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키아벨리의 출생부터 청년시절까지(1469~1498)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5월 3일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프리마베라와 마르게리타라는 이름의 누나가 둘 있었으며, 밑으로는 남동생 토토가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어머니는 바르톨로메아 데 넬리로 몇편의 종교시를 지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인생 곳곳에서 드러난 그의 시적재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의 아버지인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는 법학박사로 마르카에서 회계사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세금 문제로 관리와 분쟁을 일으켜 파산선고를 받고 경제활동이 법적으로 금지된 처지였기 때문에 은밀히 법률가의 일을 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보수는 극히 적었고 기회도 거의 없었다. 대신 그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관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 밖의 수입원으로는 피렌체에서 남쪽으로 1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약간의 토지에서 재배되는 포도와 양의 치즈가 있었는데 그리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 집안은 결코 사치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뒤에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어릴 적 나는 즐기는 것보다 참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베르나르도는 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돈이 생기면 책을 살 정도로 공부에 힘을 기울였고, 철하지 않은 책을 사서 스스로 제본하는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책을 사지 못하면 빌려서 보았으며, 법률서뿐 아니라 인문서도 읽었다. 당시 피렌체는 인쇄술이 도입되기는 했지만 필사본보다는 많이 싸다고 해도 여전히 만만치 않은 가격이었다. 베르나르도의 책에 대한 애정을 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베르나르도는 초기의 피렌체 인쇄업자들 중 하나인 니콜로 델라 마냐로부터 인쇄 예정인 리비우스의 책 한 부를 받아 그 속에 나오는 지명을 색인하는 일을 맡았다. 무려 9달이라는 시간동안 애쓴 대가로 그는 그 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베르나르도는 비망록을 남겼는데 그 덕분에 마키아벨리의 어린시절 교육에 대해 어느정도 알 수 있다. 1476년 5월 6일 니콜로는 마테오라는 선생으로부터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이듬해 바티스타 다 포피에게 문법을 배웠다. 그뒤 11세 때 파올로 다 론칠리오네라는 선생에게 공부를 배운 것으로 보이지만 베르나르도의 비망록은 1487년까지만 기록되어 있어 마키아벨리가 고등교육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리스어는 거의 배운 적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평생동안 그의 재능을 뒷받침하게 될 많은 지식을 그는 독서를 통해 얻었다. 마키아벨리는 독서를 매우 좋아했으며 끊임없이 책을 읽었다. 그가 처음 읽은 역사서는 유스티누스(서기 3세기 경 살았던 로마 역사가. <필리푸스 시대의 역사>를 썼음)의 책으로 아버지가 다른 곳에서 빌려와서 읽게한 것이었다. 그 밖에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헤로디아누스, 투키디데스, 폴리비오스를 읽었으며 단테의 시를 좋아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가 보여준 놀라운 통찰력은 독서를 통해서만 얻은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공직에 나가기 전까지 그는 무엇을 보며 자랐을까?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피렌체시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르네상스기의 피렌체는 은행제도가 크게 발달하여 상거래가 활발해지고 있었다. 메디치가, 파치가, 스트로치가 등 피렌체의 은행가들은 유럽 전역에 걸쳐 금융업을 하고 있었으며 무역 중개에 관여하여 큰 이익을 보고 있었다. 특히 교황청의 재정을 담당하는 일이 가장 많은 부를 쌓을 수 있는 길이었다. 대규모 은행들은 정치공작, 거액의 뇌물, 회계장부 조작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교황권의 이권을 손에 넣으려고 하였다. 마침내 1414년 메디치가가 이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권을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민주적 공화제인 피렌체의 지배권마저 장악하고 만다. 1434년 코시모 데 메디치가 피렌체를 지배한 이래 피에로를 거쳐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해에 로렌초 데 메디치가 권력을 손에 넣었다. 로렌초는 많은 예술가와 학자들을 지원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이탈리아 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특히 1479년 나폴리 왕국이 교황과 결탁하여 피렌체를 공격하였을 때 피렌체군은 잇단 패배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나 로렌초가 대담하게도 단독으로 나폴리로 건너가 나폴리왕과 평화협상을 맺은 것은 그의 인기를 최고조에 달하게 하였다. 하지만 1492년 로렌초가 사망했을 무렵 메디치가에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메디치가의 다른 인물과 달리 로렌초는 정치적 능력은 뛰어났지만 사업 능력은 뒤떨어졌으며 그의 뒤를 이은 피에로 데 메디치는 무능한 인물이었다. 1494년 이 해는 앞으로 닥치게 될 이탈리아의 모든 불행이 시작된 해였다. 프랑스왕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입한 것이다. 프랑스왕은 남하하면서 이탈리아 각국에 사절을 보내어 프랑스군이 영내를 통과하는 자유와 필요한 물자의 제공을 요구하였다. 피에로는 프랑스왕의 요구에 굴복하여 순순히 프랑스군을 피렌체를 통과하게 하였으며 이에 피렌체인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마침내 시민들은 봉기를 일으켜 메디치가를 추방하였고 그들을 선동했던 수도사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의 정권을 잡게 되었다. 협상 끝에 피렌체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었고 프랑스군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내려가 이듬해 2월 나폴리를 점령하였다. 프랑스군이 이탈리아에 들어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유린한데 대해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수치로 생각했고 이는 마키아벨리도 마찬가지였다. 엄격한 수도사였던 사보나롤라는 시민들의 사생활을 억압하고 도시를 종교적인 분위기로 몰아갔다. 대외적으로 피렌체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것 때문에 교황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미움을 받아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사보나롤라에 대한 반감도 높아져 마침내 1498년 그는 실각하였고 화형에 처해졌다.
사보나롤라가 죽은 지 겨우 닷새 후 새 정부는 29세의 젊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피렌체 공화국 제2서기국 서기장으로 선출하였다(1498년 5월 28일). 그와 함께 서기장 후보로 나선 인물 가운데는 교수와 변호사 등 어느정도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지만 당시 무직이었던 마키아벨리가 이들을 제치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의 청년기 시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의 경력이라든지 선출 배경에 대해서는 좀처럼 알기 쉽지 않다. 어쨌든 1498년 6월 19일 마키아벨리는 제2서기국의 장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피렌체 공화국에는 제1서기국과 제2서기국이 있었는데 제1서기국은 대외 관계와 외교 서신을, 제2서기국은 국내 관계와 전쟁을 관장하였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각의 역할이 바뀌고 다른 기구와 업무가 중첩되는 등 실상은 관청들 간의 업무가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앞으로 마키아벨리가 주로 맡게 될 업무도 외교에 관한 일이었다.

