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남자 블루 컬렉션
카롤린 봉그랑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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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코로나 검사받으러 갔는데 줄이 너무 길어서 안되겠다 싶어 근처 알라딘에 들어가 이 책을 샀다. 적당한 분량에다 재미있기까지 해서 진료 대기하는 동안에 다 읽어버렸다. 책으로 시간 때우는 게 이럴 땐 정말 좋다. 근데 수백 명의 대기자 중에 책 읽는 사람은 나밖에 없더라고. 뭐 암튼 처음 알게 된 프랑스 작가인데 꽤나 내 스타일의 글을 쓰시더군. 제목에 밑줄 긋는 정체 모를 남자와 밀고 당기는 숨바꼭질을 하면서 사랑에 빠져가는 여자의 이야기인데, 이런 순정/로맨스 장르를 잘 안 찾는 나님이 푹 빠져 읽은 걸 보면 이제 나도 여성호르몬이 너무 많아져 버린 게 아닐까 한다. 아니면 연말이라서 괜히 싱숭생숭해지는 걸수도 있고. 암튼 우리 남자들아, 이런 달달한 책도 좀 읽어주고 해야 각박한 세상을 유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요.


소설가 로맹 가리의 작품을 다 읽으면 더 이상 사는 낙이 없을까 봐 걱정인 그녀. 안되겠는지 서브 작가를 찾고자 도서관에 가서 책 몇 권을 빌려온다. 그런데 어떤 매너 없는 인간이 책 곳곳에 밑줄을 그어놓고 여백에다 낙서까지 써놓은 게 아닌가. 낙서자가 기록한 추천도서를 대여했더니 또 곳곳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는데, 묘하게도 밑줄의 문장들이 전부 그녀에게 말을 걸듯이 느껴졌다. 대여한 책마다 그어진 밑줄을 쫓다 보니 어느새 이 실체 없는 대상을 사랑하게 된 그녀. 이제 슬슬 내 운명 맡기고 싶구만, 그대는 왜 이리 꽁꽁 숨어서 피 말리게 하시는가.


이 책도 일인칭 시점이라 단순하고 읽기 수월하다. 사랑에 빠지고 싶은 평범녀의 원맨쇼가 이렇게나 재미있다니. 도서관 책에 쓴 밑줄과 낙서로 시작되는 로맨스라. 설정이 좀 억지인데 이건 뭐 애교라 치고, 한국 드라마 여주인공처럼 발동동 왈가닥 귀염포텐이 넘치는 주인공에게 금방 익숙해지더랬다. 글만 읽어도 러블리함이 느껴지던데 어째서 남자가 꼬이지 않는 캐릭터로 해놨을까. 프랑스 남자들은 이런 타입의 여자를 선호하지 않나 보다. 그녀의 운명은 로맹 가리에서 밑줄 긋는 남자로 옮겨간다. 어찌나 몰두했던지 남자가 밑줄 친 문장에 혼자 대답하고, 다른 문장에다 밑줄 치며 대답을 대신하고. 그렇게 상상 속의 이상형을 그리면서 솔로 탈출을 꿈꾸는 금사빠 그녀였다.


근데 밀당도 좀 적당히 해야지, 이놈의 밑줄남은 도저히 나타날 생각이 없는 거다. 설렘은 점점 짜증으로 바뀌고 인내심은 바닥이 나려던 차에 직접 밑줄남을 알아내기로 한다. 아 이렇게 매력 있는 여성을 어딘가에서 지켜만 보는 밑줄남의 관음증을 영 이해할 수가 없네. 나까지 짜증이 나려던 때에 한 남자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윙크를 날린다. 제법 밀당을 할 줄 아는 작가일세? 아무튼 그는 밑줄남이 아니었고, 그녀의 이상형과는 딴판이었지만 나대신 밑줄남을 찾느라 고생하는 모습에 또 사랑에 빠진다. 금사빠답게 정말 거침없는 전개였지만 그게 또 나쁘지가 않았다. 이제 솔로도 탈출했으니 밑줄남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었는데, 현남친은 계속해서 밑줄남 수색에 집착한다. 이거 언제까지 이럴 건가 싶을 때쯤에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마지막까지도 밀당이라니, 깜찍하시더군.


사실 로맨스물이라고 하기엔 한참 뒤에 남자가 등장하고, 그전까지는 주인공 혼자 북 치고 장구치는 내용뿐이라서 장르가 애매하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허점이 가득하나 작가 특유의 개성과 독특함이 온갖 단점들을 가려준다. 무거운 작품도 아닌데 뭐 어떠랴. 이만하면 아주 훌륭한 소설이다. 죽어있던 연애세포가 다시 살아난 기분입니다요. 갑자기 달달한 게 먹고 싶어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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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10 0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리커버 하면서 가격이 두배!

로맨스 물에 푹 빠진 물감님

낼 눈뜨면 이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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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21-12-10 00:43   좋아요 2 | URL
예압 당 충전하겠습니다ㅋㅋ

공쟝쟝 2021-12-10 00: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밑줄긋는 남자에 별 다섯개라..... 🤔 이쯤 되면 별의 기준은 그의 호르몬인가.

물감 2021-12-10 00:43   좋아요 3 | URL
ㅋㅋㅋ저는 작품성보다는 소설다움을 좋아하는 편이라...

scott 2021-12-10 00:43   좋아요 2 | URL
그런 걸로 ㅋ^^

공쟝쟝 2021-12-10 00:46   좋아요 3 | URL
소설 못 읽는 사람은 사람마다의 별 기준을 분석중이다… ㅋㅋㅋ 저 이 책은 아주 오래전에 읽다가 좀 오글거려 놓았던 기억..

scott 2021-12-10 00:48   좋아요 3 | URL
저희 아부지 뉴스에서 슬픈 것만 들으셔도 눈물이 주르르릭,,,
아무래도 소설 별 기준은

호르몬 수치 ?? ㅎㅎㅎㅎㅎ

물감 2021-12-10 00:49   좋아요 2 | URL
저도 오글거림은 잘 못 참는데 연말에 읽으니 볼만합니다. 역시 모든건 타이밍이라죠😎

공쟝쟝 2021-12-10 00:51   좋아요 4 | URL
물감님 저에게 로맨스를 권하지 마세요. 막 피튀기고 두뇌싸움 쩌는 장르물을 추천하란 말야!! 느끼한 거 말고 아주 시니컬하고 잘난척 해서 죽여버리고싶은 주인공이 나오는.. 욕하면서 보는데 재밌는 그런거!!!

물감 2021-12-10 00:56   좋아요 4 | URL
내 공쟝쟝님을 위한 페이퍼를 작성할테니 그전까지 사둔 책들로 잘 버티고 있어봐요ㅋㅋㅋ

공쟝쟝 2021-12-10 00:57   좋아요 3 | URL
맞아 도끼나 패야지… 물감님 안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