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터의 고뇌 창비세계문학 1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임홍배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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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고전문학은 20세기보다 19세기 이전의 문학들이 더 쉽게 읽힌다. 적어도 내게는 20세기의 문학들이 더 심오하고 복잡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오래된 작품일수록 버거울 거라는 예상이 깨질 때마다, 슬슬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일부러 피했던 괴테를 이제서야 만났다. 무려 1749년생이라는데 괜스레 예의를 갖춰야 할 것만 같았다는. <젊은 베르터의 고뇌>는 사랑에 빠진 남자의 절규를 담아낸, 다소 평범하기 그지없는 짝사랑 이야기에 불과하다.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썩 재미있게 풀어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나 또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는데, 남정네들의 뻔한 감정이 아닌 거대한 우주 전쟁과도 같아서였다. 아마도 나 같은 F들은 과몰입하지 않을 수가 없을듯한데.


주인공 베르터는 예비신부인 로테를 사랑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친구로서 곁에 있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고, 그녀의 약혼자와도 가까워져 이중삼중으로 고통이 더해만 갔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커져서 멀리 떠나기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테는 친구라는 명목으로 베르터를 곁에 두고 싶어 했다. 보다시피 짝사랑으로 열병을 앓는 내용이 전부지만 그래서 볼만한 작품이다. 음식도 아는 맛을 자꾸 찾게 되듯이 말이다. 읽는 동안 이 책은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해 본 적 있는 사람이나 몰입하겠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구차해져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공감할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여 베르터의 고뇌가 마치 내 이야기만 같은 착각을 주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상대방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행복이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이뤄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비겁하고 옹졸한 나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제 삼자의 입장이 되고 말았다. 첫 연애를 되돌아 볼 때, 갖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파괴한다는 심정이 어떤 건지를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것조차 용기가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행위였고, 나같이 자존감 없는 사람은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신세한탄과 현실 부정에 그칠 따름이었다. 나 역시 베르터처럼 속내를 고작 글로만 남겨서 응어리를 덜어내곤 했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힘들어하느니 되든 안되든 그냥 지르고 볼 것을, 그때는 그렇게 본심을 꺼내기가 두렵고 겁이 났다. 그래서 베르터 혼자 오두방정 떨어대는 모습들이, 누가 보면 구차하고 한심하다 할 그 모습들이 과거의 나를 보는 듯 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로테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양보와 타협이 필요하단 걸 알고 시작한 게임이었다. 이러나저러나 질 수밖에 없는 게임을 시작했다면 판을 엎지 않는 이상 결말은 정해져 있으므로, 불리한 입장을 자처한 베르터는 사실 할 말이 없는 게 맞다. 그나마 베르터 정도면 양반이다. 나는 애인이 절친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 간 최악의 경우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행복을 만들어가는 광경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지옥도 참 그런 지옥이 없었다. 한국이 총기 소지가 허용되었다면 나도 자살했을지 모르겠다. 정신이 갈 때까지 갔을 때는, 혹여 내가 잘못된다면 나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자살한 베르터도 그 같은 생각이었는지 모르지만, 자신의 비겁한 사랑과 운명의 농간에 반항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베르터가 개츠비처럼 사랑 자체를 숭배한 게 아니냐고 할 텐데 솔직히 그게 뭐가 중요한가.


작중에서 베르터는 자신의 처지와 똑같은 어느 하인을 만난다. 그 하인은 자신의 안주인을 사모하고 있지만 딱히 어쩔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 장면을 굳이 넣은 건 베르터의 거울 치료 때문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본 작품을 쓰게 된 계기였다고 한다. 실제로 유부녀를 사모한 괴테가, 자기와 똑같은 상황인 친구의 일화를 집어넣은 거였다. 다만 현실에선 친구가 자살했고,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자살한 것으로 바뀌었다. 놀랍게도 괴테의 친구가 자살할 때 쓴 총기는, 괴테가 사모하던 여인에게서 빌렸다고 하니 괴테의 죄책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조차 안 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한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잖아요‘라는 현대 명언이 문득 떠오른다.


이 작품은 절반가량이 주인공의 성향을 나타내는 내용들로 채워져있다. 그러니까 메인 테마인 짝사랑만큼이나 인물 묘사의 비중이 높다는 얘기다. 과거 문인들이 대개 그렇듯 베르터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낭만파 중에 낭만파이다. 이웃과 아이들을 사랑하며, 줄곧 적선도 하고, 하인들의 고민도 들어주는 고운 심성을 지녔다. 자연과 시를 사랑하고, 잘려나간 호두나무에 슬퍼했으며, 궁정 상관들의 불의를 참지 못하는 청렴한 사람이었다. 마치 사랑을 누릴 자격은 이런 사람에게나 주어져야 한다는 듯한 무언의 경고로 느껴질 정도. 이렇게 평화와 질서로 살아가는 베르터의 삶에 방문한 전쟁 같은 사랑은 축복이 아닌 저주였다. 과연 베르터에게 사랑의 자격이 있기나 했을까.