2. 피렌체 공화국 서기장 마키아벨리(1498~1512)

마키아벨리가 공직에 취임했을 당시 피렌체 정부가 가장 몰두하고 있었던 일은 피사 공략문제였다. 피사는 피렌체 공화국 영내의 도시로 과거 이탈리아의 주요 해양국가 가운데 하나였으며 피렌체에 복속되면서 피렌체가 바다로 나가는 주요 항구가 되었다. 하지만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에 피렌체가 혼란에 빠지자 이를 틈타 피사가 독립한 것이다. 이는 피렌체의 무역에 지장을 주었으며 베네치아 등 다른 국가가 피사를 지원하면서 피렌체의 대외관계에도 부담이 되었다. 피렌체로써는 도저히 피사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부 내의 모든 업무가 이에 집중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피렌체는 피사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각지에서 용병을 모으고 용병대장과 계약을 맺고 있었다. 마키아벨리가 첫 사절로 간 포를리도 용병계약과 관련된 일이었다. 당시 포를리는 여장부로 유명한 카테리나 스포르차 백작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마키아벨리는 협상에 약간의 난항을 겪긴 했지만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피사공략은 좀처럼 마음먹은대로 풀리지 않았다. 피렌체는 당대의 유명한 용병대장 가운데 하나였던 파올로 비텔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피사를 공격했다. 비텔리가 지휘하는 피렌체군은 피사를 포위하고 대포로 성벽을 부수었으나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피사가 거의 다 손에 들어온 상태에서 그냥 시간만 보내자 피렌체 시민들은 분노했고 정부에서는 파올로 비텔리를 체포한 뒤 처형했다. 이듬해 피렌체는 동맹국 프랑스의 원군을 불러들여 다시 피사를 공격했는데 피사가 시간을 끌고 프랑스 병사들이 난동을 부리며 전선을 이탈하자 전쟁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1505년에도 에르콜레 벤티볼리오가 지휘하는 피렌체 용병군이 다시 피사를 포위했지만 비텔리 때와 같이 성벽을 부수고 난후 전투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러한 실패들은 피렌체로써는 굴욕적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이탈리아 군대의 허약함을 그대로 내보이는 꼴이었다.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마키아벨리는 후에 <군주론>에서 용병과 원군에 의지하지 말고 자국의 국민으로 이루어진 국민군을 양성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프랑스, 독일 등 외국과 이탈리아의 여러 나라의 사절로 바쁘게 돌아다녔는데 강대국으로 파견될 경우에는 주로 상대방의 요구조건을 완화시키거나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이었다. 물론 군주와 그 측근 주위에 머물면서 협상의 경과나 정세를 분석하여 본국으로 보고하는 것도 중요 업무가운데 하나였다. 마키아벨리의 보고서는 간결하면서도 냉철하고 정확한 분석으로 유명했기에 피렌체 정부도 그를 신임하였다. 특히 피렌체의 콘팔로니에레(국가원수)인 피에로 소데리니는 더욱 그러하여 마키아벨리를 측근으로 두었을 정도이다. 덕분에 마키아벨리는 비교적 낮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의 사절 경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역시 체사레 보르자에게 파견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 알렉산드로 6세의 아들로서 교황과 프랑스왕 루이 12세의 지원을 등에 업고 이탈리아 중부를 정복해 나가고 있었다. 이탈리아 중부 로마냐 지방은 본디 교황령에 속했지만 이 무렵에는 사실상 여러 나라로 독립한 상태였다. 체사레 보르자는 비상한 계략과 뛰어난 전술을 통해 빠른 시간 내에 로마냐 지방을 점령해 나갔으며 이에 두려움을 느낀 피렌체는 마키아벨리를 그에게 파견하여 그의 의중을 파악하게 하였다. 발렌티노 공작으로 불린 체사레 보르자는 마키아벨리가 여태까지 본 군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자였다. 그는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것은 바로 마키아벨리가 꿈꾸고 있던 것이었다. <군주론>은 바로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쓴 것이었다. 비록 조국 피렌체 공화국에 위험한 인물이긴했지만 마키아벨리는 그를 좋아했고 그의 곁에 머무르며 그가 행한 일들을 관찰하였다. 체사레가 재빠른 기동력으로 우르비노를 점령한 일이나 비텔로초 비텔리, 파올로 오르시니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계략을 써서 진압한 것, 라미로 데 로르카를 처형하여 로마냐 지방의 민심을 안정시킨 일 등은 마키아벨리를 감탄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에게 미소지어주지 않았다. 1503년 발렌티노공이 로마에 머무르고 있을 때 갑자기 전염병이 돌아 8월 18일 교황 알렉산드로 6세가 사망했고, 공교롭게도 같은날 체사레 보르자도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맸던 것이다. 이 때문에 보르자 가문은 큰 타격을 입었고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을 비롯한 그의 정적들이 기회를 잡게 되었다. 다음 교황자리를 두고 체사레 보르자를 지지하는 추기경들과 줄리아노 추기경을 지지하는 추기경들 사이에 경쟁이 치열해졌고 일단 어느파에도 속하지 않았던 인물인 피우스 3세가 교황의 자리에 올리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새 교황은 불과 26일만에 고령으로 사망하였고 뒤이은 선거에서 승리를 한 사람은 바로 줄리아노로 그가 율리우스 2세로 교황이 되었다. 이로써 체사레 보르자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으며 얼마 못가 새교황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 마키아벨리는 로마에 머무르면서 교황선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체사레가 실각한 후 그의 군대는 분열했으며 로마냐 지방은 율리우스 2세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잠시 대외 상황을 보자면 꾸준히 이탈리아를 넘보던 프랑스와 이미 이탈리아 남부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에스파냐 사이에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동맹국이었던 피렌체로써는 불운하게도 전황은 에스파냐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점차 위기로 치닫고 있던 상황을 보며 국민군을 창설하는데 박차를 가하게 된다. 정부의 승인을 얻어 피렌체 영내에서 모병이 시작되었고 이를 관장하기 위해 ‘9인 피렌체 군령 및 민병대 관제위원회’가 창설되었으며 마키아벨리는 새 위원회의 서기관을 겸하게 되었다. 1506년 2월 15일 첫 사열식이 피렌체 시내에서 거행되었으며 아마도 이날이 마키아벨리 일생 중 가장 뿌듯한 날이었을 것이다. 비록 아직 규모가 작고 제대로 훈련이 되지 않아 군대다운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신뢰할 만한 군대가 탄생했다는 것은 국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듬해 독일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알프스를 넘어 남하할 의도를 보이자 마키아벨리는 독일로 파견되었다. 이때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는 비록 처음 가본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정세에 관한 정확한 분석으로 빛나고 있다. 1509년 초 피렌체는 새롭게 창설된 민병대로 다시 한번 피사를 공격하여 포위하였다. 마키아벨리도 물론 전쟁에 참가하여 군과 관련된 업무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피렌체군이 쉽사리 물러나지 않자 피사는 항복했고, 6월 8일 피렌체군은 피사에 입성했다. 피렌체로써는 그토록 원하던 피사 재정복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 상황은 피렌체에게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즉위 이후 거침없이 세력을 확대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프랑스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1511년 교황과 루이 12세는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으며 교황은 에스파냐와 베네치아 등과 손을 잡고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였다. 이듬해인 1512년 4월 11일 라벤나에서 벌어진 동맹군과 프랑스군의 전투는 프랑스측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총사령관인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하는 바람에 루이 12세는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피렌체였다. 프랑스 세력이 이탈리아에서 철수한 상황에서 동맹군은 피렌체를 그냥 두지 않았다. 당시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끌고 있었던 메디치가가 피렌체 복귀를 노리고 있었으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피렌체 내에서도 친메디치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8월 말 라이몬도 다 카르도나가 지휘하는 에스파냐군이 피렌체령인 프라토를 공격했다. 에스파냐군의 첫공격은 물리쳤지만 아직 완전히 조련되지 않은 피렌체 민병대는 당시 유럽 최강이었던 에스파냐군에게 맞설 수 없었다. 두 번째 공격에서 프라토는 함락되었고, 살인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피렌체인들은 두려움에 떨었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도저히 피렌체로써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9월 16일 메디치가 추종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무궁을 장악함으로써 공화정은 무너지고 말았다. 18일에는 민병대가 와해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서기국에 머무르기는 했지만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11월 7일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고 10일에는 새정부로부터 추방 명령을 받아 피렌체시에서 떠나 피렌체 남부 산탄드레아에 있는 작은 집으로 갔다. 14년동안 성실히 근무했던 정무궁을 떠나는 그의 심정은 매우 참담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은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이듬해인 1513년 2월 피렌체의 지배자 줄리아노 데 메디치 암살계획이 발각되고 음모자 중 한명이 가진 서류에 마키아벨리의 이름이 올라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이 음모와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투옥되었다. 그러나 3월 11일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은 레오 10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피렌체 출신의 교황이 탄생한 것을 축하하여 사면령이 내려졌다. 감옥에 갇힌 지 두달 만에 마키아벨리도 풀려나 산탄드레아에 조용히 은거하게 된다.

