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패셜]'메이저'에서 '인디'를 실현시키는 배우

Philip Seymour Hoffman
3류 사기꾼 아버지와 미모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수차례 버림받았던 기억을 안고 있는 사람, 잡지 예술부 에디터로 일하면서 마릴린 먼로와 인터뷰하고 각종 이슈를 세상에 던졌던 동성애자, 오드리 햅번의 영화로 유명한 ‘티파니에서의 아침을’의 작가 카포티는 사망하기 두 달 전 이런 말을 남겼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내가 죽으면 나 같은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요.” 그의 전기적 영화 ‘카포티’의 주연을 맡아 아카데미, 골든글러브, 미국배우 조합상, LA 비평가상을 휩쓴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카포티 역할을 처음 제안 받았을 때 조금 당황스러웠다. 유년시절 어렴풋한 기억 속의 카포티는 자신과 그 어떤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예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같은 배우를 발견하기란 무척 어려울 것’이라는 점에서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 발생한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으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란 길고도 어려운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좋은 소식 앞에서 걱정되는 것이 있는데, 그가 ‘아카데미’라는 수식어에 종속되기에는 너무 큰, 혹은 너무 귀중한 배우라는 사실이다. 수상목록을 더 살펴보자. 보수적인 퇴역 군인과 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는 여장남자의 소통 가능성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플로리스’에서 여장남자 역할을 맡아 로버드 드니로와 호흡을 맞췄던 그는 이 영화로 1999년 전미비평가협회, 전미배우협회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주연은 아니었지만 로버트 드니로를 감당해 낼 만큼의 에너지를 가진 조연이었고, 다른 영화들에서도 증명됐듯이 영화를 자기 것으로 흡수해 더 특별하고 진실된 것으로 만들 줄 아는 배우였다.
사람은 원래 변두리적인 존재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1967년 7월 23일 뉴욕의 로체스터에서 태어나 판사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고등학교 시절 연극반 활동으로 진로를 결정한 후, 뉴욕대학에서 드라마를 전공했고 91년 인디영화 ‘트리플 보기 온 어 파 파이브 홀’로 데뷔했다. 그때부터 작품 활동을 이어갔는데, 대중이 그를 새롭게 발견한 것은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부기 나이트’였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던 청년이 포르노 배우가 돼가는 과정을 리얼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포르노’에 대한 편견을 전복시키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순수한 사람들을 따라간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주인공을 사랑하는 동성애자 카메라맨 역할이었는데 그의 눈빛, 행동 하나 하나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전달하고도 남았다. 세상이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혹은 정반대의 시선으로 주목받는 폴 토마스 엔더슨 감독은 이를 포함해 총 네 작품에서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과 함께 작업했다. 그렇게 그는 인디 영화계의 아이콘으로 자리를 잡았고, 연기력 하나로 ‘레드 드래곤’이나 ‘콜드 마운틴’ 같은 메이저 영화의 호출을 받는다.
인디 영화에 어울리는 배우였던 그는 메이저 영화에서도 변두리적인 인물을 주로 연기했다. 흔히 하는 말로 정상적이거나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에 만족스럽지 않은 캐릭터들이었다. 연구를 위해 광적으로 허리케인을 뒤쫓았던 ‘트위스터’나, 학생과 사랑에 빠져버린 내성적인 고등학교 선생을 연기한 스파이크 리 감독의 ‘25시’ 등 예외가 없었다. “나는 사람이란 원래 변두리적인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다. 창조적이지 않거나 특별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것이 내가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카포티가 유명인이었다는 점이 예외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카포티를 ‘공인이면서 아웃사이더인 인물’로 해석했다. 유명했으나 외로웠던 캐릭터를 연기하기위해서 더 기민해야 했다. 그가 ‘카포티’ 이후에 ‘미션 임파서블 3’를 선택하자 ‘블록버스터를 계속 할 것이냐, 말 것이냐’부터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의 답은 간단하다. “물론,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은 역할도 있지만 연기를 하는 것에 있어 많은 계획을 세우지 않고, 따라서 다음 작품이 어떤 것이 될지는 순전히 그때의 감정 상태에 달렸다.” ‘미션 임파서블 3’ 에서의 캐릭터에도 분명 개인적으로 끌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그는 스스로의 시작을 대중들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 찾는다. 바로 92년 작품 ‘여인의 향기’다. 알파치노의 탱고로 유명한 이 작품에서 그는 알파치노와 우정을 나눴던 크리스 오도넬의 학교친구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 “그 당시 나는 배우로서 직업을 가질 수 없었을 뿐더러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하기 힘들었다. 레스토랑의 웨이터 자리에서 해고됐고, 스파의 경호원 직에서도 쫓겨나 식품 판매점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여인의 향기’에 캐스팅 됐고, 이 기회가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는 않지만 내 연기는 거기에서 시작됐다.”
‘성공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단언하는 그에게 성공이란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이고, 그 일을 잘 해내는 것이고, 꿈을 향하는 것’이다. 아카데미 수상이라는 성공이 그가 가진 연기에 대한 열정에 비하면 사소한 것이 될 수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말이다. 그는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는 연기를 즐긴다. 대본을 보면서 혼자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저 바닥까지 가는 과정. 그렇게 나 아닌 것들을 발견하고 창조적인 요소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이 그가 연기를 하는 이유다. 연기를 할 때 그는 다른 때보다 더 개인적이 되고, 더 많이 개방하고, 더 깊이 집중한다. 그렇게 다른 인물이 되는 작업이 이뤄진다. 카포티의 전기 작가 젤라드 클라크를 찾아가 끊임없이 묻고, 카포티의 독특한 고음을 재현하기 위해 마릴린 먼로와의 인터뷰 테이프를 끊어질 때까지 들었다는 일화는 충분히 상상가능하다.
그는 브로드웨이에서의 연극무대 활동도 즐긴다. 이미 여러 작품에 출연했고, 연극계의 아카데미라 할 수 있는 토니상에 두 번이나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현재 뉴욕 극단에 공동 예술감독으로 있으면서 작품을 연출하기도 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배우에게 줄 수 있는 인위적인 거부감이 있다면, 연극은 새로운 자극과 발견이 가능한 무대라고 그는 말한다.

