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말기의 군대는 재정초기의 군대와는 사뭇 달랐다.

 

이유는 국가체제의 변화, 복장, 무기,전술,편성뿐만아니라 인적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중에 군복의 변화는 과거의 중무장에 비해 경무장으로 바뀌게되었다. 당시 로마병사는 이미 금속갑옷과 투구를 착용하지 않게되었고,  더 이상 붉은색을 군대의 이미지 색상으로도 삼지 않았던것이다.

 

그림은 제국말기의 병사의 모습이다.

 

또한 야만족이라 불리우던 게르만이나 켈트의 복식을 따라 바지와 상의 그리고 헬멧을 착용했던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기존의 화려한 장식을 제거하고 다순한 무늬를 통한 장식을 이루게되었다.

 

무기에서는 보다더 대담성이 보이게되는데 과거의 주요장비였던 필룸을 제거하고 장검이나 재블린을 사용했고 이후에 들면서 이러한 재블린도 다트(15Cm정도의 투척무기)로 바뀌게되었다. 이런 다트는 크기도 작은데다 무게또한 가벼웠기때문에 방패에 5~10개를 달고다녔다고 한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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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에 책을 보다가
이 내용이 나오더군요
저번에 이 주제가 카페 어디에서인가 나온 것이 기억나서 한번 써봅니다

이 내용은 폴라비우스란 로마의 역사가가 쓴글이랍니다
구찮은 관계로 줄이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쓰렵니다
밤샜더니 고민하기 넘 구찮아요

적대적인 대립진영에서 이런 서로 다른 전투체제가 발견되고있기에 우리는 서로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고
로마인이 유리한 쪽으로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방진이 고유의 정상적인 조건을 유지하는 한 어떤 세력도 그 공격을 저지하거나 그 격렬한 충격을 견뎌낼수없다는 것을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사실로 입증해주는 증거는 도처에 많이 있다


(중략.... 방진에 형성, 열의 배치에 대한 설명은 길어서 생략)


로마군은 전투대형에서 3피트(90cm) 이상의 땅을 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움직일 필요도 있기에 방패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무기의 날과 끝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각 군단병은 주변에 어떤한 장애물도 없는 3피트의 공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군단의 대열에 서있는 로마병사는 방진과 싸울 때 첫대열에서 직접 적군 2명은 물론 수평으로 놓여진 사리세(24피트-7.3m의 창)를 10개씩이나 상대한다
그리고 백병전에서 그는 적의 대형을 돌파하거나 뚫고 갈수 없다 또한 이 싸움에서 다른 열은 그를 지원할 수 없다 더없이 맹렬한 돌격도 효과가 없고 그 자신의 칼도 무력해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그 고유의 진형을 유지하는 한 방진은 백병전에서 계속 무적을 자랑할 것이고 다른 대형은 맞설수 없을것이다


그렇다면 로마군이 계속 승리한 것인가? 어떻게 하여 방진이 패하게 되는 것인가?

전쟁에서는 모든 전투의 장소 시간 상황이 무한으로 변화한다
그러나 방진은 하나의 특정한 시간과 정의가 명확한 장소 알맞게 짝지어진 상황에서만 무적을 자랑하고 다른 대형은 대항할수없다
시간과 장소 상황이 방진에 불리할때 공격이 쉽게 이루어지면 그 전망은 다르다

방진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대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평평하고 휜히 트인데다가 도랑이나 소택지가 없고 좁은 골짜기나 언덕도 없고 또 강에서 멀리 떨어진 땅을 발견해야할 필요가 있다
대단히 드문 상황을 제외하고 이러한 요구에 해당하는 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점유하기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만약 적군이 한지역에서 접전하면 다행이지만 적이 병력을 작지만 강한 부대로 나누어 인근의 지방으로 퍼져나가 도시를 약탈하고 동맹자의 영토를 황폐화시킨다면 설사 방진이 완벽하고 강력한들 무슨 공헌을 할수있겠는가? 무적의 부대는 유리한 지점을 확보할때만 그 상태를 유지할수 있겠지만 친구를 보호하는데 실패했을때 더이상 그 자체의 안전을 확보하지 못하게 될것이다

저항하지 세력을 만나지 못한다면 인근지방을 장악한 적군이 호송대를 차단할것이다 호송대가 차단된 상태에서 방진은 그 자체의 힘과 견고함이 심하게 손상될것이다

설사 방진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적군이 총공세를 나서지않는다면 또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철수해 충격을 피한다면 방진은 어떻게 될것인가

로마군은 전략을 관철함으로써 모든 점에 대해 견해를 표명할수 있다 로마군은 방진의 그것과 동일한 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모든 군대를 사용하지 않는다
군의 한 부대가 적을 상대하는 동안 그들은 언제나 두번째 부대를 예비로 보유하고있다

또 전선에서 대항하는 대열이 무너지던지 그 자체가 분쇄되던지 방진은 그 고유의 대열을 유지한다 그러나 방진이 도망병을 추적하거나 후퇴하거나 달아나려고 한다면 방진은 어느정도 무너질것이다 밀집된 대열에 틈이 생긴다면 예비대가 이것을 알아채고 어디듯지 가리지않고 공격을 가할것이다

또 이러한 사항도 첨부되어야한다
방진의 형성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는 다양한 지방을 지나가야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도중에 야영하고 휴식을 취하기 위해 유리한 지역을 점유하고 적의 도시를 포위하거나 포위당할 수도 있다 그들은 예기치못하게 적을 공격할 수 있고 공격 당할 수도 있다