3. 역사가, 희극작가, 비극작가(1513~1527)

비록 마키아벨리가 메디치가의 재집권으로 오랫동안 근무하던 사무국에서 쫓겨나고 고문과 투옥까지 당했지만 공직에 복귀하고자 하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이전의 공화정에서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지금의 메디치 정권 하에서도 그는 자신이 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마키아벨리는 로마 주재 피렌체 대사인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를 통해 복직을 시도하였다. 지난 14년간 바쁘게 돌아다녔던 습관에다 일에 대한 그의 열정 때문에 지금의 여유는 고통스러운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때부터 프란체스코 베토리와 편지교환이 시작되는데 이는 마키아벨리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의 편지를 보면 우스갯소리도 잘하곤 했지만 주로 정치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내용이 많이 있다. 정치는 언제나 그의 관심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며 비록 시골 산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처지이긴 했지만 그의 예리한 통찰력은 여전히 빛을 발했다. 프란체스코 베토리도 그의 식견에 감탄하여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일이 있었지만 마키아벨리의 복직에 관해서는 언제나 소극적이고 애써 무시하려고 하였다. 또한 교황 레오 10세도 마키아벨리에 대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공직 복귀는 요원한 일이었다.
비록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마키아벨리는 이 시기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그해 후반부터 바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사 논고>, <군주론>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집필을 시작한 것은 <로마사 논고>였지만 당시 피렌체를 지배하고 있던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하기 위해 잠깐 작업을 멈추고 <군주론>을 몇 달에 걸쳐 완성했다. 이 책은 교훈이 될 만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고 군주로서 지녀야 할 자질을 논한 것으로 이 책을 메디치가에 바침으로써 공직으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그의 소망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로렌초 데 메디치는 놀고 먹는 데에만 신경을 썼던 젊은이로 <군주론>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1516년부터 마키아벨리는 ‘오르첼라리 정원’으로 불리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모임은 코시모 루첼라이의 주최로 피렌체의 재능있는 젊은이들이 모여 다양한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덕분에 문인, 군인, 법조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피렌체로 모여들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마키아벨리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그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였고 그가 쓰고 있는 책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다음해에 <로마사 논고>가 완성되자 마키아벨리는 이 책을 모임의 멤버인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코시모 루첼라이에게 헌정하였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에 관한 책만 쓴 것은 아니었다. 그는 평소에 자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에 대한 재능도 풍부했다. 1517년 그는 흔히 황금 당나귀로 알려진 <당나귀>, <벨파고르 이야기>를 지었다. <당나귀>는 짐승으로 변장하여 진짜 짐승같은 사람들을 깨문다는 기발한 생각이 돋보이는 시이다. <벨파고르 이야기>는 마키아벨리 자신이 지어내어 저녁식사나 술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주었던 많은 이야기들 중 글로 옮겨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희곡작품도 썼는데 <만드라골라>와 <클리치아>가 그것이다.
1518년에 쓰여진 <만드라골라>는 희극으로 마키아벨리의 정치관련 저서들과는 완전히 다른 유쾌한 분위기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어 피렌체는 물론이고 베네치아, 로마 등 각지에서 연극으로 상연되고 대본이 출판되었다. 1522년 베네치아에서는 이 연극을 보기 위해 몰려든 관객들이 너무 많아 상연기간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였다. 만드라골라의 성공으로 인해 마키아벨리의 이름은 여성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클리치아>는 플라우투스의 희곡 <카시나>를 토대로 각색한 작품으로 마키아벨리의 친구인 포르나차이오가 벌인 잔치에서 상연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 1525년 1월 13일 이폴리토 데 메디치를 포함한 도시의 저명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상연된 클리치아는 연회와 더불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호평을 받았으며 그 소문은 피렌체 밖으로까지 퍼져나갔다.
