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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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비평 위주로 쓰다 보니 칭찬에는 인색하고 불평불만이 가득한 인간으로 종종 오해받지만 나님은 따듯한 도시 남자임을 밝혀둔다. 일단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쓰는 것도 아니거니와 많고 많은 칭찬 리뷰를 나까지 쓸 필요가 있나 싶을 뿐. 어떤 책이든 대부분의 리뷰가 복사/붙여넣기 한 것처럼 비슷한 내용에 글도 참 재미없게 써서 눈에 촥 감기는 맛이 하나도 없다. 그런 게 싫었던 나는 최대한 남들과 겹치지 않는 리뷰를 써야 했고 그 해답을 비평에서 찾아냈다. 그저 ‘좋아요‘밖에 모르는 독자들에 대한 반발심도 한몫했는데 아무튼 난 따도남이다. 오랜만에 애정 작가인 정유정의 책을 읽었는데 어머나, 내가 이 분을 까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유야호~


정신을 차렸을 땐 그녀의 몸은 보노보가 되어있었다. 아마 교통사고가 나면서 안고 있던 보노보의 몸으로 영혼이 옮겨진듯하다. 그녀는 사고 목격자를 통해 육체가 있는 응급실로 이동한다. 막상 반송장이 된 제 몸을 확인하자 멘붕이 온 그녀는 몸을 되찾기가 망설여진다. 인간으로 돌아가면 곧 죽을 것이고 보노보로 살자니 인간이길 포기해야 한다. 육체의 생명은 꺼져가고, 영혼은 보노보에 동화되어가는 야속한 상황. 하늘이여, 뭐 이런 X같은 시련을 주셨나이까...


오랜 시간을 흑마법사로 지내온 작가는 어떤 사고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 같다. 구상 중인 작품이 있었는데 갑자기 떠오른 옛 기억, 중환자실에서 모친 곁을 지키며 느꼈던 것을 정리하다 보니 이 책을 먼저 쓰게 되었단다. 작가의 말을 통해 어째서 보노보 소설이 탄생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 동물까지 동원하여 인간의 심연을 연구하는 작가의 태도와 열정에 박수를 안 보낼 수가 없다. 하지만 다른 때보다 준비기간이 짧았는지 곳곳에 부실공사 흔적이 가득했다. 아무리 전작들과 성격이 달라도 그렇지, 아픔을 담담하게 풀어내던 절제의 미학은 다 어디 가고 이렇게 감정에만 치우친 글을 쓰다니. 무엇보다 동물과의 정신 결합 설정은 작가의 스타일과 안 맞는다고 생각한다. 이 분은 상상력이 아닌 조사와 취재를 바탕으로 해서 작품에 녹여내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직선만 쓰던 사람이 곡선을 쓰려다 보니 어색해질 수밖에.


화두는 많은데 파악은 잘 안되고, 재미는 있는데 대중성은 없는 난해한 작품이다. 엔터테인먼트와 작가주의를 다 가져갈 거면 진지함과 가벼움의 비율을 제대로 나눠야 한다. 전반적으로 진지하다가 가끔 가볍게 환기를 시켜주던지, 아니면 가볍게 쭉 가다가 한 번씩 진지모드로 브레이크를 걸어주던지. 그 비율을 신경 쓰지 않으면 이렇게 작품 성격이 불분명해진다. 이외에도 문제는 많았는데 특히 작가 특유의 속도감이 영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부분. 특정 장면에서 길게 머무르다 보니 진도가 드럽게 안 나간다. 문체도 시원시원하고 가독성도 좋은데 드럽게 답답하다. 이 경우는 한국인의 고질병을 논하기보다 작가의 스타일이 바뀐 탓을 하는 게 맞다. 작중 상황이 상황인지라 멘붕오는건 알겠는데 계속 거기에만 꽂혀있으면 우야꼬. 역시 정유정이라며 다들 치켜세우던데 내 눈에는 작가의 매력 발산이 절반도 안돼 보였다. 정유정의 네임밸류는 절대 이 정도가 아니란 말이다.