그들은 온갖 우발적인 사건을 다 부딪치고 이것을 극복할 각오가 되어있어야 한다
이 모든것이 전쟁의 변수이다
승리는 이것들에 달려있고 승리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겨우 방진을 제대로 펼칠 수 없다 설사 펼칠수 있다 한다던들 형편좋게 작용할 수 없다
하지만 로마군의 경우는 다르다 언제나 신속하고 단호하게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기에 적군의 대형이나 군사력 과시에 당황하지않는다
전투원이 쉽게 신속하게 효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대형이 있기에 진취적 기상의 로마군이 열등한 체제하에서 훈련받은 적군에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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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5-03-1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노스케팔라이 전투나 퓌드나 전투와 같은 로마군과 마케도니아군 사이의 전투를 분석한 것이 있다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텐데...
 

:: 로마 군대의 역사 : 2. 제정 이후의 로마 군대  ::

 로마군은 제국이 드넓은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다른 분야에서도 로마인이 보여주었듯, 로마군은 그들의 효율성과 조직화 능력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다른 민족의 것도 좋은 것이라면 아낌없이 배우려 하는 로마인의 개방적인 자세는 로마군의 변천사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로마군의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보면 로마를 제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강점은 단지 강력한 로마군이 아닌, 그러한 군대를 만들어낸 그들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마리우스 시대의 군제 개혁:: (BC 1세기)

  이 시대에는 로마사에서도 중요한 군제 개혁이 이루어졌다. 흔히 마리우스가 이 개혁을 이루었다고 한다. 카밀루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개혁이 기존의 추세에 대한 단순한 추인(혹은 미봉책)에 불과했는지, 또는 마리우스 혼자만의 업적이었는지에 대해선 약간 논란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로마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개혁임은 틀림없다.

 

 

 (←옆사진 - 가이우스 마리우스C. Marius)이때까지는 5개의 재산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최소한의 경제 능력이 있는 사람)을 군단에 징병했다. 이들을 아시두이assidui라고 한다. 제5계급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은 병역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었다. 이들을 '프롤레타리 및 머릿수(proletarii et capite censi)'라고 불렀다. '프롤레타리'란  '자식 생산자' 즉 무산계급을 뜻했다. '카피테 켄시' 즉 '머릿수'는 인구/국세조사(켄수스)가 있을 때, 정부가 이들 무산계급의 재산 평가액은 기록하지 않고, 단지 머릿수만 세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우스는 로마군을 징병제에서 지원제로 바꾸었다. 경제력이 없는 프롤레타리도 군단에 지원하면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 개혁은 도시의 가난한 빈민을 군대로 흡수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제 군대 복무는 시민의 의무가 아닌, 직업의 한 종류로 바뀌었다.

 마리우스는 로마 최초의 직업군대로 아쿠아이 섹스티아이(액상 프로방스)에서 게르만의 한 종족인 킴브리 인을 격파했다. 또 그는 필룸(투창)을 개량한 것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기존의 철제 창촉을 나무 핀으로 대체한 것이었다. 나무 핀이 던져졌을 때, 부딪히는(또는 찌른) 충격으로  나무 핀이 부러져 적이 다시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대해선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충격으로 긴 철제 창촉을 휘어지도록 창촉을 달구어 단련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군단의 지원제 전환과 더불어 이 시기에 있었던 중요한 개혁 중 하나는, 군단의 구조를 완전히 바꾼 것이었다. 마리우스는 벨리테스와 3개의 전열(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의 구분을 없앴다. 그 대신에 모든 군단병에게 똑같은 무기와 장비를 지급했다.

 또 이들은 이제 대대(코호르스)로 조직되었는데, 3개의 중대(마니풀루스)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대대의 기원은 확실치 않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대대를 주요한 전술 부대로 우선했던 바 있다.

 그러나 대대의 도입이 군단 지원제과 상당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왜냐면 이전의 벨리테스와 3개 전열 시스템은 병사의 재산과 경험으로 구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군단병은 전열을 만들 때, 누구나 똑같이 대우받았다. 이러한 시스템은 전보다도 더욱 유연하고 강력한 전술을 가능케 했다.

 

 그의 개혁으로 인한 결과는 대개 성공적이었는데, 다만 한 가지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이전의 땅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시민군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군단에 복무해, 국가에 대해 충성했다. 그러나 직업 군인이 된 도시 빈민 출신 병사들은 국가에 대해 잃거나 얻을 것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조국에 충성과 책임감을 지녔던 이전 시민군과는 달리, 직업군인은 더 이상 국가에 충성하지 않았다. 대신에 더 많은 전리품을 줄 수 있는 자신의 지휘관에게 그들의 충성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또한 속주 총독이 군대를 모병하는 것도 가능해졌는데, 카이사르는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을 위해 군단을 모집해서 전쟁을 일으켰다. 나중에 그의 병사들은 거리낌없이 카이사르를 따라 루비콘 강은 건넜다.