로테는 하루도 빼먹지 않고 찾아오는 베르터를 보고도 어떻게 아무런 의심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은 이미 결혼한 몸이니 설마 별일이야 있겠냐는 생각이었다면 차라리 낫겠다. 대체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와 가벼운 말동무나 하고 앉았겠냐. 결국엔 우정을 가장한 별개의 감정이라는 촉이 오지만, 그럼에도 우린 친구일 뿐이라며 아찔한 줄다리기를 이어나가는 그녀. 로테의 남편은 베르터만큼 애정 어린 성격이 아니었기에 베르터와의 묘한 관계를 우정이라는 이름하에 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에 악의는 없었지만 베르터에게 일말의 여지를 준 셈이니, 아주 고약하고 잔인한 장난질이라 해야겠다. 물론 유부녀에게 접근한 베르터 역시 또이또이니까, 그래서 이 작품은 페이소스보다 휴머니즘에 초점을 갖게 한다고 생각된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가 지금까지도 영광을 누리는 데에는 해설처럼, 답답한 사회환경에서 자아실현의 가능성을 찾지 못했던 청춘들의 열정을 해소해 주었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결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삶에 권태를 느낀 사람들이 막혀있던 담을 허물 수 있겠다는 희망의 사실이 중요하다. 이 작품을 통해 괴테가 청춘들의 아픔을 어떻게 대변했고 얼마나 응원했는지 잘 알았다. 어느덧 청춘이라 할만한 나이는 지나버렸지만 괴테를 읽고 가슴이 뛸 수 있어서 참 고마웠다. 베르터 신드롬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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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15 19:52   좋아요 1 | URL
아유, 물감님, 고맙습니다. 잘 했습니다.
그때 만약 잘못했으면 어찌할뻔했습니까?
저랑 이렇게 댓글도 못 나눌뻔했잖아요. 그죠?
뿐만아니라 물감님을 아는 모든 사람에게는요.
모든 건 지나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엔 안 좋은 만남만 있는 건 아니란 걸 물감님도 잘 알죠?
물감님은 심지가 곧고 착하니까 좋은 만남이 더 많을 거예요. 믿으세요.
근데 괴테도 트라우마가 상당했겠어요.
반면 괴테 할배 땜에 물감님이 위로 받았겠어요.
덕분에 괴테 할배 어깨가 백두산만큼 높아졌겠는데요? ㅎㅎ

예전엔 베르테르라고 했는데 베르터가 맞을까요? 좀 낮선데요? ㅋ
내가 이 책을 읽었나 했더니 안 읽었네요. 언젠가 영상으로 찍은
연극을 본 적은 있네요.
사랑이나 실연 이야기는 영 땜기지 않아서.
나중에 함 읽어 보겠습니다. 잘 지내죠?
전 요즘 여기서 안 놀아요. 딴데서 놉니다. 그래도 가끔 일케...

물감 2025-01-15 20:11   좋아요 1 | URL
와 스텔라님 엄청 오랜만이에요, 잘 계시죠^^?
그러게요, 어떻게든 살아있어서 이렇게 괴테같은 작가도 만나보고 재미나게 살아가네요. 한 권 읽고 말하긴 뭐하지만 괴테도 꽤나 유리감성이 아니었나 싶어요. 저는 이런 작가들이 좋은가봐요, 헤세도 그래서 좋아하고 ㅋㅋㅋ
듣자하니 베르터가 독일어 발음에 더 가깝다고 하네요? 베르테르는 콩글리쉬인가...
이 책은 뭐 전형적인 1인칭 남성의 서사라 안 읽으셔도 될 거 같아요~
아 그리고 저도 알라딘에서 안 놀아요. 그래서 글만 올리고 주로 블로그만 합니다. 예전의 따숩던 알라딘 마을이 그립네요.

2025-01-15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15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5-01-16 08:00   좋아요 1 | URL
물감님 아 ㅠㅠ 어찌 그런 일이ㅠㅠ
그 고통은 제가 감히 뭐라 말할 수가 없는 그런 거라 ㅠㅠ
잘 이겨내셨습니다. 저도 베르터를 창비책으로 읽었어요. 저는 사실 로테같은 친절한 여자 싫어요. 베르터가 어떤 마음인지 뻔히 알면서 친구라는 명목으로 계속 친절하게 맞아주며 베르터를 더 힘들게 하잖아요.
저라면 상처를 주더라도 제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할텐데요.
오늘도 힘내시고 좋은 하루되세요!

물감 2025-01-16 12:42   좋아요 0 | URL
쿨캣님도 오랜만입니다, 건강하시죠? ㅎㅎ

세상은 비극과 고통이라는 걸 저는 어릴 때부터 많이 보고 자란 듯 해요. 그래서 빨리 나이를 먹고 싶단 생각을 자주 했는데, 어느덧 세월이 훅 지났네요 하하핳

베르터도 그렇고 로테도 그렇고, 현대와 영 맞지 않는 이성관이지만 그래서 또 매력적이기도 하네요.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니까 불가항력이었다고 생각하면 이해 안될 것도 없더라고요. 제삼자들은 속터지겠지만요 ㅎㅎ

맥락없는데이터 2025-02-07 23:00   좋아요 0 | URL
베르터의 고뇌를 단순한 짝사랑 이야기로 보지 않고, 인간의 감정과 존재의 무게까지 깊이 들여다본 해석이 인상적이네요. 특히 베르터와 괴테의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느껴지는 비극성과 인간적인 연민이 잘 담겨 있어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