1520년에는 전해에 사망한 로렌초 데 메디치의 뒤를 이어 교황의 사촌인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 피렌체를 통치하게 되었다. 3월에 마키아벨리는 친구 로렌초 스트로치의 소개로 그를 만나게 되었고 추기경은 반갑게 맞이하였다. 메디치가 인물들 가운데 비교적 마키아벨리에게 호의적이었던 추기경은 비록 그의 복직을 허락하진 않았지만 피렌체사의 집필을 의뢰하였다. 또한 같은 해에 마키아벨리는 <전술론>, <카스트라치오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지었다. <전술론>는 희곡작품을 제외하고 그의 생전에 유일하게 출판되었던 책이었다. 군사분야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관심을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14세기 루카의 실존인물이었던 카스트라치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써 루카 체류 중에 영감을 얻어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쓴 작품이다. 이제 마키아벨리는 역사가, 작가로서 많은 경력을 쌓게 되었으며 줄리오 데 메디치의 주선으로 2년 동안 피렌체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공직에 대한 꿈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 곳에서나 일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1521년 아드리아해 연안의 라구사로 망명해 있었던 전 콘팔로니에리인 피에로 소데리니가 편지를 보내 라구사 공화국의 서기장 자리를 제의했으나 거절하였다. 뒤이어 당시 유명한 용병대장이었던 프로스페로 콜론나에게 마키아벨리를 추천하여 다시 한번 서기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했다. 콜론나는 200두카토의 봉급과 경비는 별도로 지급하겠다고 조건을 걸었다. 이는 마키아벨리가 서기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봉급보다 훨씬 많은 액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또다시 거절했다. 그는 언젠가 메디치가에게 인정을 받아 피렌체 공화국의 옛자리에 복귀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상인들이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을 대신하여 사절노릇을 하기도 했었는데, 과거 왕이나 황제에게 파견되어 협상을 벌였던 옛일을 떠올리면 참으로 안타깝게 여겨지는 일이다. 이듬해인 1522년 마키아벨리에게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 일어난다. ‘오르첼라리 정원’의 멤버이자 마키아벨리의 절친한 친구였던 자노비 부온델몬티와 루이지 알라만니를 비롯한 몇 사람이 메디치 추기경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들통난 것이다. 전과 마찬가지로 마키아벨리는 음모에 가담했지만 자칫 또다시 연루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 두사람은 간신히 도망쳤고 다른 음모자들은 잡혀 처형당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마키아벨리에게 화가 미치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1523년 교황 하드리아누스 6세가 사망하고 - 레오10세는 1521년에 이미 사망 - 새로운 인물이 교황이 선출되었는데 바로 피렌체의 줄리오 데 메디치 추기경이었다. 클레멘스 7세라는 이름으로 즉위한 새 교황은 마키아벨리에게 호의적인 인물이긴 했지만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판단력이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또 한번 위기 속으로 치닫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동안 에스파냐에게 눌려있었던 프랑스가 다시 이탈리아 침공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미 1515년 프랑수아 1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마리냐노 전투에서 스위스군을 격파하고 밀라노를 비롯 롬바르디아 지방을 장악하였다. 한편 독일 황제 카를 5세는 1516년 에스파냐 왕위까지 물려받아 유럽 최대의 군주가 되었다. 그 또한 역대 독일황제들이 그러하였듯 이탈리아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1525년 마키아벨리는 완성된 <피렌체사>를 들고 클레멘스 7세를 만나러 로마로 갔고 교황은 이에 기뻐하여 마키아벨리에게 약속된 보수보다 더 많은 돈을 그에게 주었다. 그런데 그보다 얼마 전인 2월 24일 제국군이 파비아에서 프랑스군에 승리를 거두었고 이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는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점점 강해지는 카를 5세에 대항하기 위해 그동안 친프랑스적인 태도를 취했던 교황에게 이것은 몹시도 안좋은 소식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교황에게 국민군을 창설할 것을 건의하였다. 교황은 이 의견에 공감하는 듯 했으나 그 특유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총애하는 신하이자 마키아벨리의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프란체스코 귀치아르디니에게 자문을 구했다. 귀치아르디니는 마키아벨리의 뜻에는 공감하였으나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이유로 반대하였고 결국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제국군이 남하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교황과 이탈리아 각국의 대응은 지지부진했다. 1526년 1월 14일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에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결과 프랑스는 이탈리아, 플랑드르, 부르고뉴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왕은 석방의 대가로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야 했다. 하지만 귀국한 프랑수아 1세는 곧바로 조약불이행을 선언하고 영국과 동맹을 맺어 카를 5세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우위는 변하지 않았고 이제 이탈리아는 그와 정면으로 부딪혀야했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마키아벨리는 마지막 수단으로 교황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조반니 데 메디치에게 가능한 한 많은 군대를 주어 제국군과 대적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조반니 데 메디치는 메디치가의 방계에 속한 인물로 마키아벨리가 서기장 시절 처음 사절로 갔던 포를리의 여백작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아들로서 어머니를 닮아 용맹하였고 군지휘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대담한 제안은 소심한 클레멘스 7세에게는 분수에 넘치는 것이었다. 그래도 피렌체 출신의 교황과 그의 측근들은 제국군에 대비해 피렌체의 방어를 준비할 결심은 했다. 5월 9일 마키아벨리가 발의한 ‘5인성벽관리위원회’가 설립되었고, 감독관이자 서기장으로 그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조수로 아들인 베르나르도를 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마키아벨리는 다시 한번 피렌체 정무궁에서 일하게 되었다. 비록 그리 대단하지 않은 지위였지만 조국을 지킨다는 면에서 그 임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즉시 보루를 만드는 일에 착수하였다. 