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의 여성의 지위 변화가 예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나마 가장 많은 부분이 묘사되어 있는 왕실의 여성에 대해 알아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헬레니즘 군주국들에서 왕실 여성은 과연 어느 정도의 발언권을 지니고 공적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먼저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될 무렵의 마케도니아가 시작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주요 군주국의 왕실은 모두 마케도니아(Macedonia)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가 동방 원정을 떠나면서 공식적으로 마케도니아는 섭정 안티파트로스(Antipatros)에게 맡겨졌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와 친누이인 클레오파트라(Cleopatra)는 마케도니아와 에페이로스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에페이로스는 올림피아스의 모국으로 그녀는 자신의 딸인 클레오파트라를 남동생인 에페이로스의 알렉산드로스와 결혼시켰기 때문이다. 에페이로스의 왕비가 된 클레오파트라는 외삼촌이었으나 이제는 남편이 된 에페이로스왕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34년 이탈리아로 원정을 떠난 이후, 그리고 기원전 331~330년 겨울 전사한 이후 에페이로스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국정을 이끌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이 시기 마케도니아 여성사의 전문가인 화이트혼(Whitehorne)은 분석하고 있는데, 첫째로 그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친누이이며, 둘째로 에페이로스에서의 여성의 특별한 지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에서와는 달리 에페이로스에서 아들이 있는 미망인은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가장으로 행동하는 것이 용인되어 있었다.

한편 플루타르코스의 <알렉산드로스전>에는 이 두 여성에 대해 눈에 띄는 대목이 두 군데 있다. 첫째는 25장 4절의 묘사로써 알렉산드로스가 가자(Gaza)를 점령(기원전 332년)한 후, 많은 전리품을 고국으로 보내면서 '올림피아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그(알렉산드로스)의 친구들에게' 보낸다고 특별히 명시한 부분이다. 둘째는 68장 3절로 "올림피아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섭정인) 안티파트로스에 대항하여 파당을 모아 그(알렉산드로스)의 영토를 분할하고 올림피아스는 에페이로스를 클레오파트라는 마케도니아를 장악하였다"는 내용이다.

첫째 부분에서 올림피아스가 거론된 것은 홀로 있는 어머니이니 당연하다고 치고, 그 밖의 다른 이복형제들의 이름이 전혀 거론되지 않은 것에 주목해 볼 수 있다. 이는 친누이에 대한 알렉산드로스의 특별한 관심을 말해주는 것이며, 이 관심은 곧바로 둘째의 구절과 관련이 될 것이다. 미망인이 된 클레오파트라가 마케도니아로 돌아와서 권력투쟁에 뛰어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며, 동시에 이는 오빠인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특별한 친분관계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68장 3절에서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어머니는 선택을 잘 하신거야, 마케도니아는 여성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거든"하고 평했던 대목은 알렉산드로스의 권위가 클레오파트라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기는 하나, 에페이로스와는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동시에 앞 문단에서 언급한 에페이로스에서 여성의 지위가 상당한 정도로 보장되어 있던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의 사망 후, 권력의 무게 중심이 소위 '후계자들(디아도코이)'에게 넘어감에 따라 이들과 결혼이나 친척관계로 맺어진 마케도니아 왕실의 여성들이 여러가지 방식으로 합법적인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이 권한이 확고한 것은 아니어서, 기원전 280년 이후 정치적 혼란이 가라앉고 헬레니즘 왕국과 왕조가 자리를 잡게 되자 그때까지 놀라울 정도로 강화되어 가던 왕실 여성들의 중요성은 일부 감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안티고노스 왕조 치하에서는 그들의 권한이 약화되었지만, 다른 경우 예를 들면 (이집트의)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어느정도까지 계속 유지되었거나 심지어 더욱 강화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 나온 여러 비문과 파피루스 등의 자료에서는 거의 언제나 왕과 여왕이 나란히 거명되고 있다. 예를 들면 신이자 구주(theoi soteres)이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왕과 베레니케(Berenice) 여왕의 자녀이시며, 남매신(theoi adelphoi)이신 프톨레마이오스 (2세)왕과 아리스노에(Arisnoe) 여왕의 아들이신 프톨레마이오스(3세) 대왕 등이다.

이리스노에는 기원전 270년까지 5년여를 프톨레마이오스 2세와 함께 통치했으며, 기원전 2세기의 클레오파트라 2세와 3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잘 알려진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 역시 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권력투쟁을 벌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은 플루타르코스의 <클레오메네스전>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클레오메네스가 이집트로 망명한 뒤, 그의 후원자 역할을 하던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얼마 안가 사망하고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즉위하였다. 이 시기 이집트의 궁중은 "지나친 방종과 음주에 빠져 있었고, 여성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국사는 왕의 애첩인 아가토클레이아(Agathocleia)와 포주였던 그녀의 어머니 오이난테(Oinanthe)에 의해 좌우되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한다.

 

출처 - 헬레니즘 <윤진,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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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래 그리스 세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일단 그리스 세계 자체가 광범위하게 커졌고, 그리스 식민지가 세워진 지중해 서쪽으로부터 저 멀리 인도 북서부와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문화가 널리 전파되었다. 이 지역 내에서는 당시 표준어라 할 수 있는 코이네 그리스어(아테네 지방의 방언)가 널리 통용되었으므로 어딜 가든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이처럼 헬레니즘 시대는 그리스 문화가 최초로 널리 보편화된 시대였다.

이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리스인들이 그들 역사에서 최초로 넓은 영토를 정복하여 대왕국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3대 왕국이던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는 과거 어떤 그리스 국가들보다도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특히 셀레우코스 왕조가 지배하던 시리아는 구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여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에서 동쪽으로는 인도 북서부에 이르기까지 통치 영역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이집트와 마케도니아도 레반트(동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며 영토를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다면 그리스 본토에서 오랫동안 폐쇄성을 유지하던 기존의 도시국가(폴리스)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3대 강국, 즉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가 번성하던 시기에 폴리스들은 더이상 예전의 영광을 누릴 수 없었다. 헬레니즘 시대 초기 알렉산드로스의 휘하 장군들이었던 디아도코이(후계왕)들은 그리스에서 영향력을 늘리기 위해 끝없이 전쟁을 벌였고, 헬레니즘 시대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마케도니아의 간섭에 놓이게 되었다.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아 전투 이래 그리스는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시기에 스파르타 왕 아기스 3세는 마케도니아에 대항했으나, 331년 메갈로폴리스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섭정 안티파트로스에게 패배하여 그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테네도 알렉산드로스가 사망한 뒤 데모스테네스나 크레모니데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여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리스 도시들은 디아도코이들이 종종 자유를 돌려주겠노라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계속 간섭을 당했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본토를 장악하기 위해 중요한 전략적 거점에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바로 칼키스, 코린토스, 데메트리아스가 마케도니아군의 주둔지로 이 세 곳은 흔히 '그리스의 족쇄들'로 불렸다.

이렇게 그리스가 강대국에 의해 간섭받던 시기 그리스 본토의 도시들은 서로 연합하고, 자체적으로 강해지기 위해 각 도시의 독립적인 권리를 일부 양도하여 연방체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대왕국들이 개개의 도시들을 압박하고 있고, 또 배타적인 옛 폴리스의 불리한 점이 명백해지던 시대에서 이런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래도 중요한 연방국가들이 성립한 곳은 그리스에서도 주로 도시국가가 여태 튼튼하게 뿌리내리지 못했거나 전통적인 자주 독립 혹은 패권의 역사를 갖지 못했던 지역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대표적인 연방 국가는 아이톨리아와 아카이아였다. 이 두 곳 모두 기원은 헬레니즘 시기 이전에 형성되었지만,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헬레니즘 시기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이 연방들은 대개 방위동맹으로써 하나의 폴리스가 맹주가 되어 동맹을 이끈 델로스 동맹이나 펠로폰네소스 동맹과는 다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연방의 시민은 자기가 속해있는 도시의 시민권과 연방 시민권이라는 이중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방에 속해있는 다른 도시국가로 이주해가면, 그곳에서도 완전한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며, 연방 민회를 열었고, 연방 공통의 화폐를 주조하기도 하였다.

아이톨리아 연방은 군복무 연령에 달한 모든 남성이 모여 연간 봄과 가을 두 차례 소집하는 총회가 있었다. 매년 선출되는 주무 행정관인 사무총장이 있었으며, 총회의 회기 사이에 통치를 담당했던 평의회(boule 혹은 synedrion)가 있었다. 이 평의회는 인구 비례로 선출되는 도시 대표로 구성되는데, 의원수가 무려 수백명에 달했다. 일상 업무는 사무 총장이 주재하는 약 30명 남짓한 평의회의 소위원회(apokletoi)가 수행했지만, 중요한 대외 정책의 문제는 총회에서 결정하였다. 아이톨리아 연방은 279년 그리스를 침략한 갈리아인들로부터 델포이를 구원하여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 후 연방을 중부 그리스 너머까지 확장시켰다. 그리하여 아이톨리아 연방은 마케도니아 왕이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다소 중요한 세력이 되었으며 훗날 마케도니아 왕 필리포스 5세에 맞서 로마의 동맹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로마의 세력확장을 용이하게 하여 그리스 세계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의 역사에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아카이아 연방이었다. 일찍부터 펠로폰네소스 방도의 북쪽 해안에 위치한 아카이아인들의 도시들은 모종의 유대를 맺어왔지만, 알렉산드로스와 그 후계자들의 시대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기원전 280년 뒤메, 파트라이, 트리타이아, 파리이같은 도시들이 모여 새로운 연방을 결성했고, 거기에 아이기온, 부라, 케뤼네이아, 레온티온, 아이기라, 팔레네가 가담했고, 후에는 올레노스도 포함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카이아 연방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은 아라토스라는 젊은 시퀴온인이었다. 기원전 251년 그는 시퀴온의 참주를 축출하고, 도리아계인 시퀴온을 아카이아 연방에 가입시켰으며, 연방의 지도자가 되어 기원전 243년에는 안티고노스 고나타스로부터  마케도니아의 주요 거점 중 하나인 코린토스를 빼앗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243년과 228년 사이에 아라토스의 공세정책이 성공적으로 진행됨으로써 대부분의 이스모스 국가, 아르카디아, 아르고스가 연방 회원국이 되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용맹스런 왕 클레오메네스 3세는 아카이아 연방과의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고, 거의 연방을 붕괴 직전으로 몰아갔다. 이런 사태에 처하게 되자 아라토스는 태도를 바꾸어 마케도니아 왕 안티고노스 3세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말았다.(기원전 225/4년) 그결과 기원전 224년 코린토스는 다시 마케도니아의 수중에 떨어졌다. 한편 안티고노스 3세는 마케도니아 군을 이끌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남하하여 기원전 222년 북부 라코시아의 셀라시아에서 스파르타 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은 거의 전멸하고 클레오메네스 3세는 이집트로 도주하였다(그곳에서 3년 뒤 클레오메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에 대한 반란을 이끌다가 죽고 말았다)

아라토스는 상황에 떠밀려 취한 필사적인 조처였겠지만 주로 마케도니아에 대한 저항정책을 통해 세력이 성장한 아카이아 연방은 이로써 마케도니아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기원전 215년부터 205년까지 일어난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아카이아는 로마와 충돌했으나, 200년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부득이 로마편으로 돌아섰다. 1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간 중 아카이아와 스파르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으나 아카이아의 지도자 필로포이멘의 활약으로 207년 만티네아 전투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였고, 스파르타 왕 마카니다스는 필로포이멘에게 직접 죽임을 당했다. 아카이아 연방은 로마와의 동맹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역을 손에 넣을 정도로 팽창할 수 있었으나, 강제로 연방에 편입된 스파르타는 연방 내에서도 항상 이질적이었다. 결국 연방과 스파르타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이것은 로마의 최후 통첩의 빌미가 되어 단기간의 파국적인 전쟁 끝에 연방은 해체되고 말았다. 146년 로마에 저항한 대가로 코린토스는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아카이아의 역사는 연방제의 이점과 아울러, 아카이아처럼 강력한 연방조차 마케도니아 왕국, 더욱이 로마와 대결하게 되었을 때 절감했던 한계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아르카디아의 메갈로폴리스에서 태어난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아카이아의 시민이자 정치가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그는 아카이아에 우호적이었고 스파르타에 적대적인 편견을 갖고 있었지만(그는 스파르타의 왕들을 참주라는 의미로 tyranos라고 격하시켜 부르고 있다), 연방의 장점에 대한 그의 설명은 어느 정도 아카이아의 지도자들이 가졌던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 많은 사람들이 펠로폰네소스인들을 공동 이익을 위한 단일 정책으로 결속시키려고 노력해 왔다. 하지만 각자 보편적인 자유의 명분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혈안이 되었던 까닭에 아무도 그것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그 목표는 매우 진전되고 성취되어, 펠로폰네소스인들은 하나의 동맹이자 우호적인 공동체를 이루었을 뿐 아니라, 동일한 행정관, 같은 평의회 의원과 배심원들은 물론 동일한 법률, 도량형, 화폐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민들이 울타리를 두른 단 하나의 대피소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만 빼면, 펠로폰네소스 거의 전체가 하나의 도시가 된 셈이다>

