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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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 전쯤인가. 학생, 청년들에게 노력만을 강조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공과 행복을 거머쥐지 못한 이유는 다 노력이 부족한 내 탓이라고 믿었다. 특히 나처럼 공부 못한 친구들은 정말 그렇구나 했더랬다. 그러다 코로나 전후로 해서 안정적인 삶은 이제 노력의 유무나 질량과는 별 관계가 없어졌고, 툭하면 노력 타령하던 윗세대들과 공익광고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지름길도 없고, 정공법도 안 먹히고, 운빨조차 다 떨어졌음을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늘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지켜보던 나는 항상 생각했다. 어차피 결과가 뻔하다면 굳이 아등바등 열심히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적어도 지금은 비관적인 태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갓생에 흠뻑 취한 이들을 볼 때마다 꼭 저렇게 힘주고 살아야 하나 싶어서.


<스노볼 드라이브>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호불호가 심한 장르이지만 나님은 정말 좋아한다. 대 자연과 시스템 앞에 무력하고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열악한 조건에서도 참고 버티는 인간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어서다. 단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오만한 인간들을 향한 경고탄처럼 느껴져서 그렇다. 이젠 아무리 긍정 회로를 돌려봐도 인간 세상은 멸망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스노볼 드라이브>는 그런 종말의 바램이 현실로 나타난 이야기이다. 피부 발진을 일으키는 ‘녹지 않는 눈‘이 지구를 덮친다. 수분을 빨아들이는 눈 때문에 땅과 나무, 강이 다 말라버렸고, 인간의 모든 산업과 일상은 마비가 되고 말았다. 대강 이런 배경과 분위기이다.


6월 어느 날에 웬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운동장에 있던 중학생들은 이내 비명과 구토 증상 등 아수라장이 된다. 이때 통증으로 꼼짝 못 하는 ‘모루‘를 이사장의 아들 ‘이월‘이 구해낸다. 그날로부터 멈추지 않는 ‘겨울‘로 인해 많은 일자리가 없어졌고, 그 자리를 제설작업 및 눈 소각장 처리반이 차지했다. 모루의 엄마는 병으로 죽고, 트럭을 몰던 이모는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다. 얼마 뒤 발견된 이모의 트럭 사고 현장에서 이모는 안 보이고, 웬 스노볼 하나가 차 안에 있었다. 문득 모루는, 자신을 구해냈던 친구가 데려간 이사장실의 스노볼 컬렉션이 떠올랐다.


성인이 된 모루는 기숙사를 제공하는 특수 폐기물 처리 센터에 입사한다. 이 소각장으로 실려오는 눈더미 속에는 죽은 동물 사체와 심지어 인간 시체마저 섞여있을 때가 많았다. 하여 혹시나 이모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그녀. 그건 마치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목표로 일평생을 날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현대에 와서 ‘복수‘는 반드시 해줘야 하는 개념이 되었다지만, 정의의 실현에도 어떤 허무와 후회가 남는 걸 보면 절대 현명한 선택이라 볼 순 없다. 그렇다고 모루 같은 입장에게 잊어버리라며, 그러지 말라며 말릴 수도 없다. 미쳐버린 세상에서는 나도 차라리 무언가에 미쳐있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모루와 이월의 시점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강압적인 아빠 밑에서 자란 소년의 유일한 친구는 기르던 개였다. 그 친구가 죽고, 그나마 조금 가까워진 새엄마도 자살한다. 화장시키려는 아빠에 대한 반항으로, 이월은 운송업자에게 연락하여 시신 운반을 요청한다. 그렇게 해서 이월과 모루의 이모가 만나게 된 것. 눈 속에 묻어달라는 새엄마의 유언을 받들어 마땅한 장소를 찾다가 졸업했던 중학교로 향하는 이월과 이모. 폐교된 이곳 어딘가에 새엄마가 좋아했던 스노볼들을 같이 묻어주고 숨 좀 돌리던 차에 지역 강도들이 들이닥친다. 트럭을 타고 도주하다가 이월만 어딘가에 내려주고, 이모는 강도들을 따돌리며 떠나간다. 홀로 남겨진 이월은 그 길로 폐기물 센터에 입사하여 모루와 재회한다. 그녀는 이월이 지니고 있던 스노볼을 보면서 불안의 조각들을 맞춰보기 시작한다. 이렇듯 디스토피아의 진짜 공포는 생활의 붕괴보다도 연대와 신뢰의 상실에 들어있다.


