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오늘의 젊은 작가 27
은모든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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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어떤 형님은 정말 뜬금없이 자신의 일과를 나한테 보고한다. 보통은 잘 지내는지, 뭐 하고 있냐는지 따위의 안부가 오고 간 뒤에 나 오늘 이런저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대화로 이어지지 않나? 그런데 이 형님은 오늘 뭘 먹을 예정이고 어느 병원에 다녀왔다는, 궁금하지도 않은 제 얘기들을 아주 뻔뻔하게 투척한다. 사회성 만렙인 나님은 아무거나 던져도 맛있게 받아주는 편이지만, 속으로는 이런 걸 왜 얘기하는 거냐고 수십 번은 묻고 싶어진다. 아마 예전 같았으면 일부러 핀잔주어 무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당신의 남다른 사고 회로와 방식들이 서로를 위해서도 좋은 게 아님을 각인시켜주고 싶은 한국인의 오지랖이 내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다름을 받아들일 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뻔하지 않은 삶의 재미를 즐기게 되었다.


이번에 읽은 작품도 그런 식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친근한 척 말을 걸어오고, 주인공에게 이러쿵저러쿵 자기 얘기를 쏟아내는 상황의 연속극. 개인주의가 팽배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내가 한 20대 시절까지만 해도 국민들의 이 같은 네트워크는 분명히 존재했었다. 나 역시 타인들의 친절을 적잖게 받았었고, 곤란한 처지에 있는 이에게는 호의를 베풀곤 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길을 묻는 정도의 짧은 접촉이 아닌 이상 경계하고 무시하고 심지어 깔보기까지 한다. 그것은 나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하여 극 내항인 인 주인공에게 별별 사람들이 다가와 TMI를 꺼낼 때면, 이 얘기를 왜 나에게?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본투비 오지라퍼도 있겠고, 괜히 뻘쭘해서 뭐라도 얘기해야겠다 싶은 이도 있었을 것이다. 뭐가 됐든지 주인공은 본인의 시간이 뺏기는데도 불구하고 묵묵히 남들의 말을 들어준다.


초반까지는 뭐 하러 저 얘기들을 가만히 들어주고 있는 건지 의아했다. 주인공이 막 사람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고, 남들에게 피드백을 부탁받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배경과 상황만 바뀔 뿐, 계속해서 누군가와의 일방적인 대화가 이어지다 보니 작품의 의도를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딱히 기승전결도 없고, 어떤 메시지도 안 보이고, 어떤 독자의 말대로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에 가까웠다는. 모름지기 글쟁이들은 자기가 할 말이 있어서 글을 쓰고 책을 낸다고 생각하기에 이런 정체 모를 작품에도 어떤 뜻이 있으리라 판단되나 아직도 파악이 안되므로 이해하기를 관두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종이가 아깝네, 시간만 버렸네 따위의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인간의 다양성만큼 소설도 온갖 유형이 존재할 테고, 그로 인해 인간의 사고 또한 똑같아지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남들이 재미있다던 책이 내게는 꽝이고, 내가 극찬한 작품이 남들은 시큰둥할 때에 오히려 안심한다.


