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짐승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5
에밀 졸라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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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는 졸라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의 문학은 졸라 재밌고 졸라 어렵다. 해설까지 총 600장이 넘는 이 책을 미친 듯이 흡입하며 읽어버렸다. 작가주의와 장르문학이 결합된 고전소설인데, 이렇게 작품성에 대중성까지 갖춘 케이스는 정말 보기 드물다. 내 방식대로 표현하자면, 문과와 이과를 제패하고 예체능까지 마스터한 엄친아, 엄친딸인 셈이지. 이런 천재들이 부러우면서도 동시에 부담인 건, 그들만의 세계를 아무나 이해할 수 없기 때문. 아무튼 에밀 졸라는 천재다. 나로서는 플롯을 소화하는 것만도 벅찬, 감당 안 되는 사이즈의 작품이어서 부분 리뷰만 간단하게 쓰기로 한다.


철도회사 부역장은 아내의 정부였던 법원장을 살해했고, 그 광경을 기관사 자크가 목격한다. 법원장의 죽음은 지역에서 큰 화제였고, 부역장과 기관사는 법원에 소환된다. 부역장의 거짓 진술로 위기를 넘겼지만, 법무부의 고위 관료는 루보 부부의 짓임을 알고 있었다. 근데도 눈감아준 것은 법원장의 과거로 인해 법원이 성추문 소굴로 찍히는 걸 피해야 했으니까. 총선을 앞둔 야당의 압박으로 진실을 은폐하고 법무부의 체제 유지를 택한 관료의 입장을 통해, 정계와 법계의 부조리 및 부패함을 꼬집는 작가의 의도를 볼 수 있다. 루보의 아내 세브린은 관료를 찾아가 아첨하면서 관료가 부부의 짓을 알고도 모른척하는 것과,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눈치챈다. 이런 식으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을 농락하는 놈을 갖고 노는 놈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냥 미쳤다.


부역장은 그의 범행을 모른척해 준 기관사를 아군으로 만들기로 한다. 식사도 자주 하며, 아내의 에스코트를 부탁하는 등 필사적으로 자크와 친해진 부부. 남편은 아내와 멀어져 도박에 빠지고, 세브린과 자크는 곧 정분이 나버린다. 이 남자에게는 살육을 갈망하는 짐승의 자아가 있었고, 그것은 성욕과 함께 증상을 보여왔다. 그 이유로 여자를 멀리해온 그가 세브린에게는 무증상을 보였고, 드디어 구원받은 기분으로 신나게 밀회를 즐긴다. 그의 전부였던 기관차 라리종호는 세브린에게 밀려났고, 눈폭풍을 겪은 뒤로 상태가 점점 나빠진다. 어느덧 잠잠하던 짐승이 깨어나 그녀를 죽이려 하는 자신을 통제하느라 죽을 맛인 자크. 사랑하는 것들을 죽이려고만 하는데, 사랑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절규하는 그의 모습이 어찌나 짠하던지. 이렇게 살바에는 차라리 모태솔로가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짐승과 싸우던 자크는 직접 짐승이 되기로 마음 먹는다. 루보를 살해하고 세브린과의 살림을 계획한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들이 걷게 될 꽃길뿐 아니라, 그의 고질병이 고쳐질까 하는 기대감도 한몫했다. 하지만 짐승이 본능대로 하는 살인과, 인간이 의도대로 하는 살인의 차이를 깨닫고 또다시 절규하는 자크. 짐승에게 이성을 뺏기지 않으려는 장면들은, 작가가 말하는 ‘인간다움‘을 깨닫기에 충분했다. 루보와 자크 말고도 짐승이 된 여러 인물 중에서 자크를 사랑한 플로르의 짐승화도 볼만했다. 자신을 버린 남자에 대한 복수심은 라리종호를 전복시킴으로 그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승객들의 떼죽음 광경에 정신이 든 플로르는 괴로워하고 결국 자살해버린다. 이렇듯 달콤한 욕망의 속삭임에 굴복하면 그 결과는 파멸뿐임을 작가는 다각도로 증명하였다. 시대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욕망을 좇아 짐승의 탈을 쓴다. 반대로 인간의 탈을 벗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이 책은 인간의 타락을 방지하기보다 인간이길 거부한 자들에 대한 경고로 쓰인 작품 같았다. 다 같이 반성합시다.