이 글은 약간의 과장이 있다. 각각의 도시는 연방법 외에 자체의 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 초, 대략 190년 경부터 연방 화폐가 발행되기 시작할 때까지 각각의 도시는 자체의 주화를 찍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카이아 연방은 기원전 225년 이후 한 명의 장군직, 10명의 연방 관리, 그 밖에 기병지휘관, 비서, 부지휘관과 해군 제독 등 다양한 관직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총회에는 모든 남성 시민들이 참석할 수 있었으며, 통상 업무를 다루기 위해 synodoi로 알려진 집회에서 연간 네 차례 모였다. 그 집회에는 30세 이상의 남성들로 구성되는 평의회와 행정관들도 출석했다. 2세기가 되면, 전쟁이나 동맹, 로마 원로원이 보낸 서찰의 수령같은 문제를 비상 총회에서 다루게 된다. 늘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비상총회는 대개 성년 남성 전체가 참석하되, 표결은 도시 별로 행해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비상총회는 로마가 실력자로 등장하면서 대외 정책이 점차 중요하게 되자 도입된 듯하며, 로마인의 존재가 그리스 국가들 내의 통치 원리와 관행을 변화시켰다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100년 남짓한 기간 동안 아카이아 연방은 그리스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폴리비오스는 그 성공 요인을 자문한 뒤, 이상주의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우연의 소치라고 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중략~~ 이 경우, 그 이유는 대충 다음과 같다. 아카이아인들 사이에서 더 나은 평등, 언론의 자유, 즉 요컨대 민주주의에 더 유리한 정치제도와 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자발적으로 이 제도에 참여하려 하며, 설득과 논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적절한 시기에 강제로 가담했던 자들도 속히 태도를 바꾸어 타협하게 되었다. 처음의 회원들에게 아무런 특전도 주지 않고, 모든 신규 가입자들을 대등하게 대함으로써, 평등과 인도주의라는 두 개의 강력한 요인의 도움을 받아 동맹은 설정했던 목표에 신속히 도달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펠로폰네소스의 지금과 같은 번영의 출발점이자 원인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낙관적인 태도는 연방의 진정한 취약점을 무시하고 있다. 중요 결정이 모든 성년 남성이 참여하는 총회에서 내려졌던 만큼, 아카이아 연방은 정치적으로는 민주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관직들은 몇몇 도시에 근거한 아주 소수의 가문에서 배출되고 있었던 것 같다.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아카이아 연방의 취약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아카이아인들 사이에 소요가 있었다. 도시들은 반란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평민들은 토지 분배와 부채 말소를 바라고 있었다. 또한 도처에서 지도급 인사들은 아라토스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아라토스가 마케도니아인들을 펠로폰네소스에 끌어들인 데 대해 분격했다>

따라서 아카이아 내부의 도시 중에서도 폴리비오스가 주장하는 만큼 연방에 충성스러운 도시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런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왕국들에 둘러싸인 상황 속에서도 아카이아와 아이톨리아 연방국가들은, 그리스인들이 여전히 새로운 정치적 도전에 새로운 해결책으로 대응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만약 로마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연방제는 여러 국면에서 좀더 발전적인 성과가 나타났을 지도 모른다. 연방제는 개개 도시 국가(폴리스)가 지닌 규모와 상대적인 취약성의 한계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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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과는 달리 글이 너무 길어지는 바람에 이렇게 나눠서 쓰게 됐습니다. 특히 읽느라 고생하신 물만두 님께 죄송합니다 (^.^)

 

2. 안티고노스는 코라이오스의 딸인 스트라토니케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었는데, 그 중 첫째가 바로 데메트리오스였다. 둘째는 필리포스인데 젊어서 죽었다. 그러나 다른 설에 의하면, 데메트리오스는 안티고노스의 친아들이 아니라 조카라고도 한다. 데메트리오스의 부친이 젊어서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모친이 뒤에 삼촌인 데메트리오스와 결혼하였다. 그래서 데메트리오스가 안티고노스의 아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데메트리오스의 외모는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얼굴과 몸매가 매우 수려하여 어떤 화가나 조각가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며, 그런 아름다움 속에서도 우아함과 강직성과 위엄이 깃들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여 벗에게 흉허물 없고 상냥했지만 전쟁시에는 놀랄 만한 인내심과 정열을 갖고 용맹을 떨쳤다.

여기서 데메트리오스의 성품을 보여주는 젊은 시절의 예를 보기로 하자.

데메트리오스의 친구 중에 미트리다테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데메트리오스과 동갑으로 안티고노스 왕을 섬기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안티고노스는 잠을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꿈 속에서 그는 드넓과 아름다운 벌판에서 황금빛 씨를 뿌리고 있었다. 씨가 땅에 떨어지지마자 금방 그자리에서 황금빛 곡식의 이삭이 돋아났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자세히 보니, 이상하게도 그 곡식의 이삭은 이미 누가 다 거두어 가고 그자리에는 그루터기만 남아있었다. 안티고노스는 분해서 버럭 화를 내며 근처를 살피는데 어디선가 이상하게도,  "황금빛 곡식은 미트리다테스가 모두 거두어 폰투스로 가져가 버렸다네." 라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꿈을 깬 안티고노스는 꿈 내용이 자꾸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불러 절대로 비밀을 지키라고 먼저 굳게 맹세를 시킨 다음, 그 꿈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리고 안티고노스는 "한시라도 빨리 미트리다테스를 죽여 없애야겠다." 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얼마 후, 미트리다테스가 이런 사정도 모르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데메트리오스에게 놀러왔다. 데메트리오스는 미트리다테스에게 단 한 마디도 말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를 받은 다음,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그러자 데메트리오스는 입을 열지 않고 쥐고 있던 투창 끝으로 그의 눈 앞에다 글씨를 썼다.

'미트리다테스, 도망쳐라!'

미트리다테스는 그 뜻을 금방 알아차리고, 그날 밤으로 멀리 카파도키아로 달아났다. 그런데 그 후 오래지 않아 안티고노스의 꿈은 사실로 드러났다. 미트리다테스는 카파도키아에서 넓디 넓은 기름진 땅을 점령하고, 그의 후손들은 오랫동안 폰투스 왕으로 군림했기 때문이었다. 이 폰투스 왕국은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8대를 이어나갔다.

이번에는 전쟁터에서의 데메트리오스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디아도코이)은 그들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고 영지가 서로 접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언젠가 이집트왕 프톨레마이오스가 키프로스 섬에서 바다를 건너 시리아로 침입하여 농촌을 마구 짓밟고, 도시를 공략하고 있다는 기별이 안티고노스에게 전해졌다.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를 보내 프톨레마이오스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데메트리오스의 나이는 겨우 22세였으며, 이 중요한 싸움에 단독 지휘관으로 처음 출전하게 되었다.

나이도 젋고 경험이 부족했던 그는 다만 왕성한 혈기와 용기만을 믿고, 일찍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에서 싸웠던 단련되고 강한 적군을 향해 돌격해 들어갔다. 그는 가자(Gaza)시 근처의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5천 명이나 되는 전사자를 냈으며, 그의 부하 8천 명은 적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천막과 재물과 노예와 그 밖에 그가 가졌던 모든 물건까지 전부 빼앗겼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포로가 된 장군과 함께 이 모든 물건을 돌려보내 주었다. 그는 이것들을 돌려보낼 때, 우리가 서로 전쟁하는 목적은 오직 명예와 영토 때문이라는 내용이 담긴 무척 너그럽고 공손한 편지를 덧붙여 보냈다.

 데메트리오스는 이 편지와 함께 선물들을 받자, "원하옵건데,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빚을 오랫동안 지지 않고, 저도 하루 속히 그와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는 날이 오도록 해 주소서."라고 남몰래 신에게 기도했다. 이런 난관에 처했을 때 그가 보여주는 태도는 첫번째 전쟁에서 실패를 경험하여 낙담하기 보다는 오히려 백전 노장같았다. 그는 다시 이를 악물로 흩어진 부하를 끌어모으고, 무기고를 가득 채우며, 그 근처의 도시들과 서로 동맹을 맺어 새로운 군대를 훈련시키는 데 온 힘을 다 기울였다. 안티고노스는 아들이 싸움에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어린 아이와 싸워 이겼지만, 다음 번에는 어른과 싸워야만 하리!" 그러나 그는 아들의 기를 죽이지 않기 위해 이번 실수를 회복하겠다는 아들의 청을 받아들여 다음 전투의 지휘권을 다시 맡겼다.

얼마 뒤 프톨레마이오스의 부하 장군인 킬레스가 대군을 거느리고 다시 시리아로 쳐들어왔다. 그는 지난 번 싸움에서 패배한 데메트리오스 정도는 힘도 안 들이고 손쉽게 시리아에서 몰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그의 예상은 단번에 뒤집히고 말았다. 데메트리오스는 갑자기 적을 습격하여 적장과 병사들이 놀랄 틈도 없이 킬레스 장군 이하 7천 명을 포로로 잡고 많은 재물을 확보했다. 그는 대단히 기뻐했다. 그것은 적에게 많은 재물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리품을 적에게 도로 돌려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는 승리의 영광이나 재물을 얻은 것보다도, 그 재물로 앞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서 진 빚을 도로 갚을 수 있게 된 데 대해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혼자만의 생각대로 이 재물을 적에 돌려주려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부친에게 그 까닭을 편지로 적어 보냈다. 그의 편지를 받은 부친으로부터, "네가 획득한 승리의 열매이니, 네 마음대로 하거라." 라는 승락이 떨어지자, 데메트리오스는 킬레스와 그 밖의 적장들에게 값진 선물까지 얹어서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돌려보냈다.  이 싸움에서 패한 프톨레마이오스 군은 어쩔 수 없이 시리아에서 떠나야만 했다. 그 뒤로도 데메트리오스는 나바타이라고 불렸던 아라비아를 공격하였다. 그때 물도 없는 지방에 들어갔다가 죽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는 이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워 끝내 야만족들을 정복한 뒤, 엄청난 전리품과 함께 7백 마리의 낙타를 빼앗아 돌아왔다.

디아도코이들과의 전쟁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데메트리오스는 키프로스를 공격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동생 메넬라오스의 군대를 격파한 데 이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선 프톨레마이오스군에게도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데메트리오스는 180척을 함대를 거느리고 맹렬하게 공격하여 적선 70척을 나포하고, 나머지는 바다에 수장시켰다.  또 메넬라오스는 아예 그의 함대 전체와 1천 2백명의 기병과 1만 2천명의 보병과 함께 항복해 버렸다.  이 승리를 거둔 뒤에 비로소 사람들은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에게 국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안티고노스의 친구들은 서둘러서 그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었고, 안티고노스는 아들 데메트리오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거기에 그를 '데메트리오스 왕'이라고 부른 것은 물론 왕관까지 보냈다. 한편 이 소식이 이집트에 전해지자 이집트인들도 프톨레마이오스를 왕이라 불렀다. 비록 지긴 했다만 자존심만은 잃지 않게 해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케도니아의 지배자 카산드로스를 제외한 나머지 디아도코이들도 저마다 왕이라는 칭호를 쓰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치룬 전쟁 가운데 유명한 것 하나만 더 소개하겠다.

기원전 307년, 안티고노스는 로도스 사람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쟁에서 자기 편에 가담하라고 요구했으나, 로도스 사람들은 이집트와의 무역으로 큰 이익을 얻고 있었기에 그 요구를 거절했다. 그로 인해 2년 후 데메트리오스는 역사상 유명한 로도스 포위공격 작전을 개시했다. 데메트리오스는 4만 명의 병사와 3만 명의 인부, 200척의 전함과 170척의 수송선을 거느리고 왔다. 그의 공성 기계들 중에는 헬레폴리스('도시들의 포획자')라는 별명이 붙은, 쇠뇌(큰 화살이나 돌을 멀리 날릴 수 있는 무기)와 트석기를 잔뜩 실은 거대한 장갑탑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헬레폴리스는 그 웅장한 모습때문에 포위당한 도시의 주민들까지도 성벽으로 기어올라 이를 신기하게 구경하였다고 한다. 언젠가 데메트리오스가 뤼시마코스의 영토인 킬리키아의 솔리를 공격했을 때 원군을 이끌고 온 뤼시마코스는 이 공성 기계들을 보더니 겁을 먹고 그냥 되돌아가 버린 적도 있었다. 옛 기록에 의하면 헬레폴리스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어서 방마다 군사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있고, 앞부분에는 각종 비행 무기를 쏠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고 한다. (영화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에서 오크들이 미나스티리스를 포위공격할 때 사용했던 공성탑과 비슷한 것 같다. 혹은 '에이지 오브 미솔로지'라는 게임에 헬레폴리스가 등장하므로 대강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덕분에 데메트리오스는 폴리오르케테스 즉, '포위 공격자' 혹은 '도시의 공략자'라는 별명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데메트리오스도 호적수를 만났다. 그는 가장 정교한 최신의 공성장비를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1년 후에는 포위를 풀지 않을 수 없었다. 양자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즉, 로도스는 자유도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안티고노스가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를 제외한 어떤 군주와 전쟁을 벌이든간에 항시 안티고노스의 동맹이 되어준다는 조건으로. 헬레니즘 시대를 통틀어 일개 도시국가가 이렇게 자유도시의 지위를 유지한 경우는 로도스를 제외하고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데메트리오스는 로도스 사람들의 용맹함(포위 공격 기간중 로도스의 노예들까지도 성벽에 붙어서 싸웠다고 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공성기계들을 두고 떠났다.  전투현장에는 그때 쇠뇌로 날렸던 커다란 돌덩어리들이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로도스인들은 그 장비들을 비싸게 판 뒤, 그 돈으로 자기네의 수호신인 태양신 헬리오스의 거대한 청동 조각상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로도스의 거상'이다.

데메트리오스는 전쟁이 일어나면 절제하는 생활이 몸에 배여 있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진지하게 전쟁에 임했지만 평화시에는 사치와 낭비, 주흥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노스는 그가 여러 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아들의 이런 사생활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 본보기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데메트리오스가 애인 라미아에게 홀려서 정신을 못차리던 어느 날, 배에서 상륙한 데메트리오스가 언제나처럼 아버지에게 정답게 입을 맞추며 반겼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한다. "그 입맞춤은 라미아로부터 배운 것이냐?"  또 언젠가는 며칠 동안 난봉꾼처럼 생활하고 난 그가, "그동안 심한 설사병에 걸려서 아버님을 뵙지 못했습니다."라고 변명했을 때 , 안티고노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랬었구나. 그래, 너를 설사병으로 시달리게 한 것이 키우스의 술이었느냐? 아니면 타소스의 술이었느냐?"

