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힘든 귀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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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중립국가 휴전선 감시위원단 탈퇴요구 시위(1955-08-13)


미스코리아 결선대회 출전자들의 수영복 심사광경(1957-05-14)


우량아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아기들(1957-05-15 )


성형수술 장면(1957-08-27)


약현성당을 방문한 로마교황사절 환영 플래카드(1959-03-09)


인기 영화배우 최은희씨(1959-08-19)


4.19혁명 희생자 49제(1960-06-05)


펄벅여사를 접견중인 윤보선 대통령 내외(1960-11-02)


김영복씨 귀국 의상 발표회(1960-12-18)

 
제2공화국 출범 경축식(1960-10-01)


경복궁서 군인위문공연(1961- 5-29)


수영복입은 박정희(61-09-11)


대학생 농촌문맹퇴치계몽 활동(1962-01-11 )


KBS의 전신인 서울방송국 위문단 제주도 위문공연(1962-03-24 )


화폐교환 및 극빈자 쌀 배급(1962-06-10 )


화폐교환하는 시민(1962-06-10)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낙선재 입궁(1962-06-14 )


한산모시 직포 광경(1962-07-23)


대한항공사 취항식(1962-12-01 )


이화여자대학교 77주년 기념 5월의 여왕 대관식(1963-05-31)


육영수 여사 사진(1963-07-27 )


제5대 대통령 취임식(1963-12-17 )




종로거리(1907)
칼을 찬 순경이 죄인을 감시하고 있고,
오른쪽 이발소 간판 밑에 가로등이 보인다.


명동성당(1905)
앞의 종탑은 명동성당이며, 뒤의 흰 3층건물은 샬트 수녀원이다.


옛 조선호텔 앞 거리(1900)
일본에 의해 황근우가 철거되고
그 자리에 조선호텔을 건축하기 전의 모습이다


소공동 중심가(1903)
당시 충무로와 소공동은 가장 번화한 거리이다.
중앙의 누각은 현 조선호텔에 남아있는 황궁우이다.


용산 나루터(1904)
이곳은 나룻배를 건조하던 장소로 유명하다.
줄무늬 상의를 입은 소년과 목판에 엿을 담은 어린 엿장수가 엿을 팔고 있다.
소년의 옷차림이 당시 유행에 민감했음을 보여준다.


마포 나루터(1900)
왼쪽에 밤섬이 보이고, 이곳 마포 나루터는 화물 선착장으로 유명했다.


옛 진고개 (1904)
진고개는 현재 충무로 2가의 고갯길로서
흙이 몹시 질어 진고개라는 지명이 생겼다.
명동성당과 북악산이 보인다.
1906년 8척 가량 파내어 길을 닦고
높이 5척의 방주형 수멍을 묻었다.
이것이 서울시내 수멍도랑의 시초이다.


광화문 전경(1907)
당시 이거리는 도성에서 제일 넓은 거리였다.
왼쪽에는 통감부 통신관리국이 있고,
오른쪽 건물엔 일본관리인과 군부대가 있었다.


소공동 거리(1907)
소공동 주변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방이 많았는데
일흥노약방 뒤로 원구단 누각이 보인다.


서대문밖 곡물창고
당시 이곳에는 곡물창고가 있었고 왼편의 건물은 전차수리소이다.
멀리 보이는산은 인왕산이다.


중학천(1907)
뒤의 누각은 경복궁 동십자각이며 백악산 밑에서
경복궁을 거쳐 청계천과 합류하였다.
하천 주변에 주민들은 이곳을 빨래터나 목욕터로 이용하였다


청계천(1904)
청계천은 서울 중심을 흐르는 하천이며
말그대로 물이 맑아 아낙네들의 빨래터로 이용되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사진이다.


독립문 앞 전경(1931)
각종 채소들이 집산되어 시내로 유입된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의주통이라 불렀다.


충무로 입구(1903)
충무로 입구에서 바라본 명동성당이다.
당시 충무로는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


서부역 부근(1907)
이곳은 저지대라 비가오면 진흙땅이 된다.
멀리보이는 건물은 약현성당이다


육영수 여사님..생전..그리고 박정희대통령의가족들..




 

 

출처 - 엽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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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도 조선땅' 中 고지도 발견
1400년대 제작, 日도 1717년 필사

(부산=연합뉴스) 민영규 기자

일본 시마네(島根)현 의회가 16일 `다케시마의 날'을 정하는 조례안을 제정해 사회적인 공분을 사고 있는 가운데 독도뿐만 아니라 대마도도 조선의 땅임을 보여주는 중국의 고지도가 발견됐다.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는 이날 1488년 당시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황제(영종)의 명을 받아 조선땅을 둘러본 뒤 작성한 견문록인 `조선부(朝鮮賦)'의 4-5페이지에 나와있는 `조선팔도총도(朝鮮八道總圖)'를 공개했다.

이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于山島)뿐만 아니라 대마도(對馬)가 조선의 영토로 자세히 표기돼 있다.

특히 김 교수가 최근 일본 모 대학의 고문서실에서 발견한 `조선부'는 1717년 일본이 한자에 일본음을 달아 제작한 필사본으로 밝혀졌다.