이모에게 부탁받은 이월은 모루에게 사건의 전말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을 숨긴 채로 그녀와 잘 지내는 것도 가시방석이었다. 눈치 빠른 모루는 그를 추궁하여 자백을 듣고서 절규한다. 이렇게 될까 봐 이모는 그에게 당부했던 거겠지.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근거 없는 희망은 이 악몽을 버틸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것이 누군가를 숨 쉬고 살아가게 한다면 비록 환상일지라도 가만 놔두는 편이 옳지 않나 싶은 거다. 앞서 말했듯이 무언가에 미쳐있으면 그럭저럭 살만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헛되고 거짓된 삶이라 해도 그걸 깨뜨릴 권한이 내게 있는 건 아니거든.


냉철하게 말하면 두 주인공은 이유야 어찌 됐든 사서 고생을 자처하는 타입이다. 마치 다람쥐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쳇바퀴를 돌듯이 말이다. 그러면 이런 의문도 든다. 도전과 투쟁은 무조건 옳고 위대한가? 이월은 아버지의 권위에서 벗어나느라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다. 모루도 이모 때문에 목숨이 위험한 소각장으로 출근했다.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더 큰 위험으로 뛰어들어, 까딱하면 개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단 말이다. 압박과 시련에 굴복하느니 확 저질러보라던 인간의 도전정신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노력‘이 아직 먹혀들던 시절까지는. 허나 어떤 시도에도 같은 결과뿐이라면 ‘사느냐, 죽느냐‘ 같은 생존 철학이 의미를 잃어버려, 어떤 희망 앞에서도 회의적인 태도가 된다. 그동안 이런 유의 작품을 읽으면서 억지로라도 새 희망을 다짐하고 청춘을 응원했다지만 이제는 안 그럴란다. 오라, 달콤한 멸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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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투맨 오늘의 젊은 작가 46
최재영 지음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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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전까지의 나는 글쓰기는 고사하고 책 한 권 읽지 않는 인간이었다. 점점 인간관계가 좁아지면서 남아도는 시간을 무얼로 때울까 하다가 채택된 것이 독서였다. 말하자면 그게 가장 싸게 먹힌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독서도 독서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허전해서 기록도 같이 하기로 했다. 헌데 리뷰란 걸 써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래서 남들이 쓴 리뷰를 눈팅으로 좀 배워볼까 했드만 어림도 없었다. 그럴수록 나 자신의 멍청함을 알게 되었고, 깨끗이 인정하며 정말 기록을 위한 글만 적었다. 아무리 길게 써봐야 고작 네다섯 줄이 다였다. 그만큼 머리 회전이 안되는 본투비 빡구였다.


글쓰기는 몰라도 독서의 매력을 점점 알아가자, 나의 뚝배기에서도 뭔가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 정체를 알고 싶어서, 또 내가 놓친 것들을 도움받고 싶어서 기존의 리뷰들을 찾아 읽었지만 대부분이 쓰나 마나 한 감상문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런 글들을 보면서 나 같은 건 흉내도 못 낼 대단한 글이라고 여겼는데 말이다. 이제 보니 알맹이는 하나도 없는 데다 온통 칭찬 일색의 복제된 글들뿐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나의 글쓰기 욕구가 솟아난 게. 그때의 나는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리뷰를 쓰고 싶었다기보다 한국의 서평 문화에 찬물을 끼얹고 싶어졌다. 결국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반항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툴툴대는 문체가 되었고, 덕분에 남들은 차마 못 꺼내는 얘기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유튜브 셜록현준 채널에 나온 유홍준 교수님이 그러셨다. 글이란 건 내가 남에게 들려주고 싶은 내용을 적는 거라고. 그처럼 나는 앞사람과 대화한다 생각하고 글을 써왔다. 사람마다 대화 코드의 맞고 안 맞고 가 있듯이, 내 글이 취향인 분들은 환호해 주었고 아닌 분들은 냉담했다. 매번 나의 글은 그 대비가 뚜렷했다. 반항심을 가질 때부터 대중성은 포기했기 때문에 상관하지 않았다. 참나, 누가 보면 작가 지망생인 줄 알겠네.