이 작품은 ‘들어주는‘ 행위의 다정함을 강조하는데, 사회의 때가 잔뜩 묻은 나로서는 퍽 강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기주장이 약한 주인공이 그런 상황들을 뿌리치지 못한 그림으로만 보였거든. 그래도 좋았던 점은, 본인이 적극적이지 않다 해서 타인의 다가감을 애써 밀어내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아무리 사회성이 높은 사람이라도 자신의 기준선을 넘었다 싶으면 거부반응이 일어나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한다. 시대를 갈수록 그 거부반응은 너무 빨리, 또 너무 자주 일어나고, 하다 하다 기분상해죄라는 이름까지 붙여가며 우리 사회를 격리시키고 고립되게 만든다. 쓰다 보니 책 얘기는 안 하고 잡설만 가득했는데 아무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다정한 거라고 하니까, 누가 옆에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하고, 개풀 뜯어먹다 체한 소리를 하더라도 으른의 마음으로 양껏 귀여워해 줍시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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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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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푹 빠져있는 <알쓸신잡>에 출연하는 김영하 작가의 작품이 읽고 싶어졌다. 이분의 책은 <살인자의 기억법>, <작별인사> 이렇게 두 권 읽은 게 전부이다. 분명 글도 잘 쓰고 재미도 있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는 않았더랬다. 이런저런 선입견을 배제하고 좀 더 알아가 볼까 하는 생각에 몇 권을 대출했다. 로맨스물인 줄 알았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어떤 장르라고 딱 규정짓기가 애매하다. 현대판 영적 지도자의 방랑기랄까. 천명관의 <고래>​가 지닌 날것의 감성이 김영하 작가에게도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운.


함구증을 앓던 동규의 단짝인 제이는, 친구의 마음을 읽고 대변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제이는 어린 동규가 보더라도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아이였다. 제이는 동물과 사물의 감정이 느껴진다고 했다. 반면에 사람의 마음은 읽어내질 못했는데, 그런 모순이 오히려 주변인들을 끌어당기는 효과를 발휘했다. 아무튼 이른 나이에 거리로 내쫓긴 제이는 비행하는 떠중이들과 지내면서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가끔 필요에 의해서 폭력을 휘두르긴 했지만 그의 본바탕은 선해서 절대 군림하거나 착취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수많은 똥파리들이 꼬였지만 하나같이 제이는 뭔가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흔히 개과천선하는 이야기가 아니어서 더 매력 있는 작품이다. 제이는 음지의 영역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한 삶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추종자가 점점 늘어나도 명령은커녕 간섭조차 하지 않았다. 중후반부에서는 제이가 오토바이에 빠지고, 그와 세력들의 폭주문화를 근절하려는 경찰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왜 이런 방향으로 트는지를 모르겠다가, 제이와 함께 하던 동규가 친구의 추락을 계속 암시한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추종자들이 추락하고, 제이 혼자만이 세상을 이기었다.


요즘에는 오토바이 폭주족이 사라진 것 같은데, 내가 중학생일 때만 해도 학교 관두고 중국집 배달하다가 폭주족이 된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튼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괜히 반가웠달까. 리뷰를 쓰면서도 여전히 의도 파악이 안되는 작품이다. 적어도 폭주족이 되기 전까지의 제이는 최소한의 선, 윤리, 정의 같은 인간다움이 있기는 했다. 애초에 인간을 이해하는 게 불가했고, 그 자신도 인간이길 포기했다 싶은 삶이었으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은 정도는 있었다. 그러다가 제이를 따르는 사람이 생기면서, 쓸데없는 마찰이 사라지면서부터 그는 서서히 ‘신‘이 되었다. 창조도 파괴도 평화도 자유도 아닌 그저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신. 사실은 잘 모르겠다. 카프카의 소설처럼 해석을 거부하는 작품 같기도 하고.


난해하긴 해도 읽는 맛이 있었다. <알쓸신잡>에서도 느꼈지만 이 작가는 글도 참 영리하게 쓴다. ‘이렇게 쓰면 특정 독자들이 욕할 텐데‘ 싶은 대목이 꽤 있다. 그러면 보란 듯이 그 우려를 상쇄시키는 재치를 발휘한다. 시대를 관통했던 옛 거장들의 작가정신이 느껴져서 좋았달까. 아무튼 잘나가다가 갑자기 폭주족 이야기로 바뀌지만 않았어도 별 다섯은 주었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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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 모중석 스릴러 클럽 43
제프리 디버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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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고른 책들이 죄다 꽝이었다. 연달아 중도 하차를 하다 보니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기분전환할 겸 제프리 디버를 읽어주었다. 역시 언제 읽어도 꿀잼을 보장하는 애정 작가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전작을 섭렵하는 독자들도 있는 반면 나님은 아껴두었다가 위기일 때 꺼내 먹는 편이다. 아무튼 덕분에 이번 위기도 무사히 넘긴 기념으로 짧고 굵게 평을 남겨본다.


