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에르와 장 창비세계문학 9
기 드 모파상 지음, 정혜용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랑스 작가인 모파상에게는 러시아 문학의 냄새가 풀풀 난다. 저자를 모른 채로 작품을 읽는다면 영락없이 도스토옙스키의 글이라고 생각될 정도이다. 이 같은 날것의 맛과 거친 감성은 합격이지만, 불필요한 묘사와 장면들로 재미가 반감되었다. 글자 수만큼 돈을 주니까 억지로 분량을 늘렸다지만, 누구는 그 억지마저도 몰입감을 주는 반면 누구는 지루함을 안겨주니 비교하지 않을 수가 있나. 쓸데없는 거 다 빼고 절반으로 줄인다면 별 다섯 개도 줄만한 작품인데, 쯧쯧.


동생인 장은 형인 삐에르보다 뛰어난 신체 스펙을 가졌다. 형은 열등감에 가득 차 있지만 아닌 척하기 바쁘다. 어느 날 운명하신 모 어르신이 동생에게 유산을 전부 물려주면서 장은 벼락부자가 돼버렸다. 배 아파하는 삐에르의 마음도 모르는 가족들은 마냥 기뻐한다. 줄 거면 형제에게 반반해주는 게 상식인데, 한 명에게만 몰아준다? 어딘가 구린내가 난다. 탐정모드가 된 형은, 그 어르신과 모친 사이에서 장이 태어났음을 밝혀냈다. 다만 이 진실을 공개하면 가족 모두가 상처 입을 것이고, 잠자코 있자니 화병에 돌아가실 지경이다. 하.


‘사느냐, 죽느냐‘를 내내 고뇌하는 삐에르의 모습. 이 정도면 프랑스판 ‘햄릿‘으로 불러도 될 듯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이 평화를 깨뜨리는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다분했다. 세상 모두가 동생을 더 우대하는데 편애한다는 기분이 안 들겠는가. 이래서야 열등감이 안 생길 수가 없단 얘기다. 그렇다고 형이 막 비교될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의사라는 번듯한 직업도 있고, 생김새도 멀쩡하고, 성격도 무난한 편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늘 동생한테 밀려났었던 삐에르에게, 재산 상속 일도 그렇고, 자신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부모님의 태도도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가정의 파괴까지 고려하는 그의 질투를 누구인들 욕할 수 있을까.


결국 삐에르는 입을 열고 말았다. 부친한테만 빼고. 모친은 순순히 인정하고, 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동생도 충격은 받았지만 가족의 해체를 막고 싶어 한다. 그와 반대로 삐에르는 가족들에게 실망하여 멀리 떠나버린다. 이렇듯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각색한 느낌마저 든다. 서사보다는 개인의 심리에 집중한 작품이었고, 그것은 충분히 공감하고도 남을만한 감정선이었다. 종종 친자 불일치로 확인된 자녀(와 아내)를 끝내 정리했다는 미디어 소식을 듣곤 한다. 그게 만약에 내 얘기라면 어떨까. 배신감에 잠 못 이룰게 뻔한데, 그렇다고 정이 든 아이를 떠나보낼 수 있을까. 마지못해 눈 감고 같이 살아갈 듯하지만 평생 괴로울 각오도 해야 한다. 혹 그렇게 되면 아이와 아내를 투명히 대할 순 없을 텐데 그럼에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정말 어려운 문제다. 이와 같은 윤리적 갈등을 다룬 <삐에르와 장>은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작품이다. 적당히 스킵하면서 읽는 것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돈키호테를 찾아서 - 포기하지 않으면 만나는 것들
김호연 지음 / 푸른숲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도 어김없이 신간을 보내주신 김호연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나의 글을 꾸준히 읽어준 분들은 아실 테지만 <파우스터>의 리뷰를 인연으로, 해마다 작품을 보내주고 계신다. 이제는 슬슬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인데, 아무튼 변치 않는 팬심과 리뷰와 홍보로 내 나름의 보답을 하고 있다. 전에는 블로그에 와주셔서 댓글도 주시고 소통도 해서 좋았는데, <불편한 편의점>이 대박 난 뒤로는 바빠지셨는지 넷상에서 볼 수가 없어졌다. 나는 예전부터 이 분이 크게 성공할 것을 예감했었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 나자 괜스레 아쉽기도 하고 뭐 그렇다. 아무튼 김호연 작가님과는 꼭 소설이 아니어도 나님의 인간미와 겹치는 구석들이 있어서 더욱 응원하게 된다.