노잼인데 이게 왜 명작이야? 그걸 또 좋다고 난리 치는 사람들은 뭐야? 물어보면 뭐가 어떻게 좋은 지도 모른대. 한국인들은 자기감정에 이다지도 솔직하지 못한 걸까. 원래도 세상에 불만이 많았던 나는 지성인을 자처하는 무리와 가식적인 문화에 커다란 염증을 느꼈다. 어째서 책도 서평도 꼭 가치 없는 것만 주목받는 걸까. 그때는 알지 못했다. 가치라는 건 다 상대적이고, 그래서 똥글에도 인기와 명성이 주어진다는걸. 그래, 원래 세상이 다 그런 거잖아. 진정성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지. 오직 유행과 명성에 승차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부터 저항을 관두고 이런저런 타협을 시도하게 된 듯하다. 하여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의 내 글은 정말이지 형편없다.


책 리뷰는 안 하고 왜 이런 얘기나 하고 있느냐면, 주인공들의 고뇌가 남일 같지 않아서 그랬다. 이제는 진부하다는 표현도 아까운, 어지간히도 안 풀리는 작가들의 이야긴데 전혀 진부하지가 않았다. <맨투맨>은 흔한 성공신화가 아닌 실패담에 가까운 내용이며, 현대 실존주의의 철학을 그려낸다. 그래서 옆 나라 소년만화처럼 심금을 울리는 문장들이 자주 나온다. 최재영 작가는 인생이라는 링 위에 오른 선수들과,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싸움과, 그 싸움에 흥미 없는 관중석까지 전부 나와 당신의 얘기라고 말한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 영호가 한물간 ‘로키‘를 동경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도 쓰레기가 아니란 걸 느끼고 싶어서이다. 계속 실패만 반복하는 자신을 그래도 증명하고 싶거든. 여튼 ‘로키‘의 영향을 받아쓴 ‘맨투맨‘의 시나리오는 대략 이렇다. 남성호르몬 과다로 건장해진 여고생 초롱이 MMA 선수가 된다는 내용. 설정은 좋았으나 시나리오는 계속 반려된다. 소위 ‘야마‘가 없다는 이유로. 결국 시나리오 수정은 그의 손을 떠나 혜진에게 주어진다. 그녀도 영호 못지않은 무채색의 소유자였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공동작업에 들어간다. 그런데 학교 선배인 옥빛 누나가 혜진을 조심하란다. 그녀는 주변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탈수기‘라면서.


혜진이 자신과 동족임을 영호는 바로 알아챘다. ‘맨투맨‘이 안 되면 이 바닥을 떠야 할지도 모르는데, 과연 혜진에게 작업 수정을 맡겨도 괜찮을까. 일단 두 사람은 ‘맨투맨‘의 주인공 초롱이의 캐릭터를 구축하기로 한다. 그러나. 초롱이에게는 이렇다 할 욕망이 없었다. 요즘 유행하는 요소들의 총집합으로 안전빵을 노렸지만, 오히려 그것이 초롱이의 발목을 붙잡는 셈이었다. 도전정신은 일절 없고 그저 무탈했으면 하는 영호의 무채색이 매력 있을 리가 있나. 안전한 삶을 추구하는 현실 세계와는 달리, 작품 속에서는 결함 없는 캐릭터가 먼저 추락하는 법이었다.


이어서 영호의 아는 형님, 치성이 등장한다. 17년째 활동 중인 격투기 선수인데, 실력에 비해서 여태 못 뜬 비운의 사나이다. 사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매번 심판의 판정승으로 이긴 탓에 관중들이 그의 시합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영호는 치성에게 무난한 경기보다 화끈한 쇼맨십 좀 해보라고 하려다가 관둔다. 그 지적은 곧 자신을 향한 것이었고,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굴 가르치나 싶은 거다. 이런 상황은 현실에서도 자주 일어난다. 도움이 되고 싶지만 ‘너나 잘해‘라는 말을 들을까 봐 다가가길 멈춘 순간들. 정말 하이퍼리얼리즘이 따로 없다.


