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탄생 - 해방 한국전쟁기 한국인의 질병과 위생 의료
전우용 지음 / 이순(웅진)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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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75만 여명의 일본인이 조선을 빠져나가고 정치, 경제 등 사회 전 분야가 대거 열리면서, 새로운 삶과 꿈에 부풀어 유랑하는 군중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추위, 굶주림, 비위생적인 생활환경 속에서 미생물의 번식도 활발해졌고, 두창, 티푸스, 콜레라 등은 물론, 결핵, 성병, 마약중독, 기생충 감염, 나병, 정신질환이 창궐했으며, 이념 대립, 사회 인프라 부족으로 각종 사고와 테러도 끊이지 않았다.  

  미군정기, 행정의 토대가 취약한 상황에서 치안과 위생 행정이 적발, 차단, 격리, 제거의 유사한 목표 아래 취급되었고, 초기에는 경찰이 위생 방역 등을 담당했으며, DDT세례가 수시로 이루어졌다. 미군은 자국 군인의 안전 보호를 위해 모든 사회 문제를 보건 문제로 취급한 데 비하여, 한국인들은 먹고 사는 것이 먼저였으므로, 보건위생을 부차적인 사안으로 취급했다.  

  해방 이후 좌익, 우익 모두 보건의료 체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못한 상황에서 한국인 보건의료정책의 책임자였던 이용설은 제도나 시설보다는 인력에, 환자보다는 의사에, 의료 수요보다는 의료 공급에 관심을 쏟았다. 서양식 의료를 제공한 병원은 일본 제국 의료와 결합한 병원, 미국 선교회에 의해 설립된 병원, 조선과 대한 제국 정부가 설립한 국립 병원들이 있었는데, 미군정기, 미군은 의사가 부족한 상황이므로 병원을 늘릴 필요가 없다고 보고, 의사의 자질 향상을 우선 과제로 꼽았다.  

  그러나 의사들은, 점차 하는 일은 많으나 박봉인 관공립병원보다는, 의료 수요 증가에 따라 진료소를 차리는 것을 선호했고, 개업의사 전성시대를 열었다. 국공립병원의 공공성이 열악해지면서, 힘 있는 부서들이 운수병원, 국민보건병원, 경찰 병원 등 독자적으로 병원을 개설했다. 공공의료 와해에 대한 여론의 분노를 무마시킬 대안으로 보건소가 제시되어, 미군정이 주요도시 6곳에 국립 보건소를 설치했으나, 이 역시 미흡했으며, 보건소법이 제정되었으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사문화되었다.  

  농어촌에서는 한지의사들이 비싼 치료비를 받고 효과가 의심스러운 방법으로 치료를 시행했으며, 미군정이 주요 병원에 의약품을 원조했으나 통제가격으로 자유판매 한다는 원칙 하에서 오히려 약값이 치솟고, 가짜약이 판을 쳤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문명의 시혜자임을 강조하기 위해 양의들에게 희소가치를 부여했고, 전통 의사들은 의생으로 이름을 붙이고 식민지 보건의료 행정의 말단에 배치했다.  

   의사의 자격은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사람, 외국의사로 총독부의 인정을 받은 사람, 관 지정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 개인 병원에서 조수로 일하다 어깨 너머로 배워 의사가 된 사람 등이 뒤섞여 의사 자격이 달라 서로 차별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터, 이에 미군정은 의학교육을 미국식 기준으로 표준화하려 했다. 특히 전문학교와 대학을 통합하려는 시도 속에서 의학교육의 연한을 통일하겠다는 구상이 국립 서울대학교 설치안으로 확정되면서, 논리적, 이념적, 물리적 충돌이 사회 전반을 휩쓸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 유일의 의사 단체였던 조선의사회는 해방 이후 좌우익의 대립이 있었으나, 이념적 통합을 이룬 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대한의학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분과 학회 구성에 주력했다.  

  한편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추위, 굶주림, 헐벗음이 시작됐고, 전염병이 더 창궐했으며, 나병, 결핵, 성병 등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미군은 전쟁 중에 헬리콥터 후송과 이동외과병원을 운영하였고 후방에서는 대규모의 종합병원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국군은 여건은 갖추어지지 않았지만, 미국의 모델을 따랐다. 

   1951년 이후 군 병원은 종합병원의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병종별, 상태별 환자분리, 해당 전문의 배치, 협진, 치료 및 회복까지 책임지는 현대적 종합병원을 체험하게 됐다. 초기에는 절단 수술로 일관했던 한국의 의료 기술도 전쟁 중 많은 환자를 감당하면서, 휴전 무렵에는 상당한 수준의 의료 기술을 갖게 됐다. 전쟁을 치르면서 의료 수요가 급증하자 돌팔이 의사도 횡횡했다. 한편 1951년 국민의료법이 국회에 전격 상정되면서, 한의와 양의에게 같은 자격을 주는 것이 결정됐다.  

  한국인은 해방, 전시 동원 체제를 경험하면서, 청결과 위생의 담론을 내면화했다. 신체와 정신이 모두 군과 국가의 전력을 구성하는 상황에서, 감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 감시를 시도했으며, 국가의 통제와 훈육에 순응하고, 국가가 요구할 때는 언제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데 익숙해졌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된 항생제들은 한국이라는 초대형 소비시장을 만났고, 일본은 의약품, 의료기기 제조·생산의 전초 기지가 됐다. 의약품은 부피가 작고 값이 비쌌기 때문에 현금처럼 유통되었고, 뇌물로도 사용됐다. 다치면, 일단 페니실린부터 맞은 군인들의 경험이 민간으로 전파되었고, 의사들도 완벽한 치료보다는 빠른 치료에 치중했으며, 항생제로 빠른 효험을 본 환자들은 약에 대한 자신들만의 “상식”을 만들어냈다. 즉 민간요법으로 약초를 쓰던 방식으로 의약품을 쓰기 시작하면서, 약은 한국인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하는 품목이 되었다.  

  역사적 대혼란을 겪으면서, 한국인의 몸과 질병에 대한 담론은 철저하게 대상화된 측면이 있으며, 공공의료가 취약할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급격하게 시장 위주의 공급 구조가 구축되었고, 약에 의존하고, 약을 선호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임을 확인하게 됐다. 왜 보건의료의 공공성을 논의할 때,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지, 이 책을 통해서 다시 상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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