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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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잡>에서 김상욱 교수가 그러더라. 미래를 예측하고 싶으면 SF 소설들을 읽으라고. 과학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설자리를 뺏는 것을 항상 못마땅해하던 나님은 SF 소설을 퍽 좋아하질 않았다. 과학의 발달이 인류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과학자들도 잘 알지만, 그럼에도 과학에 대한 연구와 비전은 언제나 희망적이라는 김상욱 교수. 그래서 앞으로는 국내 SF 작가들을 좀 더 주목해 볼까 한다. 물론 SF 장르와 담쌓고 살지는 않았다. 또 그중에는 제법 재밌고 유익했던 작품들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작가는 없었다. 그런데 김초엽 작가는 뭐랄까, 이제야 알게 된 게 후회가 되었다. <지구 끝의 온실>은 ‘내가 바라던 SF의 맛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대재앙 ‘더스트 폴‘이 종식된 2060년대의 이야기. 과거 한 연구소의 실패로 발생한 더스트가 자가증식하면서 전 지구를 강타했고, 항체가 없거나 생존게임에서 패한 자들은 전부 죽어버렸다. 과거 생존자들이 힘겹게 재건한 현대사회의 생태학자인 아영은, 국내 곳곳에서 무섭게 증식하는 덩굴 ‘모스바나‘를 조사한다. 그러다 에티오피아의 은퇴한 식물학자의 관련 글을 읽고서 곧장 만나러 간다. 더스트 시대의 산증인에게 전해 들은 모스바나는 복잡한 인류사와 맞물려있는 충격 그 자체였다.


말레이시아의 모 연구소 실험체였던 두 자매가 탈출하여 어느 마을에 도착한다. 더스트가 전 세계를 폐허로 바꾸었으나 이곳 프림 빌리지만은 파괴하질 않았다. 소규모의 인원이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고, 마을 규칙을 세워 제법 평화롭게 돌아가는 낙원 아닌 낙원이었다. 이 마을을 꾸려온 두 사람, 기계 정비사인 지수와 사이보그 식물학자인 레이첼의 특이한 관계가 자매의 흥미를 돋우었다. 유리온실에서 실험만 하는 레이첼은, 지수의 요구에 따라 재배 작물 씨앗, 더스트 분해제 등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지수는 침입자들을 물리치는 장치와 드론을 만들면서 마을을 지켜왔다. 한편 프림 빌리지를 향해 날아오는 더스트 폴이 관측되었고, 작물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최종 수단으로 모스바나를 만들어 숲에 심는다. 죽은 나무들의 영양분을 먹고 무성해진 그 덩굴들이 방패가 돼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마을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침략자들로 인해 마을 사람들은 전부 흩어지게 된다.


프림 빌리지의 엔딩도 똑같았다. 그저 다른 마을들보다 멸망이 좀 더 연장됐을 뿐이다.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인데, 프림 빌리지를 탈출한 두 자매가 챙겨온 모스바나를 마을마다 심었고, 그 식물이 넓게 분포하면서 더스트의 분해 작용을 해나갔다. 또한 지수에게 전수받은 분해제를 만들어 환자들을 살리는 데에도 힘썼다. 두 자매는 모두에게 프림 빌리지와 모스바나를 설명했지만 아무도 믿어주질 않았고, 더스트 협회의 대응기술과 더스트 종식으로 두 자매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 아영은 그들의 이야기를 뒷받침한 소설 ‘지구 끝의 온실‘을 출간한다.


내가 압축한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입체적인 내용의 작품이다. 보다시피 디스토피아 소설이라서 시종일관 암울한데, 오히려 그래서 더 희망을 노래한다고 볼 수 있다. 김상욱 교수의 말대로, 과학은 언제나 희망적이라는 게 바로 이건가 싶다. 약탈과 폭력, 불신이 만연한 환경에서도 인간은 의존할 만한 누군가를 기다린다. 다만 그 대상은 꼭 인간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대다수가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려와 달리 성별이 문제 될만한 장면은 없었는데, 갑자기 퀴어 문학으로 전환됨에 따라 납득이 갔다. 여하튼 내가 질색했었던 ‘이과소설‘과는 여러모로 결이 많이 달라서 좋았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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