안되는 거 길게 붙잡지 말고 다른 일 알아보는 게 맞는 걸까. 여태 해온 게 아까워서, 배운 게 이것뿐이라서, 아직 희망이 없진 않아서 등등등. 여러 핑계와 변명으로 버티고 있단 걸 너도 알고 나도 안다. 내 능력의 한계는 이미 드러났고, 그럼에도 때려치울 용기가 없어서 이러고 사는 걸 우리 모두가 안다. 무엇보다 이 자존심을 버렸을 때 주위에서 날아들 흉과 손가락질이 너무나도 두렵다. 현대인이라면 다 겪는 공포가 아닐까. 헌데 옥빛 누나는 달랐다. 일찍이 탈선하여 다른 길로 가서 성공한, 지금 보면 참 부럽기 그지없는 케이스였다. 사실 이런 건 시간이 지나봐야 알지, 그 당시에는 무모하다며 욕먹기 딱 좋다. 그럼에도 결단을 내리고 개척자가 된 옥빛 누나야말로 승자 중에 승자였다. 그러면 영호와 혜진, 치성이 형은? 이들은 다 패자 확정인 걸까? 정답이 없는 질문은 곧 패자뿐인 경기나 다름 없었다.


또 다른 자아라고 할지, 정신적 대필 작가라고 할지, 뭐 그런 게 영호와 혜진에게는 있었다. 종종 찾아오는 그 목소리에 자신을 의탁하면 맨정신일 땐 절대 없을 결과물이 탄생한단다. 흔히 말하는 뮤즈나 악마일 텐데, 그걸 의존하는 것은 곧 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세상과 타협한 작품을 ‘내 것‘이라고 말하기 창피할 테니까. 그래서 인간은 질 것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영호의 담당 피디는, 처리하기 곤란한 인물은 총으로 쏘든지 해서 빨리 퇴장시켜버리라고 했다. 과연, 링에는 제대로 붙을 의지가 있는 사람만 서있는 법이다. 영호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질질 끌다가 판정승을 하느니 차라리 화끈하게 져버리라고. 그것이 관중들에게 더 기억에 남는 시합이라고. 어쩌면 오늘날의 실존 문제는 이런 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실패라는 놈에게 맨투맨 마크를 당해온 우리의 인생. 공포의 그림자는 어딜 가든 우리를 압박 수비하며 졸졸 따라다녔다. 그 기세에 눌려 우리는 계속 숨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초롱이는 평생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인간은 결단을 하고 선택을 해야 한다. 아무것도 고르지 않는 것은 중립도 아니고 균형을 잡는 것도 아니다. 어중간한 사람은 언젠가 퇴장당하게 되어있다. 소심해서 무해한 인간으로 살아온 영호처럼, 겁이 많은 나 역시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왔다. 나의 까칠했던 예전 모습들도 ‘실패‘에게 전담 마크를 당해서 그랬던가 싶다. 예전의 나는 ‘선택‘을 했음에도 휘청였고, 지금의 나는 ‘타협‘을 했음에도 똑바로 서있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승자보다 패자의 드라마가 더 그럴싸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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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방문객 오늘의 젊은 작가 22
김희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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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소설만 계속 읽어서인지 국내 소설이 읽고 싶어졌다. 그래서 당분간은 국내 소설만 읽을 생각이다. 도서관에서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만 잔뜩 빌렸는데, 내 머나먼 기억에는 요 시리즈가 거의 평타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처럼 <두 방문객>도 읽자마자 단숨에 완독했을 만큼 만족스러웠다. 분량이 길지는 않은데, 막상 리뷰하려니 퍽 어렵게 느껴진다.