물감 2025-02-08 09:38   좋아요 0 | URL
아고고 쑥스럽습니다ㅎㅎ감사합니다😃
 
혼돈의 도시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13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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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근래에 계속 무겁고 우중충한 분위기의 작품들만 냅다 읽었더니 좀 질려가지고 오랜만에 장르소설이나 읽어주었다. 이럴 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코넬리 옹의 작품을 고르면 된다. 보아하니 아직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시던데, 내 부모님 나이보다도 몇 년은 더 높으신 56년생의 할아버지가 어쩜 그렇게도 활력이 넘칠 수가 있는 걸까. 더 놀라운 것은 젊었을 때에 보여준 하이 퀄리티가 지금도 여전하다는 데에 있다. 그렇게 코넬리의 작품들은 늘 젊은 감각을 지니고 있어, 독자들이 저자의 건강 염려를 잊어버리게 된다. 어느덧 뱀파이어 같았던 톰 크루즈도 늙었고, 키아누 리브스마저 간달프를 닮아가는 걸 보니 세월이 참 야속하단 생각이 든다. 그처럼 언젠가는 코넬리도 은퇴할 텐데 지금으로썬 상상이 안된다.


<혼돈의 도시>는 ‘해리 보슈 시리즈‘ 중에 가장 분량이 짧은 데다 미친 속도감으로 하루 이틀 만에 다 읽었다. 다만 주인공 혼자 치고 나가는 스트레이트 플롯이라 가벼웠던 점과, 인물 간에 갈등보다는 사건 중심으로만 흘러가서 좀 싱거웠던 점이 아쉬웠다. 그래서 별 셋을 주려다가 후반부에 급 하이 텐션으로 재미가 휘몰아쳐서 후하게 별 넷을 주었다. 이번 사건은 방사능 물질인 세슘을 다루는 병원 관계자가 총살 당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생의 앙숙관계인 LA 경찰국과 FBI가 동시에 사건을 맡았는데, 어쩐 일로 FBI는 경찰 수사에 순순히 협조하는 분위기였다. 아무튼 사건 담당인 해리 보슈는 살인 쪽을, FBI는 병원에서 도둑맞은 세슘을 중점으로 수사를 맡는다. 알몸으로 결박된 피해자의 아내와 살해 현장 목격자의 진술을 통해, 범인들은 이슬람권 아랍인으로 추정되었다. 한편 FBI의 블랙리스트인 반미주의자의 집에서 범인들의 차량이 발견되었고, 이로써 방사능 물질로 사제 폭탄을 만드려는 테러범들의 소행으로 간주되어 초 비상사태가 된다. 의사들의 말로는, 세슘에서 나오는 감마선이 퍼지면 농도에 따라 몇 시간 내로 사망하며, 노출 지역은 수백 년간 폐쇄를 해야 한단다. 따라서 이번 수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촌각을 다투게 생겼는데, 왜 갑자기 FBI는 해리 보슈에게 배타적으로 대하는 것일까.


99%의 본능과 1%의 직감으로 살아가는 LA의 코요태, 해리 보슈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구린내를 맡는다. 노련한 베테랑답게 시간 잡아먹는 수사 과정은 건너뛰고 지름길로만 쏙쏙 다니는데, 체계와 질서를 무시하는듯한 그의 독단적인 행동은 언제나 동료들의 미움을 샀더랬다. 그 때문에 이번 수사도 남들과 부딪히며 설득하기에 바빴고 별다른 수확 없이 제자리걸음만 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살인범보다 방사능 노출과 국제 테러 문제로 번질 위기는 파악하지 못한다는 꾸중만 듣는데 솔직히 할 말 없었다. 보슈는 뭔가에 꽂히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반면에 큰 그림은 잘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 단점이 <혼돈의 도시>에서는 유독 크게 부각되었는데, 이번 편의 서브 테마가 ‘관료주의와 대립‘이기 때문이다. 일분일초가 급하다 보니 보고쳬계를 가볍게 무시하는 보슈와, 그로 인해 골치 아픈 뒤처리를 떠안아야 하는 기관들의 고충 장면이 자주 나온다. 어쨌건 사건이 잘 마무리돼서 망정이지, 보슈의 태도는 국가를 어지럽히는 문제아가 틀림없다. 물론 그에게는 파리 하나 잡겠다고 도끼를 꺼내드는 저 얼간이들이 답답하겠지만, 왜 파리채가 적격인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보슈에게도 잘못이 있단 말씀이야.