 

사회주의 사상의 '프롤레타리아'는 바로 여기서 나온 말이다

 

 

 

::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제정 초기 (AD 1세기) ::

 

 

 로마 공화정은 내전과 혼란을 겪고 난 뒤 무너지고,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가 새로이 제정을 세웠다. 아우구스투스는 제국의 정복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여, 이제 정복이 아닌 제국의 방위를 위한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카이사르는 로마군을 더욱 효율적으로 발전시키고 훈련한 바 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뒤를 이어 새로운 로마군단을 유지해야 했다.  (→옆사진 -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가 쓴 '업적록res gestae'에서 그는 약 300,000여명의 병사들을 해산했다고 언급한다. 그는 경쟁자들을 물리칠 때마다 그들의 군대를 무작정 해산시키지 않고 우선 모두 받아들였다. 그러나 악티온 해전 뒤, 내전으로 크게 불어난 군단을 28개로 감축했다. 이것이 제국을 지키는 상비군stand army의 시작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상비군의 복무 기간을 20년으로 연장했다. 각 군단은 대개 라인, 도나우 강이나 시리아같은 국경지방에 배치되었다. 각 군단은 약 6000명으로 이루어졌으며, 필요하면 비상군이나 예비군을 비슷한 수로 동원할 수 있었다.

 

 

 황제와 로마 시(이탈리아)를 지키는 근위대praetorian과 일종의 경찰과 소방관 역할을 한 비길레스vigiles는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것이다. 또 속주에서 보조군auxilia을 모집하여 군단을 보조하도록 했는데, 보조군에 복무한 속주민에게는 로마 시민권이 주어졌다.

 

(↑사진 설명) 행군하는 로마 군단병 재현

 

 흔히 영화에서 나오는 로마군은 대개 이 시대의 로마군이다. 그러나 지중해 세계를 정복한 공화정 시대의 로마 군단과는 그 모습도 다르고, 뿐만 아니라 그 성격까지도 다르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군이 공격적이었다면, 제정 시대의 로마군은 방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국경선을 따라 항구적인 병영을 건설하고, 수백년 동안 주둔했다.

 

※타키투스는 A.D 23년에 25개 군단이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A.D 9년에 테우토부르크 숲에서 3개 군단을 잃은 적이 있다. 거기서 이후에 군단 증강이 없었다고 가정하여, 28개 군단으로 줄였다고 추측하는 것이다. (물론 논쟁의 여지가 남아있다)

 

 

 

 

:: 제정 중기 (AD 4세기까지)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트라야누스 시대까지, 로마군은 그 정점에 이르렀다.  전쟁터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던 로마군에겐 오랫동안 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AD 250년대까지는 로마군단의 중무장 보병이 로마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필룸과 글라디우스는 옛 무기가 되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로마군은 새로운 시도에 적응했다.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국경에서 시작되었다.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국경선(라인, 도나우,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대규모 상설요새가 들어서 적을 막았다. 이러한 국경선을 리메스Limes라고 한다. 이 방어체제 덕분에 설사 야만인 군대가 국경을 넘는다고 해도, 방어망과 보조군을 돌파해야 했고, 그 다음으로는 로마군단과 상대해야 했다. 리메스는 오랫동안 제 기능을 다 했다.

  ↑리메스 : 오늘날 도이칠란트의 마인츠와 레겐스부르크 사이에 있던 국경선

(촘촘히 이어진 점들은 로마군 기지)

 

 3세기 이후에는 이 방어체제도 한계에 이르렀다. 낡은 군단은 와해되어 대대(코호르스)로 나누어져, 방어시설을 충원하기 위해 여러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외적의 침입과 군인황제들의 끊임없는 내전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속에서 새로운 보병과 기병이 형성되었다.

 

 이 시대의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AD 212년에 있었던 황제 카라칼라의 칙령이었다. 이 칙령은 모든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서 기존의 로마 시민과 속주민의 차이를 없앴다. 군대로 보자면 로마 군단과 보조군의 차이가 사라지고 둘의 지위가 같아진 것이다.

  이 시대의 황제들은 속주민 뿐만 아니라 로마인이 아닌 게르만, 사르마티아, 아랍, 아르메니아, 무어, 페르시아 인들도 모병했다. 이들은 과거 보조군과 같은 관계로 복무했다. 3세기 내내 이들 이민족 군대는 커져갔지만, 결코 제국을 위협하는 태도를 가지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운 3세기 이후의 군대 개혁은 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한 것이다.

 그는 중앙 예비군을 통해 로마 방어체제의 큰 약점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제 로마군단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중앙 예비군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nses를 창설했다. 국경에 주둔하는 군단병은 리미타네이limitanei로 불렸다.

 이 새로운 유동적인 부대는 전통적인 전체 규모의 옛 군단에서 약 1000명의 군단병으로 조직되었다.

 

 약 4세기까지 기병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중보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옛 군단 기병은 대개 게르만 인 기병보다 더 중무장했지만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도 보병은 여전히 로마 군단의 주력으로 남아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근위대장직을 폐지하고, 대신 보병총감(마기스테르 페디툼magister peditum) 직책과 기병총감(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 직책을 만들었다. 이것은 기병의 중요성이 높아졌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군단은 아직 제국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여전히 A.D 357년에 그의 군단으로 라인 강의 게르만인을 격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병의 중요성은 커져갔다.

 

 그 이유로는 두 가지가 있다. 많은 야만인들이 제국을 실제로 침공하기 보다는, 그저 말을 타고 제국을 약탈하고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러한 기병 무리들을 로마 영토에서 쫓아내는 데에는 느린 보병보다는 기병이 더 적합했다.

 

 다른 이유는 적들에 대한 로마군단의 우위가 더이상 전과 같지 않았다는 점이다. 야만인들은 지난 세기에 적 로마군대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수많은 게르만인들이 용병으로 복무하고 로마에서의 전쟁 경험을 쌓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되자, 그들에 대항하여 로마 군대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무장 보병을 보호할 수 있는 강한 기병을 준비했음을 알게 되었다.

