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숨그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큰일이다. 근래에 우울한 작품을 연달아 읽었더니 울적한 기분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해와 달을 거듭할수록 증가하는 여성호르몬이 나의 감성을 더 여리고 섬세하고 순결하고 산뜻하고 감미롭고 우아하게 바꿔놓았다. 그래서 이제는 예전 같은 삐딱하고 까칠한 글이 나오질 않는다.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나의 캐릭터를 빼앗겨버린 듯한 이 기분, 당신은 알랑가몰라. 그래도 기분이 우울해서 좋은 점은 글이 잘 써진다는 것이다. 요즘같이 비 오고 흐린 날이면 밤새워서라도 글을 쓰고 싶지만 밤 12시에 눈이 감기는 나의 저질 체력 따위를 끄적이는 이유는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그냥 손가락 가는 대로 아무 말이나 적는 중이다. 그러니 시간 아까우신 분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시오.
나에겐 리뷰 쓰기 어려운 세 가지 케이스가 있다. 첫 번째는 내용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했을 때. 두 번째는 남들과 겹치는 글 밖에 안 나올 때. 세 번째는 실화가 바탕인 작품일 때이다. 그런데 <숨그네>는 이 세 가지가 모두 해당된다. 내용은 어렵지 않은데 난독증 생길 만큼 가독성이 좋지가 않다. 그래서 문장이 머리에 남질 않고 장면이 잘 그려지질 않는다. 게다가 다각도로 볼 수도 없고, 다양한 해석을 낳는 작품도 아니므로 남들과 겹치지 않는 리뷰를 쓰기도 어렵다. 특히 실화 기반의 작품은 줄거리가 전부라서 할 말도 많지 않다. 따라서 그 어느 때보다도 멘붕에 빠져있으므로 이번 리뷰는 영혼 없이 써보겠다. 두둥탁.
히틀러의 만행으로 피해 입은 소련은 루마니아에 거주 중인 독일인들을 강제 징집하여 책임을 지게 한다. 독일인들은 소련의 강제 수용소에서 5년 동안 무너진 지역을 재건해야 한다. 다 알다시피 수감자들은 노동과 억압과 배고픔과 탄식의 나날을 보낸다. 눈앞에서 시체가 쏟아져내려도 아무렇지 않을 만큼 무감각해져버린 수감자들. 이곳 생활에 적응한 이들은 수용소를 제 집으로 여기며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는다. 어느새 영혼의 빈자리는 수고와 고통으로 채워지고, 인간의 존엄성은 빵 한 덩이만도 못한 것이 되었다. 그 모진 시간들을 이기고 마침내 집으로 귀환한 주인공 레오. 모든 게 뒤바뀐 일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는 자유를 얻고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영혼은 여전히 수용소에 남아있었고, 그의 육체는 러시아식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수용소를 다룬 작품들은 처참하고 끔찍한 냄새가 풀풀 나기 마련이지만 <숨그네>는 그것과 성격이 좀 다른 편이다. 화자인 레오의 성격이 워낙 저텐션이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덤덤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런 잠잠한 주인공과 달리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문장 문장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것을 억누르는 과정에서 새어 나오는 감정과 아이러니가 이 작품을 좀 더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시간과 경험들을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도록 의도하고 있다. 헤르타 뮐러는 슬퍼서 펑펑 우는 이보다, 넋을 잃어 눈물이 나지 않는 이의 절망을 보여주려 하였다. 뮐러는 말과 글로 형용 못할 심정을 자신이 창조한 복합단어로 대변했는데 제목의 <숨그네>는 삶과 죽음을 그네뛰는 숨결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하얀 토끼, 뼈와 가죽의 시간, 배고픈 천사, 심장삽 등등 생소한 단어가 자주 나온다. 뜻이 함축된 시 같은 문장들이 많아서 읽다가 멈추게 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 또한 저자의 의도라고 보면 된다. 애석하게도 순문학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님은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세상에 아무 미련도 없어 보이는 주인공의 생존 의지가 꽤나 질긴 편이다. 벽돌 한 장과 흙 한 줌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타인의 사소한 행동도 특별하게 여길 만큼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수용소 생활의 낙으로 받아들인다. 끝없이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허덕이면서도 현실을 수긍하고 순응하는 레오. 체념하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인간다운 게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 그가 독자에게 말한다. 사는 방식이 다르더라도 삶의 의미는 다르지 않다고. 절벽 한가운데 피어나는 꽃에도, 아스팔트에 피어나는 들꽃에도 벌과 나비는 날아든다. 꽃들도 제 역할을 잊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인간의 역할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먹고 자고 싸는 게 전부가 아닌 인간이 되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