5월 23일 코냑에서 교황, 피렌체, 베네치아, 프랑스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다. ‘코냑 동맹’이라고 부르는 이 동맹은 즉각 제국에 대해 전쟁을 선언하였다. 교황군은 귀도 랑고니와 조반니 데 메디치가 베네치아군은 우르비노 공이 지휘하였고, 비텔로 비텔리는 피렌체군을 맡았다. 그리고 전군을 감독하는 총감독관 자리에는 프란체스코 귀치아르디니가 올랐다. 동맹군은 북쪽으로 진격하여 로디를 함락시키고 밀라노 아래에 진을 쳤다. 그러나 갑자기 우르비노 공이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켜버렸고 이 때문에 동맹군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딱히 하는 일도 없이 롬바르디아 평원에 머무르고 있던 동맹군은 9월 23일 크레모나를 함락시킨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며칠 전인 9월 19일 어리석은 교황이 에스파냐 장군 돈 우고 다 몬카다에게 속아 주위의 경비병들을 해산시킨 뒤 로마의 호족이었던 콜론나파의 기습을 받아 포로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인해 동맹군은 롬바르디아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군대와 함께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피렌체로 돌아갔다.
11월이 되자 황제의 독일 용병부대인 <란치군 Lanzi> (Lanzichenecco, Landsknecht)이 프룬츠베르크의 지휘 하에 알프스를 넘었다. 베네치아군이 도중에 방해했지만 독일군은 포 강의 도하 지점에 이르렀다. 베네치아군 사령관인 우르비노공이 적극적으로 행동할 거라고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희망은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끄는 얼마 안되는 군대에게 달려있었다. 11월 25일 조반니 데 메디치는 용감히 싸웠으나 포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았다. 28일 독일군은 포 강을 건넜고, 30일에는 부상이 악화된 조반니 데 메디치가 죽었다. 도중에 밀라노에서 온 에스파냐 군과 합류한 독일 란치군은 로마로 향하고 있었으나 식량과 돈이 떨어지고 기상이 악화되어 진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제대로 급료를 지급받지 못하자 제국군 용병들은 명령도 듣지 않았다. 밀라노 시민들로부터 얻어낸 돈으로 간신히 진격이 재개되었으나 1527년 3월 식량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지휘관 프룬츠베르크가 중상을 입고 독일로 호송되었으나 곧 사망하고, 샤를 드 부르봉이 지휘를 맡았다. 새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로마를 공격하자고 병사들을 선동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클레멘스 7세는 전쟁도 강화도 제대로 못하고 오직 충돌만 피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구이차르디니가 지휘하는 교황군과 피렌체군은 그저 제국군을 뒤에서 따라갈 뿐이었다. 점점 재앙이 현실로 다가오는 가운데 클레멘스는 마지막 실수를 저지른다. 제국군이 남하하기 시작했다는 보고에 놀란 교황은 나폴리 총독의 권유에 따라 로마를 지키고 있던 군대를 해산시켜버린 것이다. 이제 로마에는 교황을 지키기 위한 고작 몇백에 불과한 스위스 병사들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5월 4일 마침내 제국군은 로마에 도착했다. 5월 6일 새벽 마침내 전투가 시작되었고 첫 공격에서 샤를 드 부르봉은 총탄에 맞고 죽었다. 그러나 워낙 기세등등한 제국군은 지휘관의 존재여부는 상관없이 사납게 공격을 가했다. 마침내 방어선이 무너지고 도시는 함락되고 말았다. 교황은 추기경들과 함께 산탄젤로성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병사들은 앞을 다투어 약탈하고 살인, 강간, 파괴행위를 자행하였다. 로마 교회에 아무런 경의도 갖고 있지 않은 루터파 신교도인 독일군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역사상 ‘로마 약탈(Sacco di Roma)'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마지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로마에서 겨우 이틀 거리에 있었던 구이차르디니와 마키아벨리로서는 너무나도 손쉬운 함락 소식에 어이없어 할 뿐이었다. 결국 6월 5일 클레멘스 7세는 황제 카를 5세에게 굴복하고 만다.
한편 5월 17일 피렌체에서는 메디치가가 추방되고 새로이 공화정부가 수립된다. 마키아벨리는 설레는 마음으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과거 자신이 일했던 피렌체 서기국에 복귀할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새 정부는 마키아벨리를 친메디치파로 여기고 6월 10일 프란체스코 타루지란 사람을 서기장으로 임명하였다. 마키아벨리에게 이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격이었다. 그 충격으로 인해 그는 갑작스레 병을 얻어 눕게 되었다. 그리고 21일 그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했던 마키아벨리는 세상을 떴다. 58세의 나이였다.
죽기 직전 그의 곁에는 얼마 안되지만 좋은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프란체스코 델 네로, 자노비 부온델몬티, 루이지 알라만니, 야코포 나르디, 필리포 스트로치 등이 그들이었다. 그는 몸과 마음의 병으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음에도 친구들과 더불어 자신의 불행을 웃어넘기고 농담을 하는 등 죽음에 의연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그들 앞에서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그는 누더기를 걸치고 비쩍 말라 병약해 보이는 빈자들의 무리를 드문드문 보았다고 얘기하였다. 그가 그들에게 누구냐고 묻자, 자신들은 천국의 축복받은 사람들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들이 사라지자 왕이나 궁정의 예복을 입은 고상한 사람들 한떼가 나타났다. 그들은 진중히 국가사를 논의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플라톤, 플루타르코스, 타키투스를 비롯한 고대의 유명한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그가 새로이 나타난 이 사람들에게 누구냐고 묻자, 자신들은 지옥에 떨어진 영혼들인데 그 이유는 ‘이러한 종류의 지식이 신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 역시 사라지자 그에게 누구와 함께 있고 싶으냐는 질문이 던져졌다. 마키아벨리가 대답하기를 자신은 처음의 누더기를 걸친 무리들과 천국에 있기보다는 차라리 고귀한 영혼들과 국가사를 논하며 지옥에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실로 그다운 면모가 잘 드러나는 마지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자료 