 

 만약 로마군이 3세기와 4세기 동안 변천을 겪었다면 점차 기병의 수가 늘어났을 것이다. 그때의 점차적인 변화의 끝 단계 두려운 재해를 초래했다.

  A.D 378년 고트인 기병이 아드리아노플(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발렌스 황제의 동부군을 전멸시켰다. 전투에서 중기병은 중보병을 패퇴시킬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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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눈팅만 해온 플리니우스라고 합니다; 저도 등업을 해보고자 ㅋ; 이렇게 예전에 쓴 글을 올리어봅니다. 원래 로마사 사이트를 만들어서 올린건데, 폐기처분하고 로마인광장이란 카페에다가 옮기고 있거든요.

 roman-empire.net 자료를 중심으로 쓴거라, 이에 대해 잘 아시는분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평가도 부탁드려요.

 

 그럼 Vale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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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 군대의 역사 : 1. 왕정-공화정 시대의 로마 군대  ::

  로마군은 제국이 드넓은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다른 분야에서도 로마인이 보여주었듯, 로마군은 그들의 효율성과 조직화 능력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다른 민족의 것도 좋은 것이라면 아낌없이 배우려 하는 로마인의 개방적인 자세는 로마군의 변천사에도 잘 드러나고 있다.

 

 로마군의 발전해나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가보면 로마를 제국으로 만들 수 있었던 강점은 단지 강력한 로마군이 아닌, 그러한 군대를 만들어낸 그들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초기 로마 군대 (BC 4세기 이전) ::

 오른쪽 병사 사진은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로마 군단병의 모습이다. 그러나 오른쪽과 같은 군단병의 무구와 갑주는 카이사르 시대 이후(BC 1세기 말)의 것이다.

 

 공화정 중기까지 로마군은 토지 보유자로 이루어진 시민군이었다. 그러나 상비군은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 군대가 필요할 때마다 병사를 징모했기 때문이다. '군단Legion'을 뜻하는 라틴어 'Legio'는 원래 '선발selection'이라는 뜻이다. 원래 이것은 군대 복무에 적합한 사람을 선발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마 왕정시대에는 봄 파종기가 지난 후에 병사가 선발되었을 것이다. 라티움의 한 도시인 가비Gabii같은 곳의 사람들은 여름에 싸우러 나가서, 가을 수확기에 해산했다고 한다.  

 

 최초의 로마군은 그리스식 팔랑크스였다. 당시의 로마 병사는 그리스의 호플리테스Hoplites 병사와 매우 비슷했을 것이다. 팔랑크스는 보통 주력군이 약 5-10명으로 된 얇은 두께의 긴 가로줄을 이루었다.

 

 인구/국세조사(켄수스census)의 도입으로 생긴 계급 구분은 로마의 사회, 정치 뿐만 아니라 로마군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제도는 로마시민을 가진 재산에 따라 5개의 계급으로 나누었다. 군대 역시 이 다섯 계급에 따라 나뉘어, 계급에 따라 다른 병종으로 시민을 징병했다. 병사의 갑주와 무구를 비롯한 모든 장비에 드는 비용은 스스로 부담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가장 부유한 제1계급은 가장 무겁게 무장했다. 그들은 호플리테스와 비슷했는데, 모두 청동으로 된 투구, 둥근 방패(클리페우스), 정강이받이, 가슴받이로 무장했고, 창과 검을 들고 있었다.   

 

 상위 세 계급은 중보병이었고, 하위 두 계급은 경보병이었는데, 아래 계급으로 내려갈수록 보다 적은 무기와 장비를 갖추었다. 제5계급은 전혀 무장하지 않고, 오로지 적에게 던지는 돌sling만 준비했다.

 

  팔랑크스 전투는 중무장 보병이 주력을 이루었기 때문에, 한 병사의 가치는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전투 장비를 갖출 수 있는가에 달려있었다. 이런 제도가 바뀌어, 계급이 아닌 나이에 따라 병종을 나누게 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폴뤼비오스Polybios 시대까지 계급에 따라  병사의 병종과 장비를 나누었다.

 

 이들 계급에게는 각각 백인대가 할당되었다. 에퀴테스(기사)는 18개 백인대, 제1계급은 82개 백인대(2개 백인대는 공병대), 제 2,3,4계급은 각각 20개 백인대, 제5계급은 32개 백인대(이 중 2개 백인대는 군악대)였다.

 

 BC 390년(역사가 폴뤼비오스에 따르면 387년), 로마는 도시를 갈리아인들에게 약탈당하는 크나큰 수모를 겪었다. 이 일로 로마는 중앙 이탈리아에 대한 패권을 잃어버렸다. 다시권위를 세우고, 이러한 일을 막기 위해서는 로마군에게 새로운 조직이 필요했다. 전승에 따르면 로마의 영웅 푸리우스 카밀루스가 로마군을 새로이 바꾸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몇 십 년간 점점 개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에 이룬 개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팔랑크스를 폐지한 것이다. 팔랑크스 전투는 양쪽이 합의한 넓은 들판에서 한 번의 전투로 결판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투방식은 이탈리아에 맞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언덕 부족들은 그런 전투보다는, 지형의 우세함을 이용하려 했다. 게다가 팔랑크스는 이들과 상대하기엔, 다루기 어렵고 너무 느렸다. 로마는 팔랑크스보다 유연한 군대가 필요했다.

