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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촌 레이첼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평점 :
작년이었나. 모 헬스 유튜버가 코로나 스트레스를 먹방으로 풀기 시작하더니 엄청난 속도로 몸이 비대해졌다. 그는 헬스장 대표라는 신분도 내려놓고 유혹에 보란 듯이 빠져들었다. 평생 쌓아온 습관과 자기관리가 단 며칠 만에 무너진 것이다. 나중에 다시 몸짱으로 복귀하긴 했지만 이거는 프로 정신 덕분인 거고, 보통은 한번 무너지면 영영 못 일어나는 경우가 더 많다. 뭐가 되었든 간에 늦바람이란 참 무섭다. 이게 뭐라고 평생 절제하며 살았나 싶어지지. 막상 해보니 생각보다 별거 없거든. 딱히 일상에 지장도 없는 거 같고. 그러다 이 반복되는 자기합리화의 문제점을 인지할 때쯤엔 이미 회생 불가 상태라 더욱 절망하게 된다. 이런 건 본인도 그렇겠지만 보는 이들이 더 속상하다. 자 그럼,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이 어떻게 틀려먹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을 소개해본다.
숙부에게 거두어진 고아 필립은 그를 따라 모태솔로로 자라난다. 숙부는 요양하러 간 이탈리아에서 레이첼을 만나 운명 같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종종 보내오던 숙부의 근황 편지가 뜸해지더니, 나중에는 레이첼이 심상치 않다는 내용을 보내온다. 그리고 얼마 뒤 숙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다. 유전병 때문이라지만 필립은 숙부의 재산을 노린 레이첼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찼다. 여기까지는 클래식하고 좋았는데 이다음부터가 대략 뻔한 전개로 흘러간다.
숙부가 죽고 가문의 주인 나리가 된 필립. 그는 자신을 찾아온 레이첼에게 반하여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는 호구가 된다. 숙부를 따라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해온 필립에게 그녀는, 어머니의 따스함과 여성의 매력까지 갖춘 여신 그 자체였다. 집안의 돈을 이탈리아로 보내는 걸 알고도 돈이 모자랄까 싶어 더 퍼다 주는 필립의 본격적인 호구 짓이 시작된다. 심지어 대부의 만류와 충고에도 내가 알아서 한다며 같잖은 집주인 행세를 한다. 이 풋내기의 관심사는 오직 레이첼의 환심을 사는 일이었고, 할 줄 아는 건 가문의 돈을 바쳐가면서 곧 떠나려는 레이첼을 붙잡아두는 정도였다. 사랑에 눈멀어 똥멍청이가 된 수많은 남자 가운데 필립의 찌질함은 명백히 한도 초과였다. 고딕소설의 위엄을 깎아내리는 필립이 문제인가, 말년에 이런 캐릭터나 만들고 있는 작가의 신세 탓인가. 아무튼 여러분, 콩깍지가 이렇게나 위험합니다.
분량은 다 끝나가는데 아직도 호구 짓거리 하는 필립 때문에 내가 다 초조해지고 머리에 쥐가 난다. 마침내 25살이 되어 법적 후견인인 대부에게서 해방되자, 당장 은행 금고로 달려가 가문의 보석을 죄다 꺼내 레이첼에게 떠먹여주는 주인공. 게다가 가문의 전 재산을 레이첼의 명의로 넘겨주는 스윗함까지. 자기를 어리게만 보는 그녀에게 상남자로 보일라고 별짓을 다하는데, 매력 어필은커녕 흑역사만 늘어가는게 아주 그냥 꿀잼이라 혼자 구경하기 아깝더라. 여튼 필사적으로 재혼을 거부하는 레이첼과, 그것이 숙부와의 사별 때문이라고 믿는 필립은 지독한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대체 이 똑같은 패턴을 몇 번이나 우려먹는 건지 아주 그냥 지겨워서 혼났다. 다른 독자들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는데 또 나만 그랬는갑다.
그에게 실망하고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에게 상처만 주는 똥멍청이 필립. 마침내 그도 레이첼의 이중성을 느끼고서 대 혼란에 빠진다. 법률상 그의 재산을 온전히 차지하려면 그녀는 재혼을 해선 안되었다. 또한 상속자 문제를 매듭지으려면 상속자인 필립이 존재해서도 안되었다. 이런 이유들로 레이첼은 천천히 필립을 매장해왔고, 어리석은 필립은 스스로 가스라이팅을 당해온 거였다. 다단계에 빠진 사람이 앞뒤 분간을 못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듯. 여하튼 정신 차린 필립이 알 수없는 행동을 보여주는데, 여기에도 수많은 독자들이 엄지척에 휘파람을 불러댔지만 나님은 그저 그랬다고 한다. 이런 결말이나 보여주려고 쌔빠지게 빌드업을 하셨단 말인가. 에잉. 그렇지만 대프니 듀 모리에가 타고난 이야기꾼이란 건 인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