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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머즈 하이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박정임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어려서부터 좋은 직장을 얻기까지 쌔빠지게 공부하고 스펙 쌓는 고생을 한다. 직장인이 되고 나면 쌔빠지게 일하다가 번아웃이나 매너리즘으로 고생을 한다. 어느새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죽지 못해 사는 얼굴이 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멀쩡하게 사는 듯한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똑같은 환경에서 누구는 맨날 울상 짓고 누구는 활력이 넘치는 이유가 뭘까. 이런 사람들은 삶의 균형을 잡고 유지하는 비결이 자기 관리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업무와 개인 시간을 정확히 구분하고, 건강한 여가생활을 즐기며, 발전하기 위해 자기계발을 멈추지 않는다. 배움에서 즐거움을 얻고, 즐거움에서 열정이 흘러나며, 열정에서 활력 있는 삶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제껏 내가 멋있다고 느꼈던 분들은 다 그런 타입들이었다. 비록 내가 좋은 어른까지는 못되더라도 멋있게 나이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자주 하게 된다. 운 좋게도 이번에 만난 소설가는 내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이었다. 57년생 기자 출신의 일본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의 라떼 시절을 소설로 만나봤다.
‘러너스 하이‘라는 마라톤 용어가 있다. 뛰다가 육체의 한계 지점을 넘어섰을 때 엄청난 쾌감이 뇌를 지배하게 된다고 한다. ‘클라이머즈 하이‘라는 암벽등반 용어 또한 등반 중에 흥분이 최고조가 된 상태를 뜻한다. 러너스 하이가 선수를 계속 뛰게 만드는 반면, 클라이머즈 하이는 흥분이 풀린 뒤에 오는 공포감으로 온몸을 마비시킨다. 그렇게 위험한데도 산에 목숨 거는 산악인들의 자부심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주인공 유키. 그는 등산 광인 직장 동료와 함께 죽음의 산을 오르기로 약속하지만 당일에 여객기가 추락하는 대형사고가 나서 약속 장소에 가지 못했다. 기자이자 신문사 직원인 그는 여객기 사건의 총괄을 맡게 되어 정신이 없다. 그리고 들려오는 등산 동료의 식물인간 소식. 어째서 나쁜 일들은 다 한꺼번에 일어나는가. 누가 나 대신 울어주길 바라는 중년 남자의 외로운 투쟁이 시작되었다.
굵직굵직한 서사들을 다루고 있어 리뷰가 영 쉽지 않군. 강렬히 휘몰아치는 상황들에 비해 분위기는 다소 차분하여 폭풍전야 같은 기분이 든다. 클라이머즈 하이가 딱 이런 기분이려나. 매번 느끼는 건데 일본의 사회파 거장들은 이런 연출을 기막히게 뽑아내는 감각이 타고난 듯하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N각 관계의 달인이라면, 요코야마 히데오는 가히 장인 수준이다. 휴대폰도 없던 시절의 올드한 작품이지만 촌스럽기는커녕 겁나게 스타일리시하다. 작가가 기자 출신이라 그런지 나이를 먹어도 감각이 되게 예리하다. 이런 숙성도 높은 글맛은 언제라도 환영이다. 혹시 내 취향이 올드한 걸까...
실제 했던 여객기 추락사고를 다루고 있어 현장감이 넘친다. 주인공은 사건 총괄을 맡은 후로 직원들과의 마찰이 끊이질 않는다. 자신의 기사가 실리지 않자 유키를 원망하는 부하들, 신문 1,2면에 여객기 내용만 가득하여 윽박지르는 타부서들, 추락사고를 돈벌이의 기회로 삼는 간부들, 이번 사건을 평생의 훈장으로 삼으려는 교활한 직원들. 모두한테 미운털 박힌 유키는 시궁창 속에서도 기자의 본분과 사명을 다하려는 참된 언론인이다. 그래서 유가족들을 위해, 고생하는 후배들을 위해 옷 벗을 각오로 상부와 싸워가며 사건을 지휘한다. 고생하는 후배들과 시기하는 윗선들 사이에서 멘탈 바사삭 중인 그에게는 레드불이 절실해 보였다.
밖에서는 이렇게나 인간적이지만 집에서는 전혀 아니었던 유키. 부친 없이 자란 유키는 어떻게 아버지 노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권위적으로 가족을 대해왔다. 그리하여 아들과 소원해진 그는 관계를 회복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질 않는다. 아들에 대한 애정은 식물인간이 된 동료의 아들에게로 향한다. 유키는 자신을 친부처럼 따르는 동료의 아들을 볼 때마다 친아들이 생각나 마음이 저리다.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기 힘든 신문사에서 있다 보니 서투른 인간관계는 전혀 나아질 낌새가 없었다. 차라리 은퇴해서 가족들과 쭉 있고 싶지만 형편상 그럴 순 없었고, 그랬다간 지금의 관계들마저 무너질지도 몰랐다. 부하들 지휘하고 신문 제작하고 조직을 상대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도 아들이 계속 생각나는 건 어째서일까.
그는 동료가 식물인간이 된 이유를 알게 되었고, 등산을 왜 그토록 좋아했는지, 친하지도 않은 자신을 파트너로 원했는지도 깨닫는다. 여객기 사건이 끝나고 수년이 흐른 뒤 동료의 아들과 함께 죽음의 산을 오르는 유키. 내려가기 위해 산을 오른다던 동료의 말을 약간이나마 이해하는 그였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해답을 찾으려 산에 오르고, 낚시를 하고, 바둑을 두는 등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해서 답을 얻은 사람들이 삶의 균형을 유지하며 멋있게 늙어간다. 왜 클라이머즈 하이가 제목일까. 흥분이 지나가고 밀려드는 공포를 조심해야 하는 건 인생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오르는 것만 생각지 말고 내려갈 것도 잘 준비하여 인생의 말년까지 잘 먹고 잘 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