또 언젠가 안티고노스는 아들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그땜 문 앞에서 젊은 미인 하나와 마주쳤다. 안티고노스느 아들의 방으로 들어가서 침대 곁에 앉아 손을 잡고 아들의 맥을 짚어 보았다.  "열이 겨우 내렸습니다" 아들의 이 말을 들은 안티고노스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무렴, 그렇테지. 마침 문 앞에서 내려가는 것을 만났지." 데메트리오스의 훌륭한 공적 때문에, 안티고노스는 이처럼 관대하게 그를 대했다.(어떻게 보면 비꼬는 것 같기도 하다...)

좀더 쇼킹한 사례로는 데메트리오스가 아테네에서 했던 짓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테네인들이 데메트리오스에게 아부하기 위해 그를 파르테논 신전의 후원에 묵게 했던 일이 있었다. 즉, 아테나 여신과 한 지붕 밑에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데메트리오스는 이런 곳을 태연히 숙소로 삼는 것도 모자라 아테나 여신을 자신의 누님이라 부르며, 여자들을 끌어들여 온갖 추행을 거리낌없이 저질렀다. 차리리 크리시스, 라미아, 데모, 안티키라 따위의 매춘부를 끌어들여 난봉을 부리는 것이 이 장소를 더 신성하게 사용하는 일이라고 할 정도 였다. 더 이상 그의 사생활을 들춰내는 것이 읽는 분들께는 매우 거북할 수 있겠지만 하나만 더 이야기 하겠다.

 아테네에는 다모클레스라는 미소년이 있었는데(별명도 '아름다운 다모클레스'이다), 데메트리오스는 평소에 이 소년에게 대단히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동성애가 오늘날보다 자유로운 편이었다. 플라톤의 '향연'을 읽어보시라...) 그 소년을 꼬시려고 선물을 보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위협까지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소년은 도무지 응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소년은 한결같이 거절하더니 끝내는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전혀 나타나지도 않았으며, 목욕도 혼자 집에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메트리오스는 잔뜩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그가 혼자서 목욕하고 있는 틈에 마침내 소년을 붙잡았다. 주변에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소년은 선뜻 솥뚜껑을 열고 펄펄 끓는 물 속에 첨벙 뛰어들어가 자살하고 말았다.(미인 박명이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입수스 전투에서 안티고노스가 전사하고 데메트리오스는 간신히 도망치는 등 엄청난 불행이 그에게  찾아왔을 때 그는 곤경에 처한 상태였다. 아테네인들이 그를 배신했고, 그리스 내에서 데메트리오스의 평판은 몹시 나빴으며, 각 도시는 전부 적의 수중에 넘어가 있었다. 그는 얼마 안되는 군대를 이끌고 아시아로 건너가 여기 저기를 떠돌며 약탈을 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힘을 회복한 뒤 아테네를 공격하여 다시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전에 데메트리오스를 배신한 적이 있음에도 그는 아테네인들을 용서하여 식량을 나누어 주고, 그들의 환심을 사 아테네를 온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뒤 데메트리오스는 스파르타를 공격하여 만티네아 근처에서 스파르타 왕 아르키다모스를 격파했다.  이어서 스파르타 근처에서 벌어진 두번째 전투에서도 역시 그들을 여지없이 쳐부수었다.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군 200명을 죽이고 5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짧은 시간 안에 데메트리오스처럼 놀랄 만한 운명이 자주 바뀌는 왕은 일찍이 없었다. 작은 일에서 시작하여 큰 일을 이루고 영화를 누리다가도 하루 아침에 붕괴되었으며, 아주 쇠약했던 세력이 또다시 권세를 쥐는 등, 몇 번씩이나 신속하고도 놀랄 만한 변화가 자주 일어났다. 데메트리오스도 자신의 운명이 변화가 심한 것을 두고, 아이스킬로스의 말을 인용해 늘 이렇게 읊었다고 한다.

그대,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웠구나. 우리를 다시 쓰러뜨리기 위해!

한편 마케도니아 왕 카산드로스가 죽자, 마케도니아에 내분이 일어났다. 본래 큰 아들 필리포스가 왕위에 올랐으나 일찍 죽고, 남은 두왕자가 서로 왕위를 두고 다투었다. 그러다가 둘째 왕자 안티파트로스가 어머니인 테살로니카를 죽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셋째 왕자인 알렉산드로스는 에페이로스 왕 퓌로스와 데메트리오스에게 원조를 청했다. 데메트리오스는 즉시 군대를 거느리고 펠로폰네소스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갔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는 데메트리오스의 야망이 큰 것을 보고 생각을 바꾸어 도움이 필요없다고 하며 원조를 거절했다. 이 일로 둘으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잔치를 열어 데메트리오스를 초청한 다음 그를 죽이려고 계획하였다. 그런데 먼저 데메트리오스가 알렉산드로스를 잔치에 초대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나중에 데메트리오스가 자기 초대를 받고 마음놓고 혼자서 자기 진영으로 오게 하려고 자신이 먼저 그의 진영에 갈 때 호위병을 한 명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데메트리오스가 갑자기 식탁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알렉산드로스는 겁을 먹고 펄쩍 뛰어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문 쪽으로 갔다. 데메트리오스는 문을 나가면서 호위병에게 "내 뒤를 따르는 놈을 죽여라!"라고 몰래 지시를 내렸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로스는 손 한 번 써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음을 당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달려온 알렉산드로스의 부하들도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은 죽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의 계획이 우리들보다 꼭 하루가 빨랐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마케도니아 인들은 데메트리오스를 왕으로 모셨다.  이리하여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를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으로 진군하여 테살리아까지 수중에 넣었다. 그는 이미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거의 수중에 넣었고, 메가라와 아테네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보이오티아 지방으로 진군하여 테베를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도 그 유명한 공성 기계 '헬레폴리스'를 사용했으나 그 기계는 지렛대를 써서 겨우 조금씩 움직이는 엄청나게 무겁고 큰 것이어서 적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에도 두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테베군은 용감히 저항하여 한때 데메트리오스도 적의 투창에 목을 다쳐 죽을 뻔했으나 결국 테베를 점령했다.

이후 데메트리오스는 또 한번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의 주위에는 적이 너무 많았다. 에페이로스의 퓌로스와 트라키아의 뤼시마코스,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뿐만 아니라 그의 거만함과 허세 때문에 마케도니아 인들도 데메트리오스를 싫어하였다. 그러지 퓌로스, 뤼시마코스, 프톨레마이오스가 연합해서 데메트리오스를 공격하였다. 자칫 잘못하면 입소스 전투의 재앙이 재현될 수도 있는 위기였다. 게다가 그의 부하들조차도 배신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데메트리오스는 퓌로스와 싸우는 도중에 부하들의 배신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마케도니아는 결국 퓌로스와 뤼시마코스에게 분할되었고, 데메트리오스는 마케도니아 왕이 된 지 7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데메트리오스는 카산드레이아(카산드로스가 세운 도시이다)로 가서 숨었다.(이때 아테네 인들은 또다시 그를 배신했다) 나라를 잃고 또다시 비참한 처지로 몰락하게 되자 그의 부인인 필라는 이 가혹한 운명을 견디지 못하고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고 말았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다시 재기의 굳은 결심을 하고 그리스로 가서 친구와 장교들을 모았다. 정말 쉴새 없이 변화만을 거듭하는 데메트리오스의 운명은 또다시 그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밀었다. 극적으로 다시 일어선 데메트리오스는 다시 군대와 배들을 모아 아시아로 떠났다. 거기서  이오니아 지방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많은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켜 자진해서 항복해왔다. 그러나 행운은 그때까지 뿐이었다. 뤼시마코스의 아들인 아가토클레스가 대군을 이끌고 진격하자 데메트리오스는 우선 프리기아로 후퇴하고 아르메니아로 군대를 이동시킬 계획을 세웠다. 아가토클레스는 직접 싸워서 이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전략을 바꿔 식량 보급로를 끊어 데메트리오스를 곤경에 빠뜨렸다. 게다가 부하들도 자신들을 멀리 아르메니아와 메디아의 끝까지 끌고 가려고 하는 데메트리오스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다. 군대는 굶주림과 싸우며 쫓기다가 리쿠스 강에서 많은 병사들이 물에 떠내려가고 전염병까지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데메트리오스는 할 수 없이 셀레우코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처한 슬픈 운명을 한탄하고, 도움을 주기를 간절히 부탁했다. 셀레우코스는 처음에는 이 편지를 보고 그를 동정하여 충분한 양식을 보급해 주라고 명령했으나 측근인 파트로클레스가 데메트리오스가 위험한 인물이므로 도와줘서는 안된다고 조언을 하는 바람에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이제는 셀레우코스마저 대군을 이끌고 데메트리오스군을 향해 진격했다. 뒤에서는 아가토클레스가 버티고 있고, 앞으로는 셀레우코스가 다가오자 데메트리오스는 절망에 빠져 함정에 빠진 짐승처럼 마구 날뛰고 덤볐다. 이제 데메트리오스는 거침없이 나라 안을 짓밟으며 재물을 빼앗았고, 셀레우코스군과도 몇 번 싸워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특히 낫을 붙인 전차 부대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를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산마루를 지키는 적군도 몰아내고 시리아로 통하는 도로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중대한 시기에 데메트리오스는 운나쁘게도 병에 걸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이 때문에 그는 완전히 파멸의 운명을 맞을 수 밖에 없었다. 부하들 가운데 더러는 적에게 도망치고, 더러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게다가 셀레우코스와 직접 부딪혔을 때 그의 용병 부대가 배신하여 셀레우코스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이제 데메트리오스는 얼마 안되는 부하들과 친구를 데리고 숲 속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는 그 속에서 밤을 기다려 카우투스에 있는 아군 함대로 도망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고개마다 적병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그 마저도 불가능 하였다. 결국 부하 중 하나가 항복하는 길 밖에 없다고 말했다. 데메트리오스는 그 말을 듣고 노여움을 참지 못해 칼을 뽑아들고 그 사람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친구들이 말리는 바람에 행동을 멈추었다. 오히려 친구들이 그 사람이 말한 대로 하는 것이 옳다고 충고했기 때문에 데메트리오스도 마침내 항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셀레우코스는 데메트리오스를 왕으로 대우하여 성대하게 맞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눈치챈 몇몇 신하와 장교를 비롯해서, 나중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데메트리오스에게 먼저 존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떠나자 셀레우코스의 동정심은 이내 시기심으로 변했다. 한편 데메트리오스는 셀레우코스의 친절한 뜻을 듣고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때 별안간 파우사니아스가 근위병들을 이끌고 데메트리오스를 포위하여 그를 셀레우코스에게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케르소네수스로 끌고 가 감금했다. 그러나 그에게 시종과 식량을 충분히 보내 주어 불편이 없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승마와 산책을 할 장소도 제공하고, 숲에서 사냥을 즐길 수 있는 자유도 주었다. 그리고 옛 신하들도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만나게 해 주었다. 셀레우코스도 때때로 편지를 보내 모든 일을 잘 처리해주겠노라고 위로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속지 않았다. 그는 아들 안티고노스 고나타스의 부하들과 아테네와 코린토스에 두고 온 휘하 군대의 장군들에게 몰래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 편지에 쓰기를, 이제 자기의 이름으로 전달되는 편지는 비록 자기 도장을 찍어 보했다고 하더라도 결코 믿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 도시를 부디 잘 지켜 주기 바라며, 아들 안티고노스를 후계자로 삼아 모든 권력을 아들에게 맡긴다고 덧붙여 말했다. 이 편지를 받은 아들은 아버지가 포로로 갇혀 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상복까지 입고, 셀레우코스는 물론 다른 왕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아버지의 석방을 도와다라고 간청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내놓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볼모가 될 생각도 있으니, 아버지만은 제발 석방해 달라고 간청했다. 많은 왕들이 이 효성어린 편지를 보고 그를 지지해 주었으나 뤼시마코스만은 셀레우코스에게 데메트리오스를 죽인다면 많은 사례금을 보내겠다고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늘 뤼시마코스를 미워하고 있던 셀레우코스는 한층 더 그를 야만인으로 생각하였다.

처음에는 데메트리오스도 이 불우한 생활을 잘 참았다. 얼마 후에는 그런 새활에 익숙해지고 계속해서 그 생활을 하는 동안에 기분도 풀려 운동도 하고, 때로는 정해진 범위 안에서 사냥도 하고 승마도 하면서 모든 고통을 견디었다.  그러나 점점 이런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술과 주사위 놀이에 빠져 지냈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때는 자꾸만 현재의 딱한 처지가 생각나서 더욱 더 술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지금 이런 생활이야말로 오랜 전부터 내가 하고 싶어하고 원했던 정말로 행복한 생활이다. 지금까지 나는 어리석게도 허황된 야심에 사로잡혀 이런 새활을 누리지 못했다. 대체로 야심이란 것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몹시 괴롭히는 일밖에 안된다. 무기와 함대와 군대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해 온 최고의 선을 나는 뜻밖에도 이 게으름과 한가함과 휴식 가운데서 발견해 낸 것이다."

데메트리오스는 케르소네수스에서 이 같은 감금 생활을 지내는 동안 운동 부족과 술 때문에 병에 걸려, 마침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가 죽자 셀레우코스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그 자신도 데메트리오스를 시기한 데 대해 뼈저리게 뉘우쳤다. 아들 안티고노스는 아버지의 유골이 시리아로부터 온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전 함대를 이끌고 부근의 섬으로 마중을 나갔다. 여기서 셀레우코스가 금 항아리에 담아 보낸 부친의 유골을 받아 자신이 이끌고 온 가장 큰 배에 모셨다. 그리하여 그 배가 도중에 닿는 곳마다 시민들이 나와 그 영전에 꽃을 바치고 장례식에 참석할 대표단을 보냈다. 이윽고 함대가 코린토스 항구에 닿자, 자줏빛 헝겊으로 덮은 유골 항아리와 그 위에 얹은 왕관이 갑판 높은 곳에 보였다. 그리고는 한떼의 청년들이 그것을 받아서 뭍에 올랐다. 그 곁에는 당시 이름난 음악가인 크세노판투스가 피리로 장엄한 가락을 불고 있었다.  이때 노꾼들의 노젓는 소리가 마치 상여꾼의 노랫소리 같아 안티고노스는 고개를 숙인채 눈물을 흘리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모두 한결같이 슬픔에 잠겼다. 데메트리오스의 유골은 일찍이 데메트리오스의 이름을 따서 붙인 도시인 데메트리아스로 옮겨졌다.

