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거인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결 옮김 / 민음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시구로의 작품도 거의 다 읽어간다. 작가 특유의 느긋함이 요즘 같은 더위와 어울리지 않지만 늘 그렇듯 읽게 되면 스르륵하고 빠져들게 된다. 이시구로 작품은 초반보다 후반 쪽이 내 스타일인데, <파묻힌 거인>은 어딘가 간이 배다 만 듯한 데뷔 초반의 감성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네임밸류가 있지, 썩어도 준치였는데 누구 말대로 추천은 못하겠더라는. 일단 거인은 안 나오는 걸로 봐서 일종의 은유였는지도 모르겠네.


갑작스럽게 중세 시대 배경의 판타지 장르물이다. 이전까지의 작품들과 전혀 다른 시도라서 생뚱맞기도 했거니와 이토록 잔잔하고 담백한 기사소설은 또 처음이라 역시 이시구로 답다고 해야 할까. 아무래도 톨킨의 <호빗>이 연상되곤 했는데, 이 작품은 액션이 거의 없고 대화나 회상 위주로 흘러가는지라 막 특별한 볼거리도 없고, 작가의 날카로운 시선도 담겨있지 않아 별다른 화두도 없었다. 그냥 쉬어갈 겸 이런 책도 냈다고 하기엔 이때가 환갑이었으니 뭔가 말이 안 맞는 듯. 잡담은 이쯤하고.


색슨족 노부부가 갑자기 잊고 있었던 아들이 생각나, 아들이 사는 마을에 가자는 즉흥 여행이 시작된다. 부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없는 이유로 과거 기억들이 삭제되었음을 반복해서 알려준다. 가끔씩 흐릿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이 무언가 평범했던 과거는 아니었음을 내내 암시하는데 그게 뭐였는지 또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알 길이 없다. 노부부는 어느 마을에서 만난 의문의 전사와 소년하고 팀이 되어 길을 떠나는데, 이 전사가 주인공 A를 빤히 쳐다보며 아는 사람으로 보는 게 아닌가. 그러나 기억이 지워진 A에게는 전혀 남남이었고, 전사는 예정보다도 더 오래 A와 동행하게 된다. 흠.


그다음에는 늙은 노기사를 만난다. 그의 삼촌인 아서왕의 명을 받들어 ‘퀘리크‘라는 암용을 죽이기 위해 살아가고 있단다. 전사의 사명 또한 멸룡이었는데, 노기사는 자신의 일이라면서 전사에게 물러날 것을 강요한다. 아서왕의 백성들은 색슨족 전사의 숙적인 브리턴족이었고, 타협이 불가하여 전사와 소년은 따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기사 역시 A를 안다는 듯이 얘기하는데, 고운 말투가 아닌 걸로 보아 왕년의 A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노부부는 그들의 기억 삭제를 설명하고, 노기사는 암용이 내뿜는 숨에 그 마법이 걸려있다고 알려준다. 그것이 암용을 반드시 멸해야만 하는 이유였는데, 어째서 전사와 노기사는 손을 잡지 않은 걸까.


읽어보면 알겠지만 A의 아내는 남편 껌딱지마냥 심각한 의존증이고, 또 남편은 그런 아내를 끔찍하게 과잉보호한다. 이렇게 끈적한 남녀관계는 내가 알던 이시구로의 스타일이 아니어서 보는 내내 좀 거시기했다. 이야기는 이제 암용을 찾아가 멸하고 기억을 되찾는 것으로 끝나는데, 정말 별거 없어서 내용은 생략하겠다. 어쨌거나 이 작품에서도 작가의 중복된 시선이 담겨있긴 했다. 고집스레 밀어붙인 결단과 저지른 행동이 훗날에 또 다른 위기를 불러온다는 것. 그때엔 올바른 선택을 했다지만 이제 와보니 섣부른 판단이었다는 사실. 돌이킬 수 없는 자신의 과오로 가까운 이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 암용의 숨결에 마법을 걸어 모두의 기억을 지워서 민족 간에 분쟁과 증오를 멈춘 장본인이 바로 주인공이었다. 즉 지금의 평화는 거짓으로 쌓아 올린 것이었고, 암용의 마법이 풀린 현재 대륙 곳곳에서 전쟁이 발발할지도 모를 일이다. 왜 노기사가 주인공을 나무랐는지 이해가 된다는.


마지막 장에서 A는 아들을 찾아가자는 아내를 극구 말리는데, 그가 알고 있는 참혹한 내막을 곧 사랑하는 아내가 알게 될 터였다. 아마 여기에도 주인공의 잘못이 개입되어 있을 테지. 그가 선택한 거짓된 평화는 정녕 헛수고였을까. 우리 인간은 잘한 일과 옳은 일이 같은 거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런 착각 속에 발생하는 실수와 잘못들은 언젠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지금껏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했었는지를 알게 한다. 하여 가즈오 이시구로는 작품마다 미래의 나에게 후회를 남기지 말자는 일인 시위를 하고 있다. 자신감과 자기신뢰가 흘러넘쳐 오만함으로 번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겠다. 독서 중독자 중에 오만한 인간들이 생각보다 많더라고, 글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4-08-14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일 날 올렸군요. 그날은 올림픽 마지막 날 여자 역도 중계가 있던 날이었죠. 제가 생중계는 안 보는데 묘하게 끌려서 보느라. 조마조마 하더군요. 워낙 잘 하는 선수긴 하지만 암튼 조마가 싫어서 안 보는데 그만...ㅠ
근데 마지막 글귀가 참 묘하게 얄밉군요.ㅋㅋ
설마 저는 아니겠죠? 근데 그럴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이 책이란게 워낙 도도한 물건이라. ㅋ

물감 2024-08-14 15:03   좋아요 1 | URL
저는 여자 마라톤 딱 하나만 봤어요. 마지막 반전이 대단했습니다ㅋㅋㅋ
저는 책이 자신을 높여주는 게 아닌 더 낮춰주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과학자들도 연구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겸손해진다고들 하잖아요. 분야를 막론하고 그게 정도의 길이라 생각이 됩니다. 🙂

젤소민아 2024-08-21 05: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아있는 나날]의 잔상이 심해서 다른 작품을 당분간 미루고 싶을 정도~~~이건 환똬지라굽쇼~~? 이시구로라면 다르겠지...험험. 물감님 리뷰보니 읽고 싶습니다~

물감 2024-08-21 10:27   좋아요 0 | URL
저도 <남아 있는 나날>이 베스트였어요. 그 작품의 여운이 꽤 오래갔었거든요 ㅎㅎ
이 작품은 판타지인지도 모르고 읽은 건데, 제가 생각한 모험물이 아니어서 읭? 했다가 점점 역시 이시구로답다 하면서 읽었다죠 ㅎㅎㅎ 끝까지 읽어봐야 느낌이 오는 게 딱 이 분의 스타일이었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