 

※ 역주

 

::라티움Latium: 로마 주변 지역으로, 로마가 최초로 지배했던 지방이다.

 

::팔랑크스palanx: 고대그리스의 밀집 방진 군대.

 

::호플리테스hoplites: 팔랑크스를 이루는 중무장 보병. 영어로는 호플라이트hoplite라고 한다.

 

::켄수스Census: 인구조사를 뜻하는 '센서스'는 여기서 이어져 내려온 낱말이다. 전승에 따르면, 이 제도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이 만들었다고 한다. 공화정 시대에는 켄소르censor라는 정무관이 이 일을 맡았다.

 

::클리페우스clipeus: 크고 둥근 방패를 뜻한다. 병사들에게 급료가 지불되고 난 뒤에는 잘 알려진 네모난 방패인 스쿠툼scutum이 도입되었다.

 

::백인대(百人隊:켄투리아Centuria): 로마군의 기본 전술 부대. 영어로는 century. '100'을 뜻하지만, 실제로는 대개 50-100명 사이였던 것 같다.

::에퀴테스equites: '기사'로 번역. 원래 로마 군단의 기병을 뜻하며, 원로원에서 선발되었다.

 

::갈리아Gallia: 골Gaul. 라틴어로 켈트Celt인이 사는 땅을 뜻한다.

 

::카밀루스F. Camillus: 로마의 귀족. 로마가 비상사태에 처했을 때, 5번이나 독재관에 선출되어 위기를 해결했다고 한다.

 

 

:: 초기의 로마 군단 (BC 3-4세기 경) ::

 팔랑크스를 폐지하면서 로마인은 그들의 타고난 융통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로마 군단은 여러 개의 전열戰列(line)로 이루어졌다.

  위와 같이 레베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 로라리, 아켄시 이렇개 하여 모두 6개의 전열이 있었다.

 

 가장 앞쪽에 있는 레베스는 창과 몇 개의 투창으로 무장한 경보병이었다. 바로 뒤의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하스타티가 있었다. 이들 중 2/3은 중무장하고 유명한 직사각형 방패(스쿠툼)을 들었지만, 나머지는 창과 투창만 들었다. 레베스는 하스타티에 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 로마군은 5개의 전열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 역주

::하스타티 병사(중무장한 창병)

 하스타티 뒤에있는 두 전열인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는 제1계급 출신이었다. 프린키페스는 장년층으로 이루어진 전투경험이 많은 노련한 병사들로 하스타티와 달리 모두 중무장했다. 트리아리는 프린키페스보다 나이가 더 많은 베테랑들이었다. 이들은 하스타티보다 더 중무장했다.

 

 로라리는 전투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었고, 아켄시는 혹시 모를 결원을 채우기 위한 예비병력이다. 이들은 군단에서 가장 하찮은 부대로 취급받았다.

 로라리, 아켄시는 각각 4,5계급 출신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전투에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고, 윗 계급 출신의 중보병인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가 로마군의 주력부대였다. 때문에 로마군은 사실상 3개의 전열로 이루어진 셈이다.

 

 각 전열은 '중대(마니풀루스)'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를 이루는 중대는 각각 15개였다. 일개 중대는 병사 60명, 백인대장 2명, 벡실룸 기수(旗手:벡실라리우스) 1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레베스는 하스타티의 각 중대마다 20명씩 배속되어 있었다.

 트리아리와 로라리, 아켄시 역시 각각 15개 중대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앞에서 말한 중대 병력의 3배였다. 즉 트리아리, 로라리, 아켄시의 중대는 각각(60명이 아니라 그 세 배인) 병사 180명, 백인대장 6명, 기수 3명이었다. 이러한 중대를 '오르도ordo'라고 불렀다.

 

※ 역주

::마니풀루스manipulus: 영어로는 maniple. 공화정 시대의 중요한 군 편제 단위.

 

::벡실라리우스vexillarius: 영어로는 standard-bearer. 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뜻함

 

 역사가 리비우스의 기록으로 추정한 일개 군단의 보병 병력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하스타티에 각각 배속된 15개 그룹의 레베스

15 x 20

300명

하스타티 15개 중대

15 x 60

900명

프린키페스 15개 중대

15 x 60

900명

트리아리, 로라리, 아켄시 각각 15개 중대(ordo)

15 x 180

2700명

일개 군단의 총 보병 숫자 (기병 제외)

 

4800명

 (※ 자료에 따라 백인대장 150명, 기수 75명도 포함시키기도 합니다만, 여기선 일반 병력수로 한정했습니다.)

 

 로마 군단의 전술은 한마디로 말해 '다중 안전 시스템(fail-safe system)'이었다. 첫 전열이 무너지면, 뒤에 있는 전열이 대신하여 싸운다. 그 전열도 무너지면 또 새로운 뒷 전열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로마군은 계속 강력한 공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단 하스타티가 적과 싸운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하스타티는 중보병 전열인 프린키페스가 있는 곳으로 물러나서 반격한다. 프린키페스에서  몇 미터 뒤에는 트리아리 전열이 있다. 프린키페스가 싸우다 밀리면, 이 트리아리 병사들이 창으로 적을 공격한다. 이 새로운 전열이 갑작스럽게 공격하면서 적을 타격을 입는다. 또 트리아리가 적과 싸운 틈을 타 프린키페스가 다시 모여 반격을 준비하게 된다.

