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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데미안은 내가 맨 처음 읽었던 고전문학이다. 그때는 좋았던 기억은 하나 없고 역시 고전은 어렵다는 좌절만 안겨줬다. 복잡한 내용이 아님에도 뭘 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친절하게도 서두에 답이 다 나와있었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각기 다른 모두가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 등등. 온전히 흡수 못한 문장도 많지만 ‘나에게로 가는 길‘을 말하려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이제야 어디 가서 데미안을 읽어봤다고 얘기할 수 있을 듯. 첫 독서 때는 경치 따윈 보이지도 않던 초행길의 운전 같았는데, 지금은 좋은 울림을 가진 문장들이 눈에 잘 들어온다. 어쩌면 별로라 여겼던 고전들도 훗날엔 대단하다 느낄지 모르겠다. 근데 이 책이 진짜 청소년문학인가? 성장소설치고 지나치게 하이레벨인데. 독일은 어린 친구들도 이만큼 수준이 높은가. 그렇다면 나 너무 자괴감 드는디.
주인공 싱클레어의 유년시절부터 대학생까지를 기록하였다. 소년은 데미안을 만나기도 전에 빛과 어둠의 세계가 공존하고 나란히 붙어있음을 보았다. 늘 그랬듯이 올바른 세계를 추구했지만 금지된 세계 또한 매력적이어서 거짓말을 시작으로 어둠에 발을 담근다. 그리고 기나긴 방황과 출구 없는 절규에 휩싸인다. 죄악의 늪을 인지한 순간 자신의 공존하던 두 세계가 분리됨도 느낀다. 화평과 안정을 주던 삶의 모두는 먼지가 되었고, 자신은 어느 축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과 나그네가 된 것이다. 어둠에 속한 것들이 왜 그렇게 매혹적인지 또 왜 금하는지를 직접 느껴보기 전까지는 감정 없는 글자에 불과하다. 헤세가 말하는 인간이란 그런 생물이다. 헤세는 한 사람을, 그것도 어린아이의 세계를 지독히도 파괴해버린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응당하다는 당연한 말보다 그것을 더 당연하게 말하고 있다. 고작 거짓말 하나 했을 뿐이나 소년에게는 감당 못할 형량이었다. 어둠에 잠식된 아이는 손닿는 곳에 구원의 손길이 있는데도 쉽사리 손을 뻗지도 못한다. 이것은 남녀노소 마찬가지인 인간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소년은 데미안의 도움으로 늪에서 탈출한다. 가족에게 죄를 고백하고 서둘러 아벨의 부류로 돌아간다. 데미안은 그의 구원이었지만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성경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괴짜였다. 아벨보다 가인을 변호했고 금지된 세계와 그 부류도 올바르다고 주장했다. 그의 해석은 인류가 신성모독이라고 못 박아둔 전부를 완벽하게 뒤집었다. 소년은 아벨이고 데미안은 가인이었다. 자신을 죽인 자와 어울릴 수 없다는 두려움과 그의 해석이 주는 기쁨의 공존을 느낀 싱클레어. 이후 몇 년간 데미안을 멀리한 그는 아벨의 부류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산다. 그러면서도 데미안과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은 자신이 그에게 구원받았던 일 때문이었다. 결국 그에게로 돌아온 싱클레어는 자신도 가인의 표를 지닌 자임을 인정하게 된다. 더 이상 데미안은 괴짜가 아니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독자들은 데미안의 해석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성경에는 악을 선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구절이 있는데 딱 데미안에게 해당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전에는 나도 그의 이교도적인 주장이 불편해서 이야기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는 사실 뭘 말하려는 건지 파악도 못했다. 두 세계가 모두 거룩하고 존중해야 한다? 각자에게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이 다르다? 금지된 것이 누군가에겐 허용되기도 한다? 이 난해하고 아리송한 말들을 서두에 적힌 답에 기준하여 본다면 쉽게 이해된다. 선에 속한 자나 악에 속한 자나 다 같은 심연에서 나온 것이다. 예를 들어 찬송가를 부르는 이에게는 쉬즈곤이 금지된 것이지만 둘의 뿌리는 같다. 누군가에겐 허용된 것으로, 누군가에겐 금지된 것으로 완전한 자신을 찾고 만난다는 말이다. 좀 더 쉽게 풀자면 이렇다. 가인에 대한 해석은 분명한 신성모독이다. 그 해석을 불쾌해하는 부류도 있고 색다른 관점으로 받아들여 흥미롭게 보는 부류도 있다. 후자인 싱클레어는 금지된 것이 허용된 것이고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은 셈이다. 그러나 이 같은 사고는 자칫 강도나 살인 같은 범죄도 같은 심연에서 나왔다고 오해할 수 있다. 나를 찾는 길을 방해한다면 그건 허용된 것이 아니라 금지된 것이니 모쪼록 잘 분별해야 하겠다.