상운이 교통사고로 죽은 지도 벌써 3주기가 되었다. 그가 지은 양평 집에 와있던 어머니는, 한 커플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다. 그들은 상운의 절친이었고, 그 가족들을 위로해 드릴 겸 며칠간 묵기로 한다. 알고 보니 남자애는 이 집을 설계하고 지어준 사람이었고, 아들은 그의 클라이언트였다나. 아무튼 이들의 위로와 헌신에 얼음장 같은 마음이 녹아내리던 어머니는 갑자기 흠칫한다. 그것은 여자애의 끼고 있던 반지가, 아들의 반지와 똑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아들의 죽음은 여러 가지로 의문이었다. 매년 독일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아이가 그날은 왜 강릉을 간 걸까? 완벽주의에다 모범생이었던 아들이 어째서 음주 운전을 했을까? 게다가 같이 사망한 조수석에 여성은 또 누구고? 아들은 분명 여자친구가 없었는데. 그러다 문득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던 아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 대상의 특징이 이상하게 방문한 여자애와 맞아떨어지는 게 아닌가. 그래서 어머니는 여자애가 상운과 만나다가 이제는 저 남자애와 사귀는, 그러니까 혹 삼각관계가 아니었나 싶은 의심이 든다. 그러면 더욱더 아들의 생일을 기념하러 왔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남자애는 상운이 숨겨둔 ‘무언가‘를 몰래 찾느라 죽을 맛이었다. 결국 여자친구에게 방문의 목적을 들켜, 진상을 밝히고 다시 수색에 나선다. 한편 상운의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과 친했다면서 3년 만에야 찾아온 것도 그렇고, 이 친구의 애도가 좀 과하다 싶어 이래저래 찜찜한 상태다. 잘은 모르지만 여자애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남자애가 자기만큼 자신을 사랑하진 않는단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조만간 결혼할 거고. 점점 자신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려던 순간, 남자애가 하고 있는 목걸이에 걸린 반지를 보게 된다. 이로써 세 친구의 우정 반지였음을 깨닫고 한숨 놓는 어무이. 아, 진짜 흡인력이 미쳤다.


이어서 여자애의 대학시절 회상으로 넘어간다. 그녀는 남자애한테 반해 고백하지만, 그는 누구와 연애할 마음이 없다면서 거절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집착과 설득으로 맺어진 연인 관계가 지금까지 왔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은 맹숭맹숭한 구석이 있었다. 몇 년 후 그는 자신의 첫 고객인 상운의 집을 지어주면서 아주 그냥 사랑에 눈을 떴고, 여자애는 어쩌다 이런 남자를 사랑하게 됐을까 하며 착잡해했다. 손발이 척척 맞는 두 남정네를 보면서, 그녀는 상운이 그냥 죽었으면 싶어 했다. 그 소망은 훗날 현실이 되었고, 그 후로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려온 그녀. 이로써 상운의 미스터리한 죽음에는 그녀의 뭔지 모를 개입이 있었다는 말일까. 그러면 남자친구가 상운의 집에서 찾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마침내 상운의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듣는다. 아들은 본인의 ‘완벽함‘ 때문에 죽어야만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들을 죽음에 밀어 넣은 것은 자신이었다. 그와 똑같은 생각을 두 방문객도 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결정이 상운을 고립시키다 못해 벼랑 끝으로 밀어낸 게 아니었을까 하고. 이런 유의 결말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뭐냐면, ‘불편한 진실을 꼭 알아야겠는가‘ 하는 것이다. 상운의 어머니도 그랬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몰랐어야 했다고. 그러나 모른다는 건 경우에 따라서 ‘죄‘가 된다. 삶이 던져준 힌트들을 무심코 지나쳤단 걸 알고 나면 더더욱 말이다.


스포를 피해 가면서 쓰는 글은 역시 한계가 있다. 개인적으로 울림은 없었지만 겁나 재밌게 읽었으니 강추한다. 처음 보는 작가인데 이 분도 이야기꾼이시네. 검색해 보니까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의 저자인 장은진 작가의 동생이란다. 본명이 김은진 작가였구나. 자매가 이렇게 글을 잘 쓰다니, 세상에나. 아무튼 즐겁게 읽었고요, 다른 작품들도 매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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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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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은 로맹 가리가 필명인 ‘에밀 아자르‘로 낸 4개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여러 번 말했지만 나님은 프랑스 문학과 궁합이 정말 안 맞는 편인데, 이상하게 로맹 가리의 글은 일말의 거북함 없이 잘만 읽었다. 알고 보니 그가 유태계 프랑스인이라고 해서 단박에 이해가 되었다. 세계문학을 읽다 보면 이렇게 출생지와 성장지가 전혀 다른 작가들이 많은데, 그들의 글에는 항상 정체성과 씨름하는 고뇌가 담겨있었다. 하여 같은 주제를 다루더라도 그 깊이가 남다름은 어쩌면 당연하다고나 할까.