 

 로마인들은 이 트리아리 전열을 마지막 전선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있는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 전열이 무너져 버리면 그 전투는 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트리아리의 뒷 전열은 후퇴한다. 로마인들에게 '트리아리까지 이르렀다'라는 말은 절망적인 전투 상황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fail-safe system은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적군은 가장 앞에 있는 레베스 전열도 뚫지 못하고 포위당해 무너졌다.

 

 ※ 참고 : 로마군단의 중대 배열은 바둑판 모양이다. 덕분에 부대 사이로 중대가 재빨리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우 유연한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몇가지 무기의 변화가 있었다. 위에서도 언급한 직사각형 모양의 방패인 스쿠툼scutum이 도입되었고, 야만족의 장검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청동 투구 대신에 철제 투구로 대체되었다. 이 투구는 검을 내리치면 옆으로 비껴나갈 정도로 표면이 매끄러웠다.

 전승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모두 유명한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공적으로 돌려지는데, 과연 카밀루스 혼자 투구 뿐만아니라 사각방패 모두 도입한 것인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3세기 초, 그리스의 에페이로스 왕 퓌로스Pyrros가 잘 훈련된 팔랑크스와 전투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했다. 퓌로스는 위대한 전술가였고 그의 군대 역시 훌륭했기 때문에 한때 로마는 큰 위험에 빠졌지만, 퓌로스의 군대는 병력 지원을 받기에는 너무 먼곳에 있었던 반면, 로마는 끊임없이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퓌로스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에서 졌다. 이 훌륭한 적과 싸웠던 로마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모두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사진 설명) 퓌로스의 팔랑크스

 

  같은 세기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다.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싸운 이 전쟁 역시 로마군이 이겼다. 그 뒤 포Po 강 유역에 사는 갈리아(켈트Celt)인들이 로마를 침공했지만, 로마군은 이들을 격퇴했다. 이로써 로마군은 한때 로마의 수도를 약탈했던 야만인들보다 우위에 섰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로마군은 어느 군대보다도 훌륭한 군대였다. 

 

※ 역주

::로마군 하스타티 병사들과 퓌로스의 전투 코끼리

 

 폴뤼비오스는 그가 쓴 책 '포물라 토가토룸Fomula Togatorum'에서 로마는 지중해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 썼다. 당시 로마의 현역 6개 군단은 보병 32,000명과 1,600기의 기병과 30,000명의 동맹국 보병, 2,000기의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약 로마가 이탈리아 동맹국에게 병력을 요구한다면, 보병 340,000명과 기병 37,000기를 더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이론상의 숫자인 만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로마가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2차 포에니 전쟁까지, 로마는 해마다 이러한 군단을 4개 정도 모병했다. (더 많은 군단을 모병한 것은 2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 일이다.) 처음에는 두 집정관이 한 달 간격으로 4개 군단을 지휘했다. 그러나 영토가 넓어지고 한번에 여러 곳에서 전투가 일어나자, 두 집정관이 두 군단씩 반으로 나누어 각각 따로 전투를 치뤘다. '

 

 

Plinius의 한마디: 2세기에 개편된 로마군 조직에 대한 설명은 다소 불확실한 편입니다.

 몇몇 자료들의 서술이 서로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 로마 군단 (BC 2세기) ::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희대의 전술가 한니발의 뛰어난 전술과 그의 훌륭한 군대 때문에, 로마는 전례없는 위기를 맞았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을 물리친 영웅 중 한 사람이다. 그는 트레비아와 칸나이 전투의 참패에서 로마군이 과감하게 전술을 바꿔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겨우 25세의 나이로 스키피오는 히스파니아(에스파냐)를 공격하는 로마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로마군을 철저하게 훈련했다.

 

 젊고 명민한 로마의 새 지휘관들은 그의 전술을 받아들였다. 그의 전술은 로마 군단이 가야할 길을 바꾸어놓았다. 더 이상 로마군은 군단병과 조직의 우월함에만 기대지 않고, 전장에 맞는 전술도 구사했다.

 그때까지 로마에는 뛰어난 군대가 있었지만, 이제는 위대한 지휘관을 얻었다.

 

※ 역주

::카르타고 보병과 기수

 

::카르타고의 히스파니아 인 용병

 ::포에니 전쟁 당시의 로마군

 

 

  BC 2세기에 로마군은 주목할 만한 개편이 이루어졌다. 우선 전열이 바뀌었다.

  전부터 있었던 주력군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는 여전히 있었지만, 로라리와 아켄시는 가장 앞으로 옮겨져 레베스와 함께 벨리테스로 합쳐졌다. 사실 벨리테스는 레베스와 마찬가지로 따로 전열을 형성하지 않고, 하스타티의 각 중대에 따로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은 투창으로 적을 괴롭히고,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 전열 뒤로 퇴각했다. 또 투석병과 궁수로부터 주력군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다.

 

 벨리테스 바로 뒤에 있는 하스타티는 청동 가슴받이로 무장했고, 몇몇 부유한 병사들은 사슬 갑옷(chain mail)를 입기도 했다. 이들은 투구 위에 자주색과 검은색의 된 46cm(18인치) 정도 되는 깃털장식을 달았다. 좀 더 키가 커보여서 적을 위협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스타티는 잘 손질된 창대 끝에 쇠촉이 달린 필룸pilum이라는 창을 썼다. 그리고 그동안 써왔던 투창javelin은 120cm(4피트)로 전체 길이가 짧아졌지만, 쇠로된 창촉은 21cm(9인치)로 길어졌다. 투창이 목표물에 박히면 그 충격으로 휘어지도록 설계되었는데, 적이 다시 주워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스타티 외에 다른 전열은 하스타(hasta:장창 - 필룸보다 길다)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슷한 무기를 썼다. 또 병사들은 '히스파니아 검'이라고 불렸던 글라디우스를 썼는데, 히스파니아에서 가져온 것이라서 그렇게 불렸다. 공화정 초기에 도입되었던 철제 투구가 좀 더 두꺼운 청동 투구로 다시 바뀌었다.

