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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 소녀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고 추락했다가 다시 일어선 이 책의 주인공을 보며 가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가난에도 두 종류가 있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와 마음이 가난한 자. 전자는 여유가 생기고 상황이 나아지면 곧 해결이 된다. 하지만 후자는 자존감 때문인지 좀처럼 바뀌질 않는다. 이들은 본인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스스로를 가둬놓는다. 뼛속까지 꽉 차있는 자기 파괴적인 성향으로 세상을 왕따시키며 소통을 거부하거나, 혹은 잘못된 방향으로 소통을 시도하다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말로가 좋지 않은 그들을 보면 참 답답하고 안타깝고 그렇다. 현대인의 질병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오래전 세대부터 존재해왔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읽었던 이 작품을 리뷰해본다.
이 책은 로즈의 성장기를 연작소설로 구성한 작품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로즈는 부잣집 남자와의 결혼으로 마침내 노동 계층을 벗어난다. 그러나 중산층 생활에 환멸을 느껴 이혼을 한 뒤로 본격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난다. 자유가 된 그녀는 여러 남자도 만나보고, 일자리도 다양하게 구해본다. 그러나 어디서도 답을 얻지 못한 그녀에게 오춘기가 찾아오기 시작하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성장 배경이나 환경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또 한번 실감하게 된다. 로즈 주위의 어른들은 강압적이고 권위적이고 책임을 회피하고 조롱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집 밖에서나 전부 어른답지 못한 사람들로만 가득했다. 안 그래도 조신함과는 거리가 먼 로즈인데, 그런 어른들만 보고 자랐으니 반항 기질이 커진 게 아닌가 한다. 십 대들의 사춘기가 다 그런 거 아니냐 할 수도 있는데, 그 시대의 사회와 가정교육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고분고분하게 자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로즈의 행동은 돌연변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아버지가 바라는 여성상과 한참 다른 딸이었지만 소녀는 그런 자신이 좋았더랜다. 집안일, 지성, 교양 같은 단어들은 소녀와 영 맞지 않았고, 나중에 커서 무대 위의 배우가 되어 자신을 나타내고 싶어 했다. 내숭도 없고 매사에 당당한 그녀 모습에 반한 남자와 캠퍼스 커플을 즐기며 잠깐이나마 행복에 젖은 로즈. 그러나 중산층의 남친은 로즈를 한 여자로서 좋아했다기보다, 그녀의 가난함을 자신의 부요함으로 덮어줄 수 있다는 자기만족감에 빠져있었다. 그는 로즈가 아닌 로즈의 가난함을 사랑스러워했다. ‘코페투아왕과 거지 소녀‘라는 그림 속의 두 사람이 자신들과 닮았다며, 은연중에 계급을 확인시켜준 그였다. 왕과 거지의 신분이 하늘과 땅 차이인 것처럼, 그와 그녀의 신분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며, 제멋대로인 그녀를 본인 아래 두고 싶어 했다. 로즈는 계급장 가지고 지지리 궁상을 떨어대는 애인한테 까칠한 척 해보지만, 결국 남자의 빽을 이용해 출세하는 비겁한 사람이 되기로 한다. 여성의 가난이 사회의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좋든 싫든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자신과 집안을 경멸하는 오만한 남자일지라도 말이다.
이혼 후에 방송국 교직원이 된 그녀는 남들에게 기득권층이라는 말을 듣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분이 상승되어있었고 그에 맞게 형편도 나아졌지만 변한건 없었다. 어느 한 곳에 좀처럼 마음 두지 못하는 데다가, 남들과 어울릴수록 오히려 고립되었고 그래서 두려웠다. 마음의 가난에서는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자식 교육에도 전념해보고, 꿈이었던 배우로도 살아봤지만 마음은 늘 곤고했다. 그 허전함을 남자들과의 관계로 채우기 시작했다. 제 맘에 들면 바빠서 보기 힘든 남자도, 애 딸린 유부남도 가리지 않았다. 결혼 이후로는 모든 편마다 남자 만나고 데이고 슬퍼하는 내용만 나온다. 외도와 불륜, 거짓말과 이별, 만남과 인연의 반복된 내용이 분량의 절반이어서 실망했다. 새 애인과의 관계가 어긋날 때마다 구차해지는 그녀가 싫어졌다. 야무지고 당돌했던 소녀는 어디 가고, 오로지 남자에 죽고 못 사는 금사빠로 타락해가는 게 안쓰럽다 못해 지긋지긋했다. 여러 번의 경험으로 서서히 달라질 줄 알았는데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는 중이다. 성장소설치고 진도가 무진장 느린 편이니 참고하시길.
로즈는 언제나 두 가지 마음을 지녔다. 사랑하면서도 거부하고, 좋으면서도 싫은 티를 내고, 간절히 원하면서도 바라지 않았고, 기대하면서도 피하고 싶어 했다. 나는 그것이 결코 이중적이거나 모순돼 보이지 않았다. 얻게 된 행복 안에 부담도 들어있다면 차라리 행복하지 않는 게 낫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자신의 처지와 입장을 잘 알기에 제한된 영역 안에서 계속 머물려고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왕이 거지에게 잠깐의 은혜를 베푼다 한들 거지의 신분은 달라지지 않으므로. 결국 로즈는 먼 길을 돌아서 고향을 찾아간다. 그리고 실패와 상처투성이인 자신과 닮은 이웃들을 만나면서 자신을 발견하고 또 용서를 구한다. 한때는 높은 계급과 사회적 신분이 곧 자신을 나타낸다고 믿고 살았던 그녀였다. 그러나 해답은 나와 닮은 사람들에게 있었다. 그 속에서 평안을 느끼고 부담 없는 행복도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마음의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보았다. 자격지심이 생기지 않고, 두 마음을 갖지 않게 될 때 마주하는 진짜 나의 모습. 우리는 온전한 나를 드러낼 수 없어서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가면 덕분에 자신이 보호받는 기분이 들겠지만, 나중에는 가면이 시키는 대로 끌려다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제 그만 가면을 벗고 마음의 가난에서 벗어나는걸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