현시점에서 가장 마지막 소설인 <나의 돈키호테>의 집필이, <불편한 편의점>보다 먼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전업 소설가로서의 생존과 연명을 위해, 또 ‘돈키호테‘를 모티브로 한 작품 구상을 위해 작가님은 스페인에서 몇 달간 체류한다. 신작의 소재와 영감을 위해 곳곳을 쏘다니며 스페인의 문화, 감성, 역사 등등을 익혀나가는 이야기들을 에세이로 묶어냈다. 따라서 일반 스페인 여행기처럼 보일 테지만, 여행보다는 소설가로서의 신앙고백에 초점이 더 맞춰져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작가의 모든 생각이 일상과 맞닿아있다는 점, 그래서 일과 삶을 분리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일상 속 작은 활동에도 글감으로 연결 짓기 바쁜 나날들이, 어쩐지 내 얘기를 하는 것만 같았다. 이래서 나는 글쓰기에 진심인, 나와 닮아있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한국과 다르게 스페인은 습도가 없어 항상 쾌청한 날씨가 유지된다고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이 괜히 에너제틱하고 친절한 게 아님을 보고 어찌나 부럽던지. 근데 좀 의외였던 건, 스페인 사람들은 돈키호테나 세르반테스에 퍽 열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작가님이 현지인들과 돈키호테 얘기를 나누면 다들 하나같이 케케묵은 전래동화를 쫓느냐는 듯한 분위기였다. 한국으로 치면 <홍길동전>에 열광하는 외국인을 보는 기분인 걸까. 그래도 전 세계를 강타한 <돈키호테>와는 급이 다를 텐데, 자국민들한테는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거로군. 돈키호테의 팬으로서 많이 씁쓸하고만.


<나의 돈키호테>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전부 꿈 많은 돈키호테로 자라나서, 지독한 현실에 굴복한 산초가 되고 만다. 아니, 지금은 어릴 때부터 산초로 커가는, 낭만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사회적 압박으로 죽어라 공부만 해왔던 현세대 청년들이 구직은커녕 그냥 쉬고 있다는 뉴스가 매일같이 보도된다. 물론 거기에는 일자리 부족과 부당한 기업문화 등등 여러 요인이 있을 테지만, 각자만의 목표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여 좌절해버리는 게 아닐까 싶다. 작가로서 계속 고배를 들어야 했던 김호연 작가님도 마찬가지였다. 수차례 포기하려다가도 글 쓰는 게 좋아서, 또 이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버텼더니 쨍하고 해 뜰 날이 돌아왔단다. 물론 이런 승리의 신화는 누구나에게 해당되고 적용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비관적으로 살아본들 달라지는 것 또한 없다는 사실도 명심해야겠다.


개인적으로 세상에 불만이 많은, 즉 하고 싶은 말들로 가득한 타입의 작가를 선호한다. 그래서 나는 세르반테스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이 <돈키호테> 외에는 거의 전무하지만, 나님은 무인도에 책 하나만 가져가라면 망설임 없이 <돈키호테>를 집어 들 것이다. 김호연 작가님이 돈키호테에게 보인 집착의 이유도 내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본다. 모든 것이 과열된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돈키호테와 산초가 적절히 섞인 하이브리드형 인간이다. 여기서 더 나빠질 수가 있을까,했던 사회 분위기는 날로 날로 갱신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보다도 자신을 지탱할 무언가가 절실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품선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o, H.


너의 가장 오래된 친구로서 해주고 싶은 말들이 있어 편지를 쓴다. 전보다는 표정이 많아진 것 같던데, 좀 어때? 이제는 그 지독했던 환멸과 염세에서 떠나온 거니? 아마 너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한때 네가 그토록 어둡고 부정적이었다고는 상상조차 못할걸. 그만큼 지금의 네 모습이 보기 좋다는 얘기야. 그나저나 이제 우린 젊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가 돼버렸네. 게을리 살든, 바삐 살든 지나간 시간들이 아까운 건 다 똑같은가 봐. 주변에서 하나둘씩 세월을 그리워하는 게 느껴지거든. 그런데 너하고 나는 그 반대였어. 오히려 시간이 약이라서 다행이다 싶어 했지. 특히 너의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고통과 증오가 옅어진 걸 보면 더욱 실감 나. 그래서 옛날 어르신들이 오래 살고 볼일이라는 말들을 했던가 봐.