마키아벨리 평전, 로베르토 리돌피 저, 곽차섭 역 ㅣ 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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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탕카멘,살았을 때 얼굴은 이렇게 생겼다

[국제부 3급정보]○…황금 마스크로 유명한 고대 이집트의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의 얼굴이 컴퓨터 단층촬영 기술을 이용해 새롭게 복원됐다. 1922년 이집트 룩소르 협곡에 있는 왕가의 계곡에서 미라가 발굴된 지 80여년 만의 일이다.

복원된 얼굴은 통통한 뺨에 도드라진 윗 입술,쑥 들어간 아래 턱 등 전반적으로 미남의 그것은 아닌 것 같다고 뉴욕타임스는 평했다. 이집트 고대유물 최고위원회는 지난 1월 투탕카멘 미라에 대한 단층촬영을 실시해 1700여장의 사진을 확보했다. 위원회는 이를 자국과 프랑스 연구팀에 제공해 3개월 간 정밀 분석 작업을 했으며 미국도 법의학 전문가와 과학자들을 동원해 연구를 수행했다.


위원회의 자히 하와스 박사는 “복원된 얼굴이 태양신으로 묘사된 투탕카멘의 초상화와 놀랍도록 흡사하다”고 말했다. 프랑스 연구팀이 보다 자세하게 복원한 초상화는 황금 마스크 이미지와도 흡사하다고 타임스는 전했다.

고대 이집트 18대 왕조의 12번째 파라오였던 투탕카멘은 BC 1352년 9세의 나이로 즉위했으나 19세 때 갑작스레 사망했다. 1968년 그의 두개골에서 움푹패인 상처가 나오자 암살설이 무성했으나,이번 연구에서는 상처가 사후 황금 마스크를 끼우는 과정에서 난 것으로 판명됐고 하와스 박사는 밝혔다. 우성규기자 mainport@kmib.co.kr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뉴스, The Kukmin Daily Internet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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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서 2천년전 신발 발견
(웰링턴<영국> AP=연합뉴스)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서머셋주 웰링턴 부근의 한 채석장 우물 터에 있는 속 빈 나무둥치에서 최소한 2천 년 전의 신발 한 짝을 발견했다고 10일 밝혔다.

고고학자들은 오랜 옛날 샘의 물을 땅으로 흘리기 위해 홈통으로 사용된 속 빈 나무 속에서 발견된 약 30㎝ 크기의 이 가죽 신발이 보존 상태가 워낙 좋아 지금도 가죽을 꿰맨 바느질 땀과 끈 구멍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라고 밝혔다.

엑시터 고고학 발굴단은 지난 1989년에도 청동기 시대의 철 제련소 터가 발견된 이 곳에서 물이 가득 찬 두 개의 물받이 홈통과 나무로 안을 댄 우물 두 개를 발견했으며 정밀조사를 위해 연구실로 옮겨진 나무 홈통 안에서 이 신발을 찾아냈다. 이들 우물의 연대는 철기시대인 기원전 700년~서기 43년 경일 것으로 보인다.

연구진은 남자가 신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신은 영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 전의 신발로 무슨 가죽을 써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조사 중이며 나중에 엑시터에 있는 로열 알버트 기념 박물관에서 전시될 것이라고 말했다.

학자들은 이 시대의 다른 유물이 유럽 대륙에서 발견된 적은 간혹 있지만 영국에서 이처럼 고대의 신발이 발견된 것은 처음이라고 밝혔다.

youngn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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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서 가장 보존이 잘된 `2천년전 미라`
미라를 얘기하면 이집트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집트 미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보존 상태를 자랑하는 미라가 있다. 기원전 210년대에 자연스럽게 생성된 습지 미라가 그 것. 9일 방송된 Q채널도전, 기네스 신기록’은 ‘세계에서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미라’로 기네스에 기록된 미라를 공개했다.

방송에 따르면 이 미라는 덴마크의 한 습지에서 발견됐다. 미라는 피부색이 검게 변한 것을 빼곤 거의 완벽하게 보존돼 있었다. 특히 피부 조직은 거의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손발톱 또한 전혀 상하지 않았다. 이 습지 미라는 1951년 얼음 속에서 발견된 미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완벽하게 보존된 이유는 바로 습지 때문. 습지에 있는 ‘토탄이끼’의 산성분이 미생물을 죽이는 역할을 해 원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습지대를 ‘유적의 보고’라고 일컫는다. 현재까지 습지대에서 발견된 북유럽의 유물들은 거의 완전하게 보존돼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습지미라가 최초 발견될 당시 더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고. 심지어 뱃속의 음식물까지 발견됐다는 것이다. 당시 미라의 뱃속에는 잡초류 씨앗이 들어있었다고. 하지만 이후 부검을 비롯해 각종 검사로 많이 부패 되었다는 것이다.