싱클레어가 탕자 된 것은 데미안의 영향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내 눈에는 소심한 범생이가 늦바람이 든 정도로 보였다. 남들과 어울린다 한들 그들은 자신보다 낮게 여겼고 본인도 자기 경멸에 빠져 살 만큼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또는 두 세계에 걸쳐있는 주인공이었다. 그러다 이상형을 발견하고 성욕에 눈을 뜬 뒤로 다시 정결한 아벨이 된다. 자신을 거룩하고 경건하고 순결하게 만드는 것이 추악하고 음탕하고 쾌락적인 것이라니. 가인의 표식을 가진 그는 데미안의 말을 이해하여 방탕을 끊고 자기 성찰에 들어간다. 이 책으로 헤세는 인간이 가진 무한의 가능성을 언급하려던 게 아닐까 한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닫혀진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관점을 배운다. 그리고 교회 오르간 연주자를 통해 닫혀진 세상에서 도약하는 힌트를 얻는다. 헤세는 데미안과 연주자를 통해서 참 인간이 되는 과정을 새와 알의 상관관계로 반복 설명한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려면 내 안의 기둥이 무너져야 진짜 세계가 펼쳐진다고.
데미안은 알을 깨고서 나오라고, 세계를 깨뜨려서 거듭나라고 했다. 오르간 연주자는 두려움을 이기고 계속해서 날아오르라고 했다. 온몸으로 부딪혀야만 알은 깨어지고, 죽어라 날갯짓을 해야만 비상할 수가 있다. 헤세가 말하는 인간이 지닌 무한의 가능성은 모든 힘의 근원과 연결돼있고 그 독자적인 힘으로 얼마든지 도약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두려움과 위험성을 고려해서 현재를, 알 속의 세계를 만족해하는 자들도 많다. 헤세는 스스로를 개척하고 세계를 바꿀 마음이 없는 자들을 안타까워했던 걸까.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는 건 분명 두려운 일이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왔던 게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 테니까. 하지만 오늘의 내가 어제와 다르다 한들 부정당할 이유도 실망할 이유도 없다. 여러 경험과 실패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시행착오를 겪어서 나의 참 모습을 찾아가는 연습을 했을 뿐이다. 나만 해도 취향, 입맛, 패션, 취미, 문화, 가치관 등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때 이것이 나라고 정의했던 것과 전혀 다른 지금의 내 모습이 오히려 더 좋다. 나도 싱클레어처럼 내 몸에 맞는 옷을 찾았기 때문에. 진짜 자신을 찾게 된다면 좋아하는 것에 자극을 받아 엔돌핀이 돌고 도는 게 아니라 공허했던 영혼이 풍요로워지고 안정감을 갖게 된다. 경험해보지 못한 분들에게 어서 알과의 투쟁을 시작하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번데기는 나비가 될 준비를 해야지, 송충이 시절을 그리워해선 안된다. 먹고살기 바빠죽겄는데 뭔 나비 타령이냐 하지 마시고 공허한 내 영혼을 진지하게 돌아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