그 뒤의 일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안티고노스 고나타스가 마침내 기회를 틈타 마케도니아를 점령하여 왕이 됨으로써 마케도니아에 안티고노스 왕조가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이어오다가 페르세오스 대에 이르러 로마인에게 정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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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4-07-10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다 썼다!!

물만두 2004-07-10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어요...


꼬마요정 2004-07-10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명의 삶을 혼자 다 살았네요~ 좋은 이야기 감사합니다.^^*
 

 제 닉네임이기도 한 데메트리오스는 헬레니즘 시대 초기 마케도니아의 왕으로서 한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유산이기도 한 헬레니즘 세계 전체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었습니다. 아버지 안티고노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과의 싸움에 적극 가담하였으며, 일생을 전쟁 속에서 보내며 영광과 몰락을 거듭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우선 데메트리오스의 일생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 후 그에 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1.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젊은 나이에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였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도 북서부까지 진격한 후 돌아오는 길에 바빌론에서 사망하였다(기원전 323년 6월 13일, 앞으로 나오는 연도는 모두 기원전)) 처음에는 독살이라는 소문이 돌았으나 오늘날에는 말라리아로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망할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33세였으며, 왕위에 오른지 13년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죽으면서 아드리아 해에서 펀자브, 타지키스탄에서 리비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은 느슨하였고, 대왕이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의 후계자가 누가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간질병이 있는 이복 형제 이외에는 다른 직계후손이 없었다. 사실은 그와 결혼했던 박트리아 태수의 딸인 록사네는 임신중이었으므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은 왕의 이복형제인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와 (록사네의 자식이 아들이라면) 알렉산드로스의 유복자를 왕으로 옹립하기로 타협했다. 그러나 실권은 어디까지나 기세등등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의 손에 있었다.  페르디카스, 안티파트로스, 셀레우코스,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등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군들은  제국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기 시작했다. 이들 장군들을 디아도코이(후계왕)라 부른다. 디아도코이들의 싸움 와중에서 필리포스 아리다이오스(필리포스 3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어머니인 올림피아스에게 살해되었다. 또 알렉산드로스 4세(대왕의 유복자)와 그의 어머니 록사네 그리고 올림피아스는 안티파트로스의 아들이자 사실상 마케도니아의 지배자였던 카산드로스에게 살해됨으로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계는 단절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유산은 이제 디아도코이들의 수중에 있었다. 

데메트리오스의 아버지인 안티고노스는 유력한 디아도코이 중 하나로 대 프리기아, 뤼키아, 팜필리아를 포함한 소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사람으로 매우 야심이 큰 사람이었다. 다른 후계왕들과 달리 안티고노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전체의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며 죽을 때까지 결코 그 야심을 버리지 못했다. 한때 안티고노스는 경쟁자인 에우메네스를 제거하고  이란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다른 왕들은 그를 공동의 적으로 삼아 동맹을 맺었다. 안티고노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자 카산드로스와 13년 간에 걸친 전쟁을 벌였고, 동시에 이집트의 지배자 프톨레마이오스와도 전쟁을 벌였다. 전쟁 과정이 지지부진하자 후계왕들은 평화조약을 맺기도 했으나 어디까지나 그건 일시적인 휴전에 불과했다.  안티고노스는 다시 전쟁을 일으켜 이번에는 셀레우코스와 대결했다. 그것은 셀레우코스가 안티고노스가 프톨레마이오스와 싸우는 틈을 타 바빌론을 차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안티고노스가 패배하여 이란을 셀레우코스에게 넘겨주었고, 그후 셀레우코스는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타와 전쟁을 벌였다.  전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안티고노스는 다시 프톨레마이오스와 전쟁을 벌여 키프로스 섬을 두고 전투를 벌였다. 이 싸움에서 데메트리오스는 맹활약을 했다. 그는 키프로스에서 우선 프톨레마이오스의 동생인 메넬라오스의 군대를 격파한데 이어 원군을 이끌고 온 프톨레마이오스 마저도 꺾었다. 데메트리오스는 키프로스에서의 승리에 이어 역사상 유명한 로도스 포위 공격을 감행했다. 로도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관계였기 때문이다. 공성전을 1년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도시를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해 데메트리오스가 실전 배치한 공성무기들로 유명해졌다. 그 덕분에 데메트리오스는 폴리오르케테스(Poliorketes), 즉 '포위공격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본래부터 오만하며 적을 가벼이 여겼던 안티고노스는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카산드로스, 뤼시마코스(트라키아의 지배자), 셀레우코스가 연합하여 안티고노스를 공격했다.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어쩔수 없이 병력을 모아 소아시아의 입소스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크게 패배하였다. 이 싸움에서 안티고노스는 전사했고,  데메트리오스는 도망치고 말았다. 뤼시마코스는 소아시아 대부분을 차지했고, 팔레스타인에서 독자적으로 군사행동을 한 프톨레마이오스는 시리아를 점령했다. 한편 데메트리오스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재기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카산드로스가 죽은 후 내분이 일어난 마케도니아에 개입하여 카산드로스의 후계자를 제거하고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후계왕들은 계속해서 데메트리오스를 압박했다. 289년부터 그의 입지가 약해지기 시작하여 프톨레마이오스가 에게 해의 영토들과 아테네를 점령했고, 뤼시마코스와 퓌로스(에페이로스의 왕)의 연합군이 데메트리오스를 마케도니아에서 쫓아냈다.  다시 한번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데메트리오스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뤼시마코스의 영토인 소아시아를 공격했으나 뤼시마코스의 아들인 아가토클레스가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보급로를 차단당한 데메트리오스는 군대를 이끌고 떠돌다가 셀레우코스에게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285년) 그리고 2년 후 실의에 빠진 데메트리오스는 운동부족과 과음으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후 여러 왕국들의 세력 구도는 급격히 변화했다. 뤼시마코스의 왕국에 내분이 일어나 뤼시마코스가 아들인 아가토클레스를 죽였고, 그러자 그의 미망인인 뤼산드라와 그녀의 남매간인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그 남매는 바로 이집트왕 프톨레마이오스의 자식들이다)가 셀레우코스를 부추겨 뤼시마코스를 공격하게 했다. 282년 셀레우코스는 소아시아를 침공했고, 그 이듬해 초 뤼시마코스는 코루페디온 전투에서 셀레우코스에게 패해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셀레우코스가 유럽으로 건너가자마자,  케라우노스는 셀레우코스를 암살한 다음 마케도니아의 왕위를 차지했다.  한편 데메트리오스의 아들인 안티고노스 고나타스는 그리스 본토의 칼키스, 코린토스, 데메트리아스(데메트리오스가 건설한 도시다)를 거점 삼아 근근히 버티고 있었다.  때마침 그리스에 갈리아인들이 쳐들어와 그리스는 혼란 속에 빠져있었는데, 이를 기회로 삼아 안티고노스 고나타스는 276년 뤼시마케이아에서 갈리아인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헬레니즘 시대의 3대 왕국인 마케도니아(안티고노스 왕조), 시리아(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안티고노스의 후손들이 대대로 통치하다가 168년 마지막 왕 페르세오스가 퓌드나 전투에서 로마에게 패배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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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4-07-09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메트리오스의 개인적인 일대기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물만두 2004-07-0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꼬마요정 2004-07-09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치 중세시대 체자레 보르자의 삶을 보는 듯 하네요~^^
데메트이오스의 일대기 기대되는걸요~~ㅅ.ㅅ

데메트리오스 2004-07-09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체사레 보르자와 비슷한 점이 꽤 있네요. 가령 아버지 빽(?)이라든가...
 

대학교 교양 과목인 '서양 문화사'의 과제로 쓴 글입니다. 주제가 자유라서 전쟁사에 관한 것을 한번 써봤습니다.

제목은 '17세기 유럽의 군사 혁명과 근대 유럽의 형성'입니다. 며칠 만에 후다닥 해

치운 것이라서 인용문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제 시각이 드러나도록

재구성했고, 읽다 보시면 제 주장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짜깁기만 하진 않았어요!) 





17세기 유럽의 군사 혁명과 근대 유럽의 형성


목차

서 론
본 론
1. 군사 혁명 이전의 유럽의 군대
① 30년 전쟁과 용병
② 군사 혁명의 가능성 - 구스타프 아돌프와 스웨덴 군
2. 프랑스의 군사혁명
① 관료제의 확립과 군대 개혁
② 루이 14세 치세기의 프랑스 군의 발전
3. 군사혁명의 성과와 유럽에 끼친 영향
결 론




서 론
1611년,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은 "현세(現世)의 해부"를 발표하여 전통적인 질서가 붕괴되어가는 당대의 세태를 읊었다.

새 학문은 모든 것을 회의의 심연으로 던지고
화기(火氣)의 요소는 완전히 사라졌다.
태양이 상실되고 지구가 상실되어 인간의 지혜는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알지 못하는구나.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세계에는 싫증을 느꼈다고
염치없이 말하며
행성에로, 허공에로
실로 많은 것을 찾으러 간다.

이 시의 내용을 보면 한편으로는 낡은 질서의 파괴로 인한 당황스러움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은 무한한 창조력을 갖춘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동시에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과학과 철학의 새로운 사상에 의해 전통적인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신조가 사라졌고, 종교개혁으로 인한 소용돌이는 여전히 유럽 내의 종교 갈등을 야기시켰다. 사태를 한층 혼란케 한 것은 새 제도, 새 신조, 새 이론이 생겨나 그것이 낡은 것과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봉건제 자체는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봉건귀족은 집요하게 전통적인 특권을 고집하고 있었다. 시민 계층이 점점 세력이 커져 도처에서 옛 귀족의 특권을 잠식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또 지구 중심의 낡은 우주관 - 2세기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장한 천동설 - 은 혹독한 비판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대로 천체가 운행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종교, 국가, 과학, 그리고 사상에서 기존의 권위가 흔들리면서 생긴 균열은 마치 유럽이 여러 세계로 나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투쟁의 이면에는 창조가 있었다. 긴장과 투쟁, 폭력과 소요가 유럽의 뒤흔들었지만 이런 거대한 장애를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질서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17세기 중엽, 영국인 제임스 해링턴(James Harringt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병상에서 뒹굴고 몸부림치고 있다면 그 결말이 죽음 아니면 회복이라는 것을 인식하라……프랑스, 이탈리아, 에스파니아 중 어느 나라가 앓고 있지 않고 부패하지 않았다면 이윽고 이 나라들은 한결같이 건전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병자는 건전한 자를 당해낼 수 없고 건전한 자는 병을 고치지 않는 한 건강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나라들 중 맨처음으로 옛날의 그 건전한 분별력을 되찾는 나라는(그것은 ……내 생각으로는 프랑스이지만), 반드시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나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예언은 상당히 정확했다. 실제로 프랑스는 17세기 동안에 최초로 정치적 질환 - 1561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종교전쟁 - 에서 회복되어 유럽을 지배할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 시기 루이 14세에 의해 창조된 프랑스는 절대주의라는 새로운 정치질서 위에 구축되어 강대국이 된 것이다.
절대주의 체제는 정치·사회의 중앙집권을 추구하여 부국강병의 강대국을 이룩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시기 유럽 각국은 제각기 국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국가 내부의 역량을 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렇듯 국력을 극대화시키려는 국가 간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국가 간의 전쟁을 불러 일으켰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항상 있어온 것이지만 17세기 절대주의 시대 유럽 주요 열강의 대국화 경향은 이전과 달리 국가 간의 전쟁이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런 추세는 절대주의 국가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기구로 변모하게 했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스웨덴으로부터 사보이에 이르기까지 여러 나라들이 매년 지출한 돈은 다른 무엇보다도 전쟁 준비나 전쟁 수행에 바쳐졌다. 예를 들어 루이 14세는 국가 수입의 75%를 군사부문에 지출했고, 내전기(청교도 혁명)의 영국의 지도자인 크롬웰은 무려 90%를 군대에 할당했다. 17세기 후반기에 신흥 강대국으로 떠오른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수입의 85%를 지출했다. 심지어 한 세기 후인 평화스러웠던 1789년 직전에도 프랑스 재무총감 네케르에 의하면 프랑스의 수입 중 3분의 2가 여전히 군대에 할당되었다고 한다. 평화는 절대주의가 유럽에서 지배적이었던 동안에는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17세기에 국가간의 대규모 전쟁이 없이 지나간 해는 단지 몇 년 정도에 불과했다. 잦은 전쟁은 군사 분야의 혁신을 자극하는 법이다. 17세기의 유럽은 시종 전쟁이 그칠 날이 별로 없었던 상황에서 군사분야의 커다란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것은 단지 무기나 전술의 발전뿐만이 아니라 군사와 관련된 분야 전체에 걸친 것이었다. 이 때의 군사분야의 발전은 유럽 내부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 장차 유럽이 무력을 앞세워 전세계로 식민지를 확장시킨 제국주의 추구의 기반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소위 '군사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17세기 유럽의 군사분야의 발전을 당대의 절대주의 체제와 함께 군사 혁명이 처음 시작된 프랑스를 대상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또, 군사혁명으로 인한 성과가 프랑스와 그리고 유럽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해서도 알아볼 것이다.