참. 러브스토리의 드라마를 즐겨본다는 말에 솔직히 놀랐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정말 의외였어. 너는 드라마 자체를 잘 보지 않는 데다 그런 장르는 취향이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내 기억으로는 J와의 실패한 연애로부터 어떤 연애물도 찾는 법이 없었지, 너는. 그래서 완전히 달라진 네 모습 가운데 그 점이 가장 신선했어. 사랑했던 이에게 배반당하는 기분, 그 경험과 기억들은 좀처럼 극복하기 힘들지. 어떤 이들은 또 다른 사랑을 잘만 찾아가는데 너는 그런 성격도 아니었잖아. 한 사람에게만 마음을 다 쏟아부어서, 다음 사람에게 줄 것이 남아있지 않은 그런 타입이잖아. 솔직히 너의 순애보가 이해되면서도 현실감이 모자라서 큰일이라고 생각했었거든. 때마침 우연하게도 이번에 읽은 <책 읽어주는 남자>를 통해서 H, 너의 해소되지 않는 미련과 앙금들이 확 이해가 되었어. 그래서 내가 느낀 것들이 맞는지 어떤지 확인받고 싶어졌거든. 잘 들어봐.


내가 읽은 책의 내용들을 곁들여 설명할게. 먼저 중학생 남자애가 삼십 대 여자의 섹스 파트너가 돼. 매일을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정이 들었지. 물론 여자는 소년의 어설픈 구애 따위에 걸려들지 않아. 뭐 그러시겠지, 짬 차이가 얼만데. 근데 사귀자는 말만 안 했지, 연인들이 하는 건 다 하는 사이야. 아무튼 소년을 쥐락펴락하는 그녀를 보면서, 모든 남자들의 첫 연애는 무조건 여자한테 잡혀사는 주종 관계가 된다고 느꼈어. H, 너도 그랬듯이 이건 남자들이 호구이기를 자처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 남자들에게 있어서 첫사랑의 위력은 ‘개츠비‘ 하나로 설명이 가능하지. 그런데 여기서 두 유형으로 갈라져. 첫 연애가 짧은 사람은 이내 상처를 회복하고 곧이어 성숙한 사랑을 하게 돼. 반대로 첫 연애가 좀 길었다 싶은 사람들이 문제야. 가장 순수했던 시절의 첫 경험들이 저주가 되어서 평생을 따라다니니까. 어느 노래의 가삿말처럼,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에 그 사람이 있는 거야. 하등 의미 없는 일들까지도 그 사람의 기억이 대신해버리지. 그래, 맞아. 다 네가 나한테 해줬던 얘기들이야. 그만큼 <책 읽어주는 남자>의 주인공은 딱 너를 닮아있어.


어느 날 그녀는 말 한마디 없이 소년을 떠났어. 그녀에게 뭔가 잘못했던 걸까? 소년에게 그만 싫증이 난 걸까? 좋았던 관계가 갑자기 틀어져 버리면 아무래도 내 잘못인 것만 같잖아. 그래서 H, 너도 그토록 자책했었던 거였고. 사랑이란 놈은 말하자면, 자동차끼리의 교통사고 같은 거야. 나만 운전을 잘해봤자 소용이 없거든. 그게 내가 살면서 보고 듣고 배운 사랑에 대한 결론이야. 소년도, 너도 차라리 확실한 이별이었다면 덜 괴로웠을까. 너를 보면서 흐지부지하게 끝난 사이에는 납득이 들어설 자리가 없단 걸 알게 됐어. 현실에는 열린 결말 따윈 없다는 사실까지도. 아무튼 위대하신 첫사랑이 대 실패로 끝난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각성하는 것 같아. 외모를 가꾸고, 스펙을 쌓고, 명성을 키우는 등 광적인 자기 계발에 들어가더라고. 난 그것이 다음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더는 호구로 남아있기 싫어서라고 생각되지 않아. 분명히 그 밑바닥에는 ‘후회하게 해주마‘라는 무의식이 깔려있어. 다시 만날 거라는 보장도 없지만, 혹시 모를 그 언젠가를 계산에 넣는 게 남자들이니깐. 다만 H, 너는 각성이 아니라 흑화에 가까웠어. 그래서 안타깝긴 했어도 뭐라 할 생각은 없어. 너의 전부를 지켜본 나로서는 네가 자살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니깐.