몇 년 전, 로맹 가리의 <노르망디의 연>을 읽다가 중도 하차했던 기억이 난다. 글맛도 없고 지루한 데다 진도가 너무 안 나가서 힘들었었는데, <자기 앞의 생>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서 놀라웠다. 이 작품은 열 살짜리 아랍인 모모의 눈높이에서 세상의 모순을 발견해나가는 내용이다.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는 매춘을 은퇴하고, 갈 곳 없는 창녀들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고 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입양되어 떠나지만 모모는 홀로 남아서 늙고 병든 로자 아줌마를 지키기로 한다. 그리고 ‘생‘의 잔혹한 실체를 마주할 때마다 소년은 어른이 되어갔다.


배경이 배경인 만큼 버려지고 소외된 인물들이 연달아 나온다. 특히 모모와 같은 매춘부의 자녀들은 그야말로 인생에 어떤 선택권도 없다. 그 고귀하다는 ‘생명‘의 이유가 고작 태어난 김에 살아야 하는 데에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아이들은 본인의 삶이 부당하고 불공정하다는 생각조차 하질 못한다. 그저 앞집 아저씨는 이래서 힘들고, 뒷집 아줌마는 저래서 힘들게 살고 있구나 할 뿐이다. 그러다 로자 아줌마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동시에 모모의 성숙함이 발현된다. 그래봤자 어린이의 사고 수준을 넘어서진 못했고, 그래서 무척이나 고통받는 소년은 ‘생‘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작중에서 모모는 자신을 예뻐해 주는 어른들을 종종 만난다. 병수발에 지친 모모는 언제라도 로자 아줌마를 떠나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그녀 곁을 지킨 것은, 그녀가 자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가면 갈수록 아줌마의 정신이 혼미해지고, 거동이 불편해지고, 애통과 탄식이 늘어남에도 별일 아니라며 그녀를 안심시키는 소년. 뇌 혈증으로 의식을 잃어가는 아줌마를 병원으로 옮기자는 의사와, 살아날 희망도 없는데 입원하기 싫다는 아줌마의 사이에서 모모와 독자는 ‘생‘의 존중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병원과 의사를 대놓고 불신하는 아줌마의 태도는, 과거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깊이 각인된 어떤 아픔들은 그 사람의 평생을 휘젓고 짓누른다. 마치 성체가 되어서도 밧줄을 벗어나지 못하는 코끼리처럼.


모모는 자신과 아줌마를 괴롭히는 원인이 ‘생‘이라고 보았다. 인간이 늙고 병드는 것, 영화의 되감기처럼 시간을 돌릴 수 없는 것, 누군가에게서 자신이 잊혀지는 것, 이 모두가 ‘자연의 이치‘라면 차라리 자연을 거스르는 편에 서기로 했다. 그것은 ‘생‘을 경멸할 수 있는 저만의 방식이었다. 그것은 어떤 선택권도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저항이었다. 언젠가 모모를 아꼈던 하밀 할아버지가 해주었던 말.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모모는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써 그 사랑을 실천했고, 세상을 거역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까지도 사랑하였다.