1. 군사 혁명 이전의 유럽의 군대

① 30년 전쟁과 용병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 동안 독일을 무대로 벌어진 30년 전쟁은 독일 역사상 가장 비참한 사건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신성로마제국의 제위를 둘러싼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 속에서 시작된 전쟁은 결국 유럽의 강대국 간의 대규모 전쟁으로 커졌다. 즉,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The Elector Pfalz, Friedrich Ⅴ)와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Ⅱ)와의 싸움이 결국 한편에 프랑스와 스웨덴, 다른편에 에스파니아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가 서서 독일을 무대로 한 국제전이 된 것이다. 어느 한 편도 분명한 우위를 차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1644년부터 48년까지 베스트팔렌에 있는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 두 도시에서 4년에 걸친 평화 협상 끝에 수십 년에 걸친 전쟁은 마침내 끝났다. 하지만 수십 년간의 전쟁의 무대가 된 독일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독일의 무수한 영방국가들이 독립국으로 인정받음으로써 독일의 통일은 불가능해졌고, 그 때문에 외국의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전쟁 기간 동안에 독일인들은 카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이든 말할 수 없을 만큼 혹독한 공포와 기아에 시달리고, 국토가 폐허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독일 인구는 3분의 1정도인 8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지방에 따라서는 주민의 절반 가까이나 잃은 곳도 있었다. 전쟁의 발단이 된 보헤미아는 1618년 전쟁이 시작될 때는 20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으나, 1648년에는 70만 명으로 줄었다. 전쟁 동안 독일을 여지없이 피폐하게 만든 것은 기아와 질병의 타격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떼를 지어 약탈하고 다닌 용병들이었다. 30년 전쟁동안 용병대는 마치 메뚜기떼처럼 중부 유럽의 도시와 농촌을 덮쳤다. 약탈, 고문, 살인이 마구 자행되었고, 농촌은 불모지가 되었으며,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30년 전쟁도 끝나갈 무렵엔 농민들은 토지를 끊임없이 군대에게 짓밟혔기 때문에 수확물을 거두어 들인다든가 씨를 뿌릴 기력도 잃고 있었다. 적과 아군의 어느쪽 군복을 입고 있는 군대가 출현한다는 것은 재난을 뜻했다. 알자스의 어느 마을 주민들은 이렇게 투덜대었다. "지금까지 파란 군복과 빨간 군복의 군대에게 혼이 났다. 이번에는 노란 군복의 군대가 나타난다. 오오! 신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시대의 전쟁은 사실상 전쟁 장사꾼인 용병대장의 일로 되어있었다. 당시의 유럽 각국은 상비군을 편성하고 유지해 갈 제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용병대장들은 최고의 보수를 지불하는 자에게 고용되어 전쟁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군대에 가담한 사람들은 유럽 전역에서 모인 억센 직업적 병사, 무법자, 모험가여서 그들이 급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고용되어 갔다. 그들의 일은 살인이었고, 따라서 상대가 프랑스인이건 영국이이건 독일인이건, 또 카톨릭이건 루터파건 칼뱅파건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포로가 되면 그대로 상대방의 군대에 들어가는 일도 흔했다. 급료를 받지 못하면 탈영하고 식량 보급이 안되면 약탈을 일삼았다. 충성심 따위는 털끝만큼도 없고 언어와 국적은 가지각색이고 대의(大義)를 위해 몸을 바칠 생각 따위는 애당초 없었다. 이러한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에서는 군율을 유지하기도 쉽지 않았다. 게다가 각 군대는 그들 뒤를 따라다니는 종자(從者), 가족, 군인 상대의 상인, 매춘부 등 직접 군대에 가담하지 않는 비전투원까지 잔뜩 안게 되었기 때문에 군의 통할(統轄)은 한층 더 어려웠다. 전쟁 당시 합스부르크가에 고용된 어떤 군대에서는 매주 6~7명의 아기가 태어났다고 한다. 2만 5,000명의 병사로 구성된 군대는 적어도 5만 명의 비전투원을 데리고 다녔다고 추정된다. 군대 내의 남녀나 어린이들은 말하자면 유랑민이었고 그 생활은 전적으로 군대에, 즉 그 사령관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군대에 지불할 자금이 조달되지 않을 때는 고용주인 왕후는 말할 것도 없고 대장조차도 병사들의 잔학한 행위를 억제할 수 없었다. 30년 전쟁 당시 프리드리히 5세의 용병대장인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가 주군을 져버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용병)도 말도 안개를 먹고 살아갈 수는 없다. 무기든 옷이든 그들의 소지품은 모두 바닥이 났고 또 낡고 망가졌다. 지금 그것들을 사려면 앞서는 것은 돈이다. 그 돈을 받을 수 없다면 그들은 누구의 것이든 가리지를 않고 닥치는 대로 탈취하는 수 밖에 없다. 문이 일단 그들 앞에 열리면 그들은 자유의 대지로 떨쳐 나선다.…… 상대가 어떤 신분이든 사양하지 않는다. 교회당이든 제단(祭壇)이든, 무덤이든 성묘(聖墓)든, 존귀한 장소이든 또 거기에 잠자는 유해든, 그들은 일체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렇듯 용병들은 거칠고 잔인한데다 충성심도 전혀 없는 질적으로 수준이 낮은 군대였다. 이런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는 제대로 통제하는 것도 어려웠다. 16세기 피렌체의 정치 사상가인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서인 <군주론>에서 용병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

"용병을 이용하여 국가를 유지하려는 군주는 결코 견실하지도 안전하지도 못하다. 왜냐하면 용병은 서로 반목하고 야심적이며 반항적이고 배신적이기 때문이다. 자기편들 사이에서는 용감하나 적 앞에서는 비겁하고 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며, 사람에 대한 신의가 없다. 따라서 군주들은 공격을 당하면 패배하게 된다. 그러므로 평화시에는 그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전시에는 적에 의해 약탈당한다."

또 그는 용병대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평을 했다.

"용병대장 중에는 유능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만일 유능한 자라면 신용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군주를 억압하거나 군주의 뜻에 반하여 다른 나라를 억압하면서 항상 그들 자신의 세력 강화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용병대장이 무능한 자라면 당신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한 세기 전의 말이지만 용병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는 옳았다. 30년 전쟁 초반에 만스펠트 군의 이탈로 프리드리히의 세력은 기울었고, 결국 1620년 11월 8일 프라하 교외의 바이서베르크의 전투에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바이에른 공 막시밀리안의 카톨릭 동맹군에게 패배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왕비와 함께 네덜란드로 도망가 재기를 노렸지만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채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페르디난트 2세의 군대도 역시 용병이 포함되어 있었다. 황제군의 용병대장인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Albrecht von Wallenstein)은 유능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탐욕스럽고 야심적인 그는 황제의 명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다는 것을 구실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군대를 배경으로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용병들은 실제로 전쟁에서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② 군사 혁명의 가능성 - 구스타프 아돌프와 스웨덴 군
30년 전쟁 초기 페르디난트 2세가 프리드리히 5세를 누르고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전쟁은 일찍 끝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마후 신교 국가인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4세가 프로테스탄트 옹호의 기치를 들고 군대를 일으킴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게다가 프로테스탄트인 영국 국왕 제임스 1세가 만스펠트를 기용하여 군대를 파견하였으므로 전쟁은 점차 국제전의 양상을 뛰게 되었다. 하지만 1626년 4월 25일, 만스펠트군은 엘베 강변의 데사우에서 발렌슈타인군과 싸워 패전함으로써 영국은 전쟁에서 탈락했고, 덴마크왕 크리스티안의 군대도 독일 중부의 루테르에서 막시밀리안의 카톨릭 동맹군과의 전투에서 완패했다. 1629년 페르디난트 2세는 덴마크와 뤼벡 조약을 체결하여, 덴마크가 전쟁에서 발을 뺐다. 하지만 1630년 또 하나의 외국 군대가 다시 독일로 진격했는데, 바로 구스타프 아돌프 2세(Gustav Adolf)가 이끄는 스웨덴 군이었다. 이 스웨덴군은 30년 전쟁 초기 거의 유일했던 군대다운 군대였다.
1630년 구스타프 아돌프는 36세였다. 그는 17세에 왕이 되었고, 즉위한 이후 덴마크, 폴란드, 러시아와 수차례 전쟁을 치르며 적국들이 발트 해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그는 당대에 보기드문 군인으로 조직과 훈련, 전술에 밝았으며, 창의력이 풍부했다. 구스타프의 업적은 행정과 조직에 대한 통찰을 토대로 하고 있었다. 스웨덴은 적들의 연합 군대와 충분히 맞설 만큼 대규모 용병부대를 끌어모을 만한 자금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구스타프는 강제징집제도를 도입했고, 결국 국가가 양성하고 급여를 주는 최초의 국민군(National army)을 창설했다. 그는 성직자와 지방판사를 모집책으로 활용하여 4만 명 이상의 신병을 모집했다. 그 신병들은 '사지가 튼튼한 18세에서 30세 사이의 어느 모로 보나 용감한' 스웨덴인이었다. 수송이나 군수픔 제조 따위에 종사하는 '예비역 직업'의 노동자들은 군복무가 면제되었다. 일부 병사들은 토지를 받거나 세금감면 혜택을 받았다. 경제적인 측면과는 별도로 그 군대는 기본적으로 국민군 성격을 유지했고, 그 결과 주로 용병으로 구성된 적보다 사기가 훨씬 드높았다.
구성과 장비에 있어서 스웨덴 군은 다른 유럽 군대와 달랐는데, 그 차이는 구스타프의 전술개념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주된 차이점은 바로 화력과 기동성을 대단히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는 머스킷(musket)을 주무기로 삼아 창병보다 머스킷 병을 대폭 늘렸다. 동시에 그는 보다 작은 단위의 부대와 하부 부대를 창설했다. 그래서 한 중대(company)는 머스킷 병 72명과 창병 54명으로 구성되었다. 4개 중대가 한 대대(battalion)를 8개 대대가 한 연대(reiment)를 2∼4개 연대가 한 여단(brigade)를 이루었다. 머스킷이 짧고 가벼워졌으므로 부대장비(사격시 총을 올려놓는 받침대 - 옛날의 총은 무거웠으므로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발사해야 했다)가 불필요해졌으며, 장전훈련이 간편해졌고, 바퀴식 발사장치와 도화지(paper cartridge)를 표준장비로 삼았다. 창(pike)은 약 4.9미터에서 3.4미터로 짧아졌고 무장은 간편해졌다. 기병은 피스톨과 칼로 무장한 흉갑기병(cuirassier)과 머스킷으로 무장한 드라군(dragoon)으로 구성되었다.
구스타프는 야포(야전시 사용하는 대포)의 중요성을 인식한 최초의 지휘관으로 야포부대를 3번째로 중요한 주력 부대로 육성했다. 1630년 약관 27세였던 뛰어난 포병장군 토르스텐손(Torstensson)이 구스타프를 보좌했다. 야포는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 더 짧아졌고, 더 가벼워졌다. 한편 포위공격용 대포도 구경이 좁아지고 표준화되었다. 구스타프는 민간인 전문가로 구성된 공병부대도 갖추었고 필요할 때마다 소집했다. 이리하여 구스타프의 군대는 과학기술을 전쟁과 면밀하게 연계시켰고, 표준방비에 지도와 쌍안경 등 새로운 보조품을 포함시켰다.
신병의 기강을 잡고 전투력을 키우기 위해 그리고 계속적인 군사훈련을 위해 교련이 실시되었다. 여러 작은 단위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에는 당연히 장교들의 수가 많아졌고, 과거보다 장교의 중요성도 높아졌으며, 계급과 계급조직이라는 개념이 자리잡게 되었다. 군대는 공격적인 개인들의 집단이나 야만스러운 무리가 아니라, 상부의 명령에 반응하는 복잡한 유기체로 보였다. 고참 장교들은 과학과 지리, 심지어 외교에 대한 지식을 갖춰야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17세기 유럽에는 여러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되었다. 구스타프는 효율성을 중요하게 보았으며, 장교들을 능력에 따라 승진시켰다. 한편 하사관들의 책임과 지휘권은 유례 없이 강화되었는데, 이는 로마 시대 이후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 이제 전술에 있어서 유연한 작전행동과 일사분란한 사격과 기율이 요구되었으며, 이를 위해 필수적으로 훈련이 요구되었다. 또 군복과 견장이 도입됨으로써 군대 내의 동질성이 높아졌으며, 이런 조치는 사기와 단결력을 북돋웠다. 구스타프는 자신이 직접 쓴 <군율 The Articles of War>에서 음주와 매춘 그리고 신성모독을 금지시키고 있다. 병사의 작은 과실에 대한 처벌은 인간적이었고, 체형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약탈과 강간, '신성한 군복무를 멸시하는 행위'에는 사형을 언도했다. 예배 집회가 정기적으로 있었는데, 그것은 교화 효과를 노리기 위한 것이었다.
군대의 규모가 커지고 전략 범위가 넓어지자 보다 기업적인 차원의 병참부를 조직해야 했다. 무기가 표준화됨으로써 과거처럼 병사들이 개인적으로 무기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일과적으로 무기조달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구스타프는 합리적인 징병제도를 마련했으며 여러 지역에 군수품 창고를 마련했다. 또 원칙적으로 군대를 요새화된 진지에 숙영시켰다. 이러한 개혁은 불필요한 낭비와 잔혹행위를 근절시켰다. 사실 전쟁터에서 스웨덴 군인들 역시 적을 응징하기 위해 약탈, 강간, 살인 등을 자행하기도 하였으나 용병들과는 달리 그것은 병사의 의사라기 보다는 왕의 명령에 의해 하는 것이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병사들이 약탈을 하러 병영을 떠나기도 하고, 알아서 숙소를 찾아야 할 때도 있었으나 스웨덴의 군 제도는 군사행정에 있어서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이었다. 구스타프는 의료체계에도 값진 혁신을 단행했다. 그는 각 연대에 한 명씩 군의(軍醫)를 배치했고, 군병원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전리품의 10분의 1을 할당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구스타프의 개혁은 혁신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을 응용하는 개념과 효율적인 군제도와 병사의 기강과 숙련도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것이었다. 1630년 카톨릭과 합스부르크가의 세력이 한창일 때 구스타프는 군대를 이끌고 북부 독일에 상륙함으로써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프로테스탄트를 보호한다는 명분과 함께 발트해로부터 적 위협을 제거하고 발트해를 스웨덴의 호수로 만들겠다는 야심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는 넓은 독일땅에서 전쟁을 하면 비록 적은 군대를 거느리고도 적의 허점을 공격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비록 적의 숫자가 많기는 하지만 지켜야 할 땅이 넓은 데다가 적 전투력은 두려워 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작 독일 내에서 프로테스탄트를 지지하는 귀족들이 겁이 많고 비관적이어서 구스타프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1631년 9월 구스타프의 스웨덴 군은 라이프치히 북쪽 8킬로미터 떨어진 브라이텐펠트에서 틸리(Tilly)가 지휘하는 황제군을 격파했다. 총병과 창병을 절묘하게 결합한 구스타프 군대는 마치 과거의 로마 군단과 같은 유연한 대형을 유지함으로써 밀집 대형의 황제군을 무찌른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 전투는 30년 전쟁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루었고 북부와 서부 독일에 대한 예수회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막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632년 봄 구스타프는 레흐 강 근처에서 다시 한번 틸리의 군대를 격퇴시켰고, 이 전투에서 틸리도 전사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해임했던 발렌슈타인을 다시 불러들여 구스타프에 대항하게 했다. 유능한 용병대장인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군과의 일전을 피하면서 스웨덴의 보급로를 차단시키려고 했다. 구스타프로서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리저리 노력하다가 마침내 발렌슈타인을 전투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632년 뤼첸에서 스웨덴군은 발렌슈타인의 군대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구스타프가 전사했기 때문에 스웨덴으로써는 오히려 더욱 큰 피해를 입은 셈이었다. 뤼첸 전투 이후 30년 전쟁에서 스웨덴의 군사적 주도권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개혁의 성과도 구스타프가 살아있을 때에 비해 미미해졌다. 그것은 구스타프의 개혁이 전적으로 그 자신의 역량에 의지한 것이라는 한계를 갖고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구스타프의 개혁은 이제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날 거대한 군사혁명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2. 프랑스의 군사혁명