몇 년 후, 소년은 법대생이 되었어. 어느 법정의 재판에 참관했던 그는, 피고인으로 앉아있는 그녀를 보게 돼. 놀랍게도 그녀는 친위대에 들어가 수용소의 감시원이 되었다고 해. 그리고 수감자들을 건물 안에 가두고 화재로 전부 죽게 했다는 게 죄목이래. 옛사랑과의 재회가 온통 배드 뉴스라니. 너와 내가 학수고대하던 그림은 이런 게 아니었잖아. 너를 버리고 떠났던 J의 ‘죄‘가 밝혀졌음에도 너는 습관처럼 스스로에게서 원인을 찾고 죗값을 물었지. 주인공도 마찬가지였어. 내가 정말 저 정도 밖에 안되는 사람을 사랑했던 것인가 하고. 그처럼 너도 실망과 비난의 화살은 전부 J가 아닌 너에게 겨눴지. 이제 슬슬 편지의 목적을 눈치챘길 바래. 아무튼 주인공은 하루도 안 빠지고 재판에 참석했어. 예외 없이 각성했던 그는 전과 달리 이성적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거야. 그 덕분에 동기 여학생과 결혼도 하고 딸까지 얻은 미래를 만들 수가 있었어. 하지만 너도 느꼈다시피 ‘두 번째‘ 애인과는 십중팔구 배드 엔딩이 되고 말지. 그런 의미에서, 모든 남자들의 ‘두 번째‘는 가장 불쌍한 운명이 아닐까 싶어.


다시 잘해보고 말고 할 것도 아닌, 전혀 가망이 없음에도 놓지 못하는 너의 그 감정들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또 사랑까진 아니라 한들 달리 무엇으로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지나온 날들처럼 앞으로도 종용히 삭히는 것 말고는 없을 테지. 그래서 주인공도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게 다였어. 더는 할 말이 없다면서 냉소적인 태도를 하고는 있지만, 누가 알겠어?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던가, 그걸로 됐다던가 하는 말들은 다 허울좋은 변명에 불과하단 걸 네가 더 잘 알잖아. 진상을 규명해서 득이 될 게 전혀 없다 해도 남겨진 자들은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그치만 주인공은 그녀를 직접 마주할 뜻은 없었고, 단지 지금도 내가 당신을 기억한다는 의사만 전달하고 싶어 했어. 그래서 한때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었던 것처럼, 낭독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교도소에 보냈어. 무려 10년이 넘도록 그걸 했다네? 사랑이 죽어버린 요즘 같은 시대에는 그게 대단해 보일지 모르겠다. 우리 때는 ‘싸이월드 댓글 100개 쓰기‘ 같은 것들도 아무렇지 않게 했었는데. 너와 J가 주고받은 편지들이 생각나. 상자에 가득 채울 만큼 차고 넘쳤던 편지들. 또 그것들을 하나씩 불태우던 네 얼굴까지도. J의 흔적을 다 없애면 후련해질 거라던 너의 확신은 보기 좋게 빗나갔어. 그러게, 다른 건 몰라도 편지는 간직하라고 말했잖아. H, 너는 꼭 내 말을 안 듣고 나중에 가서 후회하더라.