너는 연기를 사랑해야만 한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의 우상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 폴 뉴먼, 메릴 스트립, 크리스토퍼 월큰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 우상이 누구냐고 묻는 일이 어색해지는 것은, 그 자신이 할리우드 젊은 연기자들의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히기 때문이다. 2003년에는 콜롬비아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학생들에게 남긴 많은 조언들이 인상적이다.

“공부해라. 좋은 선생님을 찾아서 함께 연기해라. 연기를 위해 연기해라. 돈과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는 그것을 사랑해야만 한다.”

“배우는 자신의 연기하는 ‘사람’에 대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분류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정직하고 풍부하게 표현하고, 창조적으로 연기해야한다. 그 캐릭터에 대한 생각으로 넌덜머리가 날지라도.”

알콜중독으로 생을 마감한 카포티를 연기한 까닭에 영화 속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연신 술을 들이키지만 실제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22살 때 끊었다고. 그는 그때를 “나는 22살이었고, 인생에 있어 패닉상태였다”고 회상한다. 그는 자신의 조언에 걸맞게 카포티라는 인물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다양한 측면을 가진 인물이어서 힘든 점이 많았지만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노력의 결과인 아카데미 수상이 물론 흥분되고 기쁘다. 한가지, 잘 알려지진 않았으나 프로듀싱 한 첫 작품이기에 개인적으로 의미가 더 크다고. ‘카포티’ ‘미션 임파서블 3’를 통해 오랜만에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풍요’를 누리고 있는 한국 관객 중 한 사람으로서, 여자친구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과 함께 잠깐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그를 채근하고 싶다. 당신의 감정이 어느 길을 택하던 그 길을 따르겠노라고.

Filmography

2006
미션 임파서블 3 Mission: Impossible III

2005
엠파이어 폴스 Empire Falls
스트레인저스 위드 캔디 Strangers With Candy
카포티 Capote

2004
폴리와 함께 Along Came Polly

2003
오닝 마호니 Owning Mahowny
콜드 마운틴 Cold Mountain

2002
러브 리자 Love Liza
25시 25th Hour
레드 드래곤 Red Dragon
펀치 드렁크 러브 Punch-Drunk Love

2000
미스터 헐리웃 State And Main
올모스트 페이머스 Almost Famous

1999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
매그놀리아 Magnolia
플로리스 Flawless

1998
몬타나 Montana
해피니스 Happiness
패치 아담스 Patch Adams
위대한 레보스키 The Big Lebowski

1997
부기 나이트 Boogie Nights

1996
리노의 도박사 Sydney:Hard Eight
트위스터 Twister

1994
노스바스의 추억 Nobody’s Fool
남자가 사랑할 때
When A Man Loves A Woman
겟어웨이 The Getaway

1993
위험한 행운 Money For Nothing
조이 브레커 Joey Breaker
쟈니와 미씨 My Boyfriend’s Back

1992
마이 뉴 건 My New Gun
기적 만들기 Leap Of Faith
여인의 향기 Scent Of A Woman

1991
트리플 보기 온 어 파 파이브 홀
Triple Bogey On A Par Five Hole

육진아 기자 yoo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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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해석이 되나요]사랑의 장애물은 오직 하나