이 짧은 분량 속에서도 코넬리 옹은 여러 번의 미스디렉션을 선보인다. 세슘 운반책의 차량에서 세슘을 발견한 보슈는 방사능에 노출된다. 그는 현장에서 빠져나와 병원으로 가는 척하면서 FBI 요원에게 사건의 개요와 용의자의 동선 등등 자신의 추리들을 들려주고 다음 현장으로 달려간다. 마침내 마주한 범인의 정체를 통해, 이번 사건은 국제 테러 사건 쪽으로 눈 돌리기 위한 속임수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렇게 경찰국 아니, 해리 보슈와 FBI의 공동 수사에서 그의 활약이 여러 차례 증명되었음에도 여전히 보슈가 요주의 인물로 지목된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저자는 해리 보슈의 시선으로 LA 경찰국의 무능함과 FBI의 융통성 없음을 신랄하게 비난해대는데, 아마도 과거 범죄 사건기자였을 때에 받았던 영향이 아닐까 싶다. 한 마디로 뒤끝이 쩐다는. 그래도 주인공의 소속이 경찰인 만큼 FBI 쪽을 악마의 집단으로 몰아가긴 하는데, 한두 번도 아니고 거의 매 작품마다 그러고 있으니 FBI의 명예훼손으로 소송당하지 않는 게 참 용하다. 아무튼 킬링 타임용으로 그만이었던 코넬리 옹의 작품이었다. 굿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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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레타 페이지터너스
이사벨 아옌데 지음, 조영실 옮김 / 빛소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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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째 연말보다 연초에 약속이 더 많이 잡혀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독서에 집중을 못 하다 보니까 앞의 내용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머리가 점점 녹슬어가는 걸로 보아 이제는 한 작품을 너무 길게 붙들지 말아야겠다. 어느덧 페이지터너스의 도장 깨기도 다 끝나간다. 전체적으로 만족도가 높은 편이라 재미나게 읽은 반면, 하나같이 결핍 가득한 작품들이어서 이젠 좀 지치려고 한다. <비올레타>는 칠레와 중남미의 현대사와 여러 인물의 서사를 다루는 거대한 역사서이다. 또한 사회의 억압을 뚫고 자기 발현을 해나가는 여성주의의 내용까지 담겨있다. 여러 가지 볼거리와 주제를 다룬 의미 있는 작품이지만 큼직큼직한 내용 위주로 흘러가서 전체적으로 투박한 느낌이었다. 숲을 논하다 보면 디테일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뭐.


아들부잣집의 막내딸인 비올레타는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팬데믹 시대에 태어났다. 미국 대공황과 함께 집안 사업이 망하자 가족들은 남부 지방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가야 했다. 팍팍한 삶이었지만 어려운 이웃들끼리 오손도손 하며 잘 견뎌냈다. 비올레타는 영국인 가정교사와 이웃 교사 부부를 통해 기초교육과 인생 경험과 체험학습을 배워나간다. 그리고 목격한 여러 가정들의 폭력으로 순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명히 무지와 빈곤에서 악이 발생한다고 배웠는데, 그녀가 보기에는 어느 곳에서든지 선악이 존재했다. 하여 교양인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삶에 접근하기로 방향을 튼다. 가볍게 지나간 이 장면이 훗날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혼돈을 낳았는지에 주목해 보자.


성인이 된 비올레타는 큰오빠의 건축 사업을 도우면서 재능을 발견한다. 덕분에 형편도 나아지고 삶의 재미도 보던 와중에 2차대전이 발생했다. 다행히도 그녀가 사는 곳은 전쟁의 피해가 닿지 않았고, 얼마 뒤에는 괜찮은 집안의 남자와 결혼식까지 올리게 된다. 이만하면 아주 탄탄대로의 인생일 텐데도 그녀의 마음은 어쩐지 공허하다. 이 원인 모를 비올레타의 갈증은 결국 외도로 해소가 되었다. 남편과 정반대의 육식남인 비행기 조종사와의 쾌락과 유희를 즐기며 살림을 차려버린 그녀. 하지만 조종사는 저밖에 모르는 카사노바였고, 비행기 타고 세계 곳곳을 놀러만 다녔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당연한 여성들의 삶이라 생각하며 혼자 감내하는 비올레타의 속앓이가 앞으로도 계속된다. 전에는 이런 걸 인과응보의 일부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원래 인간의 본성이 배움과 노력의 고생길보다도 폭력과 충동의 지름길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비올레타>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과 아슬아슬하게 타협하는 장면으로 도배된 작품이다. 세계사, 가정사, 여성주의 등 독자마다 포커스가 다를 텐데, 나의 관심사는 화자인 주인공의 심리상태였다. 비올레타의 복잡한 인간성은 단순히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으로 나눌 수 없는, 아주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다.


비올레타는 아들과 딸을 낳았다. 조종사는 여성스러운 아들과 달리 자신을 쏙 빼닮은 딸을 예뻐하고 애지중지했다. 아들은 크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딸은 아빠와 함께 쾌락주의자로 살아간다. 그러다 딸이 마약중독으로 개차반이 되고 나서야 엄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는 주인공. 거기에다 민간 비행기 사업으로 갱단의 불법거래를 담당하는 조종사 남편까지, 비올레타의 고통과 근심은 마를 날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야 마는데, ‘왜 비극적인 삶을 원하느냐‘는 의사의 질문이 작품을 관통하는 대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50대가 돼서야 비올레타는 자신의 외로움을 인지했다. 가족, 인맥, 재산, 능력까지 다 갖췄으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외로움의 유형은 아닐 터. 그렇다면 그녀의 결핍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님은 이 질문의 해답을, 그녀의 가정교사였던 조세핀의 삶과 대조하여 알아냈다. 조세핀은 이혼이 금지되었던 그 시대에도 당당히 동성애자로 살아가며, 파트너와 함께 여성 투표권, 가부장제 반대, 여성 사회 진출 등 여성주의에 힘을 쏟는 중이었다. 어렵지만 의미를 찾아가는 조세핀과 상반된 비올레타의 공허한 삶에는 ‘쟁취‘가 없었던 것. 둘 다 진취적이었지만 비올레타는 자기 충동에 따라 저항했고, 조세핀은 자유의지에 따라 저항하며 살아갔다. 그 결과 비올레타의 부실한 독립성은 맥없이 무너지고, 조세핀의 견고한 조화성은 자신과 주변을 지켜주었더랬다.