캘리포니아 CBI 요원 캐트린은, 대상의 보디랭귀지를 읽고 프로파일링하는 동작 전문가이다. 용의자 및 범인의 자잘한 동작에서 속내를 캐치하여 수사를 돕는 포지션인데, 이번 편에서는 동작학이 전혀 무용지물인 대상을 만난다. 대충 아이유 정도의 파급력을 지닌 가수의 스토커를 상대한다는 내용인데, 망상에 아주 단단히 빠져있어서 동작학이 전혀 먹혀들질 않는다. 가수가 팬들에게 돌린 전체 메일을 마치 본인에게만 쓴 연애편지처럼 생각하고 또 애인관계처럼 여기며 그녀에게 접근하는 스토커 센세.


범인의 살인 계획이 매우 참신하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범인은 항상 신호를 알려왔다. 그것은 가수의 타이틀곡 1절만 틀고, 1절의 가사와 연관된 장소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식이었다. 4절까지 있는 그 노래 가사를 통해서 가수의 측근이 죽어나가는, 러시안룰렛의 뉴타입이랄까. 콘서트 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사건은 계속 발생하고, 용의자마저 파악이 안되는 답답한 상황이다. 초반부터 접근해온 스토커가 유일한 용의자인데, 심증만 있다 보니 막 건들지도 못한다. 독자 입장에서는 스토커가 미끼 역할이라는 걸 알지만 그냥 넘어가지도 못하는 게 광팬의 수준을 넘어선 정보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스토커는 가수의 개인 정보들과 음악적인 것들과 주변인들의 사적인 비밀들까지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가수와 팬 관계의 선을 자꾸 넘었지만 딱히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으니 그저 지켜보는 일 외에 뭐가 없었다. 진짜 심각함.


평소 휘몰아치기를 즐겨 하는 디버 치고는 좀 평범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일단 캐트린의 활약이 너무 약소한데다 이번 편의 주인공인 가수 케일리도 내내 울고 무기력한 모습밖에 보여주지 못했다. 슬슬 실망하려던 차에 가수의 열혈 팬인 선거 후보자가 등장한다. 여기서 독자들은 가수를 선거운동에 이용해먹는구나 할 텐데, 흐름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이어서 캐트린은 링컨 라임을 현장으로 초대해 법과학으로 범인을 검거한다(등장만으로도 든든한 빛링컨). 그렇게 종결된 줄 알았더니 또 어디선가 4절이 반복 재생되어, 아직도 끝난 게 아니었다는 공포가 솟구친다. 그리고 미끼가 미끼를 낳았음을 알게 된 캐트린은 마침내 몸짓의 동작학에서 언어의 동작학으로 각성한다. 그래, 내가 알던 디버는 바로 이런 맛이었지.


비상시에만 꺼내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저자의 전작을 다 읽어간다. 그나저나 내 스타일의 작가를 발견하기가 왜 이리도 어렵냐. 솔직히 나도 아무 책에나 재미를 느끼고, 남들처럼 열광할 만한 작가가 많다면 좋겠는데 말이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 한반도에 비주류로 태어나 마이너 취향을 가진 자의 설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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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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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제목에 끌려서 읽은 작품이다. 프랑스 문학이라 별 기대는 안 했다만 역시나였다. 개인적으로 작별이란 말을 들으면 다신 만나지 못할 것만 같은 슬픔이 몰려든다. 그래서 이별과 작별의 차이가 무언지 검색해 봤다. 이별은 알다시피 갈라서 헤어짐을 말한다. 그런데 작별은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거란다. 둘 다 같은 용도로 쓰이지만 작별은 뭐랄까, 재회의 가능성을 지녔다는 느낌이 강하다. 혹여 현생에서 불가하다면 천국에 가서라도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겨자씨만 한 희망을 품게 한달까. 헤어진 마당에 무슨 희망을 바라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쩝.


