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1 - 직선은 원을 살해하였는가 ㅣ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장용민 지음 / 시공사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국내 장르소설의 전설이 되어버린 장용민 작가의 데뷔작을 읽었다. <궁극의 아이>와 <불로의 인형>에서도 느꼈던 바, 이 분의 광활한 상상력은 가히 예술의 경지라 하겠다. 장르소설에 예술이 웬 말이냐 싶지만 그의 작품들을 읽어보면 반박하기도 뭐할 것이다. 확실히 시나리오 작가라 이야기에 군더더기가 없고 장면 장면마다 시각화가 잘 된다는 게 장점이다.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은 96년도 시나리오 공모전 대상을 받아 영화화되었는데 영화는 안 봐서 모르지만 소설과 설정이 많이 다른듯하다. 90년대의 기술로 이 정도의 스케일은 소화 불가라 그러려니 한다. 원작이라도 좋으면 장땡이지 뭐.
팩션 문학의 선두주자인 장용민의 색깔은 매우 뚜렷하다. 역사, 신화, 전설, 문화를 현대로 가져와 시대 음모론으로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다루기 쉬운 소재들도 아니고, 잘못 건드렸다간 논란이 날 수도 있는데 굳이 그쪽 길로 나간다는 건 그만한 깡이 있어서겠지. 이런 복잡한 이야기가 개연성에 재미까지 있으려면, 작품을 위해 연구에 뛰어드는 정도 가지곤 절대 무리다. 지역 토박이처럼 아예 그 바닥에서 말뚝 박고 살았어야 이만한 퀄리티가 나올 수가 있다. 차기작들도 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정말 칼을 미친 듯이 갈았는데, 저자의 상상력뿐 아니라 머리도 뛰어나고 조예도 깊다는 게 곳곳에서 느껴진다. 사실 난해한 제목으로 계속 읽기를 미뤘던 건데 왜 이제야 읽었는지 후회된다.

위 작품은 조선의 천재 시인인 김해경(이상)이 쓴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아주 난해한 시다. 여기에는 한반도를 뒤집어놓을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있다고 한다. 은표와 지우는 시의 분석과 김해경의 삶을 짜 맞춰 만든 가설로 웹 소설을 써낸다. 폭발적인 조회 수와 함께 쏟아지는 이메일 중, 글을 내리지 않으면 위험해질 거란 내용을 발견한 두 사람. 이들이 쓴 가설은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렸고, 이메일의 경고대로 위협과 습격을 받게 된다. 한편 ‘오다니 컬렉션‘이라는 일본의 엄청난 보물이 조선의 땅 어딘가에 묻혀있다는 것과, 보물지도의 역할이 건축무한육면각체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시인이기 전에 건축가였던 김해경은 조선의 일급비밀을 자신의 건축물 안에 감춰두었고, 그것이 언젠가 일본의 눈을 피해서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고 있었다.
워낙 방대한 내용이라 요약이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역사 속 인물과 사건을 인용하는 플롯이라서 걱정했는데, 나 같은 역사맥주병도 가뿐히 읽어낼 만큼 이해가 잘 되는 작품이다. 근데 조선을 와해시킬 일본의 음모론이라니, 썩 솔깃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먹고살기 바쁜 대중은 음모론 따위에 그리 흥미를 갖지도 않는다. 현시대에 발생한 일이 아니라면 더욱더. 이런 대중의 미적지근한 반응을 통과하려면 모두의 이목을 끌만한 특종이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1932년도에 발표한 김해경의 시 하나를 재해석하여 국가의 위기를 막아낼 열쇠로 탈바꿈했다. 지금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시대라 신선함이 덜하지만 출간 당시에는 꽤나 쇼킹했었겠다. 난 기발한 발상보다 소스의 활용에 더 점수를 주고 싶다. 음모론이란 게 카더라통신 같은 거라서 일반인들도 그럴싸한 루머를 생성해낼 수가 있다. 그런 낭설에 생기를 불어넣어 실존하는 진실처럼 꾸며낸다는 건 실로 엄청난 재능이자 능력이다. 정녕 이 책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문학가의 입장에서도 깔 데가 없는 장르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생각한다.
작품 구석구석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한도 끝도 없을 듯하다. 쓰고 보니 서평보다 감상문에 더 가깝네. 요즘 장용민은 창작의 샘물이 말라버렸다는 썰이 돌던데, 이것도 카더라 통신이겠지? 제발 그렇다고 해줘. 잔잔바리 갬성뿐인 지금의 출판계에는 용가리의 포효가 절실합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