌린 욕망이 깔려있나 보다 하시면 됩니다. 소설이라서 이해해 준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문학을 전혀 읽을 줄 모른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인간은 가증스러운 것들로 꽉 찬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아름다움을 보려고 할 뿐이죠. 그렇게 욕망을 제어할 줄 아는 인간이 돼가는 것이지, 욕망 자체가 소멸되는 건 아닌데 마치 자신들은 완전무결한 위인처럼 평가하려는 게 참 거시기합니다. 유독 한국은 이상적인 형태가 아니면 물고 뜯고 흠집 내려는 경향이 강합디다. 이거는 문화인이나 지식인들이라도 예외가 잘 없더군요. 여하튼 읽으실 거면 편견이나 색안경은 넣어두시고 보시길 바라바라바라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