① 관료제의 확립과 군대 개혁
30년 전쟁은 유럽의 여러 군주와 정치가들에게 분명한 교훈을 주었다. 신성로마제국과 같이 다분히 관념적이고, 경계도 불분명한 나라가 어떤 상황을 맞게 되었는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신성로마제국을 분열시킨 몇몇 요인은 많은 적든 다른 나라들에도 존재하는 것이었다. 자기들 특유의 신앙을 끝까지 지킬 결의를 굳히고 기회만 있으면 그 신앙을 남에게 강요하려는 종교 세력은 어느 나라에나 있었다. 모든 나라의 크고 작은 귀족은 전통적 특권을 위협하는 왕권과 싸우고 있었다. 또 어느 나라에서나 자치 도시와 자치령은 중앙 집권화의 어떤 시도에 대해서도 자기들의 유서 깊은 권리를 지켜 나가려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분열을 야기시킬 수도 있는 이런 강력한 세력들이 득실거리는 나라들에 질서와 국민적 통합을 기대하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질서와 국민적 통합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17세기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지상권위(至上權威)에 권력을 집중시켜야 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토머스 홉스가 말한 지상의 힘, 즉 '거대한 리바이어던(the great Leviathon)'이라고 부른 새로운 합리적 정치 질서를 군림시키는 일이었다. 물론 17세기에는 영국의 입헌 군주제처럼 다른 형태의 국가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론상으로도 또 실제적으로도 절대주의는 이 시대에 나타난 질서의 문제를 가장 명쾌하게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정치체제였다. 전거가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프랑스 왕 루이 14세가 한 말 중 가장 유명한 "짐이 곧 국가이다"라는 말은 절대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7세기의 절대군주들 가운데 가장 강력했으며 그의 치세에서 프랑스는 유럽 최강대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 '군사혁명'은 절대주의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면 프랑스의 절대주의가 어떻게 군사혁명에 영향을 미쳤을까? 앞서 언급했듯이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때는 놀라울 정도로 드물다. 특히 17세기 유럽의 주요 열강들이 대국화되는 추세에서 영토전쟁은 필연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의 성격은 달라지게 되었다. 또한 30년 전쟁을 끝으로 종교를 대상으로 한 전쟁이 종결되면서 이제 전쟁은 국가의 이익에 보다 철저하게 된 것도 전쟁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절대주의 체제는 당시 루이 14세에 의해 확립된 관료제도를 통해 변화하고 있던 전쟁의 추세에 대응하였다. 절대주의 체제에서 관료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어떤 조직보다도 상하관계가 뚜렷하고, 업무의 구분이 분명한 조직인 관료제는 역시 상하관계와 지휘계통이 분명한 군대의 개혁에서도 능력을 발휘하였다. 예를 들면 자금, 장비, 병사의 원활한 충원과 화약과 총포류의 구경을 표준화하기 위한 무기독점은 정부의 주축인 관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게다가 관료들 중에는 군사분야에 뛰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본래 군대는 상하관계가 뚜렷한 조직이다. 그러나 17세기에 있어서는 정규 지휘계통같은 실로 단순한 제도조차도 혁신적인 것으로 보였다. 군의 지휘권은 개인의 소유물이며 귀족의 특권이든가 군대에 더불어 매매할 수 있는 상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군 지휘관들은 마음이 내킬 때라든가 그것이 자기의 이익이 될 때 외에는 일부러 싸움터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왕에 대해 특별히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는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사실상 그들은 왕에 대해 빈번히 도전했다. 게다가 그들은 참된 의미에서의 군의 지휘관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들에게 봉사하는 장교가 지휘관과 마찬가지로 그 직권을 상속 또는 매매에 의해 손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제도 밑에서 강력한 상하관계나 직업적 기능이 생길 까닭이 없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관료들은 이러한 프랑스의 기존 군체제에 대한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프랑스의 '군사혁명'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② 루이 14세 치세기의 프랑스 군의 발전
'군사 혁명'은 단지 군대의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군 내부의 질서를 확립시키고, 군 제도와 규칙을 보완하며, 군대와 관련된 행정을 능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까지 포함되는, 전반적인 군사분야에서 이루어지는 개혁을 의미한다. 프랑스의 군사개혁은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육군의 개혁에 착수한 인물은 육군대신 미셸 르 텔리에(Michel le Tellier)와 그 직을 계승한 텔리에의 아들인 루브와 후작(Marquis de Louvois)에 의해 이루어졌다. 르 텔리에가 육군대신이 된 1643년부터 루브와가 죽은 1691년 사이에 이 두 사람은 프랑스군을 유럽 최강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전혀 선례가 없는 군사제도를 창조해 내었다.
군사 개혁 이전의 프랑스 군의 지휘체계는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르 텔리에와 루브와는 책임과 위신을 존중하는 규율화된 피라미드 형 체제를 확립하여 이러한 결함을 개선시키려 했다. 체제의 정점은 군인이라기보다 문관에 가까운 육군대신이 차지하고 그 아래는 프랑스 육군 원수가 앉으며 이들이 많은 장군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장군 밑에는 대장이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그 직권을 차지하고 있던 이 대장들에게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들은 직권의 매매를 통해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었고, 그것을 금지시키려고 하다면 그들은 당연히 반발할 것이었다. 그래서 르 텔리에와 루브와는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억눌러 그 권한을 국가에 흡수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가 바로 각 대장에게 국가 직속의 부관(副官)을 붙이는 것이었다. 부관은 군의 정규 지휘계통 속에 포함된 전문 장교이며 실질적으로 부대의 지휘권을 장악, 대장의 직능은 유명무실해 갔다. 또 언제나 돈을 주고 그 인가서를 살 수 있었던 대위(중대장)와 대령(연대장)이라는 계급 이외에 가난한 장교들의 봉사를 보상해줄 수 있는 소령, 중령(대대장), 여단장과같은 새로운 계급이 출현했다. 계급제와 진급은 이후 승진 순서의 명부에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젊은 장교들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학교가 문을 열었고, 성 루이 십자무공 훈장이 충성과 헌신을 보상했다. 그러나 루이14세도 대신들도 군의 형태를 정비하는 것만 갖고는 질서와 규율이 확립된다고 믿지 않았다. 장교와 병사들의 행동에는 항상 감시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거기에서 군 감독관(Inpecteur en mission)의 직책을 창설, 이윽고 국가 직속의 감독관이 전군에 배치되어 군의 충성여부를 감시하게 되었다. 그들이 직면한 문제 중에서도 제일 골치가 아팠던 문제의 하나는 파스볼랑이라고 불린 '가짜 병사' 문제였다. 이것은 부대의 회계관도 겸하고 있던 대장이 실제의 숫자 이상으로 병사의 급료를 청구하고 감독이 나타나기 직전에 가짜 병사를 긁어모아 사열을 받게 하는 사기행위였다. 이에 대한 형벌은 가짜 병사에 대해서는 태형과 낙인, 장교에 대해서는 벌금과 투옥이며, 감독관들은 이것을 엄격하게 실행했다. 초대 감독장관 마르티네(Martinet)의 이름은 오늘날 엄격한 '규율가',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이기도 하다.
르 텔리에와 루브와는 또한 사병에도 관심을 기울여 중대장에게 일당 5수(sous)의 봉급을 정기적으로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탈영병을 추적하게 했다. 탈영병은 코와 귀를 베인다는 협박을 받았다. 늙고 다친 병사들을 위해서 파리에 폐병원(Hotel des Invalides)이 세워졌다.(1670-74년). 또 4년 복무의 지원병으로 충원된 군대의 병사수가 1667년에 6만 5000명에서 1678년에 28만 명으로, 치세의 말기에는 30만-40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수치에 이르기 위해 새로운 충원방식인 민병대(milice)가 고안되었다(1688). 루브와는 각 교구가 자체의 경비로 무장시켜 왕군에 복무할 독신자 1인을 추첨으로 선발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병역의 의무를 예고하는 이 제도는 잘 기능하지는 못했지만 치세의 말에 침입을 막아내는 데에 기여했다. 아울러 르 텔리에와 루브와는 구경지역에 식량 창고를 짓고 파리, 릴, 스트라스부르, 메스에 최초로 병영을 세우게 했다. 이 시기에 용기병(龍騎兵)이 생기고, 기병대에서 검을 사용하고, 포의 구경이 작아졌다. 1670년부터 병사들은 군복의 착용이 일반화되었다. 또 1687년부터 병사는 보방이 창과 총을 결합시켜서 만든 화약통이 달린 총검(bayonet)을 장비하게 되어 창병은 폐지되었고, 1693부터 총검이 실전에 사용되었다. 1700년경, 화승총 대신에 소총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기병은 기병용 총을 갖게 되고, 척탄병 1개 연대와 포병 12개 중대가 창설되었다. 그리고 30-40만 명에 달한 상비군 중에는 프랑스 근위병, 왕실 연대, 대소 총기부대, 스위스 용병 등 유명한 연대를 포함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군사 개혁 중 보방의 축성 및 공성술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17세기 유럽 내 군사개혁가들은 이성과 과학을 존중하는 시대적 사조의 영향으로 과학 기술적 지식을 군사분야에 적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크게 활약한 사람이 프랑스의 보방(Sebastien Le prestre de Vauban)이었다. 청년장교 시절 보방은 루이 14세에 대한 반란에 가담했다가 포로로 붙잡힌 전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후 전향하여 루이 1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사망하기 몇 개월 전까지 프랑스 군 내에서 최고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보방은 반세기의 군대생활에서 약 50회의 공성전을 실시하고, 1000여 개의 요새와 항만시설을 설계·감독했다. 오늘날 공병감에 해당하는 직책을 오랫동안 역임한 그는 축성과 공성으로 프랑스 곳곳을 동분서주하면서 생애를 보냈다. 보방은 군사부문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응용수학 및 응용과학 분야에 크게 기여하여 1696년 영국 과학원으로부터 저명한 과학자에게 주는 상을 받았다. 오늘날에는 통계학의 선구자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대포의 포위공격으로 함락된 이후 대포의 포격에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요새들이 고안되기 시작했다. 공학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이 무렵 요새의 축성 기술은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또 이 시대는 20세기 기관총이 등장했던 때처럼 요새의 방어력이 당대의 공격 기술을 능가하여 좀처럼 유능한 지휘관의 출현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일반적으로 유럽 각국은 전략적 가치를 지니는 지역을 요새화하고 방어하는 데 주력했던 만큼 보방과 같은 요새 전문가들의 역할이 컸다. 루이 14세 치세의 프랑스가 방어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지역은 플랑드르였다. 플랑드르는 비옥한 평원 지대로, 프랑스의 적들이 아무런 자연적인 장애물도 돌파할 필요없이 작전을 펼치거나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지역이었다. 1702년 무렵에는 플랑드르에도 30곳 이상의 대규모 일급 요새가 세워졌고, 그보다 작은 규모의 요새화된 도시나 성이 약 50군데가 있어서, 그 요새들은 프랑스의 가공할 방어벽을 형성했다. 보방은 요새 축성에 있어서 여러 가지 최신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그중 하나는 돌 대신 흙으로 보루를 짓는 것이었다. 돌 보루는 포격을 당할 때 파편이 튀어서 위험했다. 흙벽은 아전했고, 건축 비용이 저렴했으며, 커다란 흙벽도 보다 쉽게 쌓아올릴 수 있었다. 또 다른 발전으로는, 과거에 원형이었던 요새의 능보가 각이 지게 건설된 것을 들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격해오는 적에게 여러 각도에서 사격을 가해 요새 벽의 모든 부분을 엄호할 수 있었다.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어느 정도 그런 아이디어가 전쟁에 적용되었지만, 보방 이전에는 아무도 그 아이디어를 전면 적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보방의 방법은 포위공격전을 기하학적인 전쟁으로 변형시키게 되었고, 그 방어가 어찌나 위력적이었던지 결코 적의 정면공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 그는 수비에 도움이 되는 지형지세를 최대한 활용했다.
보방은 요새 축성에 있어서 단순한 기본원칙을 고수했지만, 결코 똑같은 디자인을 반복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벽으로 감싼 내부, 보루, 바깥 보루, 해자 등 요새의 기초 설계에 있어서는 전통을 유지했다. 요새는 본체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계속 저항할 수 있었다. 포위공격의 성패는 요새의 어느 부분이 가장 잘 버틸 수 있는가의 문제에 달려있었다. 보방은 장소와 시간과 돈만 있으면 가능한 한 바깥 보루를 많이 지었다. 그래서 적으로 하여금 포위공격을 원거리에서부터 시작하게 했고, 그의 특유한 방식대로 장애물을 더욱 늘려 요새를 함락시키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 가중되도록 했다. 바깥 보루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 해도, 중앙의 주 보루에서 사격을 가함으로써 수비군은 함락된 보루를 계속 지배할 수 있었다.
보방은 기하학적 재능과 지형을 파악할 주 아는 안목을 이용해, 요새의 모든 앞면이 뒤나 옆의 보루에 의해 방어되고 지원받을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규모가 커지고 다양화된 그 설계의 기본구조는, 성 안쪽 변 없이 밖으로 뾰족한 삼각형 구조였다. 밖으로 뾰족한 벽은 적이 제대로 겨냥하는 것을 어렵게 했고, 효과적인 집중공격을 가할 수 없게 했다. 즉, 적군이 볼 때 요새벽은 모서리와 안쪽으로 패인 골로 이루어진 형태였다. 대형 능보 주위에는 보다 작은 능보가 분산되어 있었고, 작은 능보는 소총으로 서로를 엄호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자리잡았다. 크기에 있어서 아주 다양한 그 삼각형 구조물은 '레블린(ravelin)'이라고 불렸고, 사실상 초생달 모양을 이룬 것은 '데밀룬(demilune)'이라고 불렸으며, 각 보루는 서로를 엄호했고, 요새 뒤쪽에 엄호를 받았으며, 물을 채우지 않는 해자가 앞쪽 멀리 패여 있었다. 이런유형의 다중 복합 요새는 흔히 중앙 보루에서 280미터 거리까지 펼쳐져, 포위공격에 저항하는 강력한 장애물 구실을 했다. 보방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본보기는 뇌프브리자슈(Neuf Brisach)와 릴(Lille)요새이다.
보방은 축성 못지않게 공성 분야에서도 큰 공헌을 남겼다. 보방 이전의 포위공격 방법은 대포의 사정거리를 확보할 때까지 지그재그로 참호를 파서 성벽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접근호(sap)의 선두는 적의 방어사격에 노출되었기 때문에 인명손실이 컸고 비효율적이었다. 불필요한 출혈을 극도로 싫어한 그는 포위군의 피해를 줄이며 요새를 점령하는 방법으로 평행진지에 의한 공성법을 도입했다. 이는 방어사격에 노출되는 무모한 돌진을 피하고 조직적으로 서서히 진행하는 것이다. 먼저 공격군은 방어측의 사정거리에 이르면 엄폐물을 이용하여 적절히 몸을 숨기고 있다가 그 선으로부터 공병이 요새를향해 지그재그를 그리며 접근호를 판다. 여기까지는 기존방식과 같다. 그러나 어느 정도 거리에 이르면 접근호와 수직이며 요새벽과는 평행한 평행호(parallel trench)를 판다. 평행호에는 보병과 장비를 투입시킨다. 이제 공격군은 수비군의 사격에 대해 엄호 사격을 할 수 있었고,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어서 같은 방법으로 제2, 제3 평행호를 구축, 전진하여 성곽 가까이 제방에 이르게 되면 높은 토루를 쌓고 공격한다. 이 공성법의 특징은 전진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임시 축성·참호·토루를 이용하는 것으로써, 18세기에도 유행했다. 러일 전쟁(1904-05)때 일본군도 이 방법으로 러시아의 여순 요새를 함락시켰다. 보방은 축성 및 공성분야에서 큰 공헌을 세웠으며, 무엇보다도 당시의 과학기술을 응용했다는 점에서 군사혁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선도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루이 14세에게 가장 신임받고 그를 위해 전력을 다한 대신인 장 밥티스트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는 보통 중상주의 경제정책을 통해 프랑스의 경제력 향상에 이바지한 수완 좋은 재정관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의 군사개혁에도 직간접적으로 공헌을 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국가간의 대규모 전쟁이 빈발하던 17세기 절대주의 시대에는 전쟁을 치르는 것은 물론, 군대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많은 경비가 소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재정에서 군사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즉, 각국의 경제·재정을 담당하는 관료들은 급증하는 군대 유지비와 전쟁비용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야만 했다. 절대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통제 경제정책인 중상주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군사력 증강과 전쟁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콜베르는 그러한 면에서 매우 유능한 관료였다. 루이 14세 통치 하에서 프랑스는 유럽의 여러국가들과 거의 단독으로 전쟁을 치렀으며, 또 그 전쟁의 대다수가 루이 14세가 일으킨 것들이었다. 많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프랑스군은 루이 14세 초기의 6-7만 명에서 후반기에 30-40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커졌고, 전쟁 비용 또한 끝을 모를 정도로 증가하였다. 또 루이 14세의 호화찬란한 베르사유 궁전 건축과 같은 건축물의 건설비까지 겹쳐 재위 말기에 이르면 프랑스의 재정은 파산 직전까지 내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경제를 숱한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이끌어 온 것만 해도 콜베르는 훌륭한 성과를 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프랑스는 합쳐서 거의 3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프랑스가 방대한 규모의 군사개혁을 추진하고, 잦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콜베르가 충실히 일구어낸 재정이 있었다.
콜베르의 중상주의 정책이 프랑스 군사개혁에 간접적으로 공헌한 것이라면, 프랑스의 해군재건은 그가 주도한 것이다. 육상 전투를 위해 군대가 강화됨에 따라 해군도 면목을 일신하여 제해권 획득을 위한 노력을 거듭했다. 17세기 후반, 유럽의 2대 해상 세력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해상 무역의 지배권을 놓고 전후 3차례 해전을 벌였다. 영국은 찰스 2세 밑에서 조선계획에 착수, 전문 사관을 양성하기 위해 해군학교를 창설하고 전술 서적을 출판했다. 이리하여 영국 해군은 정확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동력을 지니게 되어 후에 여러번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의 우수한 해군을 부러워한 프랑스는 독자적인 해군 조성 계획에 착수했다. 콜베르는 그대로 방치되어 황폐해진 상태였던 항구를 복구하여 브레스트, 로슈포르, 툴롱을 군항으로 만들고, 조선소를 건설했다. 그리고 프랑스 조선계의 지침서가 된 조선 기술서 '콜베르 도감'을 출판했다. 대규모 건조 계획의 결과, 1661년 20척의 배밖에 없던 프랑스 해군은 1677년 116척의 전함과 83척의 소함정을 보유하게 되었다. 콜베르는 필요한 승무원을 얻기 위해 판사들에게 죄인들을 갤리선을 젓는 형벌에 처할 것을 부탁했다. 1702년, 40척의 갤리선에 노를 젓는 죄수는 1만 2000명에 달했다. 전함의 경우에는 선원 등록제가 구상되었다. 해안의 주민들은 봉급과 기타 물질적인 혜택을 받고 3년에 1년 꼴로 국왕의 배에서 복무해야 했다. 또한 수리학과 항해술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어서 장교를 양성하려는 노력이 행해졌다. 콜베르의 활약은 주효하여 종종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해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투르빌과 뒤켄과 같은 뛰어난 제독들이 배출되었다. 특히 루이 14세 말기에는 적국의 상선을 나포하는 권한을 가진 -이 점에서 해적과는 다른- 사략선들이 활약하였다. 바르, 뒤게 트루앵은 사략선의 선장으로 유명했다.