후반부에 석공의 재판 자리에서 작가는 미친 듯이 상황을 비틀고 비틀었다. 정황상 살인자가 된 석공과, 그를 히든카드로 이용한 부역장. 두 사람은 서로 진실을 말하나, 그럴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한 상황이 된다. 이제 거짓은 참이 되고, 선은 악이 되었으며, 짐승이 인간을 지배하는, 믿고 싶지 않은 결말이 되었다. 비록 권선징악은 아니었지만 그게 더 현실적이라서 여운이 남았다. 특히 폭주하는 기관차를 짐승으로 표현한 마지막 장면은 최고였다. 마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감상한 기분이다. 에밀 졸라는 ‘루공 마카르 총서‘라 하는 스무 편의 작품을 썼다는데, 국내에는 미출간된 책이 너무 많아서 짜잉난다. 빨리빨리 좀 출간해주쇼, 현기증 나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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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21-01-31 04: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과와 이과를 제패하고 예체능까지 마스터했다‘는 데 격하게 공감합니다!ㅎㅎ 탄탄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힘, 이토록 칙칙할 수 있을까 짐승의 스멜이 훅훅 뿜어지는 배경묘사, 사실적인 표현,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인 듯 곳곳에 널려있는 생동감있는 캐릭터까지 뭐하나 버릴 게 없더군요. 엄지척!하며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을 농락하는 놈을 갖고 노는 놈‘이라는 표현은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건가요!ㅋㅋ 맞아, 맞아!하며 뿜었습니다.ㅎㅎ

자크라는 캐릭터를 보고 소름이 돋았거든요. 뉴스 기사에 올라오는 인간들 중 저런 인간들이 몇 명쯤은 되는 것 같아서요. 무려 1890년의 작품인데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걸 보면, 이런 기질은 DNA를 통해 대대손손 전달이 되는 걸까요.
모태솔로도 믿을 게 못되는게 드러나지 않는 휴화산일지 몰라서ㅋㅋ

인간의 탈을 벗는다는 말씀이 와 닿습니다. 성악설의 탈피 버전인 듯하여ㅎ

저도 마지막 장면이 정말 좋았습니다. 작가의 메시지가 폭발하는 것 같았거든요. 드문드문 묘사한 짐승스런 인간들에서 ‘에브리바디 짐승‘을 외치는 것처럼. 기차 안에 실린 군인들이 짐승처럼 느껴졌거든요.
23년 동안 20편이니 총서를 뽑아내는 수준이 거의 자판기급이라 졸라의 다른 작품도 전부 이런 고퀄일까 싶지만^^; 어쨌든 이 소설은 참 좋았습니다.^^

물감 2021-01-31 11:28   좋아요 3 | URL
정말 놀라운 작품이었고, 놀라운 작가였습니다ㅎㅎㅎ 새로운 거장을 알게 되어 기쁨을 느낀 게 얼마만인지요 ^^ 스토리며 캐릭터에 연출, 구성, 주제의식에 글맛까지 뭐하나 빠지지 않는 팔방미인의 작품이더랬죠! 진짜 엄친아 엄친딸 포스였습니다. 크으.

보통 인간의 괴물/짐승 자아를 다루는 작품들은 모 아니면 도였던 것 같아요. 어떻게 표현하냐에 따라 흐름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상황에 집중하도록 하고 주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필수장치가 되기도 하는데, 자크는 후자였던 것 같아요. 또한 짐승의 기질은 과연 유전인건지, 환경적 요인인건지 궁금하네요. 그러고보니 휴화산의 모태솔로가 언제 활화산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점으로 볼 때 환경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ㅎㅎㅎ

다들 마지막 씬을 극찬하더군요. 저역시 놀랐어요. 어떻게 쇳덩어리 기차를 생명있는 짐승으로 생각을 했는지, 타고있던 군인들도 똑같이 묘사를 했는지. 이런 천재 작가들을 접할 때마다 과거에 다 쏟아져나와서 이제는 더이상 천재가 없는걸까 싶어져요^^;; 작가를 좀 더 조사해보니까 루공 마카르 총서 말고도 꽤 많이 썼더라고요. 국내에는 거의 없지만. 여튼 그 천재성을 썪히지 않고 부지런히 활동한 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ㅎㅎㅎㅎ 에밀 졸라의 작품은 나중에 또 선정해볼까 합니다. 벌써 1월도 다 갔네요. 여전히 바쁘시죠? 어째 두꺼운 책을 선정하기가 죄송하네요ㅋㅋㅋ그래도 짬내서 파이팅 하는걸로!

다락방 2021-09-01 20: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땡투합니다. 부자되세요!

물감 2021-09-01 23:48   좋아요 1 | URL
땡투가 뭐지요? 여튼 감사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