언젠가 네가 스치듯이 해준 얘기가 있어. 차라리 괴로운 기억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이 부럽다던. 요즘 뉴스에서는 갈수록 연애 자체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대. 그러면 네 말대로, 사랑을 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더 낫다는 걸까? 글쎄. 나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 끔찍한 터널을 지나오면서 우리는 성숙해지고 인간에 가까워질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지워버릴만한 추억조차 없는 이들이 불쌍해 보여, 나는. 이 얘기를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냐. 이제 너는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진 나비가 되었으니까. 너도 참 징글징글한 놈이야. 그래서 말인데, 이젠 그만 좀 잊으라고 했었던 말들을 철회할게.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그게 얼마나 잔인한지도 잘 알았어. 너처럼 삶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한테 내가 너무 몰아붙였던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해. 그냥 지금처럼 잊고 살아가다 한 번씩 회상하고 울적해지고 추억 팔이 하는 정도여도 좋을 것 같아. 그러니 앞으로는 너를 통제하거나 고치려 들지 않을게. 그리고 H, 나는 네가 다시 한번 ‘편지 써주는 남자‘가 되기를 바라. 그것이 너의 아이덴티티라는 걸 부디 잊지 말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임신중절 - 어떤 역사 로맨스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리처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왔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다. 늘 밝고 명랑했던 친구들도 세월 앞에서 소용없지 않았던가. 직업, 신분, 학벌, 나이, 성공 등 모든 조건을 막론하고 세상에 즐거운 사람, 걱정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여 이 같은 사회에서는 매사에 긍정적이기보다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건강한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을 지키는 것이 모진 풍파를 이겨내는 비결이라 하겠다. 이것은 고통과 불안뿐 아니라 지루함과 권태까지도 막아준다. 물론 이게 가능해지려면 본인만의 사랑이 충만해야 한다. 그 사랑이란 내 주변과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자기만의 시선과 방식이다. 이 점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입버릇처럼 세상을 탓하고 불평불만을 일삼게 되어있다.


어쩌다 보니 특정인들에게 팩폭을 한 것 같은데, <임신중절>을 읽으면서 형편없는 스스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일단 브라우티건 작가는 살짝 난해한 글을 쓰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나마 이 작품이 쉬운 편에 속하는데, 메시지를 넣은 건지 만 건지 아리송한 챕터가 참 많았다. 요약하자면, 한 여자가 도서관 사서와 동거 중에 임신해서 낙태수술하러 떠난다는 내용이다. 지극히 평범한 서사여서 인사이트가 많지는 않았는데, 나님은 두 남녀의 자기해방에 대해서만 적어보겠다.


남자는 도서관의 비좁은 방에서 지내며 24시간 365일을 근무하는 사서이다. 그곳은 출판이 불가한 책들을 기증받는 특수한 도서관이었고, 그곳을 혼자 3년 넘게 지키는 중이었다. 자리를 비울 수도 없어 외출 한번 못해봤지만 그는 퍽 만족해했다. 어느 날 밤, 한 여자가 도서관을 찾아와 고충을 털어놓다 그만 남자에게 반해버린다. 그녀는 매혹적인 마스크와 다이너마이트 바디를 소유한, 그야말로 초절정 절세 미녀였는데, 정작 자신은 그 완벽한 육체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만을 따지던 남들과 달리,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해준 사서에게 마음을 뺏겼다는 게 어쩐지 디즈니에서 잘 써먹는 전개였지만 그냥 넘어가자.