김 교수는 "독도는 물론 대마도까지 우리땅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고문서가 발견됐는데 일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우리나라가 대마도의 영유권을 주장한다면 일본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youngky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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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디시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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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美보다 知로 로마 유혹했다”

조선일보]

비운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빼어난 미모가 아니라 위대한 지성으로 카이사르안토니우스 등 당대 로마의 대표적인 장군들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는 14일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클레오파트라를 ‘성적 매력’으로 가득한 헬레니즘 최후의 여왕으로 묘사하기 훨씬 이전부터 중세 아랍학자들은 그를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새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런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고대이집트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오카샤 엘달리 박사는 “중세 아랍 학자들은 많은 문건에서 클레오파트라의 과학지식과 행정능력을 격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저서 ‘이집트학:잃어버린 천년’에서 “아랍 학자들은 클레오파트라가 쓴 저술에서 많은 전문지식을 인용하고 있으며 ‘대학자’로 묘사하고 있다”며, “클레오파트라는 위대한 학자이자 건축가였다”고 밝혔다. 나일강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이어지는 대수로를 설계한 것도 클레오파트라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런던=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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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5-03-15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사 제목이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다...-_-
실제로 클레오파트라의 지적 능력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미모를 이용한 경우도 많았다(사실 미모가 뛰어나다는 표현보다는 여성적 매력이 있었다는 표현이 좀더 적절할 듯...)
 

바야흐로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사분오열되어(오리엔트도 마찬가지)혼란의 시기를 맞고 있었고 그 가운데서 수많은 영웅이 탄생했으니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라토스도 그중에 하나이다.

당시 그리스의 정세를 주도하던 삼대 세력은 마케도니아를 다스리는 안티고노스 왕과 시리아를 다스리는 셀레우코스 왕, 마지막으로 이집트를 다스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으로 이들은 마케도니아 출신의 왕들로서 각자 강력한 왕국을 바탕으로 그리스의 정세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한편 우리의 주인공 아라토스의 고향인 시키온 시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북안에 위치한 도시로서 아카이아 지방의 동부와 코린트의 서부에 끼여 있었다. 소위 코린트 지협에 가까운 도시였던 것이다.
그 도시는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따르자면 '도리아식의 귀족정치'를 하고 있었는데 지도층 내부의 분쟁과 개인적인 투쟁으로 인해 귀족정은 붕괴하고 참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인 클레온이 살해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클레온의 사후 유력자인 티모클리데스와 클리니아스 두 사람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시키온은 혼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시키온 시가 질서를 되찾을 때쯤 티모클리데스가 죽고 파세아스의 아들 아반티다스라는 자가 참주가 되기위해 클리니아스를 죽이고 그의 친척과 친구들을 추방했다. 아라토스는 바로 이 클리니아스의 아들로 당시 일곱살이었던 그는 집안이 풍비박산 난 이후 보살펴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집안에서 나와 시내를 방황하다가 소소라는 이름의 부인을 만나는데 이 여자는 아반티다스의 누이이자 클리니아스 동생인 프로판투스의 아내였다. 그녀는 아라토스를 그날 밤으로 아르고스 시로 탈출시킨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아라토스는 어릴적부터 전제군주를 싫어하게 되었고 그러한 성향은 자랄수록 더욱 강해지게 된다. 그러나 그런 면만 있는것이 아니라 아라토스는 만능 스포츠맨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그후 아반티다스도 디니아스와 아리스토텔레스(우리가 아는 그사람은 아닙니다.)에게 암살당하고 아반티다스의 아버지인 파세아스가 잠시 정권을 잠았다가 니코클레스에게 암살되어 그가 시키온의 참주가 된다.
정치적인 투쟁에는 뛰어난 모양이지만 군주로서의 능력은 떨어지는 듯 니코클레스는 아이톨리아 군에게 패배하는 등 나라를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

한편 장성한 아라토스는 시키온에서 추방된 많은 인사들에게 존경을 받는 위치에 올라섰고 그때문에 니코클레스에게 의심을 받게되어 니코클레스의 첩자들이 그를 감시하게 된다. 이는 아라토스가 시키온에 복귀하기 위해 다른 군주들의 세력을 불어들일것을 염려한 것인데 아라토스도 그런 점은 고려했지만 각국 군주들의 미온적인 태도로 인해 결국 자신이 직접 시키온 시로 잠입하여 니코클레스를 실각시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시키온의 망명자 아리스토마쿠스와 메갈로폴리스의 철학자 엑델루스에게 알려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여러 망명자들은 아라토스가 경험이 적고 너무 젊은것을 염려하였지만 곧 그의 계획에 동참할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러던 도중 크세노클레스라는 망명자의 동생이 시키온의 감옥에서 탈옥하여 그에게 도망쳐 와서 시키온 시의 성벽은 안족은 평평하지만 바깥은 수직으로 뻗어 있어 사다리를 사용하면 쉽게 넘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드디어 작전이 시작되었다.