조종사를 따라 비올레타의 거처도 자주 바뀌었다. 어쨌거나 그녀 또한 사업가였고, 그렇다 보니 나이가 들어서도 왕성한 활동을 유지하며 젊은 인생을 살았다. 딸의 죽음, 남편의 바람, 대 지진, 독재 정권, 블랙리스트가 된 아들 등 많은 아픔과 난관을 겪었음에도 할 일이 많아서 어렵지 않게 이겨내지 않았나 싶다. 전개가 휙휙 널뛰는 데다 화자의 담백한 말투 때문에 생략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테지. 비올레타의 응어리가 또 한풀 꺾이는 시기가 언제였냐면, 조종사의 n번째 애인이 주인공을 찾아왔을 때였다. 오래전에 그녀와 한바탕했던 이 어린 친구는 이제 와서 조종사를 엿 먹이고 싶어 했다. 조종사의 비행 사업 행정을 맡았던 애인은 불법 장부를 증거로 제출하여 조종사를 소송하고 그의 사업까지 무너뜨렸다. 불행의 원흉이었던 조종사는 비올레타가 자처한, 그것도 떳떳하지 못한 방식으로 선택한 것이었기에 마지못해 끼고 살아왔으나, 기회를 얻어 한방 먹여주고 나니 쟁취한 삶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죽은 딸의 이름으로 설립한 여성재단에 더욱 열과 성을 다하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오래전에 버렸던 교양인의 모습을 다시 찾아간 비올레타의 인생 3막이 그렇게 열렸다.


이 작품은 비올레타의 죽기 직전까지도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다 기억도 안 나지만 일일이 나열할 수도 없는 대 서사라서 이 정도로 줄여야겠다. 어떻게 보면 무지몽매한 인간의 성장소설 같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개과천선이나 사필귀정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닥쳐오는 파도를 넘는다기보다 온몸으로 부딪혀 경험하는 타입이었으니. 마침내 오르막길을 걷게 된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비올레타는 어떤 위인이나 성인군자가 되려 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지나간 과오들을 후회하지도 않았고, 지금의 업적들에 막 자부심을 갖지도 않았다. 돌아보면 비올레타는 항상 그랬다. 되는대로 사는 듯하면서도 열정을 쏟았고, 무심한듯하면서도 친절하려 했고, 수없이 좌절하면서도 삶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것들은 어떤 원대한 목표나 책임감도 아니고 개인의 강인한 기질 때문도 아니었다. 비올레타에게 인생이란 불을 무서워하지 않는 요리사처럼, 파도를 겁내지 않는 서퍼처럼 일단 부딪히고 볼 일이었으니까. 하여 그녀의 무수한 혼돈을 보면서도 안쓰럽다는 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처럼 우리는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오르막길을 걷고 파도에 맞서가며 쟁취하는 삶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도 어째서 비극적인 삶을 원하느냐는 질문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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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도박 페이지터너스
아르투어 슈니츨러 지음, 남기철 옮김 / 빛소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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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게 느린 나님조차 반나절 만에 다 읽은, 말 그대로 페이지 터너인 작품이었다. 그렇다 보니 어떤 인사이트를 도출하기도 전에 끝나버렸다. 솔직히 지금 뭘 적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써보겠다. 저자 슈니츨러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기법을 토대로 글을 쓴 작가라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한밤의 도박>에서도 심리 묘사가 잘 드러나는데, 작가 이력을 보니까 병원까지 개업한 의사 출신이어서 더 놀랬다. 지금껏 내가 보아온 사자 직업군들은 감성이 메말라서 섬세한 표현에 참 서툴다는 인상만 받았거든. 그런데 슈니츨러한테는 그런 닭 가슴살의 감성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유대인의 핏줄 덕분이 아닐까 싶다. 아님 말고.


육군 장교 빌리는, 민간인이 된 옛 동료에게 돈 좀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리 친하지도 않은 데다 자기도 거지면서 기꺼이 돕겠다니 참 이해가 안가지만, 한창 테스토스테론이 넘칠 나이의 수컷들은 어떻게든 가오를 잡으려 한단 말이지. 초장부터 객기 부리는 걸 보니 결말이 뻔해서 김빠지긴 했는데 그래도 재미있었다. 빌리는 노름판에 가서 돈을 잃고 따내길 반복하다가 빚쟁이가 된다. 유일한 혈육인 외삼촌은 돈을 주지 않았고, 외삼촌이 흘린 정보를 따라 있는지도 몰랐던 외숙모를 찾아간 주인공. 놀랍게도 외숙모는 언젠가 자신이 즐겼던 원나잇 상대였던 것. 이제는 성공한 사업 투자자가 되어 빌리의 거만한 콧대를 꺾어버리는 그녀. 내일까지 빚을 갚지 못하면 군에서 잘린다는 사정 앞에 외숙모는 알 수 없는 웃음만 짓는다. 예나 지금이나 정신 나간 것들은 금융 치료가 정답이란 말씀.