습지 미라는 이것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오래된 것은 2,900년 전에 생성된 것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미라는 부패 상태가 심한 편이다. 손발톱과 약간의 피부만 남아있는 상태다.

두 습지 미라 사이에 흥미로운 공통점이 발견됐다. 바로 목 뒤에 올가미가 감겨 있고, 머리 뒷부분에 가격당한 흔적이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미라가 범죄자였거나 신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물로 추측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전직은 미라가 깨어나기 전까진 아무도 모를 것이다.[TV리포트 진정근 기자] gagora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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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속에는 당대의 여러 가지 지식들이 용해되고 투영되어 있다.
당빌의 지도는 한국과 중국의 국경 문제에 대한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중국 황제가 실측에 참여하여 제작한 지도이기 때문이다. 고지도는 과거의 것을 그린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담고 있는 창고인 셈이다.

우리는 모두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보기 위해 그 거울에 비춰본다. 비춰진 그 영상을 보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린다.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거울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들도 자신의 거울로 우리를 비춰보고 그들 나름의 해석을 내린다. 그 해석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내리는 해석과 다를 수 있다. 우리의 해석이 ‘주관적’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은 ‘객관적’이라고 한다. 사실 다른 사람들도 주관적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객체의 관점이라 객관적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두 가지 관점을 모두 알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우리를 대외적으로 대표하기 때문이다. 서양 고지도란 바로 다른 사람들의 거울에 나타난 우리의 모습이다.

서양 고지도의 역사는 AD150년 그리스의 프톨레마이오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전통이 단절되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15세기경이다. 그러나 상업적인 고지도가 인쇄되고 판매된 것은 16세기 후반부터이고 초기의 서양 고지도에는 한국의 모습이 잘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서양이 한국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서양에서 맨 먼저 한국에 대해 안 사람들은 아랍인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옛 가사와 일부 묘지의 석상 중에도 아랍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알 이드리시라는 지리학자는 1154년에 지은 저서에서 sila가 섬으로서 금이 많이 나는 나라이며, ‘와꾸와꾸’옆에 있다고 소개하였다. 그것이 최초의 한국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해석으로는 ‘신라’를 ‘Sila’라고 표기하였고, 아마도 장보고의 청해진에 들렀던 아랍상인이 신라를 섬이라고 한 것이 알 이드리시가 섬이라고 한 것의 발단이 되었다고 추정한다. 또한 ‘와꾸와꾸’ 란 중국인이 ‘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한 것을 발음이 분명치 않아 어린이 언어에서처럼 반복하여 ‘와꾸와꾸’라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4세기, 동방견문록에 카올리(Caoli)로 첫 등장

그 후 1300년경 마르코 폴로가 감옥에서 회고록 형식으로 쓴 <동방견문록>에 ‘카올리(caoli)’라는 지명이 나오는 데 ‘고려’를 중국식으로 발음한 것을 옮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후 두라도가 1568년에 만든 포르투갈 고지도에 ‘comra’라는 지명이 등장하는데, ‘m’은 착오로 삽입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이 ‘조선’이라는 지명으로 명확하게 표기된 지도는 랑그렌이 1590년에 제작한 <동양지도>에서다. 한국은 좁다란 반도로 그려져 있고, 국명은 ‘corea’, ‘Tiauxeu’, ‘Cory’의 세 가지로 혼용되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다.

16세기 말부터는 베네룩스가 지도 제작의 중심이 된다. 특히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과 벨기에의 항구도시 앤트워프에서 많은 지도가 제작되었다. 그 중에서도 인도에서 여러 해를 보내면서 각종 해도를 수집한 린쇼텐이 암스테르담에 돌아와 1591년 랑그렌과 함께 출판한 <동양수로지>에 한국에 대해서는 부정확하지만 흥미로운 지도가 첨부되어 있다.

포르투갈어로 표기되어 있고 인도 철학의 영향을 받아 동쪽을 위쪽에 두고 있는데, 한국은 거의 둥근 섬으로 그려졌고 일본은 한국 아래에 새우와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 더 특이한 점은 한국이라는 지명 아래에 ‘도적섬’이라는 주석이 붙은 것이다.

그러나 그 호칭은 한국에 맞지 않는다. 외국과 거의 교류가 없던 한국이 누구를 도적질한 경우가 없었고 한국을 비롯하여 중국의 해안지방까지 노략질한 것은 일본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야 할 표현이 한국에 잘못 적용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다른 지도들은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일부 서양 고지도는 16세기 말경까지 한국을 빠트리거나 혹은 섬으로 그렸는데, 그것은 압록강과 두만강에 의하여 만주와 단절된 섬으로 그려진 한국의 천하도나 고지도가 서양에 전해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601년 헤라 라의 <서인도제국지도>에서도 한국은 기다란 섬으로 나타나고 아랍지도의 영향인지 국명을 ‘Cory’라고 표시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은 17세기에 들어오면서 많이 달라진다.

1 우선 마태오 리치의 지도에는 한국이 섬이 아닌 반도로 그려져 있다. 그의 지도가 서양 고지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17세기부터는 중국에 다녀온 선교사들이 동양의 지도를 제작하게 된다. 마르티니 신부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천문과 지리에 정통한 신부로서 마태오 리치의 요청에 의해 중국으로 갔다.

중국은 서양 선교사들에게 두 가지만을 허용하였다. 즉 대포 만드는 법의 전수와 지도 제작이었다. 마르티니도 대포를 만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중국을 비롯한 극동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귀국 후 지도제작에서 명성을 날리던 요한 블라우와 함께 1655년 <중국지도첩>을 발간하였다. 그의 지도첩은 중국(한국까지 포함)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포함하고 있다.

