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드라이브 오늘의 젊은 작가 31
조예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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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0년 전쯤인가. 학생, 청년들에게 노력만을 강조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성공과 행복을 거머쥐지 못한 이유는 다 노력이 부족한 내 탓이라고 믿었다. 특히 나처럼 공부 못한 친구들은 정말 그렇구나 했더랬다. 그러다 코로나 전후로 해서 안정적인 삶은 이제 노력의 유무나 질량과는 별 관계가 없어졌고, 툭하면 노력 타령하던 윗세대들과 공익광고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지름길도 없고, 정공법도 안 먹히고, 운빨조차 다 떨어졌음을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늘 그러한 시대의 흐름을 지켜보던 나는 항상 생각했다. 어차피 결과가 뻔하다면 굳이 아등바등 열심히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적어도 지금은 비관적인 태도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갓생에 흠뻑 취한 이들을 볼 때마다 꼭 저렇게 힘주고 살아야 하나 싶어서.


<스노볼 드라이브>는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호불호가 심한 장르이지만 나님은 정말 좋아한다. 대 자연과 시스템 앞에 무력하고 나약한 인간의 존재를, 열악한 조건에서도 참고 버티는 인간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어서다. 단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오만한 인간들을 향한 경고탄처럼 느껴져서 그렇다. 이젠 아무리 긍정 회로를 돌려봐도 인간 세상은 멸망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스노볼 드라이브>는 그런 종말의 바램이 현실로 나타난 이야기이다. 피부 발진을 일으키는 ‘녹지 않는 눈‘이 지구를 덮친다. 수분을 빨아들이는 눈 때문에 땅과 나무, 강이 다 말라버렸고, 인간의 모든 산업과 일상은 마비가 되고 말았다. 대강 이런 배경과 분위기이다.


6월 어느 날에 웬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운동장에 있던 중학생들은 이내 비명과 구토 증상 등 아수라장이 된다. 이때 통증으로 꼼짝 못 하는 ‘모루‘를 이사장의 아들 ‘이월‘이 구해낸다. 그날로부터 멈추지 않는 ‘겨울‘로 인해 많은 일자리가 없어졌고, 그 자리를 제설작업 및 눈 소각장 처리반이 차지했다. 모루의 엄마는 병으로 죽고, 트럭을 몰던 이모는 갑자기 행방불명이 된다. 얼마 뒤 발견된 이모의 트럭 사고 현장에서 이모는 안 보이고, 웬 스노볼 하나가 차 안에 있었다. 문득 모루는, 자신을 구해냈던 친구가 데려간 이사장실의 스노볼 컬렉션이 떠올랐다.


성인이 된 모루는 기숙사를 제공하는 특수 폐기물 처리 센터에 입사한다. 이 소각장으로 실려오는 눈더미 속에는 죽은 동물 사체와 심지어 인간 시체마저 섞여있을 때가 많았다. 하여 혹시나 이모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그녀. 그건 마치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목표로 일평생을 날린 것과 다름이 없었다. 현대에 와서 ‘복수‘는 반드시 해줘야 하는 개념이 되었다지만, 정의의 실현에도 어떤 허무와 후회가 남는 걸 보면 절대 현명한 선택이라 볼 순 없다. 그렇다고 모루 같은 입장에게 잊어버리라며, 그러지 말라며 말릴 수도 없다. 미쳐버린 세상에서는 나도 차라리 무언가에 미쳐있는 편이 더 나을 테니까.


모루와 이월의 시점이 교차하며 진행된다. 강압적인 아빠 밑에서 자란 소년의 유일한 친구는 기르던 개였다. 그 친구가 죽고, 그나마 조금 가까워진 새엄마도 자살한다. 화장시키려는 아빠에 대한 반항으로, 이월은 운송업자에게 연락하여 시신 운반을 요청한다. 그렇게 해서 이월과 모루의 이모가 만나게 된 것. 눈 속에 묻어달라는 새엄마의 유언을 받들어 마땅한 장소를 찾다가 졸업했던 중학교로 향하는 이월과 이모. 폐교된 이곳 어딘가에 새엄마가 좋아했던 스노볼들을 같이 묻어주고 숨 좀 돌리던 차에 지역 강도들이 들이닥친다. 트럭을 타고 도주하다가 이월만 어딘가에 내려주고, 이모는 강도들을 따돌리며 떠나간다. 홀로 남겨진 이월은 그 길로 폐기물 센터에 입사하여 모루와 재회한다. 그녀는 이월이 지니고 있던 스노볼을 보면서 불안의 조각들을 맞춰보기 시작한다. 이렇듯 디스토피아의 진짜 공포는 생활의 붕괴보다도 연대와 신뢰의 상실에 들어있다.


이모에게 부탁받은 이월은 모루에게 사건의 전말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을 숨긴 채로 그녀와 잘 지내는 것도 가시방석이었다. 눈치 빠른 모루는 그를 추궁하여 자백을 듣고서 절규한다. 이렇게 될까 봐 이모는 그에게 당부했던 거겠지.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다. 근거 없는 희망은 이 악몽을 버틸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것이 누군가를 숨 쉬고 살아가게 한다면 비록 환상일지라도 가만 놔두는 편이 옳지 않나 싶은 거다. 앞서 말했듯이 무언가에 미쳐있으면 그럭저럭 살만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헛되고 거짓된 삶이라 해도 그걸 깨뜨릴 권한이 내게 있는 건 아니거든.


냉철하게 말하면 두 주인공은 이유야 어찌 됐든 사서 고생을 자처하는 타입이다. 마치 다람쥐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쳇바퀴를 돌듯이 말이다. 그러면 이런 의문도 든다. 도전과 투쟁은 무조건 옳고 위대한가? 이월은 아버지의 권위에서 벗어나느라 안락한 생활을 포기했다. 모루도 이모 때문에 목숨이 위험한 소각장으로 출근했다.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더 큰 위험으로 뛰어들어, 까딱하면 개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단 말이다. 압박과 시련에 굴복하느니 확 저질러보라던 인간의 도전정신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노력‘이 아직 먹혀들던 시절까지는. 허나 어떤 시도에도 같은 결과뿐이라면 ‘사느냐, 죽느냐‘ 같은 생존 철학이 의미를 잃어버려, 어떤 희망 앞에서도 회의적인 태도가 된다. 그동안 이런 유의 작품을 읽으면서 억지로라도 새 희망을 다짐하고 청춘을 응원했다지만 이제는 안 그럴란다. 오라, 달콤한 멸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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