두 편의 중편을 묶어놓은 작품이다. 표제작인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만 리뷰하겠다. 두 편 모두 저자의 자전소설인데,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는 영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표제작만 있는 단행본이었다면 더 좋았을 듯. 소년 레몽의 가족들은 전쟁을 피해 시골마을 트랑으로 피난 온다. 10명의 형제자매는 서로 잘 놀았고, 마을에서도 금방 적응하고 잘 지냈다. 어느덧 형들처럼 레몽도 기숙 학교에 들어가면서 점점 가족 전체가 모이는 게 어려워졌다. 언젠가부터 부모님은 싸우기 시작했고, 그래서 트랑의 집은 더 이상 사랑과 평화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고, 성인이 된 형제들은 흩어지고, 레몽 또한 프랑스를 떠난다. 이후 어머니의 질병 소식으로 다시 트랑에 돌아온 주인공은, 옛 향수를 절대 느낄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한다.


냉정하게 말하면 흔하디흔한 일반 가정집의 역사이다. 한 집안의 자식들이 성장하여 각자의 삶을 찾아가고, 부모는 곧 세상을 떠나게 되는 것. 특별히 더 슬플 것도 없고 이상할 것도 없는 매우 자연스러운 순리이다. 물론 가족 중에 누군가가 다쳤거나 병에 걸렸거나 하는 내용들은 별일이 맞지만, 그것도 삶의 한 조각일 뿐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덤덤하고 무미건조하게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여전히 부모와 형제, 고향 땅과 집을 사랑하고 추억하지만 어릴 때만큼의 에너지는 아니어서 자신에게 실망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게 너무 이해가 된다. 정들었던 사람과 공간, 사물들에 더는 정을 느낄 수 없을 때. 또는 정이 가지 않는 자신을 느꼈을 때. 그 모든 날들에 우리는 손을 내밀며 작별을 나누곤 했다. 순리대로 살아갈 것을 소망하며.


저자가 어떤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써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붙잡으려 할수록 달아난다는 인생 법칙에 의거하여 순리대로 살자는 생각이다. 이것은 내 나름 2025년의 교훈이었다. 나의 글쓰기도, 이 공간도 언젠가 작별하게 된다면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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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리커버)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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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롱패딩의 계절이 돌아왔다. 바깥은 찬바람이 쌩쌩 불지만 카페 안에서는 여전히 아이스커피를 마신다. 길가에는 낙엽이 다 져서 앙상해진 나무도 있고, 사시사철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들도 있다. 어떤 이는 춥다며 히터를 틀고, 누군가는 건조해서 가습기를 켠다. 이렇듯 겨울은 다양한 생활양식을 제공하는 신기한 계절이다. 문득 사람마다 겨울을 인지하는 기준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입동이 시작돼야 겨울의 시작이라거나, 기온이 영하권으로 되어야 한다거나, 수능일을 기준으로 겨울이라거나, 패딩을 입기 시작할 때부터라거나. 각자의 기준에는 계절변화를 인식시켜준 어떤 추억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게 또 무엇이냐에 따라서 겨울은 추운 계절이기도 하고 따뜻한 계절이 되기도 한다. 예외도 있는데, 내 마음은 1년 내내 겨울이라서 추운 줄도 모르겠다고나 할까.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이번 작품은 일부러 겨울이 올 때까지 참았다가 읽었다. 올해 읽은 책 중에 베스트 5 안에 들 만큼 좋았지만 너무 애처로워서 두 번은 못 읽을 작품이었다. 진짜 울컥하고 숨이 막혀서 읽다가 멈추기를 여러 번 반복했단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리뷰를 남기고 싶지 않은데 그랬다간 이 감정들이 길게 갈 것 같아서 빨리 털어내는 게 나을 듯하다. 말하자면 양 옆집에 사는 이들의 불행 잔치인데, 이거야말로 하이퍼리얼리즘이라며 박수 친 나와는 달리 요즘은 너도나도 불행하므로 이런 이야기에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겠다. 도파민에 절여진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계절은 겨울뿐이다.


