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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3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평점 :
나는 언제나 참여하는 쪽이 아니라 관람하는 쪽이었다. 감정과 의욕은 있었지만 다스리고 표현할 줄 몰라서 항상 울타리 밖을 맴돌았고,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직관이 발달한 케이스였다. 알다시피 직관적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것들에 관심을 쏟는 편이며, 버릇 같은 의미 부여와 습관적인 본질 파악으로 스스로를 학대하는 젠틀한 사디스트라고 볼 수 있다. 한창 성장기일 때만 해도 다들 나랑 똑같은 줄 알았는데, 말로만 들었던 잔잔한 돌아이가 나였다는 사실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나의 ‘남다름‘을 감추고 살아봤지만 정말이지 온통 나사 빠져있는 세상과 친구 하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다. 하여 나는 심신의 평화를 찾아 여기저기에 정신과 시간을 쏟았고, 얼마간은 그것들에 위로와 평안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비대해진 자아는 매번 제자리에 돌아왔고, 그렇게 번민과 해탈, 좌절과 초월을 되풀이하며 고통 중에 살았다. 여전히 방황하는 산책자이지만 지금은 정답 따윈 없다는 것과 선악의 조화를 깨달아 무던히 살아가고 있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비슷한 고민들로 절망했던 내 과거를 꺼내놓는다. 사실 헤세의 작품이 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고통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원인을 해결하러 나섰다는 점에서 박수를 주고 싶다. 브라만의 아들 싯다르타는 힌두교 내에서 해소되지 않는 갈증 때문에, 브라만을 관두고 고행하는 승려인 사문의 길을 간다. 하지만 3년이나 사문으로 있으면서도 열반은커녕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고, 고타마(부처)를 통하여 누군가의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스승이 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제 그는 틀에 박힌 형식을 내려놓고 속세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창부를 만나 관능의 세계를 탐험하고, 상인과 함께 일하며 물질의 세계에 마음을 뺏겨도 본다. 속세에서도 배울 점은 많았고, 사람들은 이 되다만 고행자에게 지혜를 구하였다. 뭐가 됐든 자기만 좋으면 다 그만인 것인가.
창부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우리 같은 사람은 ‘사랑‘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기에 순수한 사랑이 불가하다는 뜻일까. 그는 오직 어린아이만이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을 알고 싶다 해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때의 주인공을 두고 하기엔 좀 이른 말이지만, 배움을 통한 진보와 성장에는 이처럼 아쉬움이 없어야 하는 것일 테다. 아무튼 그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재산인 단식, 사색, 인내까지 모두 잃고 나서야 자신이 그토록 업신여겼던 어린아이의 세계로 들어서게 된다. 배움의 경지에 이른다 해도 절대 이해불가한, 내 것이 될 수 없었기에 차라리 경멸했던 그 순수의 타이틀을 마침내 획득한 싯다르타. 진흙탕을 실컷 뒹굴고 마흔에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갔으니 그 기쁨의 충동은 말할 것도 없었겠지.
사람마다 자아를 인식하는 능력치가 판이하다. 똥인지 된장인지를 꼭 먹어봐야만 아는 사람이 있고, 딱 보면 모르냐며 경험 없이도 쉽게 구별하는 사람이 있다. 헌데 이 같은 지각 및 감각은 개인의 타고난 영적 수준과 크게 상관없어 보인다. 브라만, 사문, 구도자, 현인, 부처의 길을 쫓은 고차원의 주인공이 세속에 물들고 관능에 빠진 것은 그의 지능 때문이 아니었으니까. 헤세는 작품마다 ‘체험‘하는 인물의 어리숙함을 꼬집곤 한다. 물론 체험은 좋은 것이고 뭐든 경험해서 나쁠 건 없지만, 헤세처럼 직관이 뛰어난 사람이 왜 항상 체험하는 인물을 다루나 싶었다. 헤세가 그리는 체험의 세계도 결국 탐욕, 관능, 타락 등의 덧없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알 것도 같다. 생각만 하는 사람은 가시에 찔릴 게 무서워 다가가지 못하고 멀리서 장미를 바라만 본다. 허나 행동하는 사람은 가시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장미에 다가가 꽃향기를 맡는다. 내가 생각하는 헤세의 갈증은 그 차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는 것만으로는 해소가 되지 않으니까.