성경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롬13:10)이라고 했다. 그 말은 완고한 조건, 규율, 상황, 법칙도 사랑 앞에선 무효라는 뜻이다. 모모의 하얀 거짓말들이 불쾌하지가 않은 것도 다 사랑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유대감이 다 끊어져 버린 듯한 오늘날, 나 역시도 ‘생‘을 원망하지만 그 원망의 기초도 사랑이었음을 이내 깨닫는다. 사랑은 아이를 어른으로, 어른을 아이로 바꾸어놓는다. 이 자연의 이치만큼은 모모도 거스르지 못했다. 모순 투성이인 세상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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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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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하다던 <안나 카레니나>를 드디어 독파했다. 명성과는 달리 드럽게도 재미없었고, 마구마구 스킵 하면서 읽었는데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아무래도 나는 교양 있는 톨스토이보다도 야만적인 도스토옙스키가 취향인가 보다. 일단 나님은 ‘이름‘이 제목인 작품들에 대한 어떤 편견이 있다. 그런 작품들은 대체로 노잼이거나 아님 난해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내가 좋아하는 <스토너>도 솔직히 노잼이 맞고, <데미안>도 심오하기 짝이 없다. 또한 나님의 인생책인 <돈키호테>도 굉장히 호불호 갈리는 작품이 아니던가. 그런고로 <안나 카레니나>도 별 기대 없이 읽긴 했지만 진짜 이 정도일 줄은 짐작도 못했다네.


나에게 크나큰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속이 좁아서 그런지 가해자들을 결코 용서해 줄 마음이 없다. 가끔 학폭 연예인에게 사과받은 피해자들이 용서했단 소식을 듣는데,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도 안 가고 용납도 안된단 말이다. 가해자가 죄를 뉘우치고 갱생의 삶을 보낸다 한들 그건 그거고, 내 심정은 그가 평생 저주와 고통 중에 살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것처럼 나는 주인공 안나의 용서받지 못할 죄와 허물을 죽어도 용서해 줄 수가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읽는 내내 안나가 진짜 미치도록 혐오스러웠다. 온갖 교양 있고 고상한 척은 다 해놓고, 불륜남의 애까지 가진 채 남편을 대놓고 상처 주고 욕보이는 그 꼬라지가, 정녕 사람이라면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 안나 부부에게 이런저런 상황을 줘가면서 참회와 용서를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양 연출하고 있는데, 아무리 시대와 정서가 다르대도 그렇지, 이건 진짜 아니잖냐는 말 밖에 안 나왔다. 나의 이 수준 낮은 감상이, 전 세계가 극찬하는 명작의 진정한 가치를 깎아내렸는지도 모른다. 그래, 지금 나는 작품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읽고 이상한 포인트에 꽂혀 헛소리를 하는 걸 수도 있다. 설령 그렇다 해도 지금으로썬 그럴듯한 작품성을 논하기가 어렵다. 근 몇 년간 읽은 것 중에 이토록 불쾌한 작품도 없었단 말이다.


키티가 레빈을 두고 훨씬 스펙 좋은 남편감을 골랐을 때는 내가 다 수치스러워서 혼났다. 곧이어 똥차를 골랐다는 걸 알고서 바로 태세 전환을 한 키티도 솔직히 밥맛이었고, 그녀에게 치욕과 모멸감을 받은 레빈이 그렇게 금방 헬렐레하는 것도 너무나 한심했다. 퇴짜 맞고 그렇게나 괴로워했으면서 레빈 네놈은 자존심도 없더냐는 말이 계속 올라왔더랬다. 결국 키티를 차지한 그에게는 ‘사랑 앞에 자존심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를 비교질했던 키티의 모친도 마지못해 기뻐해 주는데, 아주 그냥 역겨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원래 사랑이란 게 지들만 좋으면 장땡이래도 이들의 내막을 아는 독자로써 절대 축복해 줄 수가 없었다.


작품 초반에 안나는 친오빠의 바람을 새언니가 용서하도록 설득한 데에서 자신의 성숙하고 고상함을 비췄으나, 정작 자신은 오빠보다도 더한 불륜으로 가족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도 뻔뻔하게 남편 탓으로 돌린다. 처음부터 양심도 없고 싹수도 노란 캐릭터라면 그러려니 할 텐데 온갖 고고한 척, 교양 있는 척은 다 해놓고 막상 불리하다 싶으면 회피하거나 합리화해대니 참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심지어 뒤에 가서는 자기가 나쁜 X이고 남편은 선하다는 말로 호소하여 주변 모두의 연민과 동정을 끌어낸다. 그렇게 상황은 역전되어 남편은 죄인이 되고, 안나는 고통과 죄책감을 덜어낸다. 재차 말하지만, 이런 내용일 거라고는 진짜 상상도 못했다.


