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판 사나이 이삭줍기 환상문학 1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1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근 1년간 방대한 업무량과 저질체력 사이에서 어떻게든 독서생활을 유지해본 결과 이러다 진짜 과로사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여 올해는 철저하게 양보단 질의 독서를 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동안 묵혀두었던 화제작 또는 유명작 위주로 읽을 계획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른 이번 책은 디즈니 동화 같은 고전문학으로 재미와 주제가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는데, 그건 마치 달달한 케이크와 마일드한 커피의 환상 조합이었다. 워낙 퀄리티가 좋아서인지 분량이 짠데도 불만이 전혀 안 든다. 샤미소는 이번에 처음 본 작가인데 이 분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기관까지 있다나.  


주인공은 X맨에게 그림자를 팔고 마법의 자루를 얻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기피 대상 1순위가 되어 대략 난감해진다. 마법 자루에서 나온 황금으로 남들의 환심을 살 수는 있었지만 마음까지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여인도 떠나보내고, 하인에게 배신을 당하는 등, 정체를 들킬 때마다 온 동네에 조롱거리가 되어 유리방황하게 된다. 다시 등장한 X맨은 전보다 더한 파격 제안을 건네오고, 이에 울컥한 주인공은 불꽃 싸다구를 날린다. 


악마와의 거래 후 타락의 길을 걷는 이 흔한 이야기가 뭐 이리 재미있다냐. 해설대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가 결합된 정말 멋진 작품이었다. 맨 먼저 주인공은 그림자를 잃자마자 나라 잃었듯이 절규한다. 또 약속이나 한 듯 모든 사람이 그림자 없는 주인공을 비난한다. 사실 그림자가 없어서 물리적인 리스크나 핸디캡이 생긴 건 아니었다. 가량 햇빛을 받아선 안된다던가, 수명이 줄어든다던가 하는 문제가 전혀 없는데도 다들 주인공을 무슨 외계인처럼 쳐다보고 비난과 조롱을 일삼는다. 여기에 대한 설명은 끝까지 없었는데 읽다 보니 그림자는 인간과 떼놓을 수 없는 것, 인간이라면 반드시 갖추고 지녀야 하는 것으로 대강 이해된다. 그런 중요한 것을 잃었다는 건 곧 인간이길 포기한 거라는 말로도 설명이 가능한데, 그러다 보니 남들을 피해 다니며 점점 은둔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한데 그림자를 잃은 슬픔보다, 자유로이 돌아다니지 못하는 것보다, 그림자를 잃게 된 경위를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할 때마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게 가장 곤욕이었다. 


악마에 대해서는 깊게 해석할 필요는 없겠다. 인간을 갉아먹는 유혹의 아이콘 정도로 해두자. 보통 인간이 죄를 범하면 자책과 회개 속에 지내다가 대가를 충분히 치렀다고 생각되면 당당해지곤 한다. 그것처럼 주인공은 악마와 재회했을 때 당연한 권리처럼 제 그림자를 요구한다. 그림자의 가치를 깨달은 건 좋은데, 황금을 쓸 만큼 쓰고서 할 말은 좀 아니었지. 그는 마법 자루를 원했던 때와 똑같은 욕심을 부리고 있었고, 그게 괘씸했던지 악마는 그림자와 영혼의 교환을 원했다. 일전에 얻은 교훈으로 거래는 무산되고, 그토록 악마와의 재회를 꿈꾸던 주인공은 이제 악마를 피하게 되고, 반대로 악마가 그를 따라다니는 코믹한 장면이 연출된다. 참 볼만하다.


해설 중에는 작가가 자본주의에 삼켜진 당시 사회를 비난했다고도 한다. 돈과 정체성을 교환한 것부터 해서 황금 때문에 주인공을 떠받든 수많은 사람들까지, 돈에 살고 돈에 죽는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게 그런 이유기도 하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론 돈을 탐내다 혼쭐나는 내용 중에서 자본주의를 지적했던 경우는 없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왜 그렇게까지 해석이 나왔을까. 아마도 그림자의 존재가 단순하지 않고 자아, 정체성, 영혼, 인간다움 등등의 철학적인 접근을 요하기 때문일 테다. 아무튼 의미를 곱씹으면서 봐도 좋고, 생각 없이 그냥 읽어도 재미가 있다. 


내가 왜 이 책에 끌렸는고 하니 이것도 결국 이방인에 대한 내용이어서다. 샤미소는 프랑스에서 태어나 독일인으로 살았고, 다행히 잘 적응해 자리도 잡았지만 두 국가 사이에서 말 못 할 방황 중에 살았다고 한다. 작가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러한 방황 덕에 이 같은 예술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런 걸 볼 때마다 역시 예술은 영혼이 굶주려야만 하는가 싶다. 암튼 이렇게 해석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작품들은 전부다 명작이다. 각기 다른 해석을 공유함으로써 문학의 세계는 넓어지고 독서의 의미는 깊어지게 된다. 다 좋았는데 마무리가 아쉬워서 별 하나 뺀다. 끝에 등장한 마법 장화도 정황상 악마가 심어놓은 걸 텐데 이에 대한 설명이나 출처도 없이 두루뭉술하게 넘어간 것도 그렇고, 잘 끌고 가던 사실주의에서 갑자기 웬 환상문학으로 바뀐 것도 쪼까 별로였다. 이거 빼면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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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1-05 07: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 좋은 작품이 쓰이기 위해서는 작가의 어려웠던 삶이 바탕이 되어야만 가능한거 같아요 ㅋ 저는 처음 들어본 작가인데 물감님 리뷰를 보니 유명하신 분인가 봅니다. 연구기관도 있다니 ㅋ 업무에 힘드시더라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물감 2022-01-05 12:30   좋아요 3 | URL
그러게요, 근데 저도 심령이 공허하고 방황할 때 글이 잘 써지기는 해요. 신기하게도요 ㅎㅎ
새파랑님도 건강 잘 챙기셔요. 전 올해는 굵직한 이야기만 팔거라 리뷰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coolcat329 2022-01-05 09: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유명한거 같아요. 제가 아는 걸 보니 ㅎㅎ
청소년 책인 걸로 알고 있었는데 모두에게 다 재밌는 책인가보네요.

물감 2022-01-05 12:54   좋아요 2 | URL
역시 그랬군요. 읽으면서 디즈니의 알라딘이 계속 생각나던데 청소년 도서가 맞나봐요ㅋㅋ

공쟝쟝 2022-01-07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간나시면 <사람, 장소, 환대>읽어보세요 ㅋㅋ 아 물감님은 소설파지만 ㅋㅋ 이 소설을 중심으로 엮은 좋은 인문서입니다! 새해복 많이받으시고, 부디 올해는 적게 일하고 많이 버시길!!

물감 2022-01-08 09:45   좋아요 2 | URL
와 공쟝님 별별정보를 다아시는분! 이건 회사서 책 신청해 읽어볼게요ㅋㅋㅋ새해 복마니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