 

 중대 분할 역시 바뀌어, 3개의 전열(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은 각각 10개의 중대로 나뉘어졌다. 중대는 2개의 백인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백인대는 중대 오른쪽에, 두 번째는 왼쪽에 배치되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의 백인대는 60명으로 이루어져, 일개 중대는 120명 정도였다. (그러므로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의 총 병력은 각각 1200명이다.) 트리아리는 그 절반(600명)이었다.

 

 

 

 각 군단에는 6명의 군사 참모(트리부누스 밀리툼military tribunus)가 있었다. 이들은 군단 지휘관을 보좌하는 일종의 참모였다. 집정관이 모병한 군단에서는 군사 트리부누스를 집정관이 선출했지만, 다른 정무관(프라이토르praetor 따위)이 모병한 군단에서는 그들이 직접 뽑았다.

 군단에서 가장 중요한 장교는 바로 백인대장centurio였다. 이들은 용감함이나 그 외에 다른 공적을 통해 뽑혔는데, 실로 군단의 등뼈와 같은 존재였다. 백인대장은 자신이 지휘하는 백인대와 함께 지내면서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통제하고 훈련시키며, 전쟁터에서는 병사들을 이끌었다. 이들은 병사들에게 엄격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론상 일개 로마군단에는 300기의 기병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들 기병은 10개의 연대(라틴어로는 투르마turma, 영어로는squadron)로 분할되어 있었다. 각 연대에는 지휘를 맡은 3명의 데쿠리오decurio가 있었다.

 말은 매우 값비싸서 부유한 사람들만이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누미디아나 갈리아 인 기병보다 좋지 않았기 때문에 로마군은 종종 기병은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다.

 

 로마군은 기병 뿐만 아니라, 다른 병종(예를 들어 궁수, 투석병 등)에서도 동맹국의 지원을 받았다. 전투시 이들은 로마군과 같은 전열에서 싸웠다. 이들은 로마 장교의 밑에서 복무했지만, 자세한 사실은 알려지지 않는다. 동맹군은 로마군 전력에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전리품 분배에서 로마군에 견주어 불리했기 때문에 불만이 생겼다.

 

   

 로마인에게 병역은 시민의 의무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모든 장비는 자비로 부담해야 했고 급료도 없었다. 그러나 482-474년에 로마 북쪽에 있었던 큰 도시 베이Veii와 전쟁하는 과정에서, 병사들에게 급료가 지불되었다. 그러나 이런 급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병사들이 얻을 수 있는 주된 보상의 원천은 역시 전리품이었다. 한 장군이 승리했을 때, 그는 엄청난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얼마간은 국고로 바쳤고, 신전 건설과 같은 유명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했지만, 병사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전리품을 나눠주었다. L.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장군이 마케도니아 왕 페르세우스를 격퇴한 뒤, 150,000명에 달하는 에페이로스 사람을 노예로 만들었던 주된 이유는, 전리품을 원하는 병사들에게 이들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것이었다.

 

 카르타고와 히스피니아, 그리스, 오리엔트에 이르는 큰 정복이 끝나자, 상업 붐이 일어났고 많은 로마인들이 교역 사업에서 일했다. 이들에겐 군사 복무가 귀찮은 일이 되었다. 그 동안의 전쟁으로 병력 대상자(특히 자영농)가 줄어들었고, 더 이상 막대한 전리품을 가져오는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힘겨운 지방 반란이 계속되었다. 아직 별로 개발되지 않은 히스파니아에서 복무하는 것은 특히 평판이 나빴다.  BC 152년, 평민들의 압박으로 이때까지 이어진 모병 방식이 바뀌어, 제비뽑기로 뽑힌 사람이 6년동안 군대에 복무하도록 하였다.

 

 또한 병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동맹군을 더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히스파니아의 누만티아 점령이나, 그리스에서 벌어진 퓌드나Pydna 전투에서 동맹군이 승리에 크게 기여했다. 때로는 한 전투에 참여한 군대에서 로마군의 비중은 겨우 1/3이고, 나머지는 동맹군이 차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부유한 상류층은 더욱 부유해지고 부패하여, 유능한 지휘관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라쿠스 형제는 징집할 수 있는 병력 대상자를 늘리기 위해, 군대에 복무한 사람에게 땅을 주고 동맹국에 참정권을 부여하고자 했지만 암살당해 실패했다. 로마는 불안정에 빠졌고,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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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동맹(Holy League)***





교황 피우스 5세

지중해를 위협하는 오스만 함대에 맞서 에스파냐, 베네치아, 제노바, 말타 기사단들이 힘을 합쳐 연합함대를 구성해 투르크에 대항하는 신성동맹을 만들것을 제의(교황은 신성동맹 결성당시 자신의 개인재산을 사용해 12척의 갤리선을 지원합니다.)