단순히 몸 찾는 내용만으론 보여줄 게 없으므로 주인공이 보노보와 동화되는 과정에 분량을 채워 넣었다. 두 의식이 교차하며 몸의 주인이 되는데, 보노보에게 몸을 내어줄 때마다 그녀는 보노보의 감각을 인지하고 정보도 파악하게끔 변화한다. 그리고 보노보의 기억을 더듬어서 이 친구가 어쩌다 한국까지 오게 되었고 어떤 고통을 겪어왔는지도 알게 된다. 또한 자신과 이 친구가 구면이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콩고에서 밀렵꾼에게 잡혀있던 이 친구를 구하지 않고 도망쳤던 그녀는 죄책감으로 사육사를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때 외면했던 보노보를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결국 이 작품도 현대판 <죄와 벌>인 셈이다. 이 인과응보의 플롯은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재탄생되었는데 그중에서 <진이, 지니>는 매우 신선한 작품에 속한다.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내용이 주제를 다 가린다는 것만 빼면 베스트가 될 수도 있었는데.


사육사로서 자격 미달로 벌받는 건 알겠는데 당장 문제는 그게 아니지 않나. 평생을 보노보로 살지 말지가 더 급선무일 텐데, 계속 보노보 사연에 집중하느라 본인의 처지는 잊어버리고 있다. 동화된 다음 사건을 역으로 보여주고 자신의 죄를 마주하는 연출은 좋았으나 이쯤 되니 그녀의 개인사는 그닥 중요치 않게 돼버린다. 주인공의 목표가 흐려진다는 건 매우 심각한 일인데 작가는 계속 보노보에게만 감정을 쏟아내고 있다. 어느덧 작가가 대중성은 포기하고 작가주의로 가려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참.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제 문제의 심각성을 생각하고 고뇌에 빠진다. 그 고뇌를 작품 내내 다루었어야지, 이제 와서 부랴부랴 말해봤자 흥미도 없어진지 오래이고 감정이입도 되지 않는다. 차라리 보노보를 콩고로 무사히 돌려보내는 게 목표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스토리도 엉켰으니 대중소설도 아니고, 주제가 전혀 부각되지 않으니 작가주의 소설도 아닌 이것은 제3의 장르입니까?


문제를 마주하고도 행동 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 이것이 내가 느낀 작품의 주제이다. 주인공 이진이는 보노보의 구조 신호를 무시했고 사육사를 그만둘 정도로 힘들어했다. 사고 목격자 김민주는 해병대 어르신의 구조 신호를 무시했고 그 죽음을 제 탓으로 돌리며 괴로워했다. 이제 두 사람은 피해서 해결될 문제 따윈 없다는 걸 안다. 결과가 죽음뿐이어도 이진이는 제 몸으로 돌아갔고, 아무런 득이 없어도 김민주는 끝까지 그녀를 도와주었다. 그녀가 행동하지 않으면 보노보를 두 번 죽이는 꼴이었고, 그가 행동하지 않으면 그녀를 두 번 죽게 하는 셈이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괴롭지 않으려면, 또다시 트라우마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두 남녀. 다소 급마무리한 느낌이었지만 엔딩은 좋았으니까 넘어가기로 한다. 나는 따도남이니깐.


정유정은 좀처럼 비평할 기회가 없는 작가라 이참에 쓴소리를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좋아하는 분이고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더 많은 피드백을 해주고 싶지만 이쯤 하련다. 솔직히 잘 나가는 작가들은 그만한 이유도 있겠지만 극성팬들 때문에 본인의 문제점을 몰라서 보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작가님들은 제게 연락 주십쇼. 매운맛이든 순한맛이든 원하시는 대로 도와드릴 자신 있습니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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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04 17: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감님의 이런 묵직한 리뷰 너무 좋은거 같아요~!! 사실 국내작품을 그렇게 즐겨읽지는 않아서 뭐라고 답을 못하겠지만 애정작가라고 하시니 찾아 읽어보고 싶네요 ^^

물감 2021-07-04 18:45   좋아요 3 | URL
오 새파랑님도 꼭 읽어보길 권합니다. (7년의 밤) 추천해요ㅎㅎ

페크pek0501 2021-07-07 1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너무 잘 나가는 정유정 작가의 책은 좀 까도 됩니다. 다 좋을 순 없잖아요.
그런데 첫 책을 낸 아마추어 작가의 책을 까는 건 저로선 인색하단 느낌이 들더라고요.
첫 책의 저자에겐 응원과 격려를,
이미 베스트셀러 저자에겐 아쉬운 점을 지적해 주면 고마워 할 것 같습니다.(저의 개인적인 생각임.)

물감 2021-07-07 13:01   좋아요 2 | URL
오 저도 공감합니다. 저는 신입작가의 책이나 기존작가의 처음 읽은 책은 그래도 유순하게 보려는 편이에요. 진짜 아니다 싶은것만 제외하면요🙂 이번 리뷰에 적었듯이 좋은 평만 가득한 경우는... 암튼 그렇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