빌리는 나름 건실한 청년이었다. 대대로 군인 집안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고, 품위를 생각할 줄도 알았고, 씀씀이도 전혀 헤프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출처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그를, 마치 타고난 럭키가이처럼 몰아가고 있었다. 근본 없는 믿음과 신념으로 냅다 뛰어든 노름판에서 운 좋게 거액을 몇 번 거머쥐기도 했다. 동료와 자신한테 쓰고도 남아돌 만큼의 돈을 따자, 냉정히 물러날 생각도 했던 빌리의 모습은 꽤나 쿨가이 다웠다. 하지만 사람 심리라는 게, 행운이 반복되면 이 운발이 어디까지 닿을지 알고 싶어지는 법이다. 하여 기어이 그 끝을 확인해야만 멈추게 되는 것 또한 정해진 수순이고. 여하튼 빌리는 한심하다고 느꼈던 동료보다 훨씬 더 한심한 놈이 되어버렸다.


외삼촌에게 빠꾸먹고 찾아간 외숙모 앞에서 온갖 동정과 연민 작전을 펼치는 주인공. 폼생폼사를 외치던 쿨가이는 어디 가고 이렇게 비굴한 인간으로 전락했을까나. 외숙모는 그를 돌려보낸 뒤, 빌리의 생활관을 직접 행차한다. 돈 얘기는 일절 꺼내지 않고 긴 시간을 노닥거리는데, 괜히 말 꺼냈다가 미움 살까 봐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주인공. 이 장면에서 천당과 지옥을 수십 차례 오가는 빌리의 원맨쇼가 참 볼만하다. 그렇게 있다가 겨우 쌈짓돈 쥐여주고 떠나버리는 외숙모에게 뒤늦은 분노를 표하는 빌리. 그것은 지난날 외숙모와의 원나잇 후에 보여준 자신의 행동이었으니. 크게 한 방 먹은 빌리는 조용히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나타난 외삼촌의 양손에는 외숙모가 건네준 돈다발이 들려있었다.


단순한 플롯 가운데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솜씨가 대단한 작가였다. 슈니츨러 역시 도박으로 탕진하여 뼈저린 후회를 했었다고 하는데, 그런 값진 경험 치고는 좀 가벼운 작품이었달까. 의사로서도 성공했고 늦깎이 작가가 되어서도 성공했으니 아주 그냥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을 테지. 부와 명예를 다 이룬 연예인들이 끝내 마약에 손을 대듯이, 연속된 성공에 길들여진 슈니츨러도 자연스럽게 노름판으로 고개가 돌아갔을 것이다. 프로이트와 가깝게 지낸 것치곤 매우 실망스러운 꼴이지만 작가와 작품은 별개로 치는 게 맞다고 본다. 작중에서 빌리는 빚쟁이가 된 자신을 가리켜 억울한 희생양이라고 말한다. 냉정함을 잃어버린 그는 자기가 시키지도 않은 일에 발 벗고 나섰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이 같은 빌리의 심리상태가 오늘날 현대인들의 질병이 아닐까 싶다. 원인을 꼭 엉뚱한 데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지. 스스로를 괴롭힌 것도 모르면서 늘 자기는 피해자라고만 생각들 하지. 안타깝게도 세상은 원래 불공정한 법이라네, 젊은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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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샤 페이지터너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정영문 옮김 / 빛소굴 / 2022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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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로 국내에 독서 열풍이 일었다지만 여전히 문학보다는 비문학이 더 잘나간다고 하겠다. 대체 문학은 왜 이렇게 인기가 저조할까. 뉴스 기사도 세 줄 요약으로 읽는 바쁜 현대인들에게 그저 시간만 잡아먹을 뿐인 종이 쪼가리인 걸까. 그게 꼭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다. 나 역시 문학, 특히 소설을 보는 일 순위는 순전히 ‘재미‘ 때문이란 말이지. 다만 이 ‘재미‘를 어느 방면에서 즐기느냐가 다를 텐데, 독서가들이 손꼽아 얘기하는 한 가지는, 남의 인생을 대리 경험할 수 있다는 데에 있었다.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일 인분의 삶 속에만 존재하기에 나와 다른 타인의 삶을 배척하도록 되어있다. 하지만 문학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하고 납득할 기회를 얻고, 더 나아가 평생 느껴보지 못할 감정의 교류를 배워 세상을 대하는 폭이 넓어지게 된다. 개인적으로 비문학은 지식을 얻고, 문학은 지혜를 얻게 해준다고 생각하는데, 이 지혜라는 인사이트는 도출하면 할수록 사람을 겸손해지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 하여 많은 현대인들이 똑똑한 데에 비해 뚝딱거리거나 공격적이거나 무례함과 솔직함을 구분 못한다는 현상들도 문학을 읽다 보면 다 해결되리라고 본다. 반대로 비문학만 읽는 사람들은 머리만 커져서 어떻게든 뽐내고 싶어 하지. 이해는 한다만 솔직히 꼴불견임.