18세기, 파리에서 발간된 지도에 동해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다

1703년 드 페르가 파리에서 발간한 <아시아 지도>에도 한국이 나타난다. 한국 해안선의 표시가 단순화되어 있다. 그의 지도에는 동양을 잘 모르는 서양인을 위한 지지적 설명이 간단히 첨부되어 있다. 그는 동해에 대한 설명에서, 서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바다이지만 달달인(만주족)들이 ‘동해’라고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초, 세계에서 가장 늦게 탐사된 동해의 표기에 관하여 잠시 살펴보자.
이탈리아의 보르도네(Bordone)는 1528년 동해를 Mare Oriental라고 표기하였고 일부 16세기 지도들은 중국해, 한국해, 동양해, 마태오 리치의 1602년 지도는 일본해라고 표기하고 있다. 중국해라는 명칭은 일종의 오류로 17세기부터는 거의 사라졌다. 한국 옆에 있기 때문에 한국해라고 하고 서양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양해라고도 했다.

마태오 리치가 일본해라고 표기한 것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해는 일본 쪽 바다에 부쳐진 이름이고 한국쪽 바다에는 한국에 대한 지지적 설명을 하다보니 여백이 없어서 한국해를 표기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그 이유는 이렇다. 마태오 리치 이전에 동양 지도를 만든 포르투갈 인들의 지도를 보면 한국 쪽에는 한국해, 일본 쪽에는 일본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가 포르투갈 인들이 만든 지도를 참고하여 <곤여만국지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여하튼 그의 지도는 서양의 고지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중국에 다녀온 신부들이 그와 다른 지도들을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당빌의 1737년의 <신중국지도첩>은 그 좋은 예라고 하겠다. 당빌은 그 후에 제작된 거의 모든 지도에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신중국지도첩>은 본래 뒤알드 신부의 4권으로 된 <중국백과 전서>의 부록으로 발간되었다. 그 자료는 중국 강희제의 명에 의하여 레지스 등의 신부들이 실측을 토대로 만든 지도의 원판을 받아서 당대에 이름 있는 지도제작자 당빌이 중국어를 프랑스어로 바꾸어 지도화한 것이다. 그의 지도첩에는 <한국전도>가 들어 있는데 그 지도는 전적으로 실측한 지도가 아니라 궁중에서 보관하던 극비의 지도를 선교사들이 입수한 후 일부 거리를 실측한 후 신뢰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프랑스에 보낸 것이다.

그의 지도첩은 지도의 역사에서 가장 가치 있는 업적으로 평가받는데 그의 지도에는 산맥과 강들이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동해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다. 마태오 리치가 부친 일본해라는 명칭은 부적당하고 그렇다고 한국해라고 하기에도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그의 영향을 받은 다른 지도들은 대부분 한국해 또는 동해로 표기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8세기는 지식산업이 꽃핀 시대로 지도 제작도 가장 활기를 띤 시대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해·동해’로 표기된 지도와 ‘일본해 또는 일본 북해’라고 표기된 지도는 어떤 도서관 지도에서는 3:1, 다른 도서관지도에서는 6:1 정도로 한국해·동해로 표기된 지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 사실을 일본 학자들도 사석에서는 인정하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글을 써나가는 서양 문화에서는 왼쪽에 있는 주어 혹은 목적어의 성수와 일치해야 한다. 따라서 지도에서도 보통 왼쪽에 있는 나라의 이름이 오른쪽 바다에 표기된다. 그리하여 북에서 이름을 남긴다.

그에 비하여 일본은 동북에서 서남으로 구부러진 섬나라이고 그 이름이 바다에 붙여진다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더욱이 일본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태평양 쪽 바다를 일본해라고 불렀는데 그것이 해가 뜨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합당하다. 그에 비해 동해는 ‘해가 지는 바다’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자면 ‘일몰해’라고 하는 것이 맞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동해를 최초로 탐사한 라페루즈가 귀국 후에 작성한 1797년의 <항해도첩>에 동해를 일본해라고 명명한 후 상황은 달라진다. 동해를 일본해라고 표기하는 지도들이 많아졌고, 그렇게 되면서 일본은 슬그머니 자기의 주장을 바꾸고 동해를 ‘일본해’라고 쓰게 되었다. 또한 일부 국수주의자들은 동해를 자기들의 ‘안방’정도로 착각하게 되었다.

 

동해 한가운데 있는 독도에 대해서도 일본의 고지도 <삼국통람도설>에 한국의 섬이라고 명기되어 있고,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클라프로트가 쓴 <삼국 총도>에도 한국의 섬이라는 설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그 섬이 자기 것이라고 억지를 쓰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고지도 속에는 당대의 여러 가지 지식들이 용해되고 투영되어 있다. 앞서 언급한 당빌의 지도는 한국과 중국의 국경 문제에 대한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그것은 중국 황제가 실측에 참여하여 제작한 지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지도는 과거의 것을 그린 단순한 지도가 아니라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담고 있는 창고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20세기에 들어와 미국 선교사들은 영어의 (K)가 ‘K’로 표기되기 때문에 ‘Corea’를 ‘Korea’로 쓰기로 한 것이 우리의 영문 국호가 되었는데 K를 C로 복원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동해를 일본해와 함께 병기해야 하는 타당성,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하는 정당성, 나아가서는 만주 남쪽의 우리 영토를 찾아야 하는 문제 등은 서양의 고지도가 우리에게 남겨준 중요한 숙제이고, 그러한 숙제를 담고 있는 서양 고지도가 역사교육에 활용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글·그림_서정철(한국외국어 대학교 명예교수)

 
 
 
출처 - ANTIQU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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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05-04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대낮에 왠일이시래요^^

데메트리오스 2005-05-04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치보면서 알라딘에 접속했어요 ㅋㅋ

물만두 2005-05-04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