헤세의 작품을 순서대로 읽었다면 되게 감명 깊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황야의 이리>를 읽고서 본 싯다르타의 유리방황과 각성의 과정들은 너무 생략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갑자기 번뜩했다가 시들시들해지는, 괜히 이랬다저랬다 하는 기분파처럼 그려놨달까. 아무튼 인간은 결국 자기만의 진리보다도 행복의 근원을 찾으려고 해야 한다. 문제는 인간이란 게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은 법이라, 쾌락 가운데서 행복을 찾는다는 데에 있다. 하지만 많은 선각자들이 주장하듯 쾌락이 아닌 즐거움을 추구해야 하며, 그 즐거움이란 손해를 입더라도 넘어갈 만큼의 몰입이 가능한 ‘무언가‘여야 한다. 이제 독자들은 결과보다도 과정 자체가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깨달았을 때보다도 정답을 구하는 데서 활력이 돈다는 점을 자각하지 못했다.
빈 그릇일수록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허나 인간은 삶의 만족을 비움보다도 채움에서 얻고자 한다. 돈을 버느라 건강을 갈아 넣고, 나중 되면 돈이 있어도 건강을 되찾지 못한다는 교훈을 숱하게 듣지만 그 누구도 주의하지 않는다. 역으로는 자기 관리라는 종교에 빠져 끝없이 채워 넣기에 바쁘다. 인간이란 비워져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하고, 그렇게 본인의 ‘옳음‘을 수집하지만 결코 쾌락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걸어온 날들에 회한이 드는 것이 그 증거이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채워보질 않으면 비움의 가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끝없는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게끔 되어있다. 왜 그런 노래 가사도 있었지.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다던.
지혜의 왕 솔로몬이 남긴 말이 있다.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전12:12).』 싯다르타도 그리 말한다. 너무 많은 지식과 지나친 금욕, 행위, 노력이 오히려 방해였다고. 나 또한 지인들과 그런 말을 했었다. 아는 것이 힘이란 말보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더 좋다고. 다시 말해 알기만 해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다만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허나 결론을 안다 해서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차라리 모르던 때가 좋았다는 얘기다. 그런고로 싯다르타의 말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야말로 참 사랑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순수하다는 것은 쉽게 악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뱃사공으로 살아가던 싯다르타 앞에 창부 카말라와 아들이 나타난다. 뱀에 물려 죽은 창부의 아이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제공하는 주인공. 하지만 그의 헌신과 정성에 욕설과 불평으로 화답하는 아이였고, 자신을 떠나버린 아이를 보며 브라만이었던 부친과 여러 스승들을 떠나온 자신을 떠올린다. 비록 실망했으나 그는 어린아이의 투정, 원망, 욕심, 자랑, 탐욕, 허영심 등의 감정들이 밉다기보다 오히려 사랑해야 할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 강한 충동들이 심장을 뛰게 하며, 죽어있는 지식과 사상이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불멸의 행위를 갖게 하였다. 결국 정답이라 생각되는 ‘도‘만을 좇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조화로움과 정반합, 그리고 욕망을 흘려보낸다는 것이 중요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늘 그 자리에 존재한다. 감정도 시간도 생각도 그렇게 순환하는 법이었다.
싯다르타는 재회한 옛 친구에게 완전함의 균형을 설명한다. 하나의 돌멩이는 모든 것을 짊어진 브라만으로써 숭배할 가치가 있다고. 불교 신자가 아닌 나님의 해석은 이러하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씨앗이다. 씨에 들어있는 dna에는 그 존재의 설계도가 담겨있으며, 다 성장한 후의 모습도 이미 새겨져 있다. 결국 씨는 과거부터 미래까지의 시간과, 존재를 발산하는 에너지가 압축된 형태로써, 그 잠재력이 깨어날 때마다 인간은 그 경이로움에 말을 잇지 못한다. 이처럼 가치와 의미는 내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으며, 그것을 발견해낼 줄 아는 감각을 길러야 한다. 더 나아가 그것들을 온전히 긍정하는 마음이 갈증을 지워준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만이 남다름과 불안함의 수렁에 빠진 나와 당신을 건져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