유대인 출신의 폴란드 작가가 쓴 <쇼샤>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만 들었다. 이렇게 책을 읽지 않았으면 내가 폴란드와 유대인들의 삶에 관심이나 가졌겠나라고. 참고로 사람의 뇌는 실제와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단다. 따라서 소설 속 이미지들을 연결하다 보면 마치 실제로 겪은 듯한 대리 경험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작품이 노잼이라도 새로운 경험을 했다면 나는 재미있다고 보고, 거기에 인사이트까지 얻어냈다면 독서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한다. 일단 <쇼샤>는 내 기준에 노잼이긴 했지만 그럴수록 뭐라도 뽑아내야겠단 일념으로 읽었다. 주인공이 유대인 랍비의 아들인 것과, 유대교를 벗어나 작가로 살아간다는 설정은 곧 저자의 자전소설임을 말해준다. 1914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지내는 유대민족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군의 침공으로 전선 바깥에 쫓겨난다. 이때 주인공 아론과 그가 사랑했던 소녀 쇼샤도 헤어지고, 그렇게 이십 년을 못 본 채로 살아가게 된다. 솔직히 이런 설정은 유대인 작가들이 쓴 작품에 꼭 있어서 벌써부터 질리려고 했다. 그나마 랍비의 아들이면서 정통 유대인이길 거부했다는 점이 내 호기심을 자극해댔다.


성인이 된 주인공 아론 그라이딩거는 잡지사에 글을 투고해서 겨우 입에 풀칠하는 중이다. 그는 종종 방문하는 작가클럽에서 한 미국인 부부를 소개받는다. 남편은 백만장자 노인이고 아내는 젊은 연극배우였다. 부부는 마침 희곡을 쓰고 있던 아론과 작품을 계약하고 빵빵한 선불비를 꽂아준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대본 쓰기에 들어가는데, 아 글쎄, 온갖 출연진들과 관계자들이 감놔라 배놔라 하면서 방향을 맘대로 바꾸는 게 아닌가. 을 중에 을이었던 주인공은 남들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 현타와서 정신줄을 놓는다. 책 한 권 내지 못한, 잡지에 몇 번 글 싣는 게 다였던 자신이 위대한 극작가로 하루아침만에 변모한다는 게 맞긴 한 건가. 동료가 얘기한 영혼의 정복은 무엇이며, 갈망의 목적은 무엇이며, 자신의 창작욕은 무엇을 원하는가. 갇혀있기가 싫어서 유대교를 떠나왔거늘 다시 계약의 노예가 되어 자유를 잃었으니 그야말로 낭패였지만, 미국의 자본주의는 얼마든지 자신을 함락시킬 힘이 있다는 게 문제였도다.


전형적인 샌님 스타일이지만 꽤나 여자를 밝혀대는 반전 매력의 주인공. 그에게는 러시아 출신의 공산당원 애인이 있었다. 그리고 하숙집 하녀와도 썸을 탔으며, 미국인 아내와 애인이 되었고, 그 밖에도 어느 유부녀랑도 애인 사이를 맺었다. 여기서 비중 높은 미국인 아내 베티에 대해서만 적겠다. 그녀는 우물 안 개구리인 주인공에게 여러 조언들로 큰 꿈을 키워주는 반면, 퇴폐미로 가득한 그에게 매료되어 갈수록 구애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데이트를 하다가 어릴 적에 살았던 동네 바르샤바를 지나가는데, 거기서 헤어졌던 쇼샤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된 아론은 사랑의 작대기를 쇼샤에게로 꺾는다. 다만 놀랍게도 그녀는 초등생의 체형을 하고 있었고 지능도 그 수준에 머물러있었다. 그럼에도 옛 향수에 젖어 쇼샤와 함께하기로 한 그였는데, 그렇다고 다른 애인들을 정리했느냐면 천만의 말씀. 심지어 그 애인들은 양다리 사실을 알면서도 아론을 사랑한다. 아무튼 이런 모습들이 정통 유대인이길 포기한 데에서 나타나는 증상이랄까. 채식주의를 하겠다느니, 주초를 안 한다느니 말은 잘 하는데 정작 정결해야 할 부분에서 그렇질 못하니 진짜 내로남불이 따로 없더군.


결국 원래 쓰던 희곡은 흐지부지되었고, 아론은 밥줄이 끊긴 데다 작가라는 직업에 회의감마저 느낀다. 건강이 위독한 미국인 갑부가 유산을 줄 테니 베티와 결혼하고 미국을 가라는 제안을 하는데, 아주 보란 듯이 쇼샤와 식을 올려버리는 우리의 초식남. 허나 이게 맞는지는 그 조차도 확신하지 못했는데, 이제껏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들은 매춘부나 다름없는, 생계를 위해 자신을 팔았던 부정한 타입들이었다. 자신의 바람대로 정결한 유대인과 결혼을 했으나, 다른 애인들에게 계속 마음이 가는 것은 오래전 내려놓았던 유대교의 금지된 법들을 행하고도 얼마든지 잘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쇼샤>에서는 정통성을 져버린, 변질된 유대인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들이 자주 나온다. 정통 유대인이길 포기한 시점부터 그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이나 할 거 없이 아니꼬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탓하거나 원망할 순 없으며 스스로를 깨어있다 하기로 뭐 한 상황.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요, 비유대인들에겐 공공의 적일뿐인 그의 마음이 어째서 율법 밖으로 도망하려는지 알 것도 같았다.


