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보이 - 2018년 제14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
박형근 지음 / 나무옆의자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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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할 때엔 사랑 노래가 전부 내 얘기 같고, 반대로 헤어지면 이별 노래가 모두 내 것이 된다. 이건 진짜 내 얘기다 싶은 노래들이 나도 몇 곡 있는데 그중 하나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다. 내가 처음 사귀었던 그녀는 나의 절친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 갔다. 중간에 많은 비하인드가 있지만 생략하고- 나보다 훨씬 잘난 놈이라 도저히 게임이 안될 걸 알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 뒤로 내가 얼마나 찌질한 놈인지를 확인하는 시간들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소리 없이 증발해서 그대로 사라져버리길 원했다. 억겁의 시간이 흐른 뒤 군 입대를 했고 필사적으로 바깥 생활들을 잊어갔다. 애쓴 보람이 있었는지 상병쯤에는 꽤 상처가 회복이 되었다. 그렇게나 지워버리고 싶던 악몽들도 제법 당당히 마주할 수 있을 만큼. 근데 지금은 그 시절의 경험과 감정과 시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오늘의 나에게 만족하는 나님은, 과거의 일들이 없었다면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음을 아주 잘 아니까. <스페이스 보이>를 읽다 보니 나의 옛날이 훅하고 떠올라서 먹먹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기억을 잊고 싶어 우주로 나간 남자의 넋두리를 들어보라.


우주공간에서 2주간의 생활을 마치고 지구로 돌아오는 프로젝트. 우주인 김신은 한 외계인을 만나 그쪽 세상에 잠시 머무른다. 그가 뭐 때문에 우주로 왔는지 잘 아는 외계인은 그의 뇌를 이리저리 거닐며 기억 삭제를 돕고자 한다. 그러나 변심한 김신은 과거뿐만 아니라 외계인과 함께한 기억도 남겨달라고 한다. 오히려 선명해진 기억들을 얻고서 지구로 복귀하고, 이후 국민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우주 대스타가 된 주인공. 그러나 마지못해 살아가는 건 여전했고, 그래서 갈수록 삐딱해져 가는 자신을 어쩌지 못한다. 결국 선 넘은 그에게 날아든 외계인의 경고장.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


재미있군. 독백체라서 읽기도 쉽고 스토리도 단순하니 집중도 잘 된다. 초중반까지는 지우고 싶던 기억들이 사실은 매우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내용이다. 솔직히 외계인과의 장면들은 주목할 게 많지 않다. 나중에 지구로 와서부터가 제법 탄력이 붙는데, 주인공이 하루아침에 벼락스타가 되어 연예인 소속사도 얻고, 방송에 광고에 화보에 인터뷰에 스캔들까지 초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다. 어느새 연예인들의 연예인이 돼버린 김신. 잔뜩 유명해진 그는 이제 헤어졌던 구여친을 찾아가 다시 시작하자는 구걸을 한다. 과거 내가 했었던 이 구질구질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네 그래. 아무튼 이런 찌질함을 받아줄 여자는 없듯이 구여친도 김신의 구걸을 딱 잘라 거절한다. 게다가 현남친과 결혼 날짜도 잡았댄다. 그렇게 확인사살을 당하고 너덜너덜해진 그는 본격적으로 막 나가기 시작한다. 어째서 외계인에게 구여친과 다시 잘 되게 해달라거나, 과거로 가고 싶다는 소원을 빌지 않았는지 궁금하군.


사랑에 울고 웃는 남자들의 순애보와 유치함을 나름 잘 나타내주었다. 이별한 후에 사라지고 싶었던 것도, 기억을 미화해가며 붙잡고 싶었던 것도, 날 놓친 걸 후회하게 만들려고 성공에 집착했던 것도, 어쩌다 마주칠 그 순간을 위해 언제나 꾸미고 다니는 것도. 다 내가 했던 것들이라 많은 공감을 하면서 읽었다. 아 물론 내가 국민스타는 아니지만. 여튼 독백체 작품이라 철저히 주인공 시점과 감정대로만 흘러가는 스토리였다. 그래서 다른 곁가지들을 일부러 분석할 필요 없이 주인공한테 몰입하면 된다. 스트레이트한 플롯이기도 하고, 동병상련의 입장이 아니라면 크게 재미가 없을 지도 모르겠다. 미필자가 군필자를 이해 못 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오늘의 한 줄 평. 남자는 좀 찌질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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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09 00: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결국 물감님 지난 시절은
스페이스 보이

현재는

스토너

그리고 냥이 집사

.....ฅ^•ﻌ•^ฅ

물감 2021-12-09 00:33   좋아요 1 | URL
스캇님의 꾸준한 냥이 언급...ㅋㅋㅋ 3탄에 대한 압박인가요ㅋㅋㅋ

scott 2021-12-09 00:36   좋아요 1 | URL
네 .🖐 ^^

coolcat329 2021-12-09 0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물감님...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ㅠ
솔직한 글이라 책 리뷰가 더 와닿고 재밌습니다.
요즘 읽으신 책들이 다 동병상련이라 연말에 마음 위로받고 새해 힘차게 출발하시면 되겠어요!

남자는 좀 찌질해질 필요가 있다. 저는 여자지만 왠지 맞는 말 같아요.😁

물감 2021-12-09 08:51   좋아요 1 | URL
이별 안 해본 사람이 있겠어요?ㅎㅎ 그리고 어떤 이별이든 쿨하거나 아름다울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구차해지는 모습이 보기 흉하더래도 저는 그게 사랑에 대한 일종의 예의같기도 하고요 ^^ 저같이 찌질한 남자들은 이렇게 단련이 되어야 훗날에 정상인 구실을 한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