여자는 동거로써 자기혐오를 극복하기에 성공한다. 이제 남자와 함께 중절수술을 받으러 갈 건데, 문제는 도서관 지박령인 그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거였다. 저 혼자 근무해서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지만, 사실 바깥을 나가기가 부담스러웠을 테지. 이렇듯 세상과 마주하는 일을 피해왔던 두 사람. 그 두려움을 깨뜨리는 것이 이들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먼저 남자부터 설명해 보자. 남자는 딱 우물 안 개구리였다. 우물 속에서 지낸 지가 오래되어 우물 밖의 세계가 궁금하지 않은 상태다. 그랬던 그는 여자의 중절수술 때문에 할 수 없이 우물 밖을 나오게 된다. 좋든 싫든 탈출에 성공한 셈이니 한 단계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남자가 개구리라면 여자는 새장에 갇힌 새였다.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 ‘육체‘라는 새장에 갇혀서 나는 법을 잊어버린, 자기가 아름다운 줄도 모르는 한 마리의 새. 모든 남자들에겐 추파를, 모든 여자들에겐 질투를 받고 살아온 여자는 사서 덕분에 새장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갖은 시선을 피하고자 제 육체 속으로 숨기 바빴던 여자는, 이제 자신의 육체를 보는 법과 세상을 대하는 인식을 알아간다. 오히려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세상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으니, 이 역시도 한 단계 성장한 셈이다. 이처럼 두 사람은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계기로 각자의 감옥에서 해방되고 위기와 불행을 극복해낸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이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품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온몸으로 부딪혀서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던 헤세의 말처럼 자기해방에는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나 자신의 충만한 사랑에 이른다면 우리는 우물 밖으로, 새장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모든 풍파를 이겨내는 평온함은 거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텔 뒤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9
애니타 브루크너 지음, 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 구매했었는지 기억도 없는 <호텔 뒤락>을 읽었다. 솔직히 그저 그랬는데 빼어난 해설 때문에 별 넷을 주었다. 정녕 이보다 잘 쓰진 못하리라 생각될 만큼 훌륭한 분석이었다. 하여 자신 없어진 나님은 최대한 해설과 겹치지 않는 선에서 평을 적어보겠다. 소설가 이디스는 어떤 불명예를 안고서 호텔 뒤락에 피신해있는 중이다.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고통을 달래고 글쓰기로 멘탈을 회복할 예정이며, 여성들이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살펴보게 된다는 작품이라나.


호텔에 있는 동안 글이나 쓰겠다던 다짐이 무색할 만큼 집필은 진전이 없었다. 단조로운 삶의 권태로 무기력해진 이디스 앞에 나타난 사업가 네빌. 그녀의 선입견과 페르소나를 들여다본 그는 많은 조언을 건넨다. 그녀는 자신이 이성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고, 남들처럼 사회적 제도와 규율에 억지로 자신을 밀어 넣을 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믿는 듯했다. 이디스의 억눌린 무언가를 본 네빌은 그녀의 관점을 바꿔보도록 권한다.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끌려다니지 말고, 감정의 과잉에 속지 말고, 좀 더 유연한 자기중심적인 삶을 습득하라면서. 사회와 관계를 정하는 잣대가 강하다 보면 자꾸 선을 긋게 된다는 거였다. 과연 그 말대로 이디스는 남들을 자기 입맛대로 속단하는 경솔함이 없지 않았다. 그것은 소설가라는 직업병이 한몫했을 테지만 세상을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몹쓸 버릇임에 틀림없었다.


나님은 불순함의 감지센서가 고도로 발달한 탓에 남들과 허물없이 지내기가 참 쉽지 않다. 특히 예상대로의 모습들을 볼 때마다 그 선입견들은 더욱 확신을 갖게 된다. 그렇게 이것저것 재고 따지다가 내려놓지를 못해 매번 고립돼버리는 것이다. 또 나처럼 고립된 사람들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 세상은 온통 병자, 환자들로만 차고 넘치는 지옥처럼 느껴지게 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부정적인 속내와 태도를 고수하게 된다는 말이다. 내가 볼 때 이디스는 나와 다르지 않다. 지난날의 잘못과 더불어 유배지나 다름없는 호텔 생활, 상대하기 피곤한 타입의 호텔객들. 여러 요소들이 그녀를 무대 밖으로 밀어내었고, 거기에 이디스도 저항 없이 끌려다녔다. 네빌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해 준 것이다.


이어서 대답한 이디스의 발언이 충격적이다. 자신은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면서. 주변과 딱 필요한 만큼만 관계를 유지하고 절대 거리를 좁히는 법이 없는 그녀의 속 사정은 누구보다도 사랑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 한 말은 에로스적인 사랑을 뜻했으나 더 넖게는 아가페와 플라토닉까지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디스의 과제는 도덕적 기준의 벽을 허무는 법을 익히는 것일 테다. 하나 네빌은 그것보다는 사랑 자체에서 벗어난 모습이 되는 게 먼저라고 하였다. 사랑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이디스는 제 사랑이 커지는 대로 놔뒀다가 그 부피에 못 이겨 무대 밖으로 밀려났다. 따라서 사랑의 부피를 줄여야만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면 이다음엔 뭐 어떡하라는 걸까? 결혼을 해서 사회적 지위를 갖춰야 한단다. 그 말은 결혼 자체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넓은 세계로 뛰어들라는 의미였다.


