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랑크스를 폐지하면서 로마인은 그들의 타고난 융통성을 보여주었다. 이제 로마 군단은 여러 개의 전열戰列(line)로 이루어졌다.

위와 같이 레베스,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 로라리, 아켄시 이렇개 하여 모두 6개의 전열이 있었다.
가장 앞쪽에 있는 레베스는 창과 몇 개의 투창으로 무장한 경보병이었다. 바로 뒤의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하스타티가 있었다. 이들 중 2/3은 중무장하고 유명한 직사각형 방패(스쿠툼)을 들었지만, 나머지는 창과 투창만 들었다. 레베스는 하스타티에 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기에 따라서 로마군은 5개의 전열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 역주

::하스타티 병사(중무장한 창병) |
하스타티 뒤에있는 두 전열인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는 제1계급 출신이었다. 프린키페스는 장년층으로 이루어진 전투경험이 많은 노련한 병사들로 하스타티와 달리 모두 중무장했다. 트리아리는 프린키페스보다 나이가 더 많은 베테랑들이었다. 이들은 하스타티보다 더 중무장했다.
로라리는 전투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었고, 아켄시는 혹시 모를 결원을 채우기 위한 예비병력이다. 이들은 군단에서 가장 하찮은 부대로 취급받았다.
로라리, 아켄시는 각각 4,5계급 출신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전투에서 그다지 큰 역할을 하지 못했고, 윗 계급 출신의 중보병인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가 로마군의 주력부대였다. 때문에 로마군은 사실상 3개의 전열로 이루어진 셈이다.
각 전열은 '중대(마니풀루스)'로 나뉘어져 있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를 이루는 중대는 각각 15개였다. 일개 중대는 병사 60명, 백인대장 2명, 벡실룸 기수(旗手:벡실라리우스) 1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레베스는 하스타티의 각 중대마다 20명씩 배속되어 있었다.
트리아리와 로라리, 아켄시 역시 각각 15개 중대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앞에서 말한 중대 병력의 3배였다. 즉 트리아리, 로라리, 아켄시의 중대는 각각(60명이 아니라 그 세 배인) 병사 180명, 백인대장 6명, 기수 3명이었다. 이러한 중대를 '오르도ordo'라고 불렀다.
※ 역주
::마니풀루스manipulus: 영어로는 maniple. 공화정 시대의 중요한 군 편제 단위.
::벡실라리우스vexillarius: 영어로는 standard-bearer. 군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을 뜻함 |
역사가 리비우스의 기록으로 추정한 일개 군단의 보병 병력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하스타티에 각각 배속된 15개 그룹의 레베스 |
15 x 20 |
300명 |
하스타티 15개 중대 |
15 x 60 |
900명 |
프린키페스 15개 중대 |
15 x 60 |
900명 |
트리아리, 로라리, 아켄시 각각 15개 중대(ordo) |
15 x 180 |
2700명 |
일개 군단의 총 보병 숫자 (기병 제외) |
|
4800명 |
(※ 자료에 따라 백인대장 150명, 기수 75명도 포함시키기도 합니다만, 여기선 일반 병력수로 한정했습니다.)
로마 군단의 전술은 한마디로 말해 '다중 안전 시스템(fail-safe system)'이었다. 첫 전열이 무너지면, 뒤에 있는 전열이 대신하여 싸운다. 그 전열도 무너지면 또 새로운 뒷 전열이 나온다. 이런 식으로 로마군은 계속 강력한 공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단 하스타티가 적과 싸운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하스타티는 중보병 전열인 프린키페스가 있는 곳으로 물러나서 반격한다. 프린키페스에서 몇 미터 뒤에는 트리아리 전열이 있다. 프린키페스가 싸우다 밀리면, 이 트리아리 병사들이 창으로 적을 공격한다. 이 새로운 전열이 갑작스럽게 공격하면서 적을 타격을 입는다. 또 트리아리가 적과 싸운 틈을 타 프린키페스가 다시 모여 반격을 준비하게 된다.
로마인들은 이 트리아리 전열을 마지막 전선이라고 생각했다. 앞에있는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 전열이 무너져 버리면 그 전투는 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트리아리의 뒷 전열은 후퇴한다. 로마인들에게 '트리아리까지 이르렀다'라는 말은 절망적인 전투 상황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 fail-safe system은 매우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적군은 가장 앞에 있는 레베스 전열도 뚫지 못하고 포위당해 무너졌다.
※ 참고 : 로마군단의 중대 배열은 바둑판 모양이다. 덕분에 부대 사이로 중대가 재빨리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매우 유연한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몇가지 무기의 변화가 있었다. 위에서도 언급한 직사각형 모양의 방패인 스쿠툼scutum이 도입되었고, 야만족의 장검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청동 투구 대신에 철제 투구로 대체되었다. 이 투구는 검을 내리치면 옆으로 비껴나갈 정도로 표면이 매끄러웠다.
전승에 따르면. 이러한 변화는 모두 유명한 푸리우스 카밀루스의 공적으로 돌려지는데, 과연 카밀루스 혼자 투구 뿐만아니라 사각방패 모두 도입한 것인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3세기 초, 그리스의 에페이로스 왕 퓌로스Pyrros가 잘 훈련된 팔랑크스와 전투 코끼리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했다. 퓌로스는 위대한 전술가였고 그의 군대 역시 훌륭했기 때문에 한때 로마는 큰 위험에 빠졌지만, 퓌로스의 군대는 병력 지원을 받기에는 너무 먼곳에 있었던 반면, 로마는 끊임없이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퓌로스는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에서 졌다. 이 훌륭한 적과 싸웠던 로마의 지휘관과 병사들은 모두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

(↑사진 설명) 퓌로스의 팔랑크스
같은 세기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났다.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싸운 이 전쟁 역시 로마군이 이겼다. 그 뒤 포Po 강 유역에 사는 갈리아(켈트Celt)인들이 로마를 침공했지만, 로마군은 이들을 격퇴했다. 이로써 로마군은 한때 로마의 수도를 약탈했던 야만인들보다 우위에 섰음을 보여주었다. 이제 로마군은 어느 군대보다도 훌륭한 군대였다.
※ 역주

::로마군 하스타티 병사들과 퓌로스의 전투 코끼리 |
폴뤼비오스는 그가 쓴 책 '포물라 토가토룸Fomula Togatorum'에서 로마는 지중해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 썼다. 당시 로마의 현역 6개 군단은 보병 32,000명과 1,600기의 기병과 30,000명의 동맹국 보병, 2,000기의 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만약 로마가 이탈리아 동맹국에게 병력을 요구한다면, 보병 340,000명과 기병 37,000기를 더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이론상의 숫자인 만큼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로마가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제2차 포에니 전쟁까지, 로마는 해마다 이러한 군단을 4개 정도 모병했다. (더 많은 군단을 모병한 것은 2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 일이다.) 처음에는 두 집정관이 한 달 간격으로 4개 군단을 지휘했다. 그러나 영토가 넓어지고 한번에 여러 곳에서 전투가 일어나자, 두 집정관이 두 군단씩 반으로 나누어 각각 따로 전투를 치뤘다. '
Plinius의 한마디: 2세기에 개편된 로마군 조직에 대한 설명은 다소 불확실한 편입니다.
몇몇 자료들의 서술이 서로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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