세이 예스 Dis-Moi Oui

사랑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뭘까 고민 중이다. 나이, 국가, 성별, 타인의 시선, 부모의 기준, 경제적 조건, 취향, 사회가 요구하는 스테레오타입, 시간. 소아과 의사 스테판이 길 잃은 열두 살 소녀를 하룻밤 재워준 것을 시작으로 사랑에 빠져버리는 영화 ‘세이 예스’도 다양한 장애물을 등장시킨다. 일단 나이 차이가 심해 둘의 인격이 곤경에 처할 수 있고, 열두 살의 대범한 소녀 에바가 혈전증이란 병을 앓고 있어 함께 오래 오래 행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스테판은 흔들린다. 멀쩡하게 성숙한, 그러니까 아름다운 여인을 뒤로한 채 에바와의 사랑을 키워나간다. 에바는 스테판의 사랑과 함께 커간다. 이 해피엔딩의 시점에서 흐뭇해하며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이 있다. 이 영화에는 진짜 사랑의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서 나열한 것들은 사실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물론 그들은 두렵고, 고통스럽다. 쓰라린 상처와 울먹일만한 아픔들이 하루하루 재생산된다.
그렇지만 이건 장애물이 아니다. 별거 아니다. 혹 발끈하신다면 한마디 하겠다. “당신은 사랑하고 있지 않냐”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엔 사랑한다. 장애물인 척 하는 많은 것들을 부채질 삼아 더 활활 타오른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말은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와 같은 말장난이다. 이건 죽도록 사랑했다는 말이다. 죽더라도 미련 두거나 추억할만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결국엔 사랑했다는 말이다. 오해는 마시라. 본인은 가수 김광석과 시인 김소월을 존경한다. 단지 사랑하지 못해서 열 받은 것뿐이다. 사랑의 장애물은 단 하나,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로맨스에 관련해서만 유독 발달한 자신의 상상력을 경멸하고, 짚신도 제 짝이 있다는 말에 마음껏 조소하며, 온갖 인연들과 가능성들을 부정하고, 패배감 내지는 허무감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리곤 그쯤 어디선가 ‘사랑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는 것이다. ‘세이 예스’라는 영화제목에 설레다가 엔딩크레디트에서 씁쓸한 웃음을 짓는 것이다. 봐라. 비참하지. 그러니 이 순간만큼은 사랑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해 하길 바란다.

육진아 기자 yoo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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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뉴스]세계 최대 규모 온라인 영화제 세네프 개막 外

세계 최대 규모 온라인 영화제 세네프 개막●

서울영화제의 온라인 행사이자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온라인영화제 서울넷페스티벌이 시작됐다. 이번 행사는 오는 7월 31일까지 75일 동안 서울 영화제 사이트에서 열리며, 동유럽에서 남미에 이르기까지 총 20개국에서 모인 89편의 영화가 경쟁부문에서 상영된다. 프로그램은 크게 경쟁과 비경쟁 두 부문이 있으며, 경쟁부문은 다시 국제경쟁부문인 ‘디지털익스프레스’와 국내경쟁부문인 ‘넥스트스트림’으로 나뉜다. 시상은 각각 참신하고 실험적인 작가들에 주목하는 ‘시네마 포맷’과 ‘웹작품’부문에서 이뤄진다. ‘인터렉티브 광고 특별전’을 비롯해 여섯 가지 기획전이 준비돼 있는 비경쟁부문 ‘퍼스펙티브

서울독립영화제가 전국으로 찾아갑니다!●

5월부터 8월까지 대구를 시작으로 서울, 삼척, 강릉, 전주, 청주, 대전, 춘천, 부산, 제주, 광주, 인천을 찾아가는 ‘서울독립영화제 2005 수상작 순회 상영회’가 열린다. 일회적인 영화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서울에 집중된 독립영화상영을 확대한다는 목적에서 시작된 이 행사는 올해로 3회를 맞는다. 순회 상영을 통해 지역 관객들에게 새로운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번 상영회 슬로건 ‘일취월장’ 아래 대상 수상작 ‘안녕, 사요나라’, 최우수상 수상작 ‘낙원’ 등이 상영될 예정이다. 순회 지역은 추후에 확대될 수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 www.siff.or.kr을 참고.

제10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오는 24일부터 28일까지 163편의 애니메이션을 즐길 수 있다.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개막작 ‘아스테릭스와 바이킹(사진)’을 시작으로 공식경쟁부문과 특별초청부문을 펼치며, 공식경쟁부문은 장편, 일반단편, 학생단편으로 나누어 상영한다. 특별초청부문에는 회고전 및 ‘아시아의 빛’ ‘시카프 시선’ ‘심사위원 특별전’이 준비돼 있어 눈길을 끌며, 16가지 주제로 분류된 전시가 서울무역전시장에서 열려 기대를 모은다. 자세한 내용은 www.sicaf.or.kr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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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α]영화적 감수성,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다

‘연애시대’