역겨움의 향연은 끝이 없다. 온 도시와 사교계가 안나와 이혼하려는 남편을 흉보고 욕하고 뜯어말린다. 안나가 혼외자까지 낳았음에도 다들 하나같이 그녀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봐달란다. 어쩜 단 한 명도 남편의 손을 들어주는 이가 없을까. 아무리 안나의 평판이 우수했다 한들 그 가면이 다 발가벗겨진 마당에서조차 남편이 대신 몰매를 맞아야 하냔 말이다. 기독교 문화가 지배적인 러시아 사회에서, 굳건하고 신실한 신앙인인 남편보다도 거의 탕자나 다름없는 안나가 더 높은 대우를 받는다는 게 이해가 가질 않는다. 진정 ‘트루먼쇼‘가 따로 없다.


새로운 안나 부부는 시골에서 그들만의 건축사업을 바탕으로 오손도손 살아간다. 본판이 총명했던 그녀는 새 남편 못지않게 지식을 익혀서 사업에 적극 보탬을 주었다. 하여 모든 게 순탄히 굴러가다 보니 새 남편은 점차 삶에 권태를 느끼고, 또 남자만의 독립성을 잃었다고 느꼈는지 지방자치 선거에 나가기로 한다. 여기에는 진짜 후보자의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미세하게 부딪히는 아내와의 거리감을 두기 위한 목적이었을 터. 안나는 그와 주변의 바람대로 전 남편과의 이혼을 추진하지 않는 데다가, 그녀의 능력이 자기 사업에 영향을 주는 게 내심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싸움의 무의미함을 알기에 스리슬쩍 상황을 넘겨버릴 때가 잦아들고, 안나는 그이의 마음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고 사랑에만 매달렸던 그녀,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딸보다도 더 남편을 사랑한 안나에게, 새 남편의 애정이 식어버린 눈빛은 절망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둘 다 겉으로는 이상적인 부부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중이었지만 이미 쇼윈도 부부나 다름없었다.


공직자였던 첫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껴 불륜까지 저지르고 참 사랑을 쟁취한 그녀. 그러나 콩깍지가 벗어진 새 남편이 슬슬 사회생활에 전념하자, 안나는 그의 느슨해진 사랑에 전과 같은 외로움으로 고통을 받는다. 이제 자기랑 놀아줄 사람이라곤 현 남편 하나뿐인데, 별 영양가도 없는 수다나 떠는 것을 어느 남자도 좋아할 리 없다는 사실 때문에 그녀의 속은 곪아만 간다. 진정 사랑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이쯤 되니 사랑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님을 깨닫는 중이었다. 결국 그녀는 전 남편에게서 느꼈던 불만과 권태를 똑같이 느끼며 그 불화의 과정을 되풀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면 갈수록 안나의 사랑 타령은 막장 드라마를 찍는다. 의부증, 편집증, 신경증, 온갖 증상으로 남편을 몰아세워 싸우고 자책하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안나가 미쳐 날뛰는 장면이 그나마 볼만했는데, 이 재밌는 구간도 오래 가진 못했다. 결국 그녀는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함으로 생을 마감한다. 사실 작품 초반부터 안나의 외도와 그 말로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결코 스포가 아니라는 나름의 합리적 변명을 해본다.


안나의 죽음 이후로도 약 100p의 분량이 남아있었다. 뒷 내용에서 안나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으며, 키티의 남편인 레빈의 뜬금없는 종교적인 자아성찰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쭉 무신론자였던 레빈은 결혼 이후 존재와 삶의 이유 같은 거대한 의문들에 휩싸이고, 톨스토이는 레빈의 입술을 빌려 온갖 철학적인 방향과 대안들로 자문자답을 반복한다. 어쩌면 이 마지막 챕터의 질문과 대답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안나의 사상을 이해시켜줄 만한 단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흥미가 없었던 나님은 열심히 스킵 해버렸다. 명성에 대한 기대 때문에 첫 장부터 끝 장까지 꼼꼼하게 읽을 필요는 없다는 말과 함께 이만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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