쇼샤를 택해 폴란드에 남더라도 그는 유대교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여 끊임없이 정통성과 부딪히고 다른 유대인들과 껄끄러워질 텐데, 이러다 히틀러가 침공하기도 전에 스트레스로 죽지나 않을까 싶더라. 나는 차라리 베티와 미국으로 가는 것이 그의 영혼을 위한 길로 보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점에서 <달과 6펜스>가 떠오르지만, 뭔가를 갈구하는 게 없는 사람인지라 <달과 6펜스>의 주인공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난 이제껏 ‘작가들은 전부 미친 사람이다‘라는 말에 별생각이 없었는데, 아론과 저자를 보면서 처음으로 그 말에 공감해버렸다. 금지된 법을 따르는 장면들에서 <데미안>도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해서 싱어가 헤세와 비슷하다고는 말 못 하겠다. 헤세가 빛 속에 공허라면 싱어는 흑암 속에 공허랄까. 좀 세게 말하자면 싱어에게는 어떤 고유의 색이랄 게 없다. 굳이 고른다면 착잡함 정도려나. 마치 사약이 담긴 그릇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죄수의 느낌. 신을 떠났으니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을 믿겠다던가, 아니면 삶의 어떤 가치를 좇겠다는 포부도 없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태도였다. 그렇듯 아론은 어떤 질문들에도 해답을 찾으려 하질 않았다. 초점 나간 정신 상태와 달리 육체는 성실한 편이라 종잡을 수 없는 캐릭터였는데, 먼 훗날 지인이 말해주길, 모두가 그를 신비주의자라 생각했지만 실은 철저한 현실주의자란다. 과연 그 관점으로 돌아가 보니 아론의 이상주의나 고민들이 전부 현실 문제와 맞닿아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러니까 살면서 별의 별소리 다 들었을 저자도, 나 역시 당신들처럼 먹고 자고 사랑하는 일들을 걱정했던 거라고 털어놓은 듯했다. 그것도 모르고 독자들은 저자를 유대인 프레임 속으로 꾸겨 넣은 건 아니었을까. 역시 문학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자자, 다 함께 자중들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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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1-03 13:16   좋아요 1 | URL
소설에 대한 물감님의 생각이 맞아요. 근데 저만해도 소설 읽기가 쉽지 않더군요.
소설이 시작되려면 진입장벽이 있잖아요. 그걸 뛰어넘어야 하는데
어떤 건 시작부터 지치게 만드는 게 있죠.
아님 취향이 아니거나. 정말 빠져들게 만드는 소설은 그리 많지않은 것 같아요.
그러니 비문학을 자연 선호하게 되는 거죠.
지금도 전 소설 두 편을 꾸역꾸역 읽고 있는데 막 재밌지는 않아요.
그래도 끝까지 읽어야죠. ㅋ
그나저나 새해 복은 많이 챙기고 있나요?
새해 복 많이 받고요, 올해도 좋은 책 많이 읽으십시오!
지난 해는 물감님이 계셔서 즐거웠습니다.^^

물감 2025-01-03 15:50   좋아요 1 | URL
본인의 수준이나 취향에 맞는 책을 찾는 게 먼저겠네요, 저만 해도 너무 아니다 싶은 책은 그냥 덮어버리거든요. 그렇게나 지치게 만들 정도라면 다른 책을 찾는 게 맞지 않을까요? 꼭 어렵기만한 고전 말고도 현대문학들이 넘쳐나니깐요 ㅎㅎㅎ
그나저나 새해 복은 어떻게 챙기는 건가요?? 저는 매일매일이 보통날입니다 ^^
스텔라 님도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시고, 올해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stella.K 2025-01-03 17:30   좋아요 1 | URL
ㅎㅎㅎ 또 또 심각하게 받아들이신다.
그냥 그렇다구요. 막 재밌지는 않다구요~~~ㅋㅋ

갱지 2025-01-03 15:10   좋아요 1 | URL
매우 재밌게 읽었습니다.

저 역시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과 비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일단 한국인들의 삶과 환경이 그렇게 만드는 부분도 있을 것 같고,
또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일수록 문학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저는 문학작품들을 방어막없이 똑바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존경스럽습니다.
저에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소모가 되는 일이라 너무 버거울 때가 있거든요.
감정이 소화가 되지 않아서 뒤집어진 딱정벌레처럼 진력나게 버둥거리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물론 윗 분이 진입장벽이라고 말하신 다양성에 대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탄해서 덧붙인다는 것이 말이 길어져 무례하게 느껴지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물감 2025-01-03 16:03   좋아요 1 | URL
갱지 님, 안녕하세요. 긴댓글 무지 환영합니다^^
말씀하신 한국인의 환경은 한가로이 문학을 들여다 볼만한 여유가 없긴 하죠. 근데 또 일반인보다 훨씬 바쁜 학자나 교수, 연구원들도 말하길,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라고들 합니다. 맞는 말 같아요. 물론 문학, 더 나아가 책을 꼭 읽어야 할 이유도 없지만 굳이 제가 문학/비문학 독서파를 구분한 것은, 언제나 비문학파들이 문학파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태도 때문이에요. 제 주변만 해도 되게 비아냥 거리는 인간들이 넘쳐나요...
그것보다도 문학을 대할 때에 들어가는 에너지 소모에 대해서는 시원한 답변을 못드리겠네요. 가벼운 청소년 문학으로 해서 감정 맷집을 단련하시는 게 어떨는지...
여튼 누추한 서재에 방문 감사드리고요, 갱지 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화이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