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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핏 쇼 ㅣ 워싱턴 포
M. W. 크레이븐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평점 :
내게 여름은 저주의 계절이었다. 원체 더위에 약한 데다가 피부까지 하얘서 허물도 자주 벗겨지곤 했다. 그래서 내 평생 여름에는 좋은 추억이 별로 없다. 그렇게나 싫었던 여름이 갑작스레 좋아져 버렸다. 덥고 습한 건 여전히 싫지만, 이 계절만의 감성과 에너지가 이유 없이 사랑스러워졌다. 그러자 문득 내가 또 나이를 먹었구나 싶어졌다. 나이가 든다는 건 신체적인 변화보다도 본인의 애티튜드, 즉 사고방식의 변화에서 더욱 실감하게 된다. 그동안 외면해왔던 것에 너그러워지는, 이런 게 바로 어른이 돼가는 징조가 아닐런가. 밤 산책을 하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날도 덥고 하니 당분간은 장르소설이나 잔뜩 읽을 계획이다. 이번에 읽은 <퍼핏 쇼>는 영국에서 건너온 신규 시리즈물인데, 요새 독자들 사이에서 제법 핫하길래 설마 했는데 역시나 그냥 그랬다. 재미가 없는 건 아닌데, 삘이 오질 않는 달까. 영국보다는 미국 쪽이 내 취향인 탓도 있지만, 그 이전에 지적사항이 많은 작품이었다.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불명예 사건으로 정직 처분된 경찰이 다시 복귀한다. 환상열석(스톤헨지의 일종)에서 사람을 태워 죽이는 연쇄살인범이, 한 시신의 몸에 주인공 이름을 칼로 새긴 것이다. 피해자들의 정보를 추적한 워싱턴 포는, 이 사건이 과거 보육원 어린이 밀매 사건과 연관됨을 발견한다. 그 사건의 관계자 중 하나가 자수하는데, 경찰서에 잡혀있던 그 또한 같은 방식으로 살인돼버린다.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다니는 이 귀신 같은 놈을 대체 무슨 수로 잡으란 말이더냐.
칭찬 글은 수두룩하니까 비평만 하겠다. 시리즈를 기획하면서 이것저것 준비를 많이 하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팩트가 약했던 이유를 몇 가지 적자면, 첫 번째로 주인공 시점만 있는 스트레이트한 플롯 때문이다. 전에도 말했지만 범인의 서사 없이 일방통행의 수사가 되면, 악당들과 싸워 이기는 게 전부인 후레쉬맨 내용과 다를 게 없어진다. 이 작품은 대단한 활약을 펼치는 범인의 등장 한 번이 없었고, 또 워낙 철두철미하여 수사가 좀처럼 방향을 잡지 못한다. 여기서 범인과의 소통 부족이 두 번째 문제가 된다. 일반 연쇄살인범들이 단서를 남겨 수사 측과 게임을 하는 반면, <퍼핏 쇼>의 방화범은 정보랄 게 없어서 그냥 미치광이 살인자로만 보여진다. 물론 그쪽이 더 현실성 있지만 소설에서는 빈약한 설정이라 재미가 반 토막 나버리지. 범인의 플레이를 구경 못하니 독자는 주인공들이 인지하는 사태의 심각성 쪽에서만 스릴감을 느낄 수 있다. 근데 여기서 세 번째, 앞서 말한 수사의 방향을 잡지 못해 되는대로 추리해 보는데, 단서를 따라갈수록 연관된 사건이 등장하고 또 다른 게 등장하고 또 뭔가가 나오고... 대체 몇 겹의 과거를 접목시키는 겁니까. 난 이렇게 복잡한 구성도 잘다루지롱~ 하는 작가의 자랑으로밖에 안 보인다. 이거 살짝 신경 거슬리는데 2편을 읽게 되면 답이 나오겠지.
독자와의 호흡을 차단하는 일방통행, 이게 바로 후레쉬맨 플롯의 단점이다. 결국 범인이 밝혀지지만 놀라울 것도 없었다. 범인의 등장 후에도 분량이 꽤 많이 남는데, 대부분이 앞에서 나왔으면 했던 범인의 성장 배경과 범행 동기였고, 수사의 방향을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에 관한 설명이었다. 그 조종한 수법들도 영 억지스러웠고, 맨땅에 헤딩하다 번뜩이는 통찰력으로 실마리를 푼다는 주인공의 패턴 또한 개연성이 떨어졌다. 분명 쎄빠지게 고생하고 있는데도 너무 날로 먹는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 거다. 그리고 후반부에 주인공의 불명예 사건과, 그의 가정사와, 경찰 측 배후 세력 등 큼직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앞으로의 기획을 언급한 건 좋은데 꼭 이렇게 몰아치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네. 내가 이 작품에 칭찬해 줄 만한 건 딱 하나, 인물 설정이다. 보통 액션 소설의 시리즈물은 주인공에게 질병이나 신체적 결함 같은 핸디캡을 주곤 한다. 그런데 워싱턴 포는 비교적 멀쩡하게 만든 반면 파트너에게 핸디캡을 부여한, 이례적인 케이스라 제법 신선해서 좋았다. 비록 기대에 못 미쳤지만 모든 1편들이 부실공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뭐. 이 작품을 소설가 지망생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난 이만 여름을 만끽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