이제 시간을 거슬러 이디스의 과거로 넘어간다. 그녀는 어느 유부남과의 금지된 사랑을 즐기고 있었지만 현실을 직시한 뒤 홧김에 다른 남자와 약혼을 한다. 그리고 문제의 결혼식 날, 모든 준비를 다 마친 상태에서 그녀는 결혼식에 불참한다. 이디스의 평판은 그야말로 곤두박질을 쳤고, 본인 스스로도 용납이 안되어 죽을 맛이었다. 그 사건은 유부남을 못 잊어서라기보다 자신이 누군가의 아내가 되고, 어딘가에 종속된다는 것과는 맞지 않다는 데서 비롯된 확신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살던 곳을 떠나와 이 구석진 장소의 호텔까지 오게 됐던 것. 그래 뭐, 도망친 건 그렇다 치고 다시 복귀할 수나 있는 지가 더 궁금하던데.


솔직히 이 정도 가지고는 좀 약하다 싶었는데 웬걸, 페미니스트를 호되게 질책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이 책이 84년도에 나왔으니까 지금과는 다른 유형을 말하는 것일 테지. 호텔에는 남자들의 시중을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고 즐기는 콧대 높은 여성 객들이 있었다. 그녀들은 손님으로서가 아닌 여성으로서 그 특권을 누리는 중이었고, 이것이 남자들에게 쉬운 표적이 된다며 불명예스럽다던 이디스의 한탄이 쏟아진다(170p). 그러는 한편 네빌과 붙어지냈단 이유로 이디스도 쓸만한 남편감을 노리는 속물처럼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중에서 그녀가 닮았다고 하는 버지니아 울프처럼, 현대 여성의 홀로서기에는 남성의 그늘을 벗어날만한 조건이 필요하다. 그렇듯 이디스도 고유의 것으로 자립하고자 해왔으나 그녀 또한 여성으로서 기대고 싶어 하는 이중성을 떨쳐내진 못하였다. 아마도 이 점을 시사하기 위해, 또 앞으로의 행보를 위해 쓴 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자, 그러면 이디스를 비롯한 현대 여성들은 이대로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해야 되느냐면 그런 게 아니다. 안팎으로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지키는 선에서의 관계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하여 저자는 주인공을 네빌과 맺어주어 그 관계를 성립시키고자 했다. 아직도 그녀는 유부남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상태이고, 네빌도 이디스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이유를 납득했기에 결합이 가능했다. 이렇듯 남녀의 다른 조건과 형편을 존중하는 것이 올바른 공정이지만, 오늘날에는 생리적 차이를 배제한 동등함을 공정이라고 보고 있다. 과거 작가들이 강조한 페미니즘의 진보는 결코 이런 게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호텔에서의 생활이 유배생활이나 다름없다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그것은 속해있던 사회와의 단절을 뜻했지만, 돌아갈 곳을 잃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나를 받아줄 이가 없다면 그곳이야말로 유배생활이 아니고 뭐겠는가. 아무튼 시대가 많이 바뀌었으니 자립의 조건 또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현대 여성의 자립에는 돈과 방의 필요성을 말했었다. 바글바글한 인간들 사이에서 개인 공간이 필요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공간이 넘쳐나고 오히려 북적이는 데를 직접 찾아가야만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현대의 자립 조건에는 타인과 연대하는 인간관계의 능력과 기술이 포함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저자의 인터뷰 중에, 성공을 거머쥔 고아로 살기보다 여러 자식을 낳은 엄마로 살고 싶다는 얘기가 있다. ‘자율성의 필요‘와 ‘관계의 필요‘가 갈등관계가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데, 두 가지가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 하나에만 집중했으니 결여된 것에 공허를 느끼는 건 당연하다.


실로 이디스는 자신의 커리어를 택했지만 사회로 뛰어드는 데에는 꽤나 소극적이었다. 게다가 혼인을 막 결사반대하는 쪽도 아니었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환상을 쫓고 있는 주인공. 이런 이디스가 글쓰기로 도피했다고 하는데, 정작 소설 집필은 손도 안 대고 가끔씩 편지 작성이나 하는 정도를 도피였다고 볼 수나 있나 싶다. 암튼 피곤해서 여기까지만 쓰겠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