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클래식 라이브러리 1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남주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말 오랜만에 사강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언제라도 독자를 청춘기로 데려간다는 말에 백번 동의합니다. 특히나 저같이 낭만에 취약한 사람에게는 더 그렇고요. 스스로를 형식에 가두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니 에르노‘와 비슷하다고도 하겠으나 그보단 좀 더 라이트하면서 러블리한 사강이 제 취향입니다. 게다가 사강이란 사람은 제가 정말 좋아했던, 지금까지도 잊지 못하는 사람과도 많이 닮아있어서 볼 때마다 기분이 참 묘합니다. 어쩌면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여자들은 다 비슷하구나 싶고요.


낭랑 18세의 사강이 썼다던 <슬픔이여 안녕>의 파급력은 어마 무시했답니다. 읽는 내내 그 정도인가 했는데, 한국의 고등학생이 이만한 수준의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라고 하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겠던데요. 한창 감수성 풍부한 여학생의 글이라는 인상을 팍팍 받았지만, 평론가 및 문학 연구자들은 이 짧은 작품에서 발견한 갖가지 분석들을 내놓았습니다. 알면 알수록 놀라워요. 순진한 동네 꽃집 아가씨와 같은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인간을 해부하는 외과의사였다고나 할까요? 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는데 그것이 계산된 행동이 아니어서 더 매력적으로 와닿았습니다.


주인공 세실과 그의 아버지는 바닷가 근처의 한 별장에서 여름휴가를 보냅니다. 태생이 자유로운 영혼인 부녀는 하고 싶은 대로,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맡기죠. 부친은 한참 어린 동거녀와, 세실은 어느 법대생과 연애사업을 키워갑니다. 적당히 무심하고 취향을 존중하는 부녀의 성향이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었죠. 이들의 평화를 깨뜨리는 중년의 여성이 별장을 찾아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옛 친구이자, 한동안 세실을 맡아주었던 사교계의 스승인 ‘안‘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확 뒤집혀요. 부친의 환심을 사던 그녀는 결국 동거녀를 몰아내고 부친과 재혼하기로 합니다. 부녀의 좋은 시절도 다 지나갔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사랑에 푹 빠진 부친과, 사교계를 선망하는 세실은 오히려 긍정적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꿈꾸는 법이니까요.


부친과 달리 사사건건 간섭하는 안에게 세실은 불만을 갖기 시작합니다. 세실은 자신이 길들여질 수 없는 야생마라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달았죠. 하지만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인 데다 그녀 자신도 안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거든요. 불편하지만 미워할 수만도 없는 두 마음이 생겨나면서 세실의 자아도 확장합니다. 다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반항심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죠. 영리한 세실은 안이 아니라 부친을 공략합니다. 세실은 동거녀와 법대생을 설득하여, 두 남녀가 부친 앞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도록 계획합니다. 욕망에 솔직한 부친이라면 그 광경을 보면서 충분히 흔들릴 테니까요. 세실이 이렇게까지 한 것은 안을 몰아내기 위함도 있지만, 안이 세실과 법대생의 연애를 비난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계획을 실행하는 동안에도 세실은 사랑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죠.


안은 그녀에게 말합니다. 네가 안다고 자부하는 것들은 사랑이 아니라고요.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달려들었던, 그저 가슴이 시키는 대로 따랐던 미흡한 연애를 사랑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저는 그 나이대에 겪는 사랑이나 연애법이 따로 있다고 생각해요. 세실이 하고 있는 사랑이 어른들 눈에는 풋내기 연애에 불과할지 몰라도요. 한때 대한민국의 연애 시장을 주름 잡았던 ‘나쁜 남자‘에 열광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니던가요. 뭘 모르면 그럴 수도 있다, 즐거웠으면 그걸로 됐다 치고 넘기는 거죠, 뭐.


안의 보수적인 연애관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세실의 태도에서, 사강이 추구하던 개방적인 사랑의 공식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그녀의 관념은 애인의 홀어머니를 대하는 태도에서 크게 드러나요. 법대생의 모친은 홀로되고부터 쭉 어머니의 역할만을 수행했으며, 그런 자신의 삶에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하지만 세실은 그런 애인의 모친이 결코 위대해 보이지 않았어요. 누군가를 사랑할 특권을 스스로 박탈시키고 자식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건, 세실이 보기에는 그리 자랑할 만한 게 못되었거든요. 그녀에게는 고결한 성녀로 살기보다도 실컷 사랑을 하는 음녀가 더 나아 보였을 겁니다. 차라리 사랑은 이제 필요 없다고 하면, 애인의 모친이나 안처럼 전통, 교양, 품위, 헌신에 힘쓰며 살아가도 되죠. 허나 사랑을 바라면서 체통을 지키는 어른들의 세계관에 세실은 납득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장에 갇힌 것과 다름없는 성녀의 삶을 비난했던 거겠죠. 작품 통틀어서 세실이 성낸 유일한 장면인 만큼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정 18세의 여고생한테서 이만한 통찰력이 나올 수 있다니요.


앞서 말했듯, 자유분방한 연애를 추구하는 세실도 속으론 품격 있는 어른들의 세계를 동경했어요. 그래서 아빠의 재혼으로 이제 자신도 지성인의 균형 잡힌 삶을 갖게 되리라 기대했고요. 작중에서 균형이란 표현이 나온 것은, 질서와 혼돈 사이에 서겠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저쪽 세계로 아예 넘어가겠다는 말이 아니라요. 하지만 안의 간섭과 통제는, 세실이 동경했던 세계가 질서 아닌 혼돈이었음을 알게 해줬죠. 아무튼 세실의 계획이 성공하고 안은 후다닥 퇴장합니다. 안 자신도 동거녀를 밀쳐내고 평화를 깨부순 장본인이면서, 자신도 그렇게 되자 펑펑 우는 게 어이없긴 합디다. 남을 울렸으면 자기도 피눈물 흘릴 각오가 돼있어야죠. 아무튼 이 작품은 주인공의 로맨스나 복수혈전을 다루는 게 아닙니다. 안에게 상처를 입힐 때마다 괜히 찜찜하고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세실을 지배하거든요. 이 과정에서 자아가 분리되고,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따져보게 됩니다. 역시 성장에는 실수와 상처, 좌절만 한 게 없다는 얘기겠죠.


저는 이 작품이 저자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후속작들이 얼마나 대단하든 간에 <슬픔이여 안녕>을 넘어서진 못하리라고 감히 단언합니다. 데뷔한 이후로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스타 작가에게도 이처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있었다는 게 신선한 충격이에요. 그녀의 소녀 감성이 어찌나 별처럼 반짝거리던지, 이 작품만 두고 보면은 저는 사강을 한 여자로서 사랑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세상에, 봄이 되니까 낯간지러운 글도 잘만 써지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