아라토스는 이 정보를 근거로 세우타스와 테크논이라는 두 하인을 보내 시키온 시를 정탐하게 했고 그 결과 성벽을 넘는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닌데 성벽 바깥의 과수원에 있는 개들이 짖는것이 문제라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토스는 의심받는것을 피하기 위해 에우프라노르라는 기계를 제작하는 기술자 출신의 망명자에게 사다리를 만들게 하고 카피시아스에게 네명의 경장비를 한 병사를 주어 과수원을 비밀리에 점거하여 개와 주인을 사로잡고 조립식 사다리를 수송하도록 했다.

한편 니코클레스의 첩보원들은 아르고스의 아라토스를 감시하고 있었는데 아라토스는 연막전술로 자신이 파티를 여는것 처럼 위장하여 첩보원들을 속이고 비밀리에 아르고스를 나와 자신을 따르는 40여명의 병사들을 데리고 집결지인 폴리그노투스 탑으로 모였다. 그는 여기서 그의 동료들에게 작전이 성공한다면 굉장한 상을 내릴 것을 약속하고 암호명을
'무적의 아폴론' 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들은 네메아에서 시키온 시 성벽까지 밤새 걸었는데 플루타르코스의 말을 빌자면 '달이 서쪽으로 기울어질 무렵에야'예의 과수원에 도착했다.
미리 대기하던 카피시아스는 위험한 소식을 전했다. 과수원 주인은 감금했으나 개는 놓쳤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원들은 대부분 작전중지를 주장했으나 아라토스는 과감히 일을 계속하기로 하고 엑델루스와 므나시테우스에게 선봉대를 지휘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를 거느리고 조용히 전진했다.

엑델루스의 부대는 사다리를 걸치고 성벽을 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보초병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위기에 빠진 엑델루스와 부대원들은 사다리 위에 몸을 바짝 붙이고 그들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도그들은 들키지 않았고 다음번 보초병들도 피해갈 수 있었다. 성벽을 넘은 므나시테우스와 엑델루스의 부대는 외부로 통하는 통로를 점령한 이후 테크논을 보내 아라토스를 불러들였는데 아라토스는 과수원을 지났지만 개들은 짖지 않았다. 하지만 한마리의 깨어있던 개가 그들을 보고 짖었고 나머지 개들도 그들을 따라 짖기 시작했다. 아라토스가 일촉즉발의 위기에 빠진 순간 과수원 주인이 그 소리를 듣고 찾아온 보초병들에게 개들이 보초병의 종소리와 횃불에 놀랐다고 둘러대는 바람에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라토스의 대원들은 이것이 시민들이 자신을 지지하는 증거라고 믿었고 그때문에 사기가 올라 성벽을 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는 너무 늦게 시작한 작전이었다. 아라토스의 부대가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을 때 이미 첫닭이 울기 시작했고 조급해진 아라토스는 먼저 사다리를 올라가 나머지 대원들이 다 올라오자 곧바로 장교숙소를 기습하여 그곳에 있던 용병대를 포로로 잡고 시내의 지지자들에게 연락하여 그들을 불러모았다.

날이 완전히 밝자 아라토스는 극장에 시민들을 불러모아

"클리니아스의 아들 아라토스가 동포를 구하러 왔으니, 시민들은 모두 떨치고 일어나 그와 함께 자유를 되찾자."

라고 말했고 이에 시민들은 크게 고무되어 니코클레스의 저택을 습격하여 그곳에 불을 질렀는데 이때의 불길이 코린트에서도 보였다고 한다.

한편 니코클레스는 지하통로를 통해 도주했고 아라토스는 니코클레스의 재산을 시민들에게 모두 분배했다.

이날의 기습작전은 단 한명의 사망자도 없이 이루어졌으며 훗날 아라토스가 아카이아 동맹의 지도자로서 전 그리스의 용명을 떨치게 되는 기반이 된다.

게다가 이 작전은 마키아벨리가 성을 공격할 때 내부로 잠입하여 성공한 몇 안되는 사례중 하나라고 평할 만큼 성공적인 작전이었음에 틀림없다.



ps. 이번 글은 범우사판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100%참조했습니다. 아마 직접 읽어보시면 그의 문장력을 느낄 수 있을텐데 그것을 짧고 간결하게 옮긴다는 것이 완전 졸문이 되어버렸군요. 많이 읽어주세요;;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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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5-03-10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라토스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의 주요 연방 가운데 하나인 아카이아의 지도자였습니다. 아카이아 연방은 펠로폰네소스 북부에 기반을 둔 도시들의 연합으로 그 기원은 헬레니즘 시기 이전으로 거슬러올라가지만,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헬레니즘 시기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아라토스가 지도자가 되면서 아카이아의 세력은 크게 성장하여 그리스 내 마케도니아의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인 코린토스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떨쳤지만 스파르타 혁명을 주도한 클레오메네스 3세에 의해 잇따라 패배를 거듭하면서 한때 연방은 해체 직전까지 몰리게 됩니다. 결국 아라토스는 적이었던 마케도니아와 손을 잡고 스파르타를 물리치지만 이 때문에 명성이 실추되는 등 말년이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