펠리페 2세


신성동맹 결성 당시 100척의 갤리선과 3만명의 병사들을 지원





오스트리아의 돈 후안

본명 - 후안 바우티스타 바스케스(Juan Bautista vazquez)

전 에스파냐 국왕인 카를로스 5세의 서자이자 당시의 국왕이었던 펠리페 2세의 이복동생으로 신성동맹 함대의 제독. 레판토 해전에서는 함대의 중앙(63척의 갤리선)을 지휘했습니다.





카를로스 5세





세바스티안 베니에로


당시 크레타 총독이며 나중에 베네치아의 총독을 역임하는 인물로 이 당시 이미 70이 넘은 노인이었습니다. 전투 당시에는 돈 후안과 함께 중앙 함대를 지휘합니다.





마르코 안토니오 콜론나


교황함대의 사령관, 돈 후안과 함께 신성동맹의 중앙을 지휘했으나 전투 중 사망합니다.





돈 알바로 데 바산


산타 크루즈의 후작, 전투에 투입되지 않은 예비대인 35척의 갤리선을 지휘. 해적출신 함장인 울루치 알리가 안드레아 도리아가 지휘하는 우익함대와 중앙과의 간격이 크게 벌어진 틈을 노려 투르크 함대와의 전투에 지친 중앙의 후면을 집중 공격하자 자신의 갤리선들을 이끌고 이를 구원해냄.


돈 후안 데 카르도나

후방에서 돈 알바로 데 바산과 함께 예비함대인 8척의 갤리선을 지휘함.








잔 안드레아 도리아


제노바의 용병대장. 신성동맹의 우익(제노바와 교황령의 배들로 구성된 64척의 갤리선)을 지휘했으나 신성동맹의 중앙함대에서 지나치게 오른쪽으로 떨어져있던 탓에 그 틈을 노린 울루치 알리의 역습을 허용하게 됨. 이로 인해 전투가 끝난 후 자신의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 정면대결을 피하려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동맹군들의 의혹과 빈축을 사게됨.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


1486년에서 1501년끼지 베네치아의 총독을 역임했던 인물, 신성동맹 함대의 좌익(63척의 갤리선)을 지휘, 모하메드 시로코가 지휘하는 오스만 함대의 좌익에게 처음에는 고전하나 곧이어 벌어지는 함상백병전에서 전세를 만회, 적함대를 전멸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전투 당시 눈에 입은 치명상으로 며칠 후에 사망합니다.





안토니오 브라가디노, 암브로조 브라가디노


베네치아 공화국 소유의 갈레아스선 6척을 지휘, 레판토 해전당시 선두에 나섰던 갈레아스선들의 활약으로 오스만 함대의 3/1이 흩어지거나 박살났다고 합니다.

사진)베네치아 갈레아스(La Galeazza veneta)

1571년의 레판토 해전에서 신성동맹 함대의 선봉을 담당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갈레아스 선입니다.

갈레아스는 기존의 갤리선을 더욱 대형화시키고 함포의 탑재량을 대폭으로 늘린 선박입니다. 이 배의 선폭은 갤리선보다 넓었다고합니다. 그리고 동체가 깊어서 배 앞쪽에는 오늘날의 선회 포탑에 해당하는 구조물을 세울 수 있었고, 이 때문에 "해상 포대"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습니다.(너무 크고 무거웠기 때문에 전투현장까지 작은배들에 견인되서 항해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갈레아스선에는 갤리선에 장착되는 통상적인 장식적 이물 대신, 강력한 충각이 새 부리처럼 달려 있었고 이물의 높이를 낮춰서 적 함대의 소형 선박들을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는군요. 50문 가량의 중포를 장착했으며 좌우현과 고물 역시 중무장했고 노잡이들은 안전하게 갑판 밑으로 들어가 있었으며 갑판 위에서는 전투원들이 작전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일반적인 갈레아스에는 20개 가량의 노가 있었고 노 하나를 7명의 노잡이들이 저었다고 합니다.전투시 노잡이들은 양 방향으로 배치되어, 약 17m 길이의 노를 밀고 당기면서 저었습니다.








***오스만 함대***





술탄 셀림 2세








무에친자드 알리 파샤


투르크 함대의 제독, 알제리의 베이이자 지중해를 휩쓸고 다니던 무슬림 해적의 우두머리. 레판토 해전당시 오스만 함대의 중앙(96척의 갤리선을 지휘함). 전투 당시 열심히 분전했으나 결국 화승총 탄환에 머리를 맞고 쓰러져 그의 머리는 장창에 꿰어져 적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은 돛대에 매달렸다고 함.





울루치 알리


투르크 함대의 좌익(93척의 갤리선)을 지휘, 기독교 함대의 우익과 중앙이 벌어진 틈을 타 치열한 전투에 지친 중앙함대의 후위를 기습하여 위기에 빠트렸으나 후방에서 대기하던 예비함대 40여척의 반격을 받고 퇴각합니다. 당시 레판토 해전에 참가했던 오스만 제독들 중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로 이듬해인 1574년 함대를 재건해 튀니지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모하메드 시로코


오스만 함대의 우익(56척의 갤리선)을 지휘, 당시 아고스티노 바르바리고가 지휘하던 신성동맹의 좌익을 그리스 본토인 아이톨리아까지 밀어붙이는 등 선전하지만 얼마 후 벌어진 함상백병전에서 단병접전에 능한 에스파냐 병사들과 화승총의 연발사격을 받고 열세에 처하기 시작했고 결국 시로코도 목이 잘려 돛대에 걸리는 신세가 되고맙니다.

 

출처 - 역사 속의 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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