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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앨런 에스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들녘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주인공이 전기문을 작성하라는 대학 과제를 위해 한 요양원을 간다. 거기서 만난 암 말기 환자 노인을 인터뷰하게 되는데 이 사람은 과거에 한 소녀를 강간하고 화재를 일으켰던 최악질 범죄자였다. 죽음이 가까워지면 대부분 잘못을 뉘우치고 인정하기 마련인데 어째 이 노인은 죽어도 자기가 살인한 게 아니란다. 굳세게 결백을 주장하는 이 노인의 진실 혹은 거짓을 증명하기 위해 X맨을 찾으러 관 속에 들어가 뚜껑까지 덮으려는 주인공은 의욕이 넘치기 시작한다.
정~말 잘 읽었다. 간만에 돈 아깝지 않은 책을 산 거 같네. 이 작가의 장점은 딱 적당한 호흡과 템포를 유지하는 정교한 컨트롤 스킬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독자와 밀당하는 법을 알고 있다. 방송 중 클라이막스에서 ‘60초 광고‘를 외치는 전현무 같은 작가라고 할까. 이런 식으로 짧고 굵게 임팩트를 때려 박는 기교의 달인 중에는 메이즈러너 작가인 ‘제임스 대시너‘와, 해리 쿼버트 사건의 작가인 ‘조엘 디케르‘ 정도였는데, 이 작가도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타입이라 앞으로 열렬한 팬이 될 예정이다.
노인의 결백대로 그는 소녀를 죽인 살인범이 아니었다. 아, 이건 결코 스포가 아니다. 다만 본인이 살인자란 사실을 시인했던 건 과거 베트남전 군인시절의 한 사건 때문인데, 그 당시 본인 양심에 따라 내렸던 판단과 행동이 꼭 정당하다고만 은 볼 수 없었기에 3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도 묵묵히 그 고통들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1년을 그렇게 살아도 미쳐버릴 텐데 30년이라니. 죽기 전에 진실이 밝혀져 참 다행이다.
여튼 다 좋았는데 한 가지, 도저히 납득이 안되는 장면은 짚고 넘어가야겠다. 온몸에 상처 입은 주인공에게 성욕을 느끼고 섹스를 하는 여자친구는 너무 오버 아닌가? 이런 것도 서양과 동양의 정서/문화 차이라고 할 수 있나? 내 보기엔 이거 완전 설정 미스임. 작가가 여자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같음.
최근 미국의 한 남학생이 심하게 왕따를 당해오다가 한 가해자 학생을 칼로 찔러 살해한 기사를 읽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미국은 이 학생에게 ‘무죄‘를 선언했다. 반면 동급생을 무차별 폭행해서 완전 불구자로 만든 학생들을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소년원 보내는 게 전부인 우리나라 판결 법을 보면 비흡연자도 흡연하고 싶게 할 정도로 답답하다. 한국의 솜방망이 처벌과는 차원이 다른 미국의 판례법들을 보면 역시 선진국은 다르구나 싶겠지만, 이렇게 명확한 증거 없이도 멀쩡한 사람을 가해자로 만드는 오판의 사례도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 책은 미스터리보다는 사회파 소설로 분류하는 게 맞는듯하다. 영미권의 사회파 문학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읽어봐도 좋을 작품이며 이런 건 소설에서나 가능하다는 독자는 부디 없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