701호 사는 50대 여성 공명주. 모친의 시신을 집안에 보관해두고, 모친의 연금으로 겨우 생활하는 중이다. 이혼한 데다 화상을 입어 일할 몸도 아니었고 재산도 없었던 그녀는, 불행한 삶을 안겨준 세상에 그렇게라도 복수하기로 했다. 문제는 여기저기서 모친의 안부를 묻거나, 모친의 휴대폰으로 연락이 오는 등 아주 난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는 거였다. 여기에 곧 대학을 졸업하는 딸이 갑자기 찾아와 돈을 요구한다. 또 얼마 뒤에는 익명의 전화가 와서 당신이 한 일을 알고 있다며 계속 협박해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발생하는 불행들이 그녀를 대체 어디까지 데려가려는 걸까.


702호 사는 20대 남성 박준성. 뇌졸중 환자인 부친을 고등학생 때부터 홀로 모시고 있다. 도망 친 형이 남긴 대출금의 빚과 부친의 치료비 때문에 그는 밤마다 대리운전을 뛴다. 간병하느라 학교도 못 다니고 직장도 구하지 못했지만 그는 결코 부친과 집안을 원망 않고 건실하게 살아간다. 그러다 가스레인지 사고로 부친이 입원하게 되자 이제는 부친의 건강보다도 돈 걱정이 앞서기 시작한다. 다급한 마음에 외제차를 대리 뛰다가 기어이 사고가 났고, 그 피해 보상을 메꾸려면 장기라도 적출해야 할 판이었다.


적어도 내겐 이들의 불행이 허구의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았다. 대체 누가 신은 공평하다고 했는가? 노력이 재능을 이길 수 있다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다 꺼지라 그래. 이제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도 안 하는 세상이올시다. 한때는 불우이웃을 보면서 위안을 삼아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근데 그렇게 정신승리해 봤자 내 삶이 더 안락해지는 것도 아니다. 어떨 때는 내가 불우이웃하고 어디가 다른지도 모르겠거든.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이해할 나이가 되고 보니 불행이 불행을 불러온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주인공의 연쇄적인 불행을 보며 온통 극단적인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안개가 걷히고 빛이 들 거라는 확신이 들어야 희망을 갖는 거지, 안 그래?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더니, 불행 또한 그러했다. 각자의 불행을 공유한 두 사람의 걱정은 더 커지기만 했다. 상대방에게 의지하고 말 것도 없었지만 동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아마도 이것이 저자의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한다. 지금 현대인들의 삶은 여러 가지의 이유로 고립되어 있다. 그렇게 모든 희로애락이 개인의 몫이 되다 보니 타인의 호의를 무슨 빚진 것처럼 여긴다. 이 꼬여있는 사회문화를 어디까지 이해해 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잡다한 이유로 우리는 단절되었고, 그래서 타인의 불행과 아픔에도 무관심해져버렸다. 하지만 어두울수록 작은 불빛도 잘 보인다지?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도무지 희망을 찾아볼 수가 없는 작품이다. 저자는 삶의 터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박살 내버린다. 그런데도 나는 두 사람의 공유된 불행에서 어떤 빛을 발견했다. 차마 그것을 희망이나 용기라고 부를 순 없겠지만 불행에 삼켜짐을 막아줄 무언가가 분명하다. 이 겨울이 영원토록 지속될지 스쳐가는 계절이 될지는 그 무언가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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