최근 한 회도 빠짐없이 시청하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사랑을 믿으라’고 떠드는 드라마들 속에서 외롭게 ‘사랑은 늘 아프다’고 조용히 말하는 ‘연애시대’다. 헤어지고도 사랑하는 이상한 관계, 은호와 동진의 이야기가 왠지 촉촉하게 마음에 스며든다. ‘영원히 사랑해’나 ‘너 없인 못 산다’ 등의 닭살스런 멘트 대신 은유하고 축약하는 대사들은 귀에 가득 차고, 아슬아슬 애정의 경계선을 왔다 갔다 하는 미묘함이 못내 불안하다.
드라마 보다는 영화에 익숙하기에 영화 감독 한지승이 연출한 ‘연애시대’가 더 편한지도 모르겠다. 영화 같은 드라마이자 절대로 영화 같지 않은 녀석이니까. 매일같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로망에 가깝다. 그런데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 같다. 드라마가 가진 단점을 보완하고 영화적 이야기를 풀어내는 ‘연애시대’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조합이다. 어찌 보면 허진호 감독 같은 잔잔한 감성이, 또는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작가만의 톡톡거리는 산뜻함이 담겨 있다. 이야기 방식으로는 스릴러에 가깝게 주인공인 은호와 동진의 헤어짐에 대해 조금씩 보여주고, 그들의 속마음도 삐걱대는 미닫이 문처럼 보였다 말았다 한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의 ‘머뭇거림’이다. 때론 답답하리 만큼 우유부단한 그들은 실은 서로를 ‘너무’ 아끼고 있어서 떠날 수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같이 할 수도 없어서 적당한 거리를 찾지 못하고 서로의 곁을 배회한다. ‘스토리 오브 어스’처럼 이혼한 커플이지만 그렇다고 해피엔딩을 찾기엔 무언가 마음에 걸린다. ‘봄날은 간다’처럼 성숙하고, 홀연히 안녕할 수 있을 만큼 서로 강렬하지도 않다. 그저 쉽게 말하자면 ‘인연’이기에, 빨간 줄이 서로 이어진 채 태어난 영혼처럼 사랑한다는 것이 어색하지 않는 커플이다. 머뭇거림이란 어쩌면 드라마에게는 진부하고 지루한 소재이지만 영화적 이야기로는 무리가 아니다. 긍정적 의미의 하이브리드로서 ‘연애시대’는 가히 성공적이다. 게다가, 종종 영화가 갖지 못해 외면당하는 ‘현실적인 감수성’까지 담고 있으니 말이다.

유희정 프리랜서 elegy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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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3rd League]당신의 가장 큰 두려움은 무엇인가요

에너지는 순환한다.
감독 장은경 시간 10분 장르 판타지, 호러 년도 2004
우리의 여름을 서늘하게 만들어 줄 공포영화에 대한 예의로, 본격적인 시즌에 들어가기에 앞서 ‘무서움’에 대해 논해보기로 하자.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기준은 개인차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제대로 ‘리얼’한 것이나 제대로 ‘언 리얼’한 것에서 공포를 느낀다.
‘에너지는 순환한다’는 현실과 비현실 중간쯤에 위치한 영화다. 주인공과 주인공이 살고 있는 세계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문을 연다거나 닫는 사소한 행위에 의해 이어지는 시퀀스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문을 열자 복면을 한 닌자가 흉기를 내리치는 악몽을 꾼 소녀, 돌돌 말은 이불로 자신의 몸을 감싼 채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문이 열리고, 애타게 찾던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무사히 안식처에 도달했다고 생각한 소녀, ‘엄마~’를 외치며 품에 와락 달려드는데 그녀의 몸을 관통하는 쇠꼬챙이. 이건 완전히 ‘아직도 내가 니 엄마로 보이니’ 버전이다. 소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은 붉게 물들어 가고, 쇠꼬챙이가 만든 상처의 구멍은 점점 커져만 간다. 그런데 이것도 꿈이다. 찜찜한 기분은 접어두고 소녀는 음악에 맞춰 가볍게 몸을 푼다. 갑자기 음악이 정지되면서 아까 그 닌자가 나타나고, 거실은 순식간에 격전장으로 둔갑한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우산을 가지고 닌자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던 소녀는 닌자의 반격으로 피투성이가 된다. 이런 식으로 당했다 싶으면 현실로 돌아오고, 살았다 싶으면 또 다른 악몽과 마주하게 되는 패턴이 반복된다. 접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존재하고, 그 상황이 끊임없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의 공포를 이 영화는 ‘에너지’라 부른다. 마지막 악몽을 끝으로 오프닝을 장식했던 부엉이가 다시 나타나는 엔딩 신에서 우리는 알게 된다. ‘에너지는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순환한다’는 사실을. 어째 좀 오싹하지 않은가.
장영엽 학생리포터 schkolade@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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