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말 페이지터너스
보리스 사빈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빛소굴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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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에서 디카프리오가 이런 말을 한다. ˝인생은 축복이니 낭비하면 안 되죠.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죠. 매일매일을 소중하게, 순간을 소중히.˝​


갈수록 시간이 빠르게 흘러감을 느끼는 요즘, 매시간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노력 중이다. 그 많던 근심과 고민들은 연기처럼 흩어지고, 열망과 체념의 줄다리기도 멈추었고, 감정과 이성의 혼란들도 다 숨을 거두었다. 진리에 도달한 지금은 더 이상 어떤 질문도 던지지 않는다. 오히려 삶에 큰 변화나 자극이 없어서 더욱 고맙고 축복된 인생이지 싶다. 혹자는 인생에 목표나 목적이 꼭 필요하다는데, 반대로 그런 게 없어서 감사할 수가 있는 인생살이도 존재한다. 바로 나처럼.


떠들썩한 국내 사정에 비해 내 마음은 이다지도 평온한 걸까. 가진 게 없어도 풍요롭고, 배움이 없어도 지혜롭고, 탐구와 번뇌의 해방감을 누린다는 기쁨으로 충만한 나날들. 순간을 소중히 하라는 말의 참 의미를 이제야 깨닫는다. 늘 그래왔지만 더욱더 내 사람들에게 잠잠한 사랑으로 다가서려 한다. 내 모든 질문의 해답은 여기에 들어있다. 그리고 어쩌면 <창백한 말>의 저자인 사빈코프 역시, 어느 정도는 나와 일치한 마음이 아닐까 싶었다.


이것은 모스크바 총독을 암살하려는 테러리스트의 수기로써, 실제 혁명가로 활동한 저자의 생을 바탕으로 쓰였다. 실패한 암살 시도와 죽어가는 동료들. 각자의 이상을 위해 바친 목숨, 그것은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뜻이 없는 조지는, 막연한 제 삶이 마치 실체 없는 인형극처럼 느껴졌다. 어째서 인간은 앙망하고 갈구해야 할 대상이 필요할까. 차라리 죽음으로 존재의 의미를 증명하는 편이 낫지는 않을까. 죽음보다 삶을 바치는 게 더 어렵다더니 과연, 말도 생각도 욕망도 삶도 다 지겨워졌다. 이제 나는 아무래도 좋다.


동료 B는 조지의 죽은 심장을 위해 그리스도를 전한다. 비록 자신은 살인자가 되었으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린 그리스도를 따라갈 뿐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살인을 막기 위해 대신 살인하는 게 세상을 밝히는 일이라고 한다. 그 말은 어쩐지 사랑을 전파한 그리스도에 대해 신성모독으로 들렸다. 그러나 사랑과 무관한 조지의 영혼은 법이 적용되지 않는 죽음 쪽으로 기울었다. 사랑을 가르쳤으나 배신 당했고, 진리를 전했으나 고통 받았던 그리스도의 생애는 온통 의문투성이였으니까.


그럼에도 조지는 신앙이나 사랑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고,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해 슬퍼할 줄도 알았다. 그녀와 함께라면 죽음도 무의미하게 느껴지곤 했다. 그랬기에 동료의 말마따나 사랑이 제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창 마음이 오락가락하던 중, B가 총독 암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기쁨은커녕 기분만 멜랑꼴리해진 주인공. 목적을 이룬 건지 잃은 건지 알 수가 없는 가운데, 슬며시 차오른 격분으로 애인의 남편을 총살해버린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주인공에게 사랑이 전부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자신은 사랑을 모른다는 그의 반복된 고백 속에서 그가 얼마나 사랑을 추구하는지를 느낄 수 있다. 겨우 인생의 해답을 발견했으나 B의 말처럼 사랑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어, 남은 건 사랑의 이름으로 죽는 것뿐이었다.


알고 보니 B가 저자의 상징 인물이란다. 그렇다는 건 서로 상반되는 두 자아를 통해 더욱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 셈이 된다. 다만 여기에는 성경 말씀을 베이스로 하고 있어서 무신론자나 합리주의자는 이해하기 어렵겠고, 특히나 T들에게는 퍽 지루할 작품이겠다. 여하간 인생들은 정한 시기가 되면 후회로 점철된 생애를 되돌아본다.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자각하게 된다면 이 얼마나 축복인가.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가 남는다면 결국 거기서 거기란 뜻일 테니,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도록 하자. 그리고 매일매일을 소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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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6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순간을 소중히 여기려고 노력 중이신 물감님의 글이 너무 잘 전달되어 옵니다.

물감 2024-04-26 19:16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그레이스님. 이 짧은 글에서 온기가 느껴지네요.
그보다 참 오랜만에 인사 드리네요. 좋은 하루 되셨기를🙂

페크pek0501 2024-05-04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망과 체념의 줄다리기가 멈추셨군요. 그게 좋을 수도 있긴 해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줄다리기가 진행 중입니다. 다 버리려 했더니 살맛이 안 나서요. 나이들수록 뭔가 붙잡고 살지 않으면 그냥 시간이 가고 그냥 늙을 것만 같아서요. 시간을 아끼며 소중하게 쓰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인생의 허망함, 부질없음이 느껴질 때가 있죠. 물감 님이나 나나 안달복달은 하지 말자고요. 안 하는 걸로...^^

물감 2024-05-05 00:39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저도 J 성향인지라 막 포기했다거나 될대로 되라식은 절대 아니고요, 조율을 하고 합의점을 보고 판단을 하는 쪽입니다 ㅎㅎ 단지 저의 것은 눈에 보이는 무언가가 아니고, 막 실현가능한 일들도 아니고, 암튼 설명하기 어렵네요 ^^; 여튼 말씀하신대로 안달복달은 안 할거에요. 지금의 제가 좋거등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