3. 군사혁명의 성과와 유럽에 끼친 영향
프랑스의 군사개혁은 군대와 관련된 모든 것, 즉 군대 자체는 물론이고 군사제도, 무기, 방어체계, 보급체계의 개선에서부터 수학, 공학, 지리학의 발전에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그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루이 14세의 시대에 이루어진 군사개혁의 결과 프랑스의 군사력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그리고 프랑스의 경제력도 언제든지 전쟁을 치를 수 있을 정도로 건실한 상태였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세력 균형은 또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격동적인 변화 속에서 루이 14세는 유럽을 지배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게 되었다. 확고한 권위와 유럽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잘 조직된 군대를 가진 국왕은 처음에는 외국에 대해 우월권을 행사하고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였다. 그러나 1667년부터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프랑스군은 1667년부터 1684년 사이에 에스파니아령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독일로 진군했다. 프랑스의 명장 튀렌과 보방은 에스파니아에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고 플랑드르의 12개 도시를 점령했다(1668년 5월 2일, 아헨화약). 1672년의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콩데 공과 튀렌은 라인강을 넘어 네덜란드를 급습하여 네덜란드 군을 격멸시켰다. 이때 다급해진 네덜란드는 에이뮈덴의 수문을 열어 프랑스군을 막으려 했다. 그 때문에 조이데르 해의 물이 암스테르담과 헤이그를 포함한 나라 일부를 침수시켰다. 유럽 각국은 프랑스의 가공할 만한 군사력에 두려움을 느끼고 더 이상 루이 14세의 침략을 허용치 않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영국, 에스파니아, 독일의 제후들과 황제가 프랑스에 대항하여 네덜란드와 결합했다. 1674년 봄 전쟁터가 바뀌어 프랑스군은 프랑슈 콩테를 점령했다. 8월에 샤를루아 근처의 스네프에서 콩데 공은 오란예 공을 격파하고, 보방의 군대와 함께 에스파니아령 플랑드르의 도시들을 점령해나갔다. 또 프랑스 동부의 알자스가 적군의 침입을 받았지만, 튀렌은 한겨울에 독일군을 급습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지중해에서 뒤켄은 네덜란드의 명장 로이테르 제독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684년에 이르러 프랑스의 힘은 절정에 달했다.
1661년 루이 14세가 통치권을 장악한 이래 1684년까지의 시기는 프랑스의 군사적, 외교적 영광이 빛나는 시기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승리들은 프랑스의 군사개혁이 거둔 성과였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프랑스 절대주의가 이룬 것이었다. 군사개혁은 절대주의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과제였다. 단지 유럽 각국의 사정에 의한 정도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절대주의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관료제와 체계화된 세금 징수, 그리고 상비군이다. 절대주의 체제에서 군주는 권력의 정점에 위치하며, 국가의 모든 힘은 중앙 정부로 향한다. 즉, 권력이 일관된 방향으로 흐르며 결국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이 절대주의 체제의 성격인 것이다. 또 앞서 제시한 절대주의의 세 가지 기반요소 또한 일관성과 체계성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절대주의 체제는 분산된 국가의 힘을 집중시켜 국력을 강화시키려는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고도의 효율성을 가진 체제이다. 하지만 절대주의가 성숙하면서 절대주의 체제는 전쟁을 위한 기구로 변모하게 된다. 그 원인 17세기의 유럽 주요 국가들의 대국화 경향과 그에 따른 국가의식의 변화 때문이었다. 17세기에도 봉건제의 잔재는 남아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국가는 내부적으로 통합되고 대국화되고 있었으며, 그런 경향이 당대의 주요 정치사상인 절대주의와 결합하면서 더욱 촉진되었던 것이다. 또 30년 전쟁의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는 이제 종교보다는 국가 자체의 이익에 충실해지고 있었다. 이 모든 변화는 국가 간의 경쟁을 격화시켰으며, 빈번한 전쟁을 불러왔다. 따라서 본래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보조하는 데 머물렀던 상비군이 이제는 대규모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규모가 확장되고, 강력해져야만 했다. 그리하여 관료제도 세금도 군사 개혁에 집중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혁신적인 군사개혁인 '군사혁명'은 바로 절대주의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군사혁명이 프랑스에서 가장 먼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루이 14세와 같은 강력한 군주가 있고,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한 프랑스 절대주의가 유럽에서 가장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혁명은 곧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났다. 경쟁 국가에 뒤지고 싶지 않은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군대의 규모를 팽창시켰다. 더불어 국가의 지원 하에 군수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대규모 군대의 식량 조달을 위해 농업이 장려되었다. 정치와 군사행정 차원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군과 관련된 부서들이 증가했고, 관료제도의 촉수는 더 길고 강인해졌다.
프랑스 이외의 국가들 중에서 군사혁명을 이룩한 대표적인 나라로는 프로이센을 예로 들 수 있다. 프로이센은 1618년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프로이센의 영지를 승계함으로써 나타났다. 탄생은 30년 전쟁의 발발과 때를 같이 하고 있으나 그 전쟁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고, 지리적으로 분단된 소국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보아도 장차 중요한 나라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의 탁월한 지도로 프로이센은 크게 달라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40년부터 1688년까지의 통치기간을 통해 17세기에 있어 또 하나의 군사혁명을 이루어냈다. 그는 처음부터 군을 국가의 중심으로 삼았다. 곳곳에 흩어진 그의 영토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통치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군무성(Intendantur der armee)을 모든 행정부서의 핵심으로 삼았다. 군대와 정부를 사실상 하나로 묶은 것이다. 과거 불과 900명에 불과했던 군대는 1678년에는 약 4만 500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 군대를 배경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유럽의 정치에서 점점 중요한 역할을 해 나갔다. 그는 세기 내내 끊임없이 벌어진 전쟁을 이용하여 우선 한쪽에 대해서는 지지를 팔고, 다시 다른 쪽에 대해서는 편드는 방법을 써서 세력을 강화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도 아버지의 방법을 따랐다. 1701년 프리드리히 3세는 대(對)루이 14세 동맹에 가담하는 조건으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Ⅰ)의 칭호를 얻었다. 마침내 프리드리히 2세 때에 이르러 프로이센은 유럽 열강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17세기의 군사혁명은 절대주의 체제 하에서 일어난 것이다. 군사혁명으로 새롭게 태어난 강력한 군대는 한동안 절대왕정의 위엄을 드높였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여러 차례의 군사적·외교적 승리로 더욱 더 거만해졌다. 스웨덴은 구스타프 아돌프(Gustav Adolf)의 후계자 카를 10세(Karl Ⅹ), 카를 11세(Karl XI)가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30년 전쟁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스웨덴은 이 무렵에는 발트해를 장악한 제국이 되어 있었다. 또 17세기 말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PyotrⅠAlekseevich Romanov)는 러시아를 근대국가로 개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발전을 위해 몸소 외국에 가서 기술을 배우기까지 했던 황제는 국내에서 강력한 권위 아래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군사혁명을 이룩한 나라들은 유럽 내의 세력구도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스웨덴은 북유럽에서, 그리고 좀더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지만 프로이센은 동유럽의 세력구도를 바꾸어 놓으려 하였다. 군사혁명의 성과는 프랑스의 경우처럼 한동안 절대왕정의 우월함을 부각시켜 주었다.
그러면 군사혁명은 결국 절대주의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군사혁명을 낳았고, 그 결과 프랑스는 유럽 제일의 강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군사혁명은 결국 절대주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 1684년까지 프랑스의 세력은 곧 유럽을 뒤덮을 것처럼 강력했다. 강력한 군대와 유능한 장군들이 프랑스에 잇따른 승리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위협정책은 유럽의 열강을 점차 결합시켜서 그에게 장애물로 작용했다. 1686년 7월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스웨덴, 에스파니아, 황제와 독일의 제후들, 사부아가 프랑스에 대항하여 동맹을 결성했다. 1688년 네덜란드의 오란예 공 빌렘이 명예 혁명으로 영국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네덜란드와 영국이 공동 전선을 펴게 되었다. 반면 프랑스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튀렌, 콩데, 콜베르와 같은 유능한 인물들이 사망한 이후 루이 14세는 역시 유능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호전적인 루브와의 영향을 받았다. 루브와는 국왕에게 계속 전쟁을 권유했다. 그리하여 국왕은 신중함을 버리고 가능성에 지나치게 매달리고 적대세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1688년부터 97년까지 일어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 전쟁에서 프랑스는 적들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초기에 프랑스군은 계속 승리를 거두었지만 바다에서 투르빌의 함대가 라 우그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1693년과 그 이듬해에는 식량과 초과 사망률의 위기로 군사작전이 중단되었다. 곧 재개되었으나 전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라이스바이크 평화조약으로 -에스파니아의 왕위 계승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루이14세는 처음으로 온건하게 처신했다.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를 제외하고 나이메헨 조약(1679) 이후에 합병한 영토를 모두 포기했다. 에스파니아 왕위계승 전쟁(1702-13)은 절대주의 시대의 경쟁과 대립이 극에 달하여 마침내 절대주의 체제 자체에 치명타가 된 전쟁이었다. 에스파니아 왕 카를로스 2세는 후계자가 없었으며 그 자신도 병에 시달려 오래 살기 어려웠다. 사실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가의 잦은 근친 결혼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고, 게다가 불임이었다. 이 때문에 에스파니아 왕이 사망한 후 누가 왕위를 계승하느냐 하는 문제로 유럽 주요 열강의 경쟁이 치열했다. 과거의 영화는 이미 사라졌지만 에스파니아의 영토는 아직도 광활했다. 본국 이외에도 밀라노, 나폴리, 플랑드르 일부 그리고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부 아메리카가 에스파니아의 소유였다. 카를로스 2세의 가장 가까운 상속자는 프랑스의 왕세자나 그의 아들 중의 하나이거나 오스트리아 황제인 레오폴트 1세의 둘째 아들이 카를 대공이었다. 루이 14세는 영국을 상대로 에스파니아 영토의 조정과 분할을 교섭했고, 그것은 상호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레오폴트 1세는 이것을 거부했고, 특히 카를로스 자신이 자기의 영토가 분할되는 것을 싫어했다. 마침내 카를로스 2세는 에스파니아와 가까운 프랑스가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 1700년 10월 2일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공 필립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1개월 후 사망했다. 1701년 2월, 앙주공 필립은 펠리페 5세로서 에스파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에스파니아의 새 국왕을 인정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조금만 신중해도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솔한 행동을 했다. 마치 에스파니아령 플랑드르가 프랑스의 것이라는 듯 루이 14세는 프랑스군을 국경요새에 주둔시켜 네덜란드를 자극하였다. 더욱 큰 문제는 루이 14세가 영국과 네덜란드 상인들이 에스파니아 및 에스파니아의 식민지에서 얻고 있던 무역특권을 빼앗아 프랑스 상인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었다. 이 두나라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결국 1701년 9월 7일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결의했다. 이윽고 바이에른과 쾰른을 제외한 독일의 모든 연방이 동맹에 가입했다.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에게 유리했다. 빌라르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프리들링겐과 호흐슈테트에서 동맹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후 프랑스는 큰 곤경에 빠졌다. 1704년 8월 13일, 블렌하임에서 프랑스군은 영국의 말버러공- 전(前)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조상이다 -과 사부아공 오이겐의 연합군에게 대패했다. 이어서 1706년에는 라미, 1708년에는 우데나르데(모두 에스파니아령 플랑드르)에서 프랑스군의 패전이 계속되었다. 1709년 9월, 양군은 말플라케에서 다시 전투를 벌여 쌍방이 모두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다(전사자 4만명). 여러 차례의 강화회의가 열렸으나 동맹국측의 과도한 요구로 모두 결렬되었다. 그러나 1710년 영국의 휘그당 정부가 쓰러지고, 1년 후에 레오폴트 1세가 사망하여 카를 대공이 황제가 됨으로써 동맹세력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된 카를 대공이 에스파니아 왕위까지 차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새롭게 정권을 장악한 토리당 정부는 전쟁에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정세 변화에 힘입어 1712년 드낭에서 빌라르의 프랑스군은 오이겐의 오스트리아 군을 격파했다. 1713년 마침내 영국과 네덜란드와의 유트레히트 조약이 체결되었고, 형의 사망으로 황제가 된 카를 대공과의 라슈타트 조약으로 전쟁이 종식되었다.
펠리페 5세는 에스파니아의 왕위와 그 식민지를 유지했으나 프랑스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다. 오스트리아의 새 황제 카를 6세는 에스파니아 령 플랑드르, 밀라노, 나폴리, 사르디니아를 차지했다. 영국은 남미에서의 노예무역 독점권(asiento), 메노르카, 지브롤터, 뉴펀들랜드, 아카디아, 허드슨 만, 성 크리스토퍼 섬을 획득했다. 프랑스는 영토의 기본은 지켜냈다. 그러나 이 전쟁으로 프랑스의 재정은 파멸적인 상황에 빠졌다. 1705년 30-40만 명의 병사들을 부양하고 무장시키는 데 무려 1억에서 1억 3000만 리브르를 썼다. 1700년부터 재정수입은 징수하기도 전에 먼저 지출되었다. 1715년에 이미 1715년, 1716년, 1717년의 조세수입이 탕진되었다. 1695년 전주민을 22개 등급으로 나누어 인두세(capitation)가 부과된 데 이어 1710년에는 '10분의 1세(dixieme)'라는 새로운 세금이 신설되었다. 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가 죽었을 당시 국고는 파산지경에 이르렀고 부채는 무려 28억 리브르에 달했다.
루이 14세의 사망은 프랑스 절대주의의 종말을 의미했다. 후계자인 루이 15세는 무능력한 데다 우유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왕의 권위는 추락하게 되었다. 루이 14세하에서 침묵하던 고등법원 판사들이 대담해져서 국왕에게 도전하기 시작했다.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왕실은 특권층인 귀족과 성직자에게 자주 돈을 빌렸다. 다시 세력을 되찾은 특권층이 여론을 등에 업고 왕실을 압박했다. 1743년부터 57년까지 이어진 고등법원 및 종교의 소요사태는 군주제를 더욱 약화시켰다.
에스파니아 왕위계승전쟁과 루이 14세의 죽음으로 프랑스 절대주의는 막을 내렸다. 유럽은 다시 세력균형이 이루어지는 안정된 시대를 맞게 되었다. 프랑스의 절대주의와 군사혁명은 상호 영향을 미쳤던 관계였다. 군사혁명은 절대주의 체제와 시대적 상황에서 필연적인 것이었지만 절대주의가 성숙하면서 본래 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군대는 이제 국가와 거의 동일시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국력의 대부분이 군사력에 투입되는 것으로 과도할 경우 체제 자체가 파괴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 유능한 관료들의 노력과 부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수십년에 걸친 전쟁으로 프랑스의 절대주의 체제는 붕괴하고 말았다. 국가의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한 절대주의는 국력의 신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권력 기구의 상호견제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군주의 행동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군사 부문처럼 어느 한 분야에 지나치게 권력과 자원이 집중될 가능성이 높았다. 국가는 나라의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군사혁명이 활발했던 17세기의 유럽은 대다수의 절대주의 국가가 빠른 발전을 위해 군사력에 지나치게 집착한 불안정한 발전을 추구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절대주의가 무너진 후 여러 나라가 프랑스와 비슷한 종말을 맞았다. 1715년 루이 14세가 죽은 지 몇 년 후에 스웨덴이 북방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프랑스의 뒤를 따랐다. 스웨덴은 발트해 주변 영토를 상실하는 바람에 더 이상 발트해를 자기 호수로 둘 수 없게되었다. 프로이센은 18세기 중엽에서야 군사혁명의 성과를 맛보았다. 프리드리히 2세의 통치 시절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서 승리자가 되면서 유럽 열강의 반열에 올랐다. 그 후 한동안 정체되다가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이후 나폴레옹에 의해 철저히 패배하였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에 다시 군사력의 발전에 지나치게 추구한 프로이센은 최초로 독일을 통일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국주의에 지나치게 몰두한 결과는 제 1차세계대전의 패배와 왕조의 몰락이었다.
이런 부정적인 결과가 있었다고 해서 군사혁명의 성과를 축소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30년 전쟁의 용병과 비효율적인 군사제도를 바꾼 것은 군사 혁명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과였다. 또 군사혁명 이후에는 30년 전쟁의 독일과 같이 민간인의 엄청난 희생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군사혁명을 통해 근대적 의미의 국민군이 탄생하게 된 것은 군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바람직한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자국민으로 이루어진 군대를 유지해야 국가의 안보를 보장할 수 있고, 국민의 애국심도 드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자기 가족과 나라를 지킨다는 마음을 갖고 싸우는 병사들은 용병들보다 훨씬 사기가 높았고, 신용할 수 있었다. 국민군을 통해 국민과 국가의 통합을 실현한 점에서 군사혁명은 근대 유럽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17세기 절대주의 체제는 군사혁명을 창조해냈어도 그것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걸은 것이다.

결 론
전쟁 속에서 시작된 17세기는 전쟁 속에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17세기에 종지부를 찍은 전쟁은 세기 초의 전쟁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양편의 군대가 맞부딪친다는 면에서 그 본질은 같았으나 전투의 기술이나 규모, 교전국의 성격, 목적 등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30년 전쟁은 왕조 내지는 종교 동맹 사이의 싸움이었으나, 17세기 후반의 전쟁은 영토국가라고도 할 새로운 정치단위를 대표하는 것끼리의 싸움이었다. 이러한 전쟁은 서쪽은 아일랜드에서 동쪽은 러시아, 북은 스웨덴에서 남은 이탈리아에 이르는 유럽 각지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이 시기 유럽의 모든 나라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대규모 전쟁에 휘말려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새 영토국가가 서로 타국을 위압하려고 경쟁을 벌인 일이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국경을 넓히고 그것을 지키며, 해외에서 영토를 획득해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싸웠다. 이미 이 시대에 제국주의의 질서가 어렴풋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 대규모적인 현상은 군사혁명의 결과 나타난 것이었다. '군사혁명'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마이클 로버츠이다. 그는 1955년 벨파스트의 퀸즈 유니버시티에서 행한 강의에서 군사혁명의 4가지 핵심적 변화를 지적했다. 첫째, 창 대신 총이 사용된 무기의 혁명이 일어났다. 둘째, 군대 규모가 커졌다. 셋째, 대규모적이고 복합적인 전술이 사용되었다. 넷째, 이와 같은 군대의 변화가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그러나 군사혁명은 그 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국민군이 탄생한 것이다. 군사 혁명 이전에는 직업적 병사인 용병들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나라에 고용되어 전쟁을 치렀다. 이들 용병은 충성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 많은 봉급을 위해서라면 배신도 주저하지 않았으며, 제대로 보급이 안되거나 봉급이 제때 지불되지 않으면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게다가 이들 용병은 적국과 아국을 가리지 않고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다. 그러나 군사혁명의 결과 자국민으로 이루어진 정규군이 조직되면서 국가는 신뢰할 수 있는 군대를 갖게 되었다. 국민군은 자기의 가족과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을 갖고 싸웠기 때문에 용병군보다 훨씬 사기가 높았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변화는 군사혁명의 결과 유럽이 흥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은 아시아보다 약소했다. 특히 가장 인접한 아시아 국가인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다. 하지만 군사혁명 이후 유럽은 군사력에서 점점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제국주의 시대에 이르러 세계로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물론 군사혁명은 초기에는 제대로 통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탄생시킨 국가체제 즉, 절대주의 체제를 붕괴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17세기는 유럽의 역사에서 하나의 큰 전환기를 이룬다. 왜냐하면 17세기에는 긴장과 투쟁, 미신과 무질서를 상당히 극복하고, 근대국가의 권력과 과학을 바탕으로 합리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질서가 구축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군사혁명은 바로 이 새로운 질서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왕정시대」, 찰스 블리처,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편집부 옮김,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1991
「전쟁의 역사Ⅰ,Ⅱ」, 버나드 로 몽고메리, 승영조 옮김, 책세상, 2000
「프랑스의 역사」, 다니엘 리비에르, 최갑수 옮김, 까치글방, 2000
「전쟁사 101장면」, 정토웅, 가람 기획, 1997
「군주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이상두 옮김, 까치글방, 2001
「테이레